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자주 두통을 앓았고 두통은 모든 소리에서 왔지.” <ㅅㄹ, ㅅㅇ, ㅅㄹ>는 오래된 홈비디오와 일상의 공간을 오가며 현재의 ‘나’에게 괴로움을 안겨주는 소리의 정체를 추적하는 여정이다. 홈비디오 푸티지 속 아이는 수많은 소리 속에 쌓여있으며, 그 자신도 특정한 소리를 낼 것을 요청받는다. 화면 밖 아버지의 목소리는 자꾸만 아이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고, 화면 속 아이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부모의 말을 따른다. 그렇게 그저 추억담인 줄로만 알았던 화면에는 차츰 균열이 가며, 일상의 평범한 소리는 점차 소음이 되어 관객의 귀에 도달한다. 감독이 확인하고자 했던 소리-소음의 정체가 잊힌 기억 속 집의 풍경과 맞닿아있음은 분명해 보이지만, 영화는 각각의 장면을 새롭게 구성하고 스스로 목소리를 내보는 과정을 통해 소리와 소음의 탐구라고 할 영역까지 나아가본다. 여기서 이미지와 사운드는 서로 겹쳐지고 충돌하며 일상의 공간을 긴장으로 물들이고, 삶의 단면을 여러 겹으로 뜯어볼 수 있게 해준다. 강예은 감독은 단편 <치치>(2017)에서도 자막과 이미지의 병치와 충돌을 통해 텍스트의 지위에 관해 탐구했다. 인디다큐페스티발 봄 프로젝트 지원작으로, 이번 인디포럼 신작전에서 상영된다.
앞서 열린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관객상을 받았다. 영화를 통해 관객을 만나는 것이 여러모로 어려운 시기에 뜻깊은 수상이다.
인디다큐페스티발은 올해 오프라인으로 열린 첫 영화제였고, 관객들로 북적이던 이전과는 분위기도 전혀 달랐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제를 준비하고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수고가 눈에 많이 띄더라. 한편으로 <ㅅㄹ, ㅅㅇ, ㅅㄹ>의 화법이 많은 관객에게 다가가기에는 무리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영화 만들 때,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듣기도 했으니까. (웃음)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과 직관을 따르자는 마음이 끝까지 지루하게 다퉜다. 오랜 편집 과정을 거쳤고, 결국에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되 너무 많은 사람의 이해는 바라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수상이 굉장히 뜻밖이었다.
요즘엔 어떻게 지내고 있나.
작년에 일과 작업을 병행하면서 번아웃이 왔다. 작업을 위해 돈을 비축하자는 마음에, 들어오는 일을 다 하고 있었거든. 논리적인 사고가 안 될 정도로 머리가 멍해지더라. 지금은 괜찮다. 나에게 영화 작업은 내가 직면한 괴로움이 터져 나오는 과정인데, 관객을 만나면서 비로소 그 문제가 제대로 보이는 경험을 이번에 새롭게 했다. 그런 면에서 관객의 존재가 특별하게 다가왔고, 내 상태도 굉장히 좋아졌다.
모음 없이 자음으로만 제목을 구성했다. 어떻게 읽히도록 하고 싶었나.
이 영화는 “왜 소리가 소음이 되었을까?”라는 큰 질문으로 시작했고,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나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 역시 자음으로만 이루어진 제목을 읽으며 직접 발화해보길 원했다. 친구들은 제목을 이렇게 지으면 검색이 잘 안 되니 힘들 거라고 하더라. 그래도 끝까지 고수했다. 내가 고집이 좀 있는 것 같다. (웃음)

연출 의도에 ‘어떤 소음의 고고학’이라고 썼다.
소리가 괴롭다는 감정을 어떤 형태로든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홈비디오를 발견하게 됐다. 그래서 디지털로 변환해봤고.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지금의 괴로움과 연관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내가 당시에 괴로워하던 문제가 비디오의 내용과 굉장히 밀접하게 닿아있다는 걸 눈과 귀로 확인하게 된 거다. 그 안에 지층처럼 켜켜이 쌓여있는 흔적을 파내고 발굴하면서 드러내다 보면 과연 어디에 다다를지 궁금하더라.
