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WFF 2020 Daily 09.13
손모아·안정연·우연 인터뷰, 주요 상영작 프리뷰
리버스 / Festival / 20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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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씩, 천천히 

<가만한> 감독 손모아·안정연 

손모아(왼쪽) 안정연 ⓒ이영진

준서(박수연)는 피아니스트라는 오랜 꿈을 접고 나서 모교 행정실에 계약직으로 취직한다. 엄마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연주를 시작하라고 다그치지만, 준서는 서른에 접어든 제 나이와 이미 돌이키기 어려울 만큼 달라져 버린 풍경을 ‘가만히’ 곱씹을 뿐이다. 귓가에 매미 우는 소리가 쟁쟁한 그해 여름, 대개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준서 앞에 예기치 못한 만남이 찾아온다. 열정적인 피아노 전공생 수미(이화원)와의 대화는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어릴 적 피아노를 처음 가르쳐준 선생님과의 재회는 미래를 가늠해보게 한다. 영화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준서를 바라보며 함께 여름을 통과한다.

<가만한>은 손모아, 안정연의 장편 데뷔작이다. 두 감독은 “처음이기에 결과를 쫓기 보다는 과정을 튼튼히 쌓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현장에서 경험한 크고 작은 폭력이 상처와 아쉬움으로 남았기에, 직접 꾸리는 현장은 최대한 수평적이고 안전한 분위기이길 바랐다. 감독님이라는 호칭 대신 각자 이름을 부르거나 별명을 사용했고, 존대 여부는 상대 동의를 구한 후에 결정했다. 스태프 전원을 여성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원칙이자 목표였다. 동료와 친구의 도움으로 대부분 무리 없이 진행되었지만, 딱 하나 촬영이 문제였다. 결국 손모아 감독이 카메라를 들었고 두 사람은 새로 합을 맞춰 나가야 했다. 의견이 어긋날 때는 열심히 싸웠고 위기의 순간에는 뜻을 모았다. <가만한>은 그렇게 하나씩 천천히, 서툴고 부족할지라도 ‘우리’ 힘으로 이뤄낸 작품이다.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에서 함께 수학했다.

손모아_ 대학원에 들어오기 전에도 아는 사이이긴 했다. 과는 달라도 같은 대학을 나왔고, 중간에 공통으로 아는 친구도 있었다. 무엇보다 서로 영화에 관심 있다는 걸 알았지.

안정연_ 학교에 영화과가 따로 없어서 이론 수업을 쫓아다니다 보면 손모아라는 이름이 자주 보이더라. 이름도 특이해서 눈에 들어왔다.

 

손모아 감독은 대학원에 들어오기 전에 어떤 일을 했나. 전작을 찾기가 어렵더라.

손모아_ 대학에선 광고를 전공했다. 영화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불확실한 길을 걷기엔 자신이 없었고, 최대한 비슷한 쪽을 찾다 보니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졸업한 후에 선택을 유예하는 기분으로 학교 행정실에서 일했다. 결국 퇴직금으로 한겨레영화학교에 등록해서 단편을 만들었다. 당시에 영화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진학을 추천하셨다. 학교 분위기나 커리큘럼에 관해 정보가 없는 상태로 입학하다 보니 처음에는 놀라기도 했다. 연출뿐만 아니라, 촬영부터 녹음과 연기까지 거의 전 분야를 혼자 경험해보게 하거든. 결과적으로 큰 도움이 됐다.

 

안정연 감독은 단편 <여름의 출구>(2016)를 만든 후,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했나.

안정연_ <여름의 출구>는 독립영화협의회 워크숍을 수료하고 나서 친구들과 품앗이하며 만든 작품이다. 그때 ‘이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 일을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엔 공부보다 현장에서 경험을 쌓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봤다. 독립 다큐멘터리와 단편영화 현장에서 일했는데 거기서 얻은 결론은 ‘아, 공부해야 하는구나!’였다. (웃음) 그래서 대학원에 가게 된 거다.

 

둘이 비슷한 경로를 거쳤다. 학부 졸업 후 외부에서 영화를 만들고, 각자 일하며 돈을 벌다가 대학원에 들어가고.  

안정연_ 아, <여름의 출구> 후반작업을 위해 나도 모아 씨처럼 학교 행정실에서 얼마간 일했다. 이전까진 행정실에서 시간을 보냈던 게 그저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했는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교수님도 그저 사적인 경험이 아닐 수 있다면서 적극적으로 활용해보라고 조언하셨다.

<가만한>

공동연출은 누가 먼저 제안했나.

