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무형문화재 30호 악기장 임선빈 선생은 무두질부터 단청까지 전통 북 제작의 모든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장인이다. 선천성 소아마비로 거동이 불편하거니와 어릴 적 오른쪽 청력까지 상실한 상태에서 이룬 성취다. 유도 사범인 아들 임동국 씨는 아버지를 도와 작업실을 운영 중이다. 전수교육조교 시험도 통과했다. 몸이 편치 않은 아버지와 거의 항상 붙어 다니며 손발이 되어주는 그이지만 많은 순간 아버지와 갈등을 빚는다. 임선빈 선생이 평생의 소리를 찾아 대북을 만드는 과정을 좇는 다큐멘터리 <울림의 탄생>에는 가슴을 울리는 북 소리의 멋에 더해 무형문화재의 삶과 부자의 미묘한 관계가 녹아 있다. 케이블 방송사 피디로 일하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진모영, 2013)의 조연출로 장편 다큐멘터리 현장에 뛰어든 이정준 감독. 첫 연출작과 함께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찾은 그를 만나 촬영 뒷이야기를 물었다.
임선빈 선생과는 어떻게 처음 만났나?
대학 때 풍물패를 했다. 어릴 때부터 꽹과리, 북소리를 워낙 좋아해서 대학 들어가면 가장 먼저 하고 싶던 일이었다. 피가 끓었다. (웃음) 첫 연출작의 소재로도 풍물패를 택했는데, 자료를 조사하던 중에 임선빈 선생님을 뵙게 됐다. 북을 잘 만드는 장인을 먼저 찾아서 그 사람부터 따라가면 최고의 풍물패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선생님께서 먼저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보이셨다. 나를 찍어보면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하셨고. 본인이 청력을 더 잃기 전에 예전부터 모아둔 귀한 목재로 대북을 하나 만들고 싶었다고 덧붙이셨다.
바로 그 제안을 수락한 건가?
특색 있는 풍물패가 잘 보이지 않았다. 2014년 외주제작 피디로 일할 때 밀라노 공예전에 사용할 영상을 촬영했다. 전국의 장인들을 만나러 다녔다. 역사학과를 나와서 그런지 장인 선생님들에 대한 존경이 있었는데, 만나보니 장인의 삶이 녹록지 않더라. 아름다운 작품만 보고 떠올렸던 삶과는 달랐다. 그런 이야기에 대한 욕심이 있던 차에 선생님 제안을 받았고, 선생님 삶을 있는 그대로 녹여내 보자 생각해 착수했다.
아들 동국씨가 작품을 만들어도 찾는 곳이 별로 없으니 저가의 상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더라.
종로에 가면 북, 장구, 징, 꽹과리부터 불상이나 불화도 파는 소매 국악사들이 있다. 스님이나 무속인이 많이 찾는다. 도매 국악사로 넘어간 선생님 북은 소매 국악사를 통해 그런 식으로 판매된다. 영화 초반부를 마무리하는 장면으로 양재에 있는 관문사에 선생님 대북을 보내는 에피소드가 있다. 불교에서 부처님 말씀을 천지 사방으로 전하기 위해 큰 북을 쓴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 그렇게 절에 설치되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대북을 웅장하게 몰아붙이며 연주하는 장면이 굉장했다. 영화 전체로 볼 때는 관객들에게 맛보기로 보여주는 거다. 북 소리가 이렇다는 걸. 그런데 그 북도 사연이 있다. 원래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에서 한 외국 작가의 의뢰로 만든 북이었다. 창고에 오래 방치되어 있던 걸 재단장해서 관문사에 보낸 거다.
작품으로 의뢰했던 건데 왜 방치되었나?
안양시에서도 북이 너무 크니 책임을 못 졌던 거다. 전시 후에 부술 건지 되가져 가실 건지 물었는데 어떻게 내 새끼를 부수냐며 가지고 오신 거다. 그래서 선생님이 나한테 북을 만들 거라고 제안을 하셨을 때, 그렇게 만든 북을 어디에 둘 수 있을지 고민해야 했다. 선생님이 예전부터 갖고 계시던 생각이었다 해도 어쨌든 내가 나타나는 바람에 만들게 된 북이지 않나. 저번 북처럼 창고에 방치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들 동국이형과 여러 얘기를 많이 나눴고 영화에 나온 것처럼 평창 패럴림픽에 보내게 된 거다.
