백양로에서
DMZ Docs 2020 <여름의 아홉 날> 윤지원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20-09-22

거리에서 졸고 있는 전경과 그 곁을 어슬렁거리는 대학생, <여름의 아홉 날>은 낯선 영상 하나로 운을 뗀다. 1996년 여름, 연세대학교에서는 범민족대회 통일대축전 개최를 놓고 학생과 정부가 격렬하게 대치했고, 결국 양쪽의 대규모 충돌로 이어졌다. 이른바 ‘96년 연세대 항쟁 혹은 사태’.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교정에서 한데 뒤엉켜 과격하게 싸우는 사람들을 보여주던 영화는 이 상황을 분명히 정리하거나 차분히 설명하는 대신 20여 년이 훌쩍 지난 현재의 연세대학교로 눈길을 돌린다. 색다른 공약으로 진행되는 총학생회 선거를 비추고, 이따금 벌어지는 소규모 집회를 엿보며,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는 전시관을 거닐던 카메라가 포착하려는 바는 무엇일까.  
<여름의 아홉 날>은 '오늘'이 수많은 어제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구성되는 것임을 드러낸다. 과거의 기억을 통해 돌아보는 현재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 영화는 여기에 명확한 답을 주기보다 각자의 눈에 비친 세상을 자각하도록 이끈다. <여름의 아홉 날>은 지난해 전시 공간 ‘시청각’에서 다채널 전시로 먼저 공개됐다. 윤지원 감독은 지금의 한국이라는 시공간에 대해 질문하는 <나, 박정희, 벙커>(2017), 동시대 매체와 이미지 환경을 다루는 <무제(세계)>(2018) 등 활발한 전시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미술가다. 뒤늦게 영화를 공부하고 싶어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입학한 그는 백양로에서 이번 작업의 귀중한 실마리를 얻었다. 

 

 

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하고 관객과의 대화도 마쳤다.

이전에 수백 번을 봤는데도 영화관에서 보니까 내가 알던 것과 미묘하게 달리 다가오는 부분들이 있더라. 앞으로 작업하는 데 있어 그것을 어떻게 참고해야 할까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어졌다. 전시는 많이 해봤지만 영화제에서 상영한 건 처음이었는데, 느낌도 매우 다르고 재밌는 경험이었다. 다만 한정된 좌석만 열리다 보니 더 많은 분들과 함께 보지 못해 아쉽다.

 

<여름의 아홉 날>은 지난해 동명의 전시로 먼저 공개됐다. 장편영화로 다시 편집하게 된 계기가 있나.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시청각에서 전시한 버전은 아홉 개의 채널을 설치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싱글 채널로 보게 되는 영화와는 상당히 다른 지각방식의 작품이었다. 전시장에서는 각각의 영상을 한눈에 본다거나, 지금이 전체의 어느 부분인지를 특정할 수가 없지 않나. 관람한 영상들을 머릿속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고, 각각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설치할 때는 공간에 따른 변수도 생기기 마련이고. 이것들을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쭉 이어지도록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약간의 추가 촬영과 정리를 거쳐 장편으로 다듬었다.

 

영화는 역사와 기억 등에 관한 질문을 던지면서 과거의 푸티지, 촬영 영상, 인터넷 화면 등을 한꺼번에 보여주며 시작한다.

인트로에 배치해놓은 게 좀 많다. 기본적으로는 과거가 우리에게 출몰하는 방식, 우리가 그것을 대하는 태도 등에 대해 발언하고 싶었다. 뒤이어 나올 영상들의 출입문 내지는 가이드 역할로 생각했다.

 

‘96년 연세대 항쟁 혹은 사태’를 출발점으로 삼아 현재의 다양한 모습을 두루 담아낸다. ‘96년 연세대’라는 시공간에서 출발하게 된 이유가 뭔가.

작업 자체는 평소에 해오던 생각에서 시작됐다. 내가 겪었던 대학 생활, 그때 보고 들었던 운동권 혹은 비(운동)권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언어, 대학에 팽배했던 분위기들에 계속 영향을 받아왔던 것 같다. 당시는 이미 교양에서 마르크스를 배우기 시작한 때였는데, 운동권에 대한 배타적 태도가 굉장히 심한 상황이었다. 또 운동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분들이 분명히 주변에 있었지만, 나의 동년배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 궁금했지. 운동권이나 학생운동의 쇠락을 언제로 볼 것인가 하는 의견은 다양하고, 내가 연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명확하게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다만 경찰백서 등에서 96년, 97년을 지나오면서 화염병을 이용한 시위 같은 것이 현저하게 줄었다는 통계기록을 찾아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96년의 사건이 당시로써는 드물게 많은 영상 기록이 남아있는 사건이라는 점이 작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공간적인 측면에서는 어땠나. 영화에서 계속 공간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데.

