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WFF 2020 Daily 09.14
김아영·유혜민 인터뷰, 주요 상영작 프리뷰
리버스 / Festival / 2020-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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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세계를 향한 끝없는 탐사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 감독 김아영 

ⓒ이영진

페트라 제네트릭스(Petra Genetrix). 첨단 테크놀로지를 떠올릴 법한 발음과 달리 이 단어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로마제국으로 전파된 미트라교와 관련된다. 빛의 신 미트라를 낳은 바위에서 유래해 ‘생식능력을 지닌 바위’를 뜻하게 된 페트라 제네트릭스를 김아영 작가는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2017, 단채널 비디오, 약 21분)의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가상의 3D 개체이자 끊임없이 움직이고 회전하는 금속의 광물 덩어리. 데이터 조각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신적인 존재. 이 모든 걸 아우르는 페트라 제네트릭스를 통해 김아영 작가는 난민의 물질적 이주와 데이터의 비물질적 이동을 동시에 환기하며, 대안적 세계와 플롯의 가능성을 시뮬레이션한다.

한국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김아영은 국내외 미술관에서 다양한 전시와 퍼포먼스를 진행한 현대미술 작가다. 해외 생활을 마무리하고 귀국한 직후 맞닥뜨린 예멘 난민 이슈는 그녀를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2019, 2채널 비디오, 여성영화제에서는 단채널 버전으로 상영된다)으로 이끌었다. 작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9’ 전시에서 처음 공개한 ‘다공성 계곡’ 시리즈로 영화제의 문을 적극 두드리고 있는 김아영 작가를 만났다.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에 이어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를 완성했다.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은 2017년 호주 멜버른 페스티벌에서 개인전 커미션 제의를 받아 만든 작품이다. 조사 과정에서 호주의 난민 정책이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폭력적임을 알게 됐다. 계약 및 법률 조항 등의 문헌 조사를 바탕으로 작업을 마치면서 2편을 제작하면 반드시 실제 난민의 경험을 들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다 2018년 여름 한국에서 예맨 난민 이슈가 터진 거다. 곧바로 ‘아시아 평화를 향한 이주(MAP)’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인터뷰했다. 해외에서 계속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다가 완전히 귀국한 때가 2017년 11월인데, 사실 그때만 해도 한국은 난민 문제와 상관없는 폐쇄적 국가로 오래 머물 것이라 생각했다.

 

이전에는 주로 방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구성한 텍스트를 목소리, 사운드 설치, 퍼포먼스, 출판, 영상 등 다양한 매체로 구현해 왔다. 이번에는 인터뷰는 물론 당사자들을 직접 출연시키기도 했는데.

조사의 연장선에서 우선 그들이 제주도에 입도했을 때 어떤 행정 절차를 거쳤는지, 난민들이 한국에 안착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불굴의 의지로 자신에게 전혀 익숙치 않은 장소에 이르게 된 존재에게 존경심을 갖고 있다. 나 역시 어느 정도는 그런 삶을 살아왔고. 난민 중에서도 극소수인 싱글 여성들과 대화할 때는 한국 친구들과 만날 때보다 더 편안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무엇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난민에 대한 편견을 무장 해제시키는 존재로 그리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마지막 장면 전까지 세 명의 예멘 난민 출연자는 가면을 쓰고 등장해 알 수 없는 행동을 한다. 각각의 가면은 무엇을 형상화한 것인가?

파도, 돌, 지층이다. 지질학에 관심이 많다. 지구의 여러 지각 판들은 지금도 움직이고 있다. 오세아니아 대륙은 1년에 7cm씩 북쪽으로 움직인다. 몇 백만 년 후에는 동남아시아와 한 덩어리가 될 것이다. 우리가 항구적이고 단단한 존재라고 상정하는 땅조차 계속해서 이주하고 있다. 땅 위에 그려진 국경과 상관없이 말이다. 그 국경을 넘나드는 존재들 또한 지구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초월적 존재로 그리고 싶었다. 난민에 대한 리얼리즘적 접근은 지겹도록 봐왔다. 난민 재현 체계에 질문을 던지려 했다. 난민은 항상 가난하고 온전하지 못한 인격체로, 시혜와 도움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가. 한국에선 특히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리스트 혹은 잠재적 성범죄자 이미지가 더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가면을 씌워 불가해한 존재로 표현했다. 마지막에 이들의 얼굴이 나오며 관객에게 전하는 인지적 소격효과, 당연하게 생각하는 현실이 얼마나 기이하고 일그러져 있는지를 멀리서 바라보게 하는 이 효과는 ‘다공성 계곡’ 시리즈를 관통하는 형식인 사변적 픽션(Speculative Fiction)과도 닿아 있다.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

