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끼리 자주 놀러 가던 강촌 선착장에서 아빠가 세상을 등진 그날, 열두 살 선유(조서연)는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장소를 동시에 잃었다. 나희(양소민)는 갑작스러운 이별에 제대로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남편이 남기고 간 큰 빚더미를 떠안았다. 모녀는 도망치듯 낯선 도시로 이사한다. 과거로부터 달아나고자 일부러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을 택한다. 살얼음판을 딛는 것처럼 매일 불안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보려고 애쓴다. 선유는 새 학교에 들어가고 나희는 새 직장을 구한다. 유흥가의 번쩍이는 불빛과 소음이 좁은 방 안까지 들어와 잠을 방해하는 밤에는 서로 팔을 뻗어 꼭 끌어안는다.
영화는 선유의 시점과 시야를 고수한다. 모녀가 현재 어떤 상황에 부닥쳤는지, 빚의 규모는 얼마쯤이고 선유 아빠의 죽음 전후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을 겪고 너무 일찍 철들어버린 아이의 눈으로 무너져가는 마음을 지켜본다. 여기로 달아난 것이 아니라, 여기까지 내몰린 것이라는 사실을 선유가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어른들이 목소리를 낮춰 대화할 때, 선유는 말없이 엄마의 얼굴을 살핀다. 자신에게는 한 번도 하지 않은 말, 하지만 엄마가 매일 떠올리고 있을 말을 끝내 듣게 될까 두렵다. 그렇게 또다시 버림받으면 이번에는 정말 혼자가 되고 만다.


자연스레 선유는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거리를 둔다.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 선유에게 반 친구들은 살갑게 다가오지만, 선유는 관심을 못내 부담스러워한다. 동갑내기 정국(최로운)은 어째선지 그런 선유에게 자꾸 말을 붙이고 싶어진다. 이따금 혼자 생각에 잠기는 선유 주변을 맴돌며 끝내 웃음을 되찾도록 북돋아 준다. 한편, 나희는 아무리 노력해도 복구할 수 없는 삶에 지쳐 간다. 식당과 공장에서 밤낮없이 일해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고, 난데없이 선유 학교까지 찾아온 시어머니는 아들의 사망 보험금을 내놓으라며 질타한다. 나희는 여느 밤처럼 선유를 품에 안고 아빠를 만나러 선착장에 가자고 말한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있을 때면, 선유는 아빠에게 선물 받은 종이 오리기 책을 꺼내 든다. 힘주어 접은 종이 위에 밑그림을 그리고 선을 따라 가위로 단정히 잘라낸다. 텅 비었던 종이는 어느새 새하얀 눈송이로, 그럴싸한 창문 장식으로 변신한다. 이 조용한 행위는 놀이라기보다는 기도처럼 보인다. 종이를 오리듯 나쁜 걸 전부 도려낸 다음 좋은 것만 남겨두려는 선유의 속내가 깃든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좋고 나쁨이 아니라 강하고 약함으로 나뉘는지도 모른다. 강하면 무조건 훌륭하고 약하면 언제나 보잘것없는 것은 아니어서, 때로 마음과 마음을 마주하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선유와 정국은 서로에게 그런 만남이 되어준다. 선유는 나란히 걷던 길과 그날 가득했던 햇살,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미소 지었던 추억을 떠올린다. 정국은 “나를 구하지 마세요”라는 선유의 말에서 제발 구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듣는다. 최선을 다해 선유에게 달려간 정국은 아무것도 몰라서 미안하다며 사과하고, 선창장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나희를 향해 묻는다. “아줌마는 선유 마음 아세요?” 그렇게 강하고 약한 마음이 만나는 순간, 영화에는 ‘그럼에도’라는 희망이 조금씩 자리 잡는다. 정연경 감독의 첫 장편으로, 2016년 대구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다양한 작품에서 아역이자 조연으로 활동해온 조서연과 최로운이 능숙하게 호흡을 맞추고, 김형구 촬영감독, 박곡지 편집감독, 강대희 조명감독 등이 참여하며 완성도를 높였다.

나를 구하지 마세요 Please don’t save me 제작 아우라픽처스 감독 정연경 출연 조서연, 최로운, 양소민 배급 리틀빅픽처스 상영시간 97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0년 9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