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이삿날 빈집에서 맨 마지막에 나온다. 못내 아쉬운 얼굴로 벽에 걸린 액자를 응시하다가 달깍 불을 끈다. 아빠가 운전하는 흰색 다마스에는 단출하게 꾸린 세간이 차곡차곡 실리고 뒷좌석에는 인형을 등에 업은 남동생이 앉는다. 재개발로 어수선한 동네를 천천히 빠져나갈 때, 소녀는 미심쩍어하며 아빠에게 묻는다. “할아버지한테 말한 거 맞지?” 옥주(최정운)는 그렇게 할아버지의 오래된 양옥집에서 그해 여름방학을 보낸다. <남매의 여름밤>에는 두 남매가 등장한다. 옥주와 동주(박승준)는 속 깊은 아이들이고 아빠(양흥주)와 고모(박현영)는 덜 여문 어른들이다. 오랜만에 한 집에 모인 가족들 사이에서 옥주는 종종 외롭고, 때로는 떠난 이를 원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아이는 아이답고 어른은 어른이라서, 영화에는 말 못할 괴로움보다 천진난만한 웃음과 곁을 내어주는 온기가 훨씬 자주 담긴다. 아마도 그건 지나고 나면 꿈에서나 다시 마주할 법한 장면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또 헤어진다는 것이 무얼 뜻하는지 조금씩 깨닫는 여름밤, 옥주의 마음속에서 그리움도 한 뼘씩 자라난다. 잊지 못할 시절을 서로에게 나눠준 윤단비 감독과 최정운 배우를 한자리에서 만났다.
영화를 처음 공개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4관왕을 달성했고, 올해 초에는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밝은미래상을 받았다. 이미 적지 않은 국내외 관객과 만났지만 극장 개봉은 또 다른 경험일 것 같다.
윤단비_ 영화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처럼 느껴진다. 근데 내가 완벽한 보호자가 아니다 보니 여러 도움을 받으며 영화를 조금씩 키워가는 거다. 지금으로서는 영화가 나를 끌고 가는지, 내가 얘를 믿고 가는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만 그마저도 아득하다. 모쪼록 관객분들이 만족하고 돌아가시면 좋겠다. 요즘처럼 외부 활동을 자제하는 시기에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까지 오시는 거니까. 개인적으로는 코로나든 뭐든 외부 상황을 핑계 삼지 않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얻고 싶다.
최정운_ 나는 솔직히 마냥 설레고 신난다. (웃음) 개봉은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시기가 시기인지라 올해 상반기에는 거의 집에서만 지냈거든. 이렇게 밖에 나와서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는 시간이 즐겁다.
벌써부터 관객 반응이 뜨겁다. 공식 서포터즈 이름이 ‘의남매’라고.
윤단비_ 마음에 쏙 든다. 실은 촬영감독이 일전에 ‘남매 친척들’이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줄이면 ‘남친’인 거다. 차마 앞에서는 아니라고 말을 못했는데 다행히 관객 분들 덕분에 ‘의남매’라는 귀여운 명칭이 생겼다. 역시 집단지성의 힘이 대단하다. (웃음)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보니 의자매 같기도 하다. 옥주 역을 소화해낼 배우를 찾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들었다. 단편 <빛나는 물체 따라가기>(문병진, 2018)의 스틸 이미지만 보고 최정운 배우에게 오디션을 제안했다고.
윤단비_ 실제로 봤을 때 곧바로 마음이 동했다. 박찬욱 감독이 <아가씨> 캐스팅 당시, 김태리 배우를 만나고 5분 만에 결정했다는 것처럼. (웃음) 쌍꺼풀 없이 깊은 눈매와 조심스러운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최정운_ 아주 어릴 적부터 배우를 꿈꾸다가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연기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빛나는 물체 따라가기>는 내게 첫 영화이자 생애 처음으로 오디션을 본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 단편을 몇 작품 더 찍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남매의 여름밤>을 촬영했다.
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시점에 <남매의 여름밤>으로 장편 주연을 맡았다. 흔치 않은 기회이지만, 배우로서는 부담감도 컸으리라 짐작한다.