‘다공성 계곡’ 시리즈에서 SF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 사변적 픽션을 가리킨다. 좀 더 설명해 달라.

보통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적 명제나 가설을 바탕으로 미래사회에 관한 상상을 펼쳐나간다. 그에 비해 사변적 픽션은 반드시 과학적 가설을 바탕으로 할 필요 없이 현재 벌어지지 않은, 벌어질 것 같지 않은 상황을 상상하며 시작한다. 보수적 기독교 극단주의자들이 만든 근 미래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임신과 출산으로만 한정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그린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 『시녀이야기』나, 자고 일어나 보니 거대한 벌레가 되어 있는 남자로 시작하는 카프카의 「변신」도 사변적 픽션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사변적 픽션이 크게 빛을 발해온 지점은 인종적, 계급적, 젠더적 마이너리티들이 억압적인 현실 세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 세계를 시뮬레이션해온 방식에 있다. ‘아프로 퓨처리즘’이 대표적이다. 몇 백 년에 걸친 흑인 디아스포라, 아프로 아메리칸이 겪은 차별과 핍박의 역사를 놀라운 허구로 도약시키면서 현실을 극복하게 만드는 이야기 장치로, 내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 흑인 여성 SF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도 그 중 하나다. 영화 <블랙 팬서>(라이언 쿠글러, 2018)는 아프로 퓨처리즘이 대중문화에 등장한 인상적인 사례다.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이라는 제목이 주는 느낌도 기묘했는데, 2편에서는 ‘트릭스터 플롯’이라는 부제가 등장해 눈길을 끈다. 트릭스터는 무슨 뜻인가?

나 역시 이번 작업을 진행하며 알게 된 단어다. 설화나 민담 같이 오래된 서사형태에서 기존 질서를 교란시키고 방해하는 존재, 도대체 무엇을 위한 행동인지 의중을 알 수 없는 훼방꾼을 트릭스터라 부른다더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체셔 고양이나 작은 개구쟁이 요정들, 잔재주를 부리는 토끼나 어릿광대 같은. 이들은 갈등을 초래하고 불편함을 일으키며 혼란을 가져오지만 결국 그 서사 안에서 좋은 결말이 이루어지게끔 귀결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한국에 도착한 예멘 난민들이 한국 사회의 질서와 면역체계를 교란하는 바이러스이자 위험분자이면서, 동시에 결국은 순혈주의 신화가 만연한 이곳에 이종적 피를 수혈하고 이 세계의 면역체계를 더욱 단단하게 해주는 불가피한 이식체가 아닐까 하는 의미에서 그들을 트릭스터로 설정했다. 이들은 서사 내적으로도 트릭스터로 볼 수 있다. 뭘 하는지 알 수 없이 돌아다니다가 결국 페트라를 ‘어머니 바위’까지 이끄는 역할을 하니까.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

트릭스터를 발견한 민담과 페트라 제네트릭스라는 이름의 기원인 미트라교처럼 ‘다공성 계곡’ 시리즈에는 유사 신화적 요소가 다분하다. 어머니 바위 역시 심원한 존재로 등장한다.

모든 서사 형식에 관심이 많다. 이야기 자체를 워낙 좋아한다. 어머니 바위는 몽골에 조사 여행을 갔을 때 감명 깊게 봤던 어머니 바위 성소의 실제 모습을 차용한 거다. 몽골에는 땅과 바위 같은 자연물에 대한 샤머니즘이 아직도 짙게 남아있다. 땅이 압도적인 곳은 항상 그런 것 같다. <행잉 록에서의 소풍>(피터 위어, 1975)에서처럼 호주인들 역시 땅에 대해 체념, 공포, 매혹이 뒤섞인 관념을 지니고 있다. 전근대적인 신앙이 첨단 테크놀로지 기반의 미래 사회의 상상과 결합할 수 있다는 믿음, 시대를 뛰어넘어 계속 출몰하는 구조나 도상에 대한 관심이 이번 작업에 반영되었다.