안정연_ 내가 했다. 제작 여건을 고려할 때, 혼자서 감당할 상황이 아니더라. 동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공동 작업에는 익숙한 편이어서 크게 부담을 느끼진 않았다. 영화 잡지 <SECOND>를 만들고 있는데, 거기서도 친구들과 위계 없이 팀을 꾸려 일하거든. 무엇보다 모아 씨는 동기 중 누구보다 이 작품을 깊이 이해해줄 사람이었다. 영화적인 스타일은 서로 다르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제안 당시 기본 스토리 라인과 캐릭터는 나온 상태였고, 이후 함께 각색했다.

 

상대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를 듣고 싶다. 서로 강점이라고 느낀 부분은 뭐였나.

안정연_ 모아 씨가 우여곡절 끝에 촬영까지 맡았는데, 그전부터 컬러, 의상, 소품, 미술감독과의 소통에 이르기까지 이미지적인 부분을 많이 담당했다. 로케이션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줬고. 평소에 실습하며 지켜볼 때도 그런 부분이 강점으로 느껴졌다.

손모아_ 정연 씨는 동기 중에 가장 성실한 사람이고 나는 가장 불성실한 사람이다. (웃음) 당시에 시나리오 마감 일자를 맞추지 못한 상태였다. 정연 씨에게 제안을 받고 생각해보니 ‘이 친구라면 영화를 어떻게든 완성하겠다’라는 확신이 들더라. 실제로 제작 과정마다 자잘한 계획이 많았는데, 정연 씨 덕분에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다.

안정연_ 나는 계획적이고 컨트롤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는 편인데, 모아 씨는 확실히 직관적이다. 결국 영화는 두 가지를 함께 가져가야 하지 않나. 내가 변화를 두려워할 때, 옆에서 주저않고 “해보자!” 하는 모아 씨를 보면서 놀랐다. 모아 씨가 나와 비슷한 성격이었다면 오히려 영화를 진행하기가 어려웠을 거다.

 

연출은 함께했지만 각본은 안정연 감독이 썼고, 손모아 감독은 촬영에 이름을 올렸다. 현장에서 실제 협업은 어떻게 이뤄졌나.

손모아_ 기본적으로 모든 회의는 함께 진행했고, 각자 집중할 파트를 나누기는 했다. 정연 씨는 배우들과 소통하며 연기 연출에 집중했고, 사운드 디자인과 믹싱을 담당했다. 나는 촬영과 동시에 이미지 디자인에 신경을 썼고, 자연스레 후반 작업 때는 색보정을 맡았다.

<가만한>

연출과 촬영을 겸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떤 사정이 있었던 건가.

안정연_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팀을 꾸리고 싶었다. 새로운 현장 분위기를 경험해보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봤고, 로케이션 중에 여대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도 필요한 조건이었다. 제한된 여건에서 급하게 촬영감독을 구하다 보니 일정 조정이라든지 소통 측면에서 문제가 생겼다. 결국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모아 씨가 용기를 냈다. 물론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기에 공동연출을 제안한 나로서는 매일 악몽에 시달릴 만큼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함께 콘티까지 마련해놓은 상태였고, 누구보다 촬영 방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도 우리였다. 결정적으로 김본희 미술감독이 큰 힘이 됐다. 본래 촬영을 하던 친구여서 미술과 동시에 촬영 퍼스트까지 맡았고, 모아 씨가 구현하고 싶은 이미지를 완성할 수 있도록 서포트해줬다.

손모아_ 촬영 직전까지 많이 긴장했다. 나 때문에 스케줄이 꼬일까 봐 걱정스러웠고, 뭔가 다들 평가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까 봐 위축됐다. 근데 막상 첫 촬영을 마치고 나니 자신감이 붙더라. 속으로 ‘이거 되겠는데?’ 싶었지. (웃음) 본희 씨한테 고맙다. 정말 상냥하고 똑똑하고,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다. 손발이 잘 맞았다.

안정연_ 한 쌍의 원앙 같은 호흡이었다. 어찌나 사이가 좋은지 나중엔 모든 스태프가 시기할 정도였다.

 

둘의 호흡은 어땠나.

안정연_ 현장에서 모아 씨를 딱히 부르거나 찾지 않아도 필요한 순간에 돌아보면 옆에 쓱 와 있더라. 컷은 내가 외치긴 하지만, 오케이와 엔지를 판단하는 건 함께했거든.

손모아_ 촬영 초반에야 부담이 없던 건 아니지만, 곧 안정을 찾으면서 계획대로 착착 굴러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배우들에게도 정말 감사했다. 연출이 카메라를 잡는 낯선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임해줬고, 오히려 우리보다 담대하게 반응해줬다. 