최정운_ 맞다. 이건 누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중히 써 내려간 작품이고, 돈과 인력이 투입되는 일이지 않나. 매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나 때문에 망치면 어떡하지?’ 걱정한다. 사실 오디션을 제안 받았을 때는 옥주가 주연인 줄 몰랐다. (웃음) 그저 가족 중 한 명이고 아무리 비중이 높아도 조연일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학생이다 보니 현실적인 고민도 해야 했다. 한 달 남짓한 촬영 기간 동안 학교에 출석하기도 어렵고 아예 시험을 못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거든. 엄마가 썩 반기지는 않으실 듯해서 눈치를 봤는데, 예상외로 “당연히 해야지!”라며 적극적으로 응원해주셔서 용기를 냈다.
윤단비_ 정말? 처음 듣는 이야기네.
최정운_ 그때는 감독님이 나를 염두에 두신 줄도 몰랐다. 꼭 붙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웠고, 오디션도 아주 잘 본 것 같지는 않았다. 결과가 어떨지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윤단비_ 서로 염려하는 마음을 안고 만났던 거 같다. 정운 배우도 그랬겠지만 나 역시 배우가 시나리오를 잘 봤을지, 어떻게 생각할지 살피느라 조심스러웠거든. 미팅해보면 무척이나 강력한 열의를 보이는 배우들이 있다. 딱히 말하지 않아도 눈빛에서 열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건 그것대로 감사한 일이지만, 신기하게도 <남매의 여름밤> 배우들은 모두 그런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정운이도 그래서 좋았다. 옥주라는 인물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배우를 찾던 중이었고, 큰 욕심 없이 연기하길 바랐다. 가족 드라마이다 보니 한 명이 너무 튀어버리면 곤란한데, 아무래도 힘이 들어가면 과잉된 감정이 나오니까.
배우가 만난 옥주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디테일을 채워 나갔는지 듣고 싶다.
최정운_ 아빠, 동주, 고모에게 대하는 방식이 각각 다르다고 느꼈다. 인물별로 어떤 관계인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생각하며 연기했다. 옥주는 속도 깊고 생각도 많은 아이다.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우리 집 형편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아빠에게 투덜대고 동주한테 괜한 시비를 걸면서 자기만의 영역을 확보하고 싶어 한다. 늘 잠들기 전에 ‘내일은 잘해야지’라고 다짐하지만, 막상 다음날이 오면 마음처럼 되지 않은 게 아닐까 싶었다.
말한 것처럼 옥주는 조숙한 인물이지만, 때로는 쌍꺼풀 수술처럼 철없는 얘기를 하거나 한참 어린 동생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하나로 묶이지 않는 다양한 면이 섞여서 오히려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다가오더라.
윤단비_ 에드워드 양 감독을 무척 좋아한다. 인물을 캐리커처로 그리지 않고 정말 캐릭터로 만들어내거든. 영화 속 인물들이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도구가 아니라, 진짜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으로 느껴지길 바랐다. 옥주 캐릭터를 만들 때는 내 이야기를 가져온 부분이 많다. 나도 어렸을 적에 생각이 정말 많았거든. 온갖 고민을 끌어안느라 때로는 ‘생각 없이 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창피하지만 당시에는 꽤 심각했다. (웃음) 옥주에게도 그런 진지함이 깃들되, 동시에 그 나이대의 인물에게 필연적인 미성숙함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고 봤다. 그때 내가 그랬듯 말이다.
두 사람은 언제 다 컸다고 생각했나.
윤단비_ 죽기 전에는 그럴 수 있으려나. 어른이라고 생각하다가도 가끔은 ‘내가 봐도 참 철이 없네’ 싶을 때가 있다. (웃음) 꿈은 늘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아이들을 지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지금은 나조차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듯해서 더 노력해야지 싶다.
최정운_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니란 걸 깨달았다. 여전히 어리구나 싶다.
윤단비_ 그걸 느낀다는 것만으로도 큰 거 같다.
최정운_ 이제 스무 살이지만 집에서는 막내이다 보니 십대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친구들과 농담처럼 “멘탈은 고등학생에 머물러 있는 거 같은데 얼마 후면 벌써 스물한 살”이라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런 면에서 옥주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옥주를 가깝게 느낀 거 같다. 연기하며 어떤 점이 가장 눈에 들어왔나.