 

1편과 마찬가지로 2편에서도 ‘문지기’ 캐릭터와 광고 호스트가 등장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단어나 어법이 굉장히 독특하다.

이주를 뜻하는 마이그레이션이라는 단어가 현재 쓰이는 빈도를 살펴보면, 사실 난민의 이주만큼 IT 업계에서 쓰는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클라우드 마이그레이션이 자주 들린다. 디지털 데이터가 저장 매체의 성능 저하나 환경 변화로 읽을 수 없게 되는 경우를 대비해 매년 기업들은 엄청난 돈을 들여 백업 저장물을 만들고 다른 저장 공간으로 데이터를 이동시킨다. 흥미로운 건 난민 혹은 이주자에게 이주 상품을 판촉하는 여러 광고들이나 난민 브로커들이 쓰는 설득의 레토릭이 IT 업계에서 클라우드 마이그레이션을 판촉하는 언어와 굉장히 닮아 있다는 점이다. 1편에 등장하는 바이럴 광고가 바로 그 두 언어를 결합해서 만든 것이다. 또한 새로운 데이터가 새로운 플랫폼으로 옮겨질 때, 기존 시스템의 이를테면 면역을 위협하지 않을지 바이러스 체크를 하지 않나. 난민들이 새로운 땅에 안착하기 위해 밟는 여러 심사 절차가 그와 닮아 있다는 착안 아래 ‘문지기’ 캐릭터를 구상했다.

 

부산비엔날레2020(사회적 거리두기로 9월20일까지 온라인 전시만 진행)에서 신작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에도 사변적 픽션이다. <수리솔 수중 연구소에서>라는 작업으로 16분짜리 단채널 영상이다. 부산 오륙도 앞바다 해저에 미래 바이오 연료인 다시마를 생육 관리하는 수중연구소가 있다는 설정이다. 예멘 난민 출신 여성인 연구소 직원이 주인공이다. 포스트 팬데믹, 기후변화, 디스토피아, 그린에너지, 디아스포라 등을 담고 있다. 이런 주제로 자료를 조사하다보니 또 관심을 갖고 살펴보게 된 건 탄소 포집 기술이다. 온실가스 배출을 막기 위해 배출한 이산화탄소를 모아서 액체가스 형태로 만든 뒤 사용이 다 끝나고 빈 유정에 집어넣는 거다. 너무 이상한 아이디어 아닌가. 쓰레기 매립하듯 탄소를 매장한다는 건데, 그게 온실가스의 주범인 석유가 들어있던 바다 속 유정이라니. 실제로 포항 앞 바다에 이 사업을 진행하려다 무산됐다. 당분간은 픽션 만들기를 이런 식으로 계속 해나갈 것 같다. 마블유니버스처럼 작업들이 이어져도 재밌지 않을까. (웃음)

글 김선명 사진 이영진 

 

 

-----Interview 2------------------------------------------------------------------------------------------------------------

행동하는 금자씨 

<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 감독 유혜민 

ⓒ이영진

금자는 어떻게 환경 운동가가 되었냐는 질문에 장난스러운 얼굴로 “재미없어 그런 거~ 난 긴 서사 따윈 없어!”라고 답한다. 대단한 계기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느낀 부당함이 금자를 가볍게, 또 진지하게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영화의 감독이자 금자의 친구인 혜민은 카메라를 들어 한없이 가볍고, 한없이 진지한 그녀를 찍기 시작한다. 환경단체를 그만두고 비닐봉지 없는 시장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금자는 문득 혜민에게 묻는다. “비닐봉지를 법으로 금지한 나라에 가볼까?” 그렇게 퇴직금과 적금을 털어 떠난 인도와 케냐로의 여행은 혜민에게 쓰레기 처리와 같은 환경 문제를 페미니즘적인 시선으로 고민할 계기를 만들어준다. 영화는 금자의 활동과 일상, 금자와 혜민의 대화, 이들이 맺는 더 큰 관계 등을 통해 ‘일회용이 아닌’ 우리의 삶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고 일상을 건강하게 꾸려갈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는 지난해 서울국제여성영화체 제작지원 프로그램인 피치&캐치에서 옥랑문화상(다큐멘터리)과 관객상을 받은 작품이다. 첫 공개를 앞두고 유혜민 감독을 만났다.

