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테리, 미스터리
<프랑스여자> 류아벨
글 차한비 사진 소동성 / Interview / 2020-06-22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사는 관객 앞에서 비밀을 연기하기란 쉽지 않다. 어떤 인물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고스란히 속내를 들키고, 어떤 비밀은 끝내 아무런 궁금증을 자아내지 못한 채 사라진다. 반전과 충격이 난무하는 요즘이니 어지간한 자극이야 구태의연해지고 마는 것이다. 눈 밝고 촉 좋은 관객들은 일찌감치 류아벨을 주목했다. <연애담>(2016)에서는 본심을 헤아릴 수 없어 더 애틋한 연인이었고, <샘>(2018)에서는 진짜 얼굴을 알 길이 없는 알쏭달쏭한 여인이었다. 김희정 감독의 신작 <프랑스여자>(2020)에서는 1인 2역(해란/현아)을 맡아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고 기억과 현실을 잇는다. “나만 나오면 스릴러가 된다더라.” 영화를 보고 나온 지인들이 류아벨에게 농담처럼 던졌다는 말을 흘려듣기 어렵다. 류아벨이 입을 다문 채 고요히 정면을 응시할 때면 스크린 위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입술 사이로 어떤 비밀이 새어 나올지 기다려지고, 그의 시선이 가닿는 끝까지 동행하고 싶어진다. 영화를 개봉하고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에 만남을 청했다. 오후에 시작한 대화는 저녁이 되어서야 일단락을 지었다. 많은 걸 물었고 때마다 솔직한 답변이 돌아왔지만, 여전히 류아벨이 말해주지 않고 혼자 간직하기로 한 무엇이 남았다고 느껴진다.

 

 

이렇게 짧게 머리카락을 자른 건 처음 본다. 혹시 준비하는 작품 때문인가.

그냥 잘랐다. 원래 손질하고 관리하는 걸 귀찮아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단발이 훨씬 마음에 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긴 헤어스타일로 이미지가 굳어졌는데, 개성이 부족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 이 스타일로 연기해본 적은 없어서 다음 작품에서 어떨지 기대된다.

 

작년에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tvN)부터 <평일 오후 세 시의 연인>(채널A), <멜로가 체질>(JTBC)까지 드라마에 연이어 출연했다. 한창 바빴을 텐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

드라마를 끝내고 이환 감독의 신작 <어른들은 몰라요(가제)>에 잠깐 출연했다. 10월쯤 모든 일정을 마쳤는데 갑자기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도 안 만나다가 <프랑스여자> 덕분에 밖에 나온다. 지금은 하반기에 촬영할 드라마를 준비하는 중이다.

 

뭐하면서 쉬었나.

넷플릭스와 유튜브. 밖에 사람 없을 시간에만 살짝 나가서 산책하고. (웃음)

<프랑스여자>
<프랑스여자>
<프랑스여자>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그러게. “혼자 있어야 할 때야!” 하면서 일부러 마음먹고 계획한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어버렸다. 사실 작년에 되게 힘들었거든. 그래선지 나를 좀 내버려 두고 싶더라.

 

뭐가 힘들었나.

여러 요인이 얽혔겠지만 한마디로 내가 나 같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나로 살고 있는데 왜 내가 아닌 거 같지? 그동안 어떻게 살았지? 이런 질문을 반복했다. 나를 둘러싼 전부가 나 같지 않은, 무척 생경한 느낌이었다. 여태 어떻게 연기했는지부터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유지해왔는지까지 전부 의문이었다. 결국 시간에 맡기고 ‘살다 보면