최정운_ 무엇보다 옥주가 엄마랑 같이 살지 않는다는 점에 마음이 아팠다. 나는 엄마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이거든. 옥주와 내가 놓인 상황이 똑같지는 않지만 그런 식으로 다가갈 여지가 있었다. 나도 할아버지에게 예쁨 받은 추억이 되게 많은데, 옥주와 할아버지가 점점 가까워지는 모습에서 따뜻함을 느끼기도 했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보다 촬영하면서 ‘<남매의 여름밤>은 이런 영화구나’ 하는 그림이 그려졌던 거 같다. 1년쯤 지나서 완성본을 봤는데, 확실히 촬영장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작품이더라.
어떤 영화가 될 거라고 예상했나.
최정운_ 소소하게 마음을 채우는 영화.
현장에서 윤단비 감독은 어떤 연출자였는지도 궁금하다.
최정운_ 연기할 때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옆에서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동선도 자유롭게 열어주셨고 대사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더 해도 좋고, 옥주 입장에서 나올 말이 아닐 거 같으면 얘기해달라고 하시더라. 편안한 분위기에 도움을 받아서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촬영장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게 감독에게나 배우에게나 쉽지는 않았을 텐데.
윤단비_ 아역 배우들과 작업하며 의외성을 발견하는 순간이 잦았다. 나로서는 전혀 예기치 못한 장면을 만들어내는데, 그걸 한정 짓는 순간 영화에는 내 목소리만 남더라. 몇몇 장면이 떠오른다. 예를 들어 동주가 옥주에게 방울토마토를 건넬 때, 한 번 주는 거로 끝나지 않고 두어 번 반복하지 않나. 작은 손으로 몇 알씩 집어서. (웃음) 만약에 “누나한테 토마토 3개 주고 다시 할아버지한테 돌아가라”는 식으로 디렉팅을 했다면 만나지 못했을 사랑스러운 장면이다. 옥주가 아빠와 싸우고 집 밖으로 나가는 장면에서도 정운 배우한테 “감정이 그만큼 올라오지 않으면 굳이 다음 동선을 소화하지 않아도 돼”라고 했다. 정말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때 나가는 게 맞으니까. 내 상상력에는 한계가 있다 보니, 최대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중요하다고 여겼다.
최정운_ 연기하면서 ‘이게 맞나?’ 싶은 순간은 늘 있었다. 테이크를 여러 번 가면서 점점 미궁 속에 빠져드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도 나로서는 앞선 테이크와 차이를 구별하기 어렵기도 했다. 결국 괜찮다는 감독님의 말을 믿고 갔던 거다.
윤단비_ 촬영 감독도 “다른 건 몰라도 네가 정말 만족했을 때만 오케이 한다는 걸 믿었다"고 하더라. 실제 배우들은 촬영 중에 자신의 연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 않나. 그때 배우가 믿을 수 있는 감독이 되고 싶고, 그게 연출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감독으로서도 계속 시도하며 배워가는 현장이었겠다.
윤단비_ 현장이 종종 어두운 동굴처럼 느껴졌다. 핸드폰 불빛처럼 아주 조그마한 빛에 의지해서 한 걸음씩 떼고 있는데, 뒤를 돌아보면 여러 사람이 따라오며 함께 걸어주는 거다. 어떻게든 길을 찾아서 무사히 나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배우들에게 정말 고맙다. 나는 신인이고 장편은 처음 아닌가. 왜 이렇게 찍는지 이유를 따져 물을 수도 있었을 텐데, 어느 한 분도 그러지 않고 온전히 내 선택을 믿어주었다. 지금에 와서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었을 때 관객들도 좋아해준다는 믿음이 생겼다. 영화를 준비하며 “2-30대 관객에게 선택 받기 위해서는 어떤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네 작품에는 그게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 시나리오가 밋밋하다는 평가도 있었고.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포기하지는 않았고, 덕분에 이렇게도 나아갈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촬영을 앞두고 각자 가장 걱정했던 장면은 뭐였나.