 

 

영화가 다루는 이슈가 더욱 중요하게 다가오는 한 해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일회용 마스크뿐 아니라 플라스틱 문제가 많이 부각되어서, 어떤 대안을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얼굴 보지 않고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금자가 최근에 ‘알맹상점’이라는 가게를 열었다. 화장품, 샴푸 등을 덜어서 살 수 있는 리필스테이션이 있고, 우유 팩이나 커피 찌꺼기를 말려서 가져가면 새로운 물건으로 교환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나도 거기서 작업하며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함께 코로나19와 페미니즘에 관련된 모임을 만들려 한다. 재난 상황에서의 여성 건강권, 자기 돌봄 같은 이슈들이 최근의 가장 큰 관심사다.

 

바쁘게 후반 작업을 끝냈다.

작년에 피칭하고 1년 만에 영화를 완성했다. 타이트한 일정이었지만, 이렇게 한번 정리하고 관객들과 만나는 자리를 가질 수 있어 좋다. 반면 아쉬운 지점도 있다. 첫 장편 작업이다 보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 거다. 또 친구인 금자를 어떤 결로 나타내야 우리 관계가 손상되지 않는 선에서 작업할 수 있을지도 고민이 됐다. 아마 이번에 못다 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개봉 버전을 만들게 될 것 같다.

 

주인공 금자와는 어떻게 만나서 관계를 만들어갔나.

처음 만났을 때 금자는 여성환경연대라는 환경단체 활동가였고 나는 그 단체에서 활동을 기록하는 촬영 알바를 했다. 고용자와 피고용자 관계였지. (웃음) 일회용 생리대나 네일숍에서 나오는 유해물질이 어떻게 여성 건강권에 영향을 주는지 알리는 작업 등을 같이 했는데, 죽이 잘 맞았다. 그때는 금자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영화를 시작했거든. 그런데 금자는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지 않나. 또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게 금자를 덕질하기 시작했고, 금자가 2018년에 단체를 그만두면서 우리 관계가 좀 더 수평적으로 변했다.

<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

영화는 한 인물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쓰레기와 일회용품 문제에 대한 고민을 풍부하게 담아낸다. 그 과정에서 감독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어떻게 기획의 가닥을 잡아나갔나.

심플한 시작이었다. 금자가 어느 날 인도와 케냐에 가보자고 하더라. 단체를 나와 시장에서 시작한 활동이 잘 안 되고 있었거든. 그래서 법으로 비닐봉지를 규제하고 있는 나라에 가보고 싶다는 거였다. 나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비닐봉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금자랑 가는 여행이 재밌을 것 같아서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거기서 만난 페미니스트 여성들 때문에, 작업을 어떤 방식으로든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단지 기록이 아니라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가공된 영상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 여행이 중요한 시작점이었던 셈이다.

금자가 하고 싶었던 활동이 어떤 것인지 그때 처음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인도에 있는 여성단체는 여성들이 줍는 폐지를 공정무역 상품으로 만드는 활동을 한다. 인도도 케냐도 폐기물 정책이나 순환구조가 잘 되어있지 않아서, 쓰레기 줍는 여성들이 없으면 결국은 무너지게 되어있다. 쓰레기 천국이 되는 거지. 그런데 그들이 저임금을 받으며 그 일을 자발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체계가 안정화되는 것이다. 그걸 본 중산층 여성들이 그들의 노동을 인정하고 정당한 임금을 보장하는 구조를 만든 거다. 쓰레기 문제가 여성들에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내가 버리는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지, 버려지고 재사용되는 물건들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관계를 만들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환경 이슈가 여성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또 이 계급 간의 교차성 페미니즘을 어떻게 볼 수 있는지를 주제로 같이 작업하자고 동료인 신혜인 PD를 설득하면서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금자는 경쾌하고 밝고 직접 행동하는 사람이지만 영화에서 그런 면모만 드러나지는 않는다. 인물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고민했을 텐데.