과거의 홈비디오 영상을 가지고 작업하는 다큐멘터리를 근래 자주 보게 된다. 홈비디오 푸티지에서는 대개 향수 어린 정서가 느껴지는데, 이 영화의 정서는 그와 전혀 다르다. 영화에 어떻게 담고 싶었나.
처음엔 그냥 재밌게 봤다. 그러다 후반부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빨간 색 옷의 푸티지를 보면서 이걸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됐다. 훈육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은데, 어쨌든 그런 식의 가정 분위기가 담긴 1시간이 넘는 영상이다. 그게 영화의 축이 되어야 한다고, 그걸 딛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영상 속에 있는 건 분명히 나이지만 그건 내 기억 속에는 없는 나다. 그렇다고 지금의 나와 완전히 단절된 나도 아니다. 내가 그 괴로움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태니까 그런 부분들을 잘 연결 짓고 싶더라. 그 외의 다른 푸티지 같은 경우는 서사적 흐름보다도 화면 사이의 조형적 연결을 고민하면서 배치하려고 했다.
푸티지 화면 자체에 가해지는 변형들도 눈에 띈다. 되감기를 하거나 화면을 분할하고 정지시키는 장면들이 있다.
오래 편집을 하고 이걸 소스로만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들었던 생각인데, 아이가 감옥처럼 프레임에 갇혀있다고 느껴지더라. 아이에게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는 늘 화면 바깥에서 아이를 제압한다. 또 아이는 프레임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다. 멀리 뛰어가도 그 모습을 카메라가 잡아내니까. 놀이공원의 줄 서는 공간에 아이가 뛰어 들어가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탈출시키려고 화면을 되감아봤다. 분할 같은 경우에는, 그 바로 직전에 들리는 말이 “네 마음대로 하세요.”이다. 하지만 아이는 절대 마음대로 못 하거든. (웃음) 그래서 “정말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엄마 아빠가 찍어놓은 거 다 뒤틀고 헤집어 놓을 거야”라는 마음으로 화면을 분할해본 거다. 프리즈 프레임도 비슷한 맥락이다. 아까 말해주었듯 내게 이건 따뜻한 홈비디오가 아니라 공포였다. 불편하고 긴장되는 느낌을 전달하고자 했다.


영화의 장면들이 불편하고 무섭게 느껴지는 데에는 사운드의 배치와 중첩도 큰 역할을 한다. 홈비디오 안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공간으로 나오면서, 그 위에 여러 가지 소리를 쏟아내는 방식으로 영화를 구성했다.
2015년, 2016년 이후에 녹음한 소리, 새 촬영을 하면서 녹음한 소리로 사운드를 구성했다. 새로운 촬영본은 내가 살았던 공간들을 찍은 것이고, 홈비디오 푸티지가 시간 순서대로인 것과 달리 역순으로 배치했다. 현재 내가 사는 집안에서부터 바깥으로 나가 거꾸로 방문해본 거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들리지 않을 법한 소리를 하나씩 쌓아나갔다. 처음에는 사운드가 한 트랙만 있다가 점점 늘어나고 마지막에 카메라가 유영하기 직전에는 열두 트랙 정도의 소리가 쌓인다. 일상의 평화로워 보이는 공간이 긴장과 공포와 괴로움의 공간이 되는 과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푸티지, 새 촬영본, 새 촬영본에 등장하는 아이, 사운드 등 여러 가지가 서로 중첩되면서 소음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한 지점을 향해 달려가도록 구성했다.
새 촬영본에 빨간 옷을 입은 아이가 등장한다. 후반부에서는 골목을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 카메라와 눈을 맞춘다.
마지막의 그 장면은 처음부터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장면이다. 이 무빙 이미지들이 내가 연출해서 만들어낸 장면이라는 걸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또 그때까지는 고정되어 있던 카메라가 거기서는 적극적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지 않나. 아이는 아이대로 카메라는 카메라대로 가다가, 배우에게 마지막에만 카메라를 바라봐달라고 얘기했다. 문제의 실체를 이제 알아냈다는 것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매우 많은 요소들을 뜯어보고 분해하고 겹치고 충돌시키면서 그 지점에 다다른다. 어떤 느낌이었나.