윤단비_ 할아버지 생일파티.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영화 속 인물들끼리는 화기애애한데 관객은 뻘쭘한 순간 말이다. 자칫 잘못하면 이상해지겠다 싶었는데, 현장에서 승준이가 연기를 잘해줬고 준비해온 춤까지 안성맞춤이었다. 정운이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야 해서 웃음을 참느라 힘들어했지. (웃음) 줄곧 긴장하다가 그 장면을 찍고 난 다음부터는 마음이 편안해지더라.
최정운_ 나는 자전거 타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나름 자전거를 잘 탄다고 자부했는데 내리막길을 달리면서 연기하기가 쉽지 않더라. 속도도 조절해야 하고 카메라와의 거리도 계산해야 하니까.
윤단비_ 테크닉이 필요한 장면이었지.
최정운_ 여러 가지를 체크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발로는 페달을 세차게 굴리면서 손은 브레이크를 잡고, 그 와중에 표정이나 감정도 신경 써야 했다. 그때 문득 ‘옥주는 이런 생각 안 할 텐데' 싶더라. (웃음)
영화에는 먹는 장면도 여러 번 나온다. 가족이 이루는 일상적인 풍경이고, 국수나 과일을 먹을 때는 계절감이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콩국수와 비빔국수까지는 여름 음식이라서 넣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옥주와 동주가 라면을 끓여 먹는 장면에서 확신했다. 아, 감독님이 면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웃음)
윤단비_ 늦은 시간인 데다 할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하시니까 아무래도 집에서 먹는 첫 끼니는 배달 음식이겠더라. 근처에 아빠의 추억이 어린 단골 식당이 있고, 그곳에 연락해서 콩국수를 배달시켜 먹는 상황이라고 설정했다. 비빔국수는 먹으면 기분 좋아지는 여름 별미 같은 느낌이라서 넣었고, 라면은 아무래도 아이들이 해먹을 수 있는 게 한정적이니까. 어쩌다 보니 면 요리가 자주 등장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웃음)
최정운_ 그때 먹은 콩국수가 정말 맛있었다. 영화를 찍고 나서 콩국수가 내 ‘최애’ 여름음식으로 등극했을 정도다. 그전까지는 눈앞에 있어도 손이 잘 안 갔는데 지금은 먼저 찾아 먹는다. 연기하면서도 즐거웠다. 배도 불렀고. (웃음)
윤단비_ 식사 장면에서는 숟가락을 든 채 대사를 한다거나 먹는 척하지 말고 진짜 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들 쉽지 않았을 텐데 잘해주었다. 이건 비하인드 스토리인데 후반부에 옥주와 동주, 아빠 셋이서 식사하는 장면이 있다. 극 흐름으로는 굉장히 진지한 분위기였는데 나중에 편집할 때 보니 승준이가 밥을 너무 맛있게 먹는 거다. (웃음) 어쩌면 진짜 그럴 수도 있겠다 싶더라. 세 사람이 꼭 같은 걸 보고 느끼지는 않을 테니까.
영화에서 또 하나 중요한 건 공간이다. 오래된 이층 양옥집을 구석구석 담아냈는데,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을 한데 머물게 할 만큼 넉넉한 정서가 돋보인다. 이 외에 등장하는 여러 공간 또한 인물과 자연스레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윤단비_ 영화를 찍다 보면 공간을 가상으로 만들어서 붙이기도 하는데, 나는 실재하는 공간을 보여주고 싶었다. 옥주가 갈 법한 집 근처의 공원을 헌팅했고, 아빠와 고모가 맥주를 마시는 슈퍼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그 자리에 평상이 없었는데 두 사람 뒤로 집이 동시에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에 평상을 옮겼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 오즈 야스지로 영화 같다는 얘기를 많이 해주시는데, 공간을 놓고 보면 오히려 나루세 미키오와 비슷하지 않나 싶다. 오즈 야스지로가 집의 정확한 구조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연상하게 만든다면, 나루세 미키오는 집의 내부부터 외관까지 자세히 비추니까.
그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자리나 소품을 말해 본다면.
최정운_ 집 자체가 실제 외할머니 댁과 비슷한 느낌이어서 보자마자 좋았다. 특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사이에 설치된 덧문이 너무 신기했다. 1층에서 다른 배우들이 촬영할 때 나머지 사람들은 그 계단에 앉아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며 구경하기도 했다.