내가 보는 금자는 마냥 웃기고 활동적이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도수 높은 안경 끼고 앉아서 책 쓰고 노트북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고, 내성적인 면도 있는 그런 사람이다. 자기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관계를 맺고 대외활동도 하지만, 또 워낙 솔직하니까 화도 잘 내고 욕도 잘한다. 난 그게 너무 웃기고 신기했다. 나는 이 영화가, 캐릭터도 다르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나지만 계속 친구 관계를 이어가는 두 여성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금자가 타인들과 맺는 관계에서 늘 옳은 사람일 수는 없고, 그건 나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정말 많이 싸운다. (웃음) 금자 또한 관계의 어려움과 갈등을 겪는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면서, 너무 선인으로 그리기보다는 여러 레이어를 쌓아가며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

한편으로는 촬영 대상이 친밀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렵고 부담스러운 지점도 있었을 것이다.

정말 힘들더라. (웃음) 같이 작업하는 김문경 PD는 다큐멘터리가 소설이라고 얘기하는데, 인물과 사건을 병치하면서 무슨 얘기를 할 것인지는 결국 창작자의 손에 달려있다는 의미라고 이해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있고, 작업을 통해 전달해야 하는 폭이 있지 않나. 나는 금자를 오래 봤기 때문에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또 우리 사이에 카메라가 들어서면서 생기는 긴장, 나의 걱정이나 미안함 같은 것들도 있어서 늘 고민스럽다. 계속 곁에 있어 준 동료들 덕분에 객관화하면서 작업할 수 있었다.

 

<쓰레기덕후소셜클럽>(2019)이라는 단편으로 먼저 작업을 했다. 영화를 확장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

금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조금씩 보였으면 했다. 단편은 말 그대로 내가 쓰레기 덕질하는 금자를 덕질하는 내용이었거든. (웃음) 금자가 상인이나 자원봉사자들 같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우리’를 만들어 가는지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금자가 다른 사람의 삶을 외주화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는 삶을 강조하지 않나. 쓰레기 문제에서 시작해서 거기까지 생각하기가 되게 어렵다. 그런데 지금의 사회는 어쨌든 누군가를 부품처럼, 일회성으로 사용하고 있다. 영화 현장이나 영상업계도 마찬가지다. 나 또한 그 안에서 받은 상처와 고민이 있기도 하고. 일회용처럼 살지 않는 삶이 실제로 가능한지, 우린 타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쓰레기를 버릴 때 발생하는 고민이 그것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

‘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라는 제목에도 그런 지점들이 드러나는 것 같다.

금자가 최근에 플라스틱 프리 실천 팁 등을 담은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제목을 그대로 가져왔다. 그만큼 이 작업에 어울리는 제목도 없다고 생각했다. 단편에서는 금자의 활동을 쭉 펼쳐놨는데, 폭을 좀 좁혀서 관계, 여성 노동, 사회가 사람을 쓰는 구조 등을 이야기하는 방향으로 가게 됐다. 앞으로는 세대별로 플라스틱의 의미가 어떻게 다르게 받아들여졌는지나 내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더 넣어서 확장하려고 한다.

 

영화 말미에 금자에 대한 재미난 노래가 나온다.

‘밥먹고 하는 밴드’라고 내 친구들이 하는 밴드가 있다. 주로 생태와 동물권에 관한 노래를 부르는데, 그 친구들에게 노래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작년에 단편 버전을 정선여성영화제에서 상영했다. 거기서 공연하고 사람들이랑 같이 ‘금자쏭’을 부르는 귀여운 상영회를 가졌다. (웃음)

 

최근에 즐겁게 하는 일이 있다면.

코로나 시국에 가장 꽂혔던 건 비누 만들기다. 처음에 금자가 알려줘서 만들기 시작했다가 지금은 장인 수준에 이르렀다. (웃음) 계속 뇌를 쓰고 생각을 해야 하는 피곤한 일을 하며 살다 보니, 손으로 만지는 작업이 굉장히 좋더라. 성과가 빨리 나오기도 하고. 몇 달 동안 엄청 많이 만들어서 주변에 나눠주고 있다.

