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품기까지
DMZ Docs 2020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정다운·김종신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20-09-23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는 기획부터 유통까지, 출판의 전 과정이 이루어지는 파주출판도시의 30년 역사를 다룬다. 출판계가 탄압받던 1980년대, 출판의 자유를 되찾고 구조적 인프라를 구축하고자 했던 출판인들은 책을 위한 도시를 건설할 꿈을 꾸었고, 새로운 건축을 고민했던 동시대 건축가들이 그들과 동행했다. 이들이 맺은 ‘위대한 계약’은 역사적 소명과 시대정신의 이름을 외면하지 않는 실천의 이름이었다.

“문화적으로 야심차고 이상적인 사람들”이자 “매우 관대하면서도 헌신적이고 서로 배려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하나의 도시를 만들어낸다. 영화는 다양한 기록과 인터뷰를 통해 이 일련의 과정을 꼼꼼하게 담아내면서, 이것을 하나의 완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으로 사고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도시를 손수 짓고 지금껏 파주의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의 태도이기도 하다.

영화를 연출한 정다운, 김종신 감독은 건축과 관련된 영상을 꾸준히 만들어 온 동료이자, 부부다. 영국에서 함께 영화를 공부했고 한국에 돌아와 제작사 '기린그림'을 설립했다. <한국 현대건축의 오늘>(2016), <이타미 준의 바다>(2019) 등의 다큐멘터리 제작은 물론, 다수의 건축 무빙 이미지와 전시 작업도 계속 이어오고 있다. 어느새 파주출판도시가 탄생한 지 30년. 건축과 인간, 자연을 잇는 고민을 모아서 담아낸 두 감독을 만났다.

 

 

파주출판도시의 역사와 현재, 성과와 과제 등을 두루 살피는 영화다. 어떻게 시작되었나.

김종신_ 파주출판도시 사업협동조합에서 먼저 영화 작업을 제안했다. 우리가 영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처음으로 맡아서 한 일이 파주출판도시를 주제로 한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건축전의 영상을 만드는 거였다. 그게 2008년이었는데, 10년이 지나서 이런 의뢰를 받게 돼 굉장히 뜻깊게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중견 건축가들이 여기서 많이 작업하셨기 때문에, 이런 계기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담아보고 싶었다.

정다운_ 파주출판도시의 씨앗을 퍼뜨린 때부터 30년의 역사를 담는 본격적인 다큐멘터리 영화를 처음부터 생각하셨던 거다. 명필름의 이은 대표님이 파주출판도시 2단계 사업 이사장님으로 계시는데, 그분이 우리의 작업을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연결됐다. 정말 기쁜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부담스럽기도 했다. 워낙 방대한 주제를 다뤄야 했으니까. 무조건 잘 할 수 있다고 말해놓고 걱정 많이 했다. (웃음)

 

도시 전체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개별 건축이나 건축가를 다룰 때와 달라진 지점은 무엇인가.

정다운_ 일단 우리가 존경하는 분들의 삶과 작품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건 언제나 하는 기본적인 고민이다. 개인의 역사를 어떤 시각에서 다루어야 할지 늘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스타일을 찾아 나가는 편이다. 그런데 이건 그런 분들이 굉장히 많이 모여 있는 프로젝트 아닌가. 볼륨감이 달랐다. 스타일상의 차이도 있었다. <이타미 준의 바다>는 내가 개인적으로 받은 감동과 전하고 싶은 위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감각적인 측면이 있는 작업이었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명확한 역사적 토대가 있었고, 그건 우리가 느끼는 대로 기록하고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고민이 많았다.

김종신_ <이타미 준의 바다>에서 구성과 표현에 관해 실험했다면, 이번엔 파주출판도시가 만들어진 과정을 충실히 담아내고자 했다. 또 실존 인물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그분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 퍼즐을 맞추는 과정이 어렵고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정다운_ 재밌는 과정이었다. 다들 다른 각도로 이야기해 주셨고, 시간이 지나서 갖게 되는 예전과는 다른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작업이 다 그런 것 같다. 늘 원하는 대로만 가지 않으니까. 시작했을 때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변화가 있었다. 어렵게 작업했지만 만족감이 크다. 정말 매력적인 작업이다.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10년이 지나 다시 찾은 파주출판도시는 어땠나.