윤단비_ 참 이상한 일이다. 다들 본인의 할머니 댁이 떠오른다고 하는데, 막상 헌팅 할 때는 이런 집을 찾기가 너무 힘들었다. (웃음) 나는 2층 테라스를 좋아했다. 그곳에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는 작은 틈이 있는데, 거기에 서면 옆집 강아지가 보였다. 그렇게 잠깐 쉬고 내려와서 다시 촬영했지. 집안 곳곳에 있는 달마도에서도 좋은 기운을 얻었다. 실제 주인 분들이 집에 큰 애정을 갖고 계신다. 이질적이라고 할 만큼 말도 안 되는 물건도 많았다. 심지어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도르래도 있어서 거기에 촬영 장비를 실어 옮기라고 하시더라. 무서워서 그렇게는 못했지만. (웃음) 얼마나 이 집을 정성스레 가꿔왔는지 보여주는 물건들이 많아서 영화에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고 했다.
햇빛을 활용하는 감각도 인상적이다. 빛이 들어오는 각도라든지 양, 시간대처럼 촬영장에서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결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많았겠다.
윤단비_ 최대한 시나리오 순서대로 찍었는데 해가 드는 시간에 맞춰 약간씩 수정하기도 했다. 1층과 2층, 할아버지 방과 거실을 오가며 빛을 따라 다녔다. 특히 아빠가 동주를 깨우는 장면이나 옥주가 노을 질 무렵 자전거를 타는 장면은 재차 고심하며 촬영했다. 장면이 주는 분위기 자체가 오래 기억에 남기를 바랐거든.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장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배우들이 합을 맞추고 카메라를 세팅하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넘기도 했다. 우리 팀은 상황을 아니까 그러려니 하는데, 하루씩 촬영을 도와주러 온 친구들은 고개를 내젓더라. 자기는 마음 급해서 이렇게는 못한다며 왜 필름으로 찍듯이 촬영하느냐고 묻는 거다. 한 컷을 찍고 나면 바로 다음 컷을 찍는 게 보통이니까. 사실 그런 방식을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다. 김기현 촬영감독이나 나나 촬영에 확신이 생긴 다음에 세팅하는 스타일이고, 특히 촬영감독이 공간에 대한 고민을 깊이 해준 덕분에 가능했던 방식이다.
처음에는 옥주 시점으로 전개되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영화 속 등장인물이 아닌 제3의 관찰자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촬영의 영향이 크지 않나 싶다. 시점 쇼트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카메라는 대부분 인물로부터 멀찍이 위치해 있다.
윤단비_ 배우의 동선을 자유롭게 풀어두는 동시에 집의 연결성에 초점을 맞췄다. 각 공간이 분리되지 않고 전체적으로 눈에 들어왔으면 했다. 어느 날 촬영감독이 추가 촬영을 해야 할 거 같다고 연락을 준 적이 있다. 뭔가 큰 걸 놓쳤나 싶어서 놀랐는데, 알고 보니 동주가 텃밭에 고추를 따러 나가는 신에서 거실부터 텃밭까지 이어지도록 찍지 못한 게 아쉽다는 얘기였다. 그런 세심한 고민이 녹아 든 덕분에 집이 또 하나의 주인공처럼 영화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거실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노래를 듣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 옥주는 2층 계단에 앉아 생각에 잠기는데, 방금 말한 집의 연결성이 두드러진다. 그 장면을 포함해서 영화 곳곳에 신중현의 <미련>이라는 곡을 사용했다.
윤단비_ 현장에서는 김추자의 <커피 한 잔>을 틀어놓고 촬영했다. 그때까지도 곡을 못 정했고 막연히 김추자 노래였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는데, 후반 작업하면서 촬영감독이 <미련>을 추천해주더라. 멜로디도 좋았고 가사도 영화와 잘 어울릴 듯했다. 특히 할아버지와 옥주의 관계를 떠올릴 때, 둘 사이에 잘 스며드는 노래였다. 다만 <미련>이란 곡은 여러 가수가 불렀는데, 할아버지는 김추자보다는 장현이 부르는 버전을 들을 것 같더라. 사실 음악을 삽입할 때 가장 어려웠던 구간은 오프닝이다. 어떻게 보면 극의 흐름보다 음악이 선행해서 등장하는 느낌이라 고민했는데, 결국 이건 그리움에 관한 영화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대신 외부 삽입곡이 아니라 라디오에서 들리는 노래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조율했다.