 

올해의 남은 계획은 무엇인가.

이번에 상영하는 <호랑이와 소> 김승희 감독님과 단편 버전에서 애니메이션 작업을 한 적 있다. 펀딩을 받아서 장편에 쓸 아카이브 위주의 애니메이션을 감독님과 함께 그리려고 계획 중이다. 잘 마무리해서 내년에는 일반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고 싶다. 그와 별개로 여성 건강권이나 환경 SF에 대해 계속 관심을 두고 있다.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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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피쉬 스위밍 업사이드 다운 A Fish Swimming Upside Down

발견 l 엘리자 페트코바 l 독일 l 2020 l 103분 l 15세 l 컬러

<어 피쉬 스위밍 업사이드 다운>

한 여자가 초록의 정원에서 비를 맞으며 춤추고 있다. 한껏 생기로워 보이는 그녀의 이름은 안드레아, 자폐 아동을 돌보는 보육교사다. 이야기는 안드레아가 최근에 만난 남자친구 필립과 그의 대학생 아들 마틴이 거주하는 집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시작된다. 큼직한 창문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이 집엔, 얼마 전 죽은 필립의 아내 한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필립은 이제 아내의 사진을 치우고 집을 정돈하며 과거에서 벗어나려 한다. 반면 아직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운 마틴은 아버지에게 반항하거나 아예 입을 닫아버리기 일쑤다. 이들이 사는 집은 크지만 그만큼 공허하고 텅 비어있는 공간으로 보인다. 헤엄치듯 이 공간에 흘러들어온 안드레아는 마치 무언가를 채워주기 위해 등장한 사람처럼 필립과 마틴의 삶에 소소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집안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필립과 친밀한 시간을 보내는 한편,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던 마틴과도 점차 일상을 나누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이라는 안온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인물들의 욕망과 관계는 도덕과 규범을 훌쩍 뛰어넘어 확장된다.

필립이 잦은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사이, 마틴은 안드레아에게 빠르게 빠져든다. 이들의 육체적 탐닉은 필립이 돌아온 후에도 비밀스럽게 지속되며, 안드레아는 필립과 마틴 두 사람 사이를 거리낌 없이 오가며 이중의 관계를 유지한다. <어 피쉬 스위밍 업사이드 다운>은 이들 사이의 삼각관계를 서사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데, 많은 부분이 전면에 드러나기보다 수면 아래로 감춰진다. 관계는 외부에 발각되는 대신 내부에서 파열된다. 현재의 욕망에 충실한 안드레아는 매번 한 발 뒤로 물러나는 필립, 관계에 점차 집착하며 공격적인 성향마저 드러내는 마틴 두 사람 모두와 끝내 불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유분방하고 한마디로 규정되지 않으며, 계모나 팜므파탈의 관습적인 이미지로부터도 한참 떨어져 있는 안드레아의 캐릭터가 무척 새롭다. 따사로운 한여름의 공기는 종종 돌출되는 관음증적 시선과 부딪쳐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엘리자 페트코바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손시내

<어 피쉬 스위밍 업사이드 다운>

421 2020-09-14 | 16:30 - 18:13 인디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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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 Summer is the Coldest Season

발견 l 저우 쑨ㅣ중국ㅣ2019ㅣ101분ㅣ12세ㅣ컬러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

13살 소녀 자허는 살해된 엄마와의 추억을 곱씹으며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버티려 하지만, 아빠는 상실감과 패배감에 젖어 자허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본래 그는 레슬링 선수였으나 은퇴 후 별다른 먹고 살 기술을 익히지 못한 채 방황한다. 사십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와 고졸이라는 학력은 번번이 발목을 잡자, 결국 그는 도축장에서 육류 배달업자로 일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한다. 자허는 학교에서 동료 학생들에게 고기 냄새가 난다는 비난과 괴롭힘에 시달리고, 술에 의존하는 아빠에게 반감을 갖는다. 14살 생일을 앞둔 여름, 자허는 엄마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 유원지를 찾아갔다가 우연히 엄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유레이를 발견한다. 애초 4년 형을 선고받았던 유레이가 3년도 채우지 않고 소년원을 나왔다는 사실에 자허는 크게 분노한다. 자허는 원망과 복수심을 안고서 서서히 유레이에게 다가가는데, 이 과정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에 관해 점차 깨달아 간다. 