후련함이 있었다. 사실 처음에 영화를 구성할 때는 괴로움에 따르는 분노나 억울함 같은 감정이 지금보다 더 컸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다큐멘터리에는 제작 과정의 변화가 다 담긴다. 영화를 편집할 당시에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고, 아버지와의 관계도 내 감정도 계속해서 변화했다. 괜찮아졌다가 힘들어지기를 반복했던 거지. 그런데 편집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서 이제는 조금 편안할 수 있을 것 같은 시기가 왔다. 그러면서 영화 마지막 부분을 그렇게 구성하지 않았나 싶다.
소리에서 소음을 거쳐 다시 ‘소리’로 갔다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다기보다는 결국 결론을 내지 않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소음이 소리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 자체는 소리와 소음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말이다. 그런데 소리가 소음도 됐다가 그 소음이 다시 소리가 되기도 하는 것이 이 영화의 제작 과정인 동시에 아버지와 나의 관계의 속성이기도 하다. 마지막을 불꽃놀이로 마무리했는데, 그건 폭죽이면서 폭탄이다. 하나로 결론지을 수 없는 모순적인 감정을 담아내고 싶었다.


마지막엔 줄곧 자막으로만 존재하던 화자가 직접 내레이션을 한다.
초반의 자막에서는 ‘아이’의 이야기였던 것이 점점 ‘예은’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가 되어간다. 그리고 소음의 정체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그것에 대해 내가 목소리를 내 볼 수 있게 되는 거다. 이 영화에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다 프레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여기서는 내가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나아가서 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거였다. 후반부에 목소리와 자막이 같이 나올 땐 자막을 목소리의 지시체로 등장시키기보다는 각자의 역할을 할 수 있게끔 독립된 트랙으로 두고 싶었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한다고.
고등학생 때 독문학과 시를 좋아해서 독문학과에 진학하려고 했다. 그걸 핑계로 고3 때는 놀면서 영화를 많이 봤다. (웃음) 그런데 독문학과 입시에 실패하고 논술로 사회과학대학에 갔다. 거기서 들었던 수업이 공교롭게도 ‘독일영화감상’이었다. 원래 글 쓰는 걸 좋아했는데 그 수업을 들으면서 영화를 보고 글 쓰는 게 즐겁다는 걸 알게 됐다. 사회에 떠밀려 나올 시점에는 영화와 관련된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몰입력이 높은 전통적인 극영화나 시나리오를 쓰는 일에는 흥미가 생기지 않더라. 이론 공부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윤영 교수님이 엮은 『사유 속의 영화』라는 책을 읽었는데, 서문을 읽고 너무 감명받았다. (웃음) 이런 선생님이 계신 곳에서 공부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메일을 보냈더니, 여긴 창작자를 뽑는 학교라고 하시더라.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이 창작과 닿아있다는 생각에 입학하게 됐다.
다음에 계획하고 있는 작업은 무엇인가.
2015년부터 생각해오던 작업이 있다. 이걸 반드시 마무리 지어야 앞으로 나갈 수 있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제목에 ‘새’가 들어가는, 새가 등장하지 않는 영화다. 극영화로 시작됐지만 아마 전혀 다른 형태로 완성될 예감이 든다. 졸업논문으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작업을 공부하려고 하는데, 아마 이것이 논문과 같이 갈 것 같다. 고루할 수 있지만 애도에 대한 영화이고, 내가 잘 모르고 이해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아직은 관객을 더 많이 만나는 것에 대한 기대가 있을 텐데, 인디포럼에서 상영을 앞둔 소감은?
대학원에서 처음 만들었던 <치치>를 인디포럼에서 상영했기 때문에 남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런 동시에 <ㅅㄹ, ㅅㅇ, ㅅㄹ> 제작지원을 냈었고 면접까지 봤는데 떨어진 기억도 있다. (웃음) 지금은 제작지원 떨어지는 게 별일이 아니지만 그때는 정말 큰 일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상영하게 되다니, 너무 재밌다. 작년에는 열리지 않았던 인디포럼이 여러 가지 논의를 마치고 이번에 다시 열리는데, 더 잘됐으면 좋겠고, 많이 응원하는 마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