최정운 배우에게는 생소한 노래일 텐데 들으면서 어땠나.
최정운_ 완전히 처음 듣는 노래였지만 묘하게 익숙했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느낌이랄까. 사실 아빠가 이 노래를 너무 좋아해서 영화를 본 후에 자주 찾아 들으신다. 그때마다 “이 노래는 친구에 대한 노래인데~”로 시작하는 긴 설명을 덧붙이시지. (웃음)
가족들은 언제 영화를 봤나.
최정운_ 작년 서울독립영화제 상영 때 부모님과 함께 봤다. 두 분 모두 되게 좋아하셨는데 반응이 극과 극이었다. 아빠는 계속 웃고 엄마는 계속 울고. (웃음) 오빠는 아직 안 봤다. 말로는 개봉하면 본다고 하는데 모르지.
밖에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동생을 자랑할지도 모른다.
최정운_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웃음) 어릴 적엔 옥주와 동주처럼 많이 싸우고 또 그만큼 친했는데,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멀어졌다. 그러다가 오빠가 대학생이 된 후로 다시 조금씩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영화에는 손때 묻은 공간과 옛날 음악처럼 그리움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다. 옥주라는 퍽 촌스러운 이름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윤단비_ 실제로 학교 후배 중에 옥주라는 친구가 있다. 내겐 촌스럽기보다는 무척 귀하게 느껴지는 이름이다. 부모님이 얼마나 고민했을지 그려지거든. 유행에 따르는 이름도 아니고 주변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이름도 아니지 않나. 우리 아버지도 내 이름을 지을 때 옥편에서 한자를 손수 찾았단다. 빛날 단에 사슴 비를 쓰는데, 이게 본래 이름에 넣는 한자가 아니거든. 동사무소에서 이름을 잘못 등록하는 바람에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윤단비가 아니라 윤단옥이었다고 하더라. (웃음) 옥주라는 이름에도 그렇게 아이를 소중히 아끼고 뭐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 담겼다고 여겼다.
윤단비 감독은 영화과에 진학하기 전에 글을 쓰고 싶었다고. <남매의 여름밤>에는 대사 없이 정서와 공간만으로 화면을 채우는 순간도 많아서 시나리오가 궁금해지더라. 예컨대 옥주와 동주가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에 가는 장면에서는 서로 아무 말이 없는데도 많은 감정이 오고 간다.
윤단비_ 시나리오는 건조하게 쓰는 편이고 지문도 세세하지 않다. 택시 신도 ‘옥주와 동주가 택시를 타고 간다’는 문장이 전부였다. 나도 참 좋아하는 장면인데 일부러 여유를 두고 길게 촬영했다. 나른하게 이어지는 시간 동안 어떤 순간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옥주가 동주에게 어깨를 내어주는 장면은 내가 연출한 게 아니라 배우들이 만들어낸 거다. 그때 승준이가 실제로 잠들었는데, 졸면서 고개가 왔다 갔다 하니까 정운이가 머리를 당겨 제 어깨에 놓더라. 두 사람이 천천히 친해졌기에 가능했던 장면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현장에서 모니터로 지켜보면서야 ‘동주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으니 당연히 피곤하겠구나’ 하고 깨달았다. 옥주도 그걸 아니까 동주를 챙기는 거고.
최정운_ 당시에 연기로서 어떤 동작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옥주 입장에서는 동생한테 뭔가 해주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나도 차를 타고 가다가 엄마에게 스르르 기대어 자곤 하거든. 현장에서는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윤단비_ 승준이는 촬영 진짜 끝난 거냐고 묻더라.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다 끝났다면서. (웃음)
옥주 곁에 동주가 있어 다행이다 싶은 순간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매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서로를 보살핀다. 크고 작은 다툼을 반복하면서도 멀어지지 않는 사이라는 점에서 어떤 관계보다도 끈끈하다는 느낌을 준다. 한편으로는 같은 부모를 둔 자식이라도 다른 기억을 갖고 산다는 생각도 들고.