안정연_ 배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영화를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촬영 전에 배우들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양해를 구하면서 “그래도 믿어주시면 모아 씨가 촬영을 맡아서 끝까지 해보겠다”라고 말씀드렸지. 근데 답장도 없으시더라. 그냥 믿고 같이 가는 거지, 뭘 그렇게 구구절절 설명하느냐면서. (웃음)

 

주인공인 준서는 어렸을 적부터 피아노에 매진해온 인물이고 현재 음악대학에서 조교로 일한다. 영화에 예술학도가 경험할 법한 상황이 실감 나게 드러나는데, 사전에 다방면으로 조사를 거쳤을 듯하다.

안정연_ 어릴 때 피아노를 쳤고 중학교 1-2학년 때는 입시도 치렀다. 다만 당시 경험은 극 중 준서와 엄마의 관계에서 풀어낸 편이고, 음대 환경이라든지 학교생활과 관련한 디테일한 부분은 프리 단계에서 조사하며 채웠다. 시나리오는 영화를 출발하는 좌표 정도로 여기고, 중간 과정에서 발견하고 얻어낸 것을 영화에 십분 반영하자고 마음을 모았다. 그래야 우리가 바라는 사실주의에 가까워질 수 있겠더라. 음악 공부를 틈틈이 하면서 취재도 지속했다. 실질적으로 캐릭터에 입체감을 불어넣은 건 배우들이다.

<가만한>

수미 역을 연기한 이화원 배우는 어떻게 만났나. 직접 연주하는 장면이 꽤 여러 차례 등장해서 실제 피아니스트를 섭외한 게 아닐까 짐작했다.

안정연_ 음대 3학년생으로 현재는 휴학 상태다. 애초 캐스팅할 때도 음악 전공자 중에 연기를 경험해보고 싶은 분을 찾고자 했다. 대신 성격이나 말투 등은 굳이 정하지 않고 배우에게 맞추기로 했다. 처음 만났을 때 굉장히 경직된 모습이어서 함께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는데, 모아 씨가 한 번 더 만나보자고 하더라. 부담 없는 상태에서 만났더니 이야기를 술술 해주었고 연기를 향한 열망도 뚜렷해서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준서가 어떤 심리적 불안을 겪는다는 사실은 암시하지만, 구체적인 증상을 보여주거나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도 전혀 없더라.

안정연_ 애초 시나리오에는 플래시백도 있었고, 준서가 속마음을 토로하는 장면도 썼다. 근데 안정적인 길을 답습하기보다는 형식적으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보고 싶더라. 어찌 보면 우리에겐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제작 규모가 커지고 관객 스코어처럼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생기면, 뭔가 시도해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테니까. 결국, 감정 신이나 과거를 설명하는 신을 많이 덜어냈다. 애초 쉬운 영화는 아니지만, 정서만 놓고 보면 보편적인 이야기니까. 

 

주변에서는 마치 꿈도 인생도 놓아버린 것처럼 몰아가지만, 사실 준서는 조용히 고군분투하는 인물이다. 촬영하면서도 인물을 어떻게 담을지 고민했을 거 같다.

손모아_ 전반적으로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가 멀다. 누구나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에 자기 몫의 아픔을 껴안고 살아가지 않나. 그런 부분을 굳이 확대해서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봤다. 카메라는 관조하는 느낌으로 멀찍이 위치하되, 다만 손을 통해 내면의 변화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수연 배우에게 손에 신경 써달라고 요청하면서 그림책을 추천했다. 우울증 상담을 기록한 책인데 중간에 손 그림이 여러 번 나오거든.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 굳어 있던 손이 조금씩 움직이는 과정을 영화에 담아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가만한>

수미와 준서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 떠오른다. 수미는 위에서 담배를 태우고 준서는 아래에서 밥을 먹는데, 둘을 동시에 담는 화면 구도가 특이하다.

손모아_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고, 그 마주침의 순간을 온전히 담아내고 싶었다. 프레임 안에서 두 사람이 마주 봐야 하는데 도무지 각이 나오지 않는 장소였다. 결국 벽과 한 몸이 돼서 찍는 수밖에 없었지.

안정연_ 보통 쓰지 않는 광각이라 기이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 동기 중 한 명은 저 정도면 실험영화 아니냐고 하더라. (웃음) 둘이 시선을 주고받는 시점 쇼트보다 한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이미지 자체가 중요했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준서와 수미의 관계를 생각할 때 그런 표현 방식이 더 적합하겠더라.