김종신_ 사실 파주출판도시는 법적으로 도시라고 불리기에 한계가 있는 곳이다. 정확히 말하면 출판문화산업단지, 공단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도시가 갖춰야 할 요건이 부족하지만, 도시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곳이다. 약국이 생겼다고 현수막이 붙은 일도 있었다. (웃음) 지난 10년 사이에 정말 많은 변화가 생겼더라. 학교도 생기고 예술가 집단도 들어섰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도시가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정다운_ 산업 구조가 바뀌고 있기 때문에, 공장이 멈추면서 문을 닫아버린 어마어마한 공단 지대를 어떻게 재생해야 하는지가 국가적으로 큰 고민 중 하나다. 그런데 이곳은 처음부터 민간인들이 자생적으로 만들었고, 지금도 도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곳이다. 그런 건강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매우 좋았다.

 

작업을 시작하면서 파악한 파주출판도시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을 따라 기획의 방향이 정해졌을 텐데.

김종신_ 제목에 대한 고민과 연관된다. 누군가는 위험한 계약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선언적이고 무모한 계약서를 가지고, 출판인들과 건축가들이 도시를 만들기 위해 꿈을 합쳤다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지금은 각자도생의 시대 아닌가. 공동의 가치를 위해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무언가를 하는 일이 과연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렇다면 현재에는 어떻고 미래에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알아보자는 거다.

정다운_ 파주출판도시는 처음부터 건축적으로 명확한 미학적 방향성이 있었던 곳이다. 그걸 최대한 잘 담아내고 전달하고 싶었다. 인간, 건축, 자연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이 공간을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길 바랐다. 공간은 사람의 삶이나 감정에 정말 큰 영향을 미치는데, 파주출판도시는 그냥 가보기만 해도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높은 건물이 없기 때문에 하늘이 넓게 펼쳐져 보이고, 시선 끝에는 계속 자연이 걸린다. 좋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뒤돌아볼 수 있게 되는 거다.

 

기본적인 인터뷰 분량과 전달해야 할 정보가 많다. 이를 정리하고 배치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정다운_ 파주출판도시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한테 바로 역사 얘기부터 하면 과연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고민스러웠다. 역사 파트를 맨 앞에 넣고 싶지 않아서 계속 노력해봤는데, 역시 이분들이 어떤 신념을 가지고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를 먼저 드러내지 않을 수는 없겠더라. 설령 파주출판도시를 모르더라도 결국은 한국의 현대사 안에서 함께 생각해볼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보시는 분들이 그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굉장히 신경 썼다.

김종신_ 기존에 나온 파주출판도시 관련 책들을 참고해 사전 조사를 했다. 처음에는 지금보다 더 광범위한 범위를 다루려고 했다. 그 근처 헤이리에 관련된 부분이라든지, 그 당시 우리나라 건축계의 움직임 등. 결과적으로는 폭이 꽤 많이 줄었고, 30년 역사를 잘 정리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처음 제안받을 때, 우리가 출판도시를 비판적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더니 조합 쪽에서도 당연하다며 이해해주신 일이 기억난다.

정다운_ 미화하자고 만드는 게 아니었으니까. 과거와 현실을 잘 봐야 미래도 볼 수 있는 거다.

김종신 ⓒ이영진

인터뷰에 참여한 분들이 모두 파주출판도시를 만들어나간 일을 ‘운동’으로 여긴다는 점이 흥미롭더라.

정다운_ 맞다. 출판그룹, 건축가그룹, 영화그룹 그리고 거기 사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분들은 실제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운동을 자기 인생 안에서 경험한 세대다. 그런 분들이 개인의 이익보다 더 나은 목적을 위해 신념을 가지고 손해 보면서도 뭉쳤던 역사를 보는 것 자체가 감동을 준다. 그분들이 다 똑같은 스타일로 사시는 게 아니거든. 만드는 책도 다 다르지 않나. 그런데 공동을 위해 희생하면서 함께해온 거다. 물론 그렇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잘 뭉치기만 해왔냐면 그건 아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변화도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콕 집어서 말하기보다는 그런 여러 가지 부분들을 다 보여주려 했다.

김종신_ 그게 결국은 도시 이야기인 것 같다.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은 또 그 공간을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나갈지 고민하는 거다. 그런 도시 이야기, 그 안에서의 다양한 시도와 실패, 문제점 같은 것들을 다 담고 싶었는데, 잘 됐는지 모르겠네. (웃음)

 

처음 공개하는 자리라 계속 그런 마음이 드나 보다.