윤단비_ 옥주가 혼자 성장하지는 않기를 바랐다. 오랜만에 만난 아빠와 고모는 옥주와 동주만큼 살갑지는 않지만, 여전히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관계다. 남매에게는 지금이라서 가능한 친밀감이 있을 거고, 이 시기가 지난 후에도 서로 끈이 되어주는 기억이 남았으면 했다.
현장에서 박승준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
최정운_ 나이로만 따지면 차이가 많이 나는데, 촬영장에서는 크게 인지하지 못했다. 몇 살이 아니라 몇 달 정도 차이 나는 느낌? (웃음) 내가 누나로서 챙겨준다기보다는 친구처럼 지냈다. 승준이가 휴대폰 게임할 때 옆에서 힐끔 쳐다보면 게임을 알려주기도 하고.
영화의 시작과 끝에 옥주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인다. 이 성장은 목표를 달성하거나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중요한 건 슬픔을 슬피 여기고 받아들이는 과정인 거 같다. 두 사람은 영화를 만들기 전과 후를 놓고 보면 무엇이 가장 달라졌다고 느끼는지 궁금하다.
윤단비_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특히 정운이와는 장애물을 하나씩 넘으며 같이 성장하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싶은 순간에도 함께했고, 지나고 나니 같이 자랐더라.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걱정이 많았다. 사람들에게 자전적 이야기라고 받아들여지면 치부를 들키는 느낌이어서 단편 작업할 때는 이렇게까지 솔직하지 못했거든. 물론 영화에 내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지만, 이번 작품을 통해 어떤 분기점을 지났다는 느낌은 확실히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터놓을 수 있게 되더라.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내게는 이번 작업이 애도의 과정이기도 했다. 미뤄두었던 감정을 마주하고 나름대로 갈무리하는 시간이었다.
최정운_ 나에게도 성장이라는 의미가 크다. <남매의 여름밤>을 찍기 전까지는 연기 경험도 적었지만, 현장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였던 적이 거의 없었다. 대본에 나온 대로, 감독님이 설명해주시는 대로 연기하는 데 익숙했던 거다. 그렇게 정해진 방식을 따라온 만큼 새로운 현장에 적응하기가 어렵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쳐 완성된 영화를 봤을 때, 나 역시 일부라는 느낌을 받았다. 단순히 출연한 작품이 아니라, 우리가 같이 만든 영화인 거다. 내가 생각하고 느낀 바를 영화에 반영했기에 자연스레 인물에게도 깊은 애정을 느낀다. 다른 인물을 연기할 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개봉하고 나면 시간이 금세 흐를 텐데,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윤단비_ 최대한 빠르게 다음 작품을 만들고 싶다. 어쨌든 찍으면서 근육이 붙으니 영화가 망한다고 하더라도 계속해볼 생각이다. 최근에는 개봉 준비로 손을 놓은 상태이긴 한데, <블루 혹은 블루>라는 일본 소설을 각색하는 중이다. 도플갱어인 두 여성의 연대를 그리는 작품이다. 이외에도 여러 제안이 있어서 차기작에 관해서는 좀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다만 비슷한 결로 동어 반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걸 시도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아마 지금까지 거쳤던 시행착오를 또 다시 겪겠지. (웃음)
최정운_ <남매의 여름밤> 이후로 오디션을 거의 보지 않았다. 작년에 입시를 치르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두려움도 있었다. <남매의 여름밤>에 실제 내가 연기했던 것보다 훨씬 잘한 것처럼 나왔다고 느꼈거든. ‘이렇게 좋은 영화를 보고 날 캐스팅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어떡하지?’ 싶어서 차일피일 미뤘다. 근데 지금은 연기가 너무 너무 하고 싶다. 하반기부터는 적극적으로 오디션을 볼 계획이다.
윤단비_ 혹시 맡고 싶은 배역 같은 게 있나?
최정운_ 어떤 배역보다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에 사는 인물이 되어보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엄마 아빠가 연애하던 시절이 궁금하다. 그때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재밌거든.
윤단비_ 영화를 통해 BC 코로나 시대로 가보는 거지.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