 

극 중 준서가 수미와 함께 가는 숲도 굉장히 매력적인 공간이다.

손모아_ 탐방하듯 학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숲길을 지나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나 나올 법한 구멍이 보였다. 

안정연_ 정말 남다른 친구다. 실제로 보면 절대 숲처럼 보이는 곳이 아니거든. 나무가 빽빽하게 자란 화단에 가깝다.

손모아_ 딱 들어가는 순간, 여기가 학교인가 싶을 정도로 너른 풀밭이 펼쳐졌다. 옆에 음대 건물이 있어서 연주 소리가 잔잔하게 들리고, 조금 더 걸으니 작은 시골길이 나오더라. 갑자기 산짐승이 튀어나와서 그날은 반쯤 걷다가 도망쳤고, 다음에 정연 씨를 끌고 다시 갔다.

안정연_ 나를 앞세웠지. 내가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면 모아 씨가 따라오고. (웃음) 우리가 한참 에릭 로메르 영화를 보던 때였는데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영화적 공간으로 훌륭한 곳이었다. 학교 안에 있다는 느낌을 유지한 채 넘어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고.

 

촬영하며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 그때 어떻게 마음을 다잡았나.

손모아_ 앞서도 말했지만 첫날이 제일 힘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첫 촬영 하루 전날. 첫 장편에 촬영까지 맡아서 막연하게 두려웠다. 원래 밖에서는 티를 안 내고 집에서 혼자 우는데, 촬영 당시에는 연출부 스태프와 숙소를 같이 쓰는 바람에 울지도 못했다. 너무 창피해서. (웃음) 다음날 촬영장 가는 길에 오민애 선배님한테 문자가 왔다. 그때 딱 정신 차리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여기서 약해지지 말고 나를 잘 붙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지.

안정연_ 처음에는 준서를 내 분신처럼 여겼기에 영화와 나를 분리하기가 힘들었다. 준서에게 쏟아지는 비판이나 공격을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은 어려웠던 거다. 하지만 현장이 주는 동력과 사람들의 밝은 에너지 덕분에 점점 마음이 편안해졌고, 그 과정에서 개인적 상처도 치유할 수 있었다. 영화를 시작할 때는 어떤 시기를 이미 지나왔다고 생각했다. 괴로운 시간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전하는 소회랄까, 내가 예전에 겪었던 시간을 누군가가 지금 보내는 중이라면 그에게 이런 이야기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근데 알고 보니 나는 그 시기를 통과한 사람이 아니라, 이제야 마주한 사람이었던 거다. 결국 모두 끝나고 난 후에야 어떤 영화였는지 정리되는 기분이다. 위기를 극복하고 나를 탈바꿈하는 노력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와 상황을 지속하고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을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칭찬에 너무나 야박한 사회이지 않나.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Interview 2------------------------------------------------------------------------------------------------------------

숨지 말고, 잃지 않고

<술래> 배우 우연 

갑자기 낯선 집에 맡겨진 민우(우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엄마, 왜 이렇게 나를 괴롭혀?” 대답을 원하는 민우는 자못 심각하고 진지하지만, 엄마 승옥(남미정)은 애들은 몰라도 된다고 말하며 민우를 남겨둔 채 떠나버린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숨만 쉬던 민우는 예전에 살던 집을, 혼자 지내는 짜증 많은 오빠를,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를 술래처럼 찾아다닌다. 민우의 내면에는 해소되지 않는 의문과 누그러지지 않는 감정이 한가득인데, 누구 하나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주거나 민우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아시아단편 부문에서 상영하는 <술래>는 불안을 품고 방황하는 민우의 뒤를 따르며,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담아내는 작품이다. 이 영화를 인상적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건 무엇보다도 민우의 얼굴과 몸짓이다. 금방이라도 새어 나올 듯한 감정을 가득 품고서 혼자의 시간을 버틴다. 배우 우연을 만나, 영화를 연출한 김도연 감독과의 만남에서부터 민우가 직접 말로 표현하지 못한 마음까지 두루 들어봤다.

 

 

이름이 독특하고 예쁘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흔한 편이라 예전부터 자연스럽게 다른 이름을 상상하곤 했다. 어릴 때부터 ‘연’이라는 글자를 좋아했는데, 그때는 커서 결혼하고 아이 낳는 걸 당연하게 여기니까 미래의 아이에게 그 글자를 줘야겠다고 생각했었지. 스무 살이 넘으면서 주관이 뚜렷해졌고, 앞으로의 인생은 스스로 지은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는 마음에 개명했다. 청명할 연(曣)이라는 예쁜 한자를 쓴다.