북 소리가 강렬한 영화다. 화면으로 제작 과정을 찍는 것 못지않게 소리를 담는 데 주의를 기울였을 것 같다.
그런 쪽으로 지식이 별로 없어서 잘 담아내지 못했다. 믹싱과 음악을 담당해 준 현진식 감독님이 엄청 고생했다. 큰 북이 울릴 때 느껴지는 위압감이나 가슴까지 파고드는 파장은 사실 카메라로 받아서 스피커로 재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래도 평창으로 북을 보내는 때처럼 중요한 순간에는 현진식 감독님이 직접 와서 다 세팅을 해줬다. 평소 대북 제작 장면이나 선생님 인터뷰 할 때는 북소리가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나 선생님의 개인적 삶에 초점을 맞췄다.
중간에 배경음악으로 들어가는 북소리도 독특하다.
색다른 시도였다. 특히 아버지와 아들의 생각이 다름을 드러내는 인터뷰 몽타주 시퀀스에서 판소리에서 고수가 북을 치듯 음악을 넣어봤다. 난 괜찮았는데 내부 시사 때도 호불호는 갈리더라. 우리나라 정서를 그런 곳에서 살려 보고 싶었는데. (웃음)


부자의 갈등이 초반부에 집중되어 나오다가 본격적으로 대북을 만들게 되며 그 문제는 많이 옅어진다.
처음엔 아들 이야기를 다채롭고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에 나오듯 아들이 유도 사범이다. 공장에서는 아버지한테 일을 배우지만, 체육관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제자도 키운다. 체육관의 아들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공장의 아버지처럼 답답해하지 않을까, 그런 부자의 유사한 모습을 담아내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전수 조교의 삶도 흥미로웠고. 그런데 생각만큼 잘 나오진 않더라. 평창 패럴림픽이 끝나고도 한참을 더 촬영했다. 선생님 개인 전시회가 올해 초에 있었는데 그것도 찍었다. 뒤 촬영은 아들 얘기 위주로 담았다. 그런데 러프컷 보고 나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판단했고, 결국 아버지 쪽에 더 힘을 주고 아들은 강력한 조연으로 가기로 했다. 아쉽긴 하다. 동국이 형은 본인 얘기로 시즌 2 찍자고 한다. (웃음)
재밌을 것 같다. 영화에 잠깐 나올 뿐인데도 동국 씨를 비롯한 전수 조교의 삶이 흥미롭더라.
무형문화재 축제 시퀀스에서 뭘 만들고 돌리는 분들은 다 전수 조교들이다. 선생님들은 뒤에서 약주 하시고. (웃음) 영화에 나오는 식사 자리 후 이어진 술자리도 찍긴 했는데 거기서도 재밌는 얘기가 많았다. 젊은 사람들은 합리적이지 않나. 머리로 이해가 안 되면 이거 되겠어, 하며 망설인다. 선생님들은 머리보다 몸으로 익혀온 분들이고. 사실 기술은 몸에 배는 거니까. 특히 아버지에게서 전수 받은 2세들은 아버지를 귀찮고 답답한 사람으로 여기면서도 안 계시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 격변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걸 계속 생각한다.
북을 만드는 과정 중 특히 마지막 단청 작업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단청까지 직접 하실 거라 생각 못했다.
단청을 후반부에 넣은 건 우연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큰 북을 만드시느라 다른 작은 북들의 단청 작업도 아예 안 하셨다. 큰 북이 마무리되고 나서 8월 넘어서야 나 역시 작업하시는 것을 처음 볼 수 있었다. 아마 그 대비가 흥미롭게 다가가리라 생각한다. 이전 시퀀스들과 달리 고요해지니까.

단청을 직접 그리는 이유가 예전에 단청을 맡겼을 때 자신이 생각하며 만들었던 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 나와서라고 한 인터뷰도 인상적이었다.