일단 그곳은 작업자인 내게 친숙한 공간이다. 사건 자체는 책을 통해 먼저 알게 됐고, 이후에 유튜브 영상을 찾아봤는데,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이 굉장히 현재적인 맥락에서 펼쳐지는 사건처럼 다가왔다. 그런데 이제 이 공간에 그때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주위의 친구들은 아무도 그 사건을 알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이상한 감정과 느낌이 있더라. 2018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가 열릴 때 이것을 주제로 공간을 주로 보여주는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낸 적이 있는데, 결국은 묻어두었다가 지금 형태로 작업하게 됐다.

<여름의 아홉 날>
<여름의 아홉 날>

영화는 과거의 푸티지와 함께 지금의 대학사회를 보여준다. 2019년의 연세대는 비대위(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지속되다 2년 반 만에 총학생회가 세워지지만, 학생 총투표로 총여학생회가 폐지되는 등의 큰 변화를 겪는다.

96년의 푸티지를 다루고자 했을 때, 이것이 회고나 추적, 탐구가 되지 않고 현재의 의미를 갖길 바랐다. 그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지금의 학생사회를 찍게 됐는데, 처음부터 총학생회나 총여학생회를 찍으려고 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총학이 없는 상태를 찍고 싶어서 당시 비대위를 찾아갔더니, 곧 선거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번에는 아마 총학이 생길 것 같다고 이야기하더라. 그때부터 카메라를 들고 관찰했다. 푸티지의 공간과 현재의 공간을 대비하려는 아이디어와 함께, 푸티지에 기록된 사람들과 현재의 사람들도 대비해보자는 발상이었다.

 

현재의 공간, 활동하는 사람들을 기록하면서 염두에 둔 지점이 있다면.

처음에 당신들을 기록한 영상에는 내레이션과 같은 코멘트를 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많은 입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보는 사람들이 입장을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완전히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최대한 일방적인 관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편집하면서도 가급적 누군가에게 감정이입 해서 이야기를 끌고 가지 않으려 했고.

 

회의 장면에서 그런 태도가 드러난다. 총학생회, 총여학생회, 강사법 공대위(공동대책위원회) 등에서 진행하는 회의를 되도록 끊지 않고 담았다. 그로 인해 관객은 그 안에서 어떤 말이 오가고 어떻게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지를 직접 보게 된다.

처음부터 생각하고 들어갔던 건 아니고, 현장에 있으면서 그런 지점들이 점차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들이 말하고 결정하는 방식, 갈등을 해결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방식처럼 사소한 것들을 기록해둘 필요가 있겠더라. 그런 기록들은 창작자가 의도를 가지고 정리하고 편집한 결과물이 드러낼 수 없는 부분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에브리타임(대학교 커뮤니티 역할을 하는 어플리케이션)이나 개인 유튜브 채널처럼 논의 공간이 온라인으로 일부 옮겨간 상황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항상 물리적인 공간과 결부된다는 점이다.

새로운 매체나 소셜 미디어 등이 만들어내는 변화가 굉장히 크고 우리에게 주는 영향이 엄청난데, 상대적으로 사소하게 인식되는 것 같다. 기존의 생활방식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변화는 최근 작업에서 내가 계속 다루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은 공간을 전유하는 싸움이 매우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지 않나. 그것이 하나의 세력 싸움이나 기억을 가지고 벌이는 전투처럼 이뤄지는 면도 있다. 과거에는 학생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시위나 광화문 같은 공간이 극우세력에 의해 새롭게 전유되고 있는데, 그 방식 자체에 주목할 만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태극기 집회 현장에도 갔다.

유튜브 찍는 모습을 촬영하려고 갔는데, 어쩌다 보니 유튜브 방송에 출연하게 됐다. (웃음) 그래서 그분 유튜브 채널의 영상도 가져와서 사용했다.

 

총여학생회의 경우, 구성원의 대화 속에서 공간에 대한 논의가 풍부하게 이루어진다. 한편 강사법 공대위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여전히 학내 운동을 만들어가고 있다.