 

지난 7월엔 미쟝센 단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연기 부문에서 수상했다. 김도연 감독도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뭣보다 이정은 선배님께서 시상해주신 게 너무 신기했다. (웃음) 작년에 <기생충>의 선배님 연기를 보며 완전히 압도됐거든. 정말 좋아하는 멋진 분이다. 이번에 김도연 감독님께도, 평소에 나를 많이 도와줬던 이나연 감독님께도 좋은 결과가 있었는데, 그렇게 함께 좋을 수 있어서 행복하고 즐거웠다. (이나연 감독이 공동연출한 <실>은 비정성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지금까지는 타인의 인정을 바라왔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상을 받고 나니 앞으로는 그러지 말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자는 생각이 들더라.

 

이나연 감독이 우연 배우를 김도연 감독에게 소개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이어진 인연인가.

2018년에 친구들과 함께 <치킨 파이터즈>(연출 고현지)라는 영화를 찍었다. 그게 내 첫 영화였는데, 운 좋게 부산국제영화제에 가게 됐다. 그때 <아프리카에도 배추가 자라나>로 영화제를 방문한 이나연 감독님을 만났다. 영화 잘 봤다고 하시기에 “예, 감사합니다.”하고 지나가려는데, 자기가 준비 중인 프로젝트를 같이 할 생각이 있냐며 스케줄을 묻더라. 그렇게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기획한 <생존자의 자리>라는 작품을 이나연 감독님과 함께했다. 촬영장에 여성이 가득했던 풍경이나 감독님의 배려가 좋은 기억으로 남았고, 그 이후로도 계속 연락하고 지내다 김도연 감독님을 소개받았다.

<치킨 파이터즈>

김도연 감독과의 첫 만남은 어땠나. 서로 일기도 주고받았다고.

시나리오 초안을 받아보고 나서 첫 미팅을 했는데, 날 그렇게 좋아해 주는 사람을 태어나서 처음 만나봤던 것 같다. 내가 했던 작품도 다 알고 있었고, 계속 연예인을 만나는 느낌이라고 말해주는 거다. (웃음) 일기처럼 내밀한 부분은 보여주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먼저 꺼내 보여줘서 정말 고마웠다. 읽어보니 이 사람이 겪었던 일과 느꼈던 감정이 나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다음엔 내 일기를 들고 갔는데, 감독님도 나처럼 굉장히 고마워했다. 이 작품이 잘 되겠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들었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민우라는 인물은 어떻게 다가왔나.

세상 모두가 그렇겠지만 민우도 말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다. 특히 여성 청소년의 경우엔 마음을 드러내지 말라고 교육받으며 자라지 않나.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어떤 감정이 생기는 것인지를 명료하게 정리하기가 어려운 거다. 그래서 감정이 삐져나온다. 민우는 그런 아이이고, <술래>의 좋은 점 중 하나는 그걸 숨기지 않는다는 데 있다. 상황이 다를 뿐이지, 아마 한국 여성의 유년기, 청소년기 안에는 민우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조금씩은 있을 거다. 민우가 얼마나 절망하고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얼마나 엄마가 미울지 그리고 동시에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을지를 가능한 한 많이 생각하려고 했다.

 

보통 어떤 준비과정을 거치는지 궁금하다.

대본을 최대한 세세하게 많이 본다. 단어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나 지문에 드러나는 이야기 등을 다 보면서 뽑아낼 것들을 모두 뽑아낸다. 그렇게 감정과 마음이 점차 쌓이면, 그걸 쓰지 않고 바로 현장에 간다. 말로 계속 내뱉으면서 연습을 하다 보면 관성이 생기고 감정이 닳거든. 가끔은 내가 가진 것도 제대로 못 하면 어떡하나 싶을 때가 있는데, <술래>를 시작할 때는 내가 가진 만큼은 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있었다.

<술래>

민우와 엄마가 보여주는 모녀 관계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다. 엄마를 연기한 남미정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

난 개인적으로 대화가 너무 잘 통하고 속마음을 다 이야기할 수 있는 모녀 관계는 판타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민우와 엄마는 사실 되게 평범한 관계다. 남미정 선배님과는 딱히 어떤 모녀를 그려야겠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합이 잘 맞았다. 나를 딸처럼 여겨주시기도 했고. 촬영 전 대본 리딩 때 선배님이 해주셨던 말씀이 굉장히 기억에 남는다. 이 대본을 보면서 요즘 청소년, 청년들이 얼마나 힘든지 느끼게 됐다면서, 기성세대로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시더라. 그 말이 너무 따뜻하고 감사했다.