정다운_ 파주출판도시 관계자분들께는 이미 보여드렸는데, 본인들의 이야기니까 진짜 재밌게 보시더라. 깔깔 웃으시면서. (웃음) 전혀 연관이 없다고 느끼는 관객들에게는 과연 어떻게 다가갈지 잘 모르겠다. 사실은 우리 현대사의 한 부분이고, 도시라는 화두가 먼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접점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에 ‘공동성’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공공성’과는 다른 개념인 것 같다.

김종신_ 우리에게도 여전히 어려운 부분이다. 말씀하시는 분마다 약간씩 다른 의미로 쓰시기도 하고. 파주출판도시에는 담이 없고 서로가 골목길을 공유한다. 내가 생각하는 공동성은 그렇게 조화롭게 어울리고 서로 배려하는 것이다. 어쩌면 세련되지 않고 조금 촌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웃음)

정다운_ 공공성이 공공의 소유나 이익처럼 딱 떨어지는 개념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공동성은 신념이나 노력, 희생 같은 것이 들어 있는 어떤 끈끈한 마음의 측면에서 설명된다. 여기까지가 내 땅이고 내 시야가 중요해서 어떤 것은 안 보고 싶으니 담을 세우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조화를 위해 담을 세우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모여서 더 잘해보자는 공동의 가치를 지키는 거지.

 

건축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아이들의 모습을 많이 담았다.

정다운_ 아이들은 우리가 늘 염두에 두는 주제 중 하나다. (웃음) <이타미 준의 바다>도 아이가 자라는 시간성을 담는 게 하나의 콘셉트였다. 다음 세대가 정말 중요하다고,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가 잘해야 한다고 늘 생각한다. 실제 건축계에 계신 분들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공간이 좋은 공간이라고 표현하시거든. 출판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아이들이 참여하는 행사는 물론이고 출판사 대부분이 어린이 브랜드를 가지고 있지 않나. 이번에 조금 더 특별한 지점이 있다면, 이곳을 고향으로 느끼는 아이가 나온다는 점이다. 그렇게 자란 친구가 벌써 책을 낸 작가가 됐다. 말 그대로 미래인 거지.

 

향후 공개 계획과 다음 작업은 어떻게 되나.

김종신_ 개봉 논의 중이다. 조만간 결론이 나지 않을까.

정다운_ 늘 극장에서 상영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만든다. 영화관 자체의 공간성과 시간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극장 체험이 우리 삶의 한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다.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투자해서 영화를 보러 갔을 때, 마음에 들어온 다른 세계로 인해 파장이 일어나고 그 파장이 인생에 영향을 줄 수 있길 바란다.

김종신_ 지금은 우리나라 1세대 여성 조경가이신 정영선 선생님에 관한 장편 다큐멘터리 작업을 진행 중이다. 팔순이 넘으신 나이에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다. ‘땅에 쓰는 시’라는 제목을 붙여봤다. 예전부터 워낙 시인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 들어오셨다고 하더라.

정다운_ 땅에 시를 쓰고 계신 거지.

김종신_ 앞으로도 선한 공간이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주제로 열심히 작업하고 싶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좋겠다.

정다운_ 우리는 궁극적으로 건축과 공간에 대한 생각을 다른 쪽으로 확장하는 데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아이들의 가치관이 돈으로 만들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절망적인데, 그게 ‘집’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지 않나. 집이라는 게 가족들이 쉬고 함께하는 공간이 아니라 부동산으로만 치환되는 시대인 거다. 그런 인식에 조금이라도 균열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고 싶다. 생각 중인 프로젝트야 많다. 제주도다운 건축이 무엇일까에 관해서도 생각하고 있고, 유이화 소장님께서 제주도에 아버님이신 이타미 준 선생님 기념관을 만드는 이야기도 따라가고 있다. 또 남편의 베이스가 극영화이기 때문에 건축가가 나오는 극영화도 생각하고 있고. 꿈은 크다. (웃음)

정다운 ⓒ이영진
Festival
천진한 호기심
SIFF 2024 <허밍> 박서윤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2024-11-30
Festival
아무렇지 않게
SIFF 2024 <환희의 얼굴> 정이주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2024-11-29
Festival
웃기는 영화, 무해한 남자
SIFF 2024 <인서트> 남경우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4-11-29
Festival
나도 내가 궁금해
SIFF 2024 <3학년 2학기> 유이하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4-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