공감각적으로 느끼시는 거다. 선생님이 기술자보다 예술가에 가까운 분이라는 걸 그 인터뷰 때 확실히 느꼈다. 대북을 메우기(통 따위의 둥근 물체에 테나 가죽을 끼우거나 씌우는 행위) 전에는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신다. 머리도 짧게 깎고 몇 달 전부터 부부 관계도 피하고. 스승님에게서 배운 거다. 그만큼 모든 작업에 온 마음을 다한다. 메우기 작업하는 당일에는 제사를 지내는데, 영화에 나온 제사 장면 전날까지도 비가 그치지 않았다. 비 오면 가죽이 습기를 먹어 작업을 할 수 없다. 그런데 당일에 비가 싹 개서 아주 좋은 그림으로 촬영할 수 있었다. 하늘이 도운 거지. 평창으로 북이 나가기 전날에도 비가 엄청 많이 왔다. 선생님이 북이 나가기 직전까지 용의 눈을 그리지 않았다. 새벽에 청룡의 눈을 찍고 나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청룡이 비를 관장하는 신이니까 그러지 않았나 말씀하시더라. 그 장면을 꼭 살렸어야 했는데. (웃음) 잘 붙지 않아 뺄 수밖에 없었다.
평창에 북을 보내는 날 북을 연주하는 세레모니가 있다. 어떤 의미의 세레모니고 연주자는 누구인가?
평창 패럴림픽 개회식에서는 외북채로 북을 치는데 원래 이 대북은 쌍북채 연주용으로 만든 거였다. 그래서 쌍북채로 연주하는 소리를 들려드리고자 동국이 형이 만든 이벤트다. 그 소리를 못 듣고 보내면 한이 될 것 같다고 말씀하셔서. 북 연주자는 최소리 씨라고 퍼커션 팀을 운영하는데 선생님 북을 제일 많이 가져다 쓰신다. 풍물팀은 ‘터주’라고 동국이 형이 북 연주하며 알게 된 팀이고. 늘 동국이 형이 고생이다. (웃음)
동국 씨가 아버지한테 싫은 소리 막 하는 게 다 이유가 있었네.
사실 촬영할 때는 나도 이해가 안 됐다. 왜 저렇게 아버지한테 짜증을 낼까. 그런데 어느 순간 나한테서 그런 모습을 발견했다. 어머니가 네이버 아이디 만들어 달라고 할 때. (웃음) 여섯 번 만들어 드렸는데 까먹어서 또 오실 때 짜증이 확 나는 거다. 그 둘은 계속 붙어 있지 않나. 언젠가 선생님이 아들에 대해 서운한 걸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그러면 저도 제 어머니에게 똑같이 한다고, 남의 자식이니까 선생님한테 잘하는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영화는 2018년에 마무리된다. 그 뒤로도 계속 촬영했다고 했는데 둘은 어떻게 지내나?
선생님은 작년에 칠순 잔치를 했고, 올해는 개인전도 하셨다. 지금은 국가지정 중요 무형문화재 모집 공고가 나서 준비하고 계신다. 전통 북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제작할 수 있는지 영상에 담아야 해서 내가 촬영을 도와드렸다. 동국이 형과 함께 서류도 꾸리고. 개인전까지 촬영했으니 그게 마지막이지 않을까 했는데 또 도전하셨다. 항상 말로는 그만 하고 싶다, 안 할 거다, 그러시는데 성격이 열정적이어서 뭔가 있으면 또 하고 싶어 하신다.
영화에서도 청력 상실을 앞두고 대북 작업이 마지막 작품인 것처럼 그려지지 않았나.
맞다. 진짜 마지막 작업이라고 해서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했는데, 어느새 보니 새 통이 짜져 있고. (웃음) 동국이 형은 요새 유튜브를 시작했다. 유도 관련 콘텐츠다. 내가 찍을 땐 메달도 못 따더니, 요새 일반인 대회에서 이긴 영상들 많이 올리더라. (웃음)
오랜 기간 촬영한 첫 작품이 끝났다. 다음 작업 계획은?
6월에 편집이 끝났으니 올해는 쉬고 싶다. 생계 때문에 외주 제작 일을 촬영 위주로 하고 있었는데 그 정도만 진행할 것 같다. 이번 DMZ 인더스트리에 나오는 <수카바티>(나바루, 선호빈 감독)의 촬영을 맡고 있다. FC 안양 서포터즈 이야기다. 예전부터 하고 싶던 아이템으로 종교 관련 이야기가 있는데 아직 구상 중이다. 범죄 스릴러처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