 

후반부로 향하며 민우는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낸다. 별다른 대사 없이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장면들이라 여러모로 어려웠을 거라 짐작한다.

사실 물에 빠지거나 자전거를 끌고 가는 장면보다도 녹즙 마시는 장면이 힘들었다. 테이크를 여러 번 갔는데, 그러다가 내 감정이 너무 커졌거든. 다 찍고 집에 가서도, 그리고 다음 날까지도 감정의 여파가 있었다. 그때의 민우는 매우 큰 고독을 맛봤을 거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은 적은데, 어른들이 알맞은 행동을 제때 취해주지 않아서 자신의 몫을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으니까. 그 고독과 거기 걸쳐있는 원망을 너무 많이 꺼내서 갈무리가 잘 안 되고 힘들었던 것 같다.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장면이 있다면.

민우가 전에 살던 집도 가고 오빠네도 갔다가 다시 선이 아주머니네로 돌아왔을 때를 좋아한다. 민우는 거기서 이미 감정이 터질락 말락 하는데, 주변에 원망할 대상이 없으니까 그걸 참고 괜찮은 척한다. 사실 처음에는 갈피를 잘 못 잡아서 테이크를 여러 번 갔다. 그러다 점점 어떤 감정인지 알 것 같더라.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이 나온 장면이다. 완성본을 보는데, “잘했는데?” 싶더라. (웃음)

<술래>

지난해 11월에 영화를 촬영하고 꽤 시간이 지났다. 우연 배우에게 <술래>는 어떻게 남아있나.

이 영화로 인해 좋은 사람, 멋진 선배님을 많이 만났다. 특히 김도연 감독님은 2019년 최고의 귀인이다. (웃음) 내 능력을 신뢰해주고 북돋아 줘서 늘 고맙다. 내가 <술래>를 찍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경험을 그냥 경험으로만 끝내는 게 아니라, 그때의 감정을 복기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내 인생에 더 좋게 쓸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됐다. 이러저러한 면에서 정말 고맙고 내게 많은 도움이 된 작품이다.

 

연기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어렸을 때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드라마를 보면서 그걸 열심히 따라 했다. 그러다 12살인가 13살 즈음에는 연습을 하다 보니 이제 내 마음대로 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곧 사라졌지만. (웃음) 이후에는 꿈도 여러 번 바뀌고 방황도 심하게 했다. 그러다 <치킨 파이터즈>를 찍고 좋은 기회를 만나게 된 거다.

 

연기의 매력은 무엇인가. 앞으로의 계획이나 해보고 싶은 연기가 있다면.

타인을 최대한 생각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사람의 약한 부분을 들여다보고 내 마음을 내주는 과정이 재밌고. 원래 제주도에 가서 촬영하려던 것들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연기됐다. 당장은 계획이 없으니 연락하시라. (웃음) 여성 퀴어물을 해보고 싶다. 또 앞으로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보면서 다치거나 베이는 느낌이 들지 않는 작품을 하는 게 목표다. 지금의 나를 잃지 않으면서, 나를 숨기지 않으면서 마음대로 하고 싶다.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Choice-----------------------------------------------------------------------------------------------------------------

엑스터시 Ecstasy

발견 l 모아라 파소니ㅣ브라질·미국ㅣ2020ㅣ75분 l 15세ㅣ컬러 

<엑스터시>

페미니스트 눈에 몸은 더없이 첨예하고 논쟁적인 장소다. 브라질 출신 작가이자 감독인 모아라 파소니의 인상적인 장편 데뷔작 <엑스터시>는 다양한 모순이 역동적으로 부딪치는 위태로운 몸을 직접적으로 영상화한다. 영화는 클라라라는 소녀의 의식을 따라 거식증을 앓는 몸과 정서의 흐름에 강렬하게 몰두한다. 몽환적이고 불안정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난장은 그녀가 엄마의 자궁 속에 있을 때부터, 태어나 자라며 세상과 불화하고, 동성 친구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며, 허기를 통해 환희와 고통을 경험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여정을 감각적으로 담아낸다. 이때 몸이란 단순히 세상의 규범에 속박된 껍데기만도 아니고, 긍정과 주체성을 온전히 담보하는 조건도 아니다. 클라라에게 몸은 의문의 대상이자 격렬한 싸움의 장이다. 거식증은 그런 그녀를 쇠약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황홀하게 한다.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엑스터시>는 다큐멘터리로 분류되는 작품이다. 논리 정연한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기록하고 다양한 자료를 통해 사회적 경험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과 섭식 장애를 겪은 여성들의 사례를 모아 만든 클라라의 이야기는, 1990년대 정치적 격동기를 맞은 브라질의 모습과 거식증으로 인해 뼈가 다 드러날 만큼 앙상해진 실제 몸의 외양을 동시에 담는다. 이러한 요소들은 영화 안에서 긴밀하게 결합하며 한 개인이 세상을 감각하는 복합적인 방식을 형상화한다. 영화엔 모더니즘적 양식의 건축물이 종종 출몰하는데, 클라라가 건축적 비유를 통해 자신의 몸과 세계를 바라보려 하기 때문이다. 이는 붕괴와 해체에 대한 욕망으로도 이어진다. 클라라는 몸의 무게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우울과 환각,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져든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회복과 화해로 향하며, 세상으로 당차게 걸어 나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희망적으로 응시하려 한다. <엑스터시>는 몸의 정치성에 관한 다층적인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지극히 개인적인 자화상이자 무척이나 보편적인 초상화다.

