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의 그림자로
<도망친 여자>
남다은 / Choice / 2020-09-15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홍상수의 스물세 번째 영화 <강변호텔>의 과격한 결말 앞에서 그의 오랜 팬들은 충격에 빠져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이례적으로 강력한 죽음의 엔딩은 그의 세계가 맞이하게 될 변화를 예고하는가. 홍상수의 다음 영화는 이제 어디로 향하게 될 것인가. 얼마간 호들갑스럽던 우리의 호기심이 무색하게도 홍상수의 스물네 번째 영화인 <도망친 여자>에서는 <강변호텔>의 결말을 채우던, 어느 생의 갑작스러운 소멸을 향한 흐느낌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한적한 오후, ‘감희’(김민희)라는 이름의 한 여인이 방문하는 타인의 안온한 공간, 거기서 생긴 일화와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말들로 이뤄진 <도망친 여자>는 이전보다 눈에 띄게 단출해진 행장으로 평범한 일상의 시간에 접속한다. 그간 홍상수의 영화가 기대던 최소의 설정들, 요컨대 낯선 여행지의 긴장감, 술집의 활기, 여정을 시작하게 만든 사연, 남녀의 구애 활동 같은 것은 여기 없다. 꿈과 현실,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줄타기하는 형식적 시도도 없다. 남편이 출장을 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한 여자의 동선이 세 개의 공간들과 그곳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풍경을 느슨하게 잇는 고리가 된다. 감희는 친구들의 환대를 받으며 그들의 사적인 공간에 머물고 거기 불쑥 등장한 남자들의 작은 소란을 구경한다. 그녀는 예민하면서도 동요하지 않는 관찰자처럼 보인다. <도망친 여자>는 세계를 이루는 모든 비장한 의미와 거창한 형식에 반문하듯, 인물들의 사사로운 행동, 부조리하며 유머러스한 대화와 감정, 누군가의 얼굴과 누군가의 뒷모습을 나열하고 바라보는 데 몰두할 뿐이다.

<도망친 여자>
<도망친 여자>

영화적 야심을 도모하는 데 무관심해 보이는 영화는 그러나, 단순하지만은 않다. 우리는 감희를 중심에 둔 담담한 장면들이 때때로 차갑고 음산한 기운으로 얼어붙는 찰나 또한 마주하게 된다. 감희는 “사랑하는 사람은 무조건 붙어있어야 한다.”라고 믿는 남편의 이야기를 재차 꺼내며 그와의 애정을 은근히 과시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실체는 의심스러워진다. 영화는 이 부부가 사는 집으로 우리를 데려가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정말 남편이 존재하는 것인가. 이 영화의 이상한 제목은 그녀의 처지를 지시하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중인가. 해소되지 않은 물음이 감희의 맑은 장면들에 얼룩을 드리우자, 영화의 중심축이자 동력인 여인의 내면은 더이상 명징하거나 가볍거나 한가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감희가 하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 말을 흡수하지 못하고 미끄러뜨리는 모호한 얼굴과 행간의 침묵으로 이 세계의 상태가 경험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모호함과 침묵을 감지하며 감희의 얼굴에 반응하는 존재는 그녀 곁의 친구들이 아니라 그녀가 종종 물끄러미 바라보고 그녀의 행로를 감싸며 내려다보는 자연 풍경인 것 같다. 홍상수의 세계에 줄곧 등장하던 바다의 파동이 아니라, 줌으로 당겨진 산의 일렁이는 형상이 세 개의 에피소드를 잇는 다리가 되어 반복해서 등장한다. 묵묵하게 한 자리에 선 산이 웅장한 자태로 감희의 미묘한 감정선을 응시하며 그녀의 시공간을 이행시킨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도망친 여자>
<도망친 여자>

그러나 그것을 이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세 번째 에피소드가 끝날 무렵, 영화는 극장을 나와 또다시 어딘가로 향하는 감희의 뒷모습 대신, 극장 문을 다시 열고 들어가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의 얼굴을 본다. <도망친 여자>는 ‘바깥’을 향한 운동 대신, 어둠 속에서의 내밀한 멈춤을 택한다. 이 대목에서 움직이는 것은 감희가 바라보는 스크린 속 바다뿐이다. 지금껏 우리가 본 장면들은 무엇이었던가. 감희는 과연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이 순간, 세계의 시간이 불현듯 안으로 구부러지며 폐쇄회로에 갇히고 감희가 쳐다보는 저 평평한 화면 위에서 파도치는 ‘영화’가 그녀의 앞선 입체적인 행로를 단번에 흡수한다. 그 화면은 마치 블랙홀처럼 <도망친 여자>의 몸체를 삼켜버리는 것 같다. <강변호텔>의 마지막에서 우리가 본 한 인간의 물리적 죽음만큼이나 당혹스럽지만, 동시에 기이한 사라짐의 순간, 아니, 세계의 신비로운 전환이다.

 

도망친 여자 The Woman Who Ran 제작 영화제작전원사 감독 홍상수 출연 김민희, 서영화, 송선미, 김새벽, 이은미, 권해효, 신석호, 하성국 배급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 판다 제작연도 2019년 상영시간 77분 등급 청소년관람불가 개봉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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