총여학생회 폐지는 2018년 말부터 연세대에서 굉장히 이슈가 됐던 사건이다. 대략 팔로우 업을 하곤 있었지만, 구체적 상황까지는 알지 못했다. 일단 만나보자는 마음이었는데, 너무 신기하게도 내가 듣고 싶은 말 혹은 영화에 들어가면 좋겠다 싶은 말들을 들려주더라. 이런 게 이런 방식의 작업을 하는 재미라는 걸 느끼는 순간들이었다. (웃음) 총학생회와 총여학생회를 찍다 보니 좀 자발적으로 생겨난 활동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시판 등을 보다가 공대위가 지금은 가장 뜨거운 이슈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상황인 것 같아 접촉하게 됐다.

<여름의 아홉 날>
<여름의 아홉 날>

광둥어를 하는 여성 화자가 내레이션을 한다. 내레이션 내용은 아마도 연출자의 생각과 경험인 것 같다.

내용에서 드러나는 정보들을 종합했을 때 어떤 명확한 정체성이 그려지지 않길 바랐다. 일종의 정체성 불일치의 효과를 실험해보고 싶었던 거지. 작업을 시작하며 처음에 고려했던 것 중 하나가, 우리가 은연중에 그리워하거나 낭만화하거나 우상화하고 있는 과거의 학생시위를 현재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홍콩의 맥락을 넣는 것이었다. 결국 여러 가지 이유로 기각되었지만, 광둥어 내레이션은 마치 퇴화한 기관처럼 남아있게 됐다. 작업을 공개하고는 예상치 못한 반응도 들었다. 90년대를 명확하게 기억하고 계신 분들께서 이 광둥어 화자가 본인들에게 되게 푸근하게 느껴진다고 하시더라. 홍콩 영화의 전성기였던 90년대의 느낌이라는 거다. (웃음) 뜻은 모르지만 그때 당시에 흔히 들어본 말, 하지만 그 이후로는 잘 들어보지 못했던 말들이라 본인에게는 노스탤직한 느낌을 준다고.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내레이션 자체가 꽉 짜인 구성을 취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도 했다가 저 이야기도 하고, 때로는 진위가 궁금해지는 순간도 있다.

대부분은 내 경험에 기반했다. (웃음) 난 머릿속에 있는 것에 맞춰서 이미지를 구성하기보다는 이미지가 있으면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훨씬 흥미롭고 상투적이지 않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 접근 방식에서 나온 이야기들인 셈이다. 역시 처음에 구상했지만 기각했던 안 중 하나가, 관찰과 비슷한 비중으로 픽션을 넣는 것이었다. 서로 다른 양식들이 혼재한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거든. 그 또한 여러 가지 이유로 기각됐고, 결국은 에세이 영화와 관찰적인 다큐멘터리라는 두 가지 이질적 영화가 결합한 형태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어쩌면 광둥어 화자는 흔적으로만 남은 픽션의 장치들이 아닐까.

 

보통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 동력은 무엇인가.

작업은 주제에서 시작하기보다는 눈앞에 있는 대상에서 시작한다. 어떤 입구가 보일 때 들어가는 거라고 해야 할까. 사실 주제에 대한 큰 이야기들은 회고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시작할 때는 내가 무슨 이유에서 어떤 작업을 하게 될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들어가는 거기 때문에. 그래야 끝까지 지루하지 않게 흥미를 잃지 않고 작업할 수 있는 것 같다.

 

돌이켜봤을 때 손에 잡히는 일관된 관심사가 있다면.

인식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이를테면 집단적 무의식이랄까. 지나온 작업에 자막을 입히다 보면, 외국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생각보다 설명해야 하는 게 너무 많은 거다. 이걸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나 고민스러운데, 사실 그건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시각적으로 바로 느껴지는 것들이다.

 

마치 태극기 집회를 보며 느끼는 감정들처럼 말인가.

맞다. 한국인들은 딱 봤을 때 어떤 느낌이고 무슨 맥락인지를 바로 알 수 있지 않나. 그런 지점에 관심이 있다. 또 매체가 인간의 인식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관해서도 관심을 두고 있고.

 

다음에 계획하고 있는 작업은 무엇인가.

아시아 소규모 출판물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다. 여행이 불가능해지면서 일시 중지된 상황이지만, 10월 말에 아트선재센터에서 지금까지 찍은 분량만으로 전시할 예정이다. 완성은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그리고 영화과에 들어와서 늘 픽션을 찍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직 입구를 찾지 못했지만, 찾게 된다면 어떻게든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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