손시내

<엑스터시>

307 2020-09-13 | 11:00 - 12:15 인디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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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 내 삶의 편린들 Toni Morrison:The Pieces I am

새로운 물결ㅣ티모시 그린필드 샌더스ㅣ미국ㅣ2019ㅣ120분ㅣ전체ㅣ컬러

<토니 모리슨: 내 삶의 편린들>

미국의 소설가 토니 모리슨은 1993년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오프라 윈프리는 토니 모리슨의 책을 자신의 TV 쇼에서 네 번이나 소개하며 미국의 보물이라 말했고, 2012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그녀에게 ‘자유의 메달’을 수여했다. 흑인 여성의 삶을 주로 다루며 문학적 성취와 대중적 성공을 동시에 이루어냈던 토니 모리슨은 작년 8월 향년 88세로 우리 곁을 떠났다. <토니 모리슨: 내 삶의 편린들>은 그녀가 사망하기 몇 개월 전인 그해 1월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다큐멘터리다. 토니 모리슨의 삶과 작품 세계 전반에 관한 충실한 안내서를 자임하는 이 영화의 중심에는 강인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지난날을 회고하는 그녀의 생전 인터뷰가 놓여있다.

어릴 적 토니 모리슨은 흑인의 삶에 대해 얘기하는 1940-50년대 당시 대표적인 남성 흑인 작가들조차 자기에게 말을 걸고 있지 않다고 느꼈다. 그들은 백인 남성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제임스 볼드윈의 말처럼 그들의 어깨에 조그마한 백인 남성이 걸터앉아 무엇을 말하고 생각하는지 끊임없이 검열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면화된 백인 남성의 시선에서 벗어나 흑인, 특히 흑인 여성의 삶을 흑인 여성의 시선과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녀의 데뷔작 <가장 푸른 눈>은 흑인 소녀의 이야기로, 크리스마스에 선물로 받는 푸른 눈을 가진 백인 소녀 인형이 어떻게 그녀가 ‘마스터 내러티브’라고 말한 백인 남성의 삶과 시선을 유통시키며 흑인 소녀들의 자기혐오를 만들어내는지 강조했다.

그녀의 언어는 수많은 흑인 여성들에게 그녀들이 겪는 고통과 삶의 조건들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단을 제공했다. 토니 모리슨을 읽는다는 건 세계 이면의 세계와 조우하는 것이었고, 독자들은 그녀를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토니 모리슨: 내 삶의 편린들>이 자신의 삶과 작품 세계를 직접 구술하는 토니 모리슨의 말을 중심에 놓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녀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며 편집자, 교육자, 작가로 살아온 그녀의 이야기는 또 한 번 용기와 위안을 선사할 것이다.

김선명

<토니 모리슨: 내 삶의 편린들>

310 2020-09-13 | 14:00 - 16:00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406 2020-09-14 | 10:30 - 12:30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9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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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키아코 Panquiaco

발견ㅣ아나 엘레나 테헤라ㅣ파나마ㅣ2020ㅣ84분ㅣ12세ㅣ컬러 

<판키아코>

세발도는 포르투갈의 항구 마을에서 어부 조수로 일한다. 오래 전 고향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파나마 원주민인 그는 지금 향수병을 앓고 있다. 아침에 샤워를 하면서 고향의 물을 떠올리고 밤마다 술집에서 홀로 상념에 젖는다. 어느 날, 한 낯선 남자가 다가온다. 배가 난파되어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선원의 우화를 들려주는 그에게 이끌려, 세발도는 고향 구나얄라로 향한다. 그러나 그리움으로 채색되어 꿈결같이 아름다웠던 고향 대신 회색빛 하늘과 거친 파도,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가 된 집이 그를 맞이한다.