영화는 4:3 화면비를 유지하고 클로즈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화면 속 밀도를 한껏 끌어올린다. 숨이 막히는 공간에 배치된 두 인물은 위태로운 긴장감을 나누는 한편, 비밀을 공유하는 친밀한 관계로 나아간다. 유레이는 자허에게 자신을 죽일 기회를 주려고 하지만, 자허는 “난 또 다른 네가 되고 싶지 않아”라며 유레이가 내린 결론을 거부한다. 대신 망연자실하게 쓰러진 아빠를 일으켜 세우고 그동안 부녀가 마음에만 눌러두었던 슬픔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자허와 아빠는 비로소 가장 사랑하는, 그들이 동시에 잃고 만 사람을 애도할 수 있게 된다.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은 베이징영화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저우 쑨의 데뷔작으로, 부당한 요구와 굴욕에 맞서며 스스로 길을 찾아나가려는 소녀의 눈빛이 큰 울림을 준다.

차한비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

407 2020-09-14 | 10:30 - 12:11 인디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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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레인보우 l 쳇 팬케이크 l 미국 l 2019 l 115분 l 12세 l 컬러 

<퀴어 지니어스>

“천재성은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꾸준함과 헌신과 사랑의 재능이다. 관계와 같다.” 실험영화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퍼포먼스 아티스트인 바버라 해머가 작년 3월에 작고하기 전 <퀴어 지니어스>에 출연해 내놓은 말이다. <퀴어 지니어스>에는 바바라 해머를 비롯해 스톤월 항쟁부터 아프로 퓨처리즘까지, 시기와 인종을 달리 하는 미국의 걸출한 퀴어 예술가 다섯 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예술 장르의 구분은 물론, 사회의 금기, 나아가 보편적 시간 개념까지 질문에 부치며 자유로이 경계를 넘나든다. 여러 방면에서 예술성을 발휘하며 주목받은 이들을 천재라고 부르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이들의 삶과 작품 세계에 관한 인터뷰를 통해 역으로 던지는 질문은 천재라는 관념 속에 자리한 고정된 이미지다.

고독한 서재에 틀어박혀 영감이 오기를 기다리는 예술가. 내면으로 침잠한 예술가에 의해 그만의 오롯한 개성이 집약되어 표현된 예술작품. 이와 같이 낭만주의 시대 이래 신화화된 예술가의 천재성이 전제하는 예술과 현실의 분리, 창조의 근원으로서의 예술가의 내면, 나아가 뮤즈를 기다리는 남성 예술가처럼 헤테로섹슈얼의 이분법에 이르는 이 모든 경계는 다섯 퀴어 예술가의 삶 속에서 허물어진다. 이를 가장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인물은 ‘공연예술 매개체’이자 비디오 예술가, 배우이면서 코미디언이기도 한 집스 캐머론이다. 인터뷰와 함께 주요 자료로 병치되는 2016년 LA 레드캣에서의 공연 클립에서 캐머론은 영감을 받지 못하는 창작의 고통과 이성애 중심의 정신분석적 해석에 결부된 예술가 이미지를 익살스럽게 전복한다.

예술과 액티비즘 양쪽 모두에서 미국 레즈비언 혁명의 시기를 살아낸 바버라 해머 또한 이를 감동적으로 전한다. 영화는 작년 여성영화제 추모전에서 상영되기도 한 유작 <증거하는 몸>(2018)의 당시 전시 준비를 따라가며 그녀의 인터뷰를 담았다. 퍼포먼스 속 그녀의 노쇠한 신체는 요절한 천재 예술가 이미지의 정반대에 있다. <질산염 키스>(1992)의 한 장면을 말하는 인터뷰에선 에이즈 시대의 취약성을 가슴 아프게 회고하지만, 피부와 피부의 어루만짐 속에서 관계의 미학을 이어갔던 그녀는 마지막까지 슬픔이 아닌 삶을 증거하는 예술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김선명

<퀴어 지니어스>

408 2020-09-14 | 14:00 - 15:55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3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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