<판키아코>는 파나마 출신인 아나 엘레나 테헤라 감독의 첫 장편 영화다. 스페인에서 퍼포먼스 배우로 활동했던 그녀는 이번 영화를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구분을 넘어서는 일종의 퍼포먼스로 구상했다. 세발도를 포르투갈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을 따라 미리 준비했던 시나리오를 전면 수정했다고 한다. 영화는 세발도와 함께 구나얄라 원주민의 의례와 풍습을 화면에 담지만 단순히 좁은 의미의 민속지적 관찰에 머무르지 않는다. 16mm와 슈퍼8mm로 찍은 화면과 함축적인 대사가 더해지며 기억과 정체성에 관한 시적인 고찰로 나아간다.

판키아코는 16세기 초 파나마의 카리브해 연안에 도착한 스페인의 탐험가이자 정복자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에게 태평양으로 향하는 길을 알려준 원주민이다. 발보아는 태평양을 처음 발견한 유럽인으로, 화폐와 길 이름에 남아 있는 그의 흔적에서 알 수 있듯이 파나마에서도 중요하게 기억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판키아코의 이름은 잊혀졌다. 이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파나마 운하와 마치 마이애미처럼 고층빌딩이 가득한 해변으로만 기억되는 파나마의 현재와 닿아있다. <판키아코>가 전통을 지키고자 투쟁하여 파나마 정부로부터 자치권을 얻어낸 구나얄라 원주민의 혁명 기념일, 그리고 유대감과 뿌리는 개인의 이상화된 그리움 속이 아니라 자연의 기억 속에 있다는 그들의 믿음을 섬세하게 기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선명

<판키아코>

321 2020-09-13 | 17:00 - 18:24 인디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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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Woman

새로운 물결ㅣ아나스타샤 미코바·얀 아르튀스 베르트랑ㅣ프랑스ㅣ2019ㅣ108분ㅣ전체 ㅣ컬러

<우먼>

영화는 성폭력 피해 경험을 말하는 한 여성의 얼굴로 시작한다. 자기 이야기를 소리 내어 말하는 그 얼굴에는 짧은 시간 동안 폭풍처럼 다양한 감정이 일렁이고, 카메라에는 생존자로서 그리고 삶의 주체로서의 모습이 또렷이 새겨진다. 전 세계 50개국에서 2천 명 이상의 여성들을 인터뷰해 만든 다큐멘터리 <우먼>은 여성의 목소리, 여성의 말하기에 관한 영화다. 연령, 국적, 인종, 직업, 섹슈얼리티, 장애 여부 등이 전부 다른 여성들이 제각기 카메라를 바라보며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터져 나오는 이 말하기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여성이 감춰야 한다고 여겨져 온 것들을 드러내는 적극적 행위다. 초경의 기억, 여성으로서 겪은 빈곤과 노동의 현장, 임신과 출산, 오르가슴, 가족 구성원으로서 수행해야 했던 의무, 신체에 흔적을 남긴 질병과 전쟁, 고통스럽게 지나온 차별과 폭력의 시간, 스스로 선택한 사랑 등 일평생 자신의 몸으로 생생하게 겪어왔던 경험들이 아주 구체적인 삶의 언어로 분명히 발화된다.

수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모여 있지만, 영화의 제목은 복수형(Women)이 아니라 단수형(Woman)이다. 카메라와 일대일로 관계를 맺고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여성들의 경험이 모두 고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에는 다양한 위치와 입장에 따른 차이들 또한 드러난다. 그러나 그 차이는 단지 개인들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요소에 그치지 않는다. 성 산업과 결혼제도에 대한 이견은 가부장제를 중심으로 구조화된 사회 자체를 돌아보도록 만든다. 임신 중단과 출산에 관련된 어떤 경험들은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해 결정권을 갖지 못하는 세태를 동일하게 보여주는 예시가 된다. 이처럼 영화는 여성들 각각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여성들이 살아가는 전체적인 구조를 환기한다. 2015년에 비슷한 프로젝트인 <휴먼>을 연출한 바 있는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 감독과 사회, 인권 문제를 주로 다뤘던 기자 출신의 아나스타샤 미코바 감독이 공동 연출했다.

손시내

<우먼>

326 2020-09-13 | 20:00 - 21:4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8관 

506 2020-09-15 | 10:30 - 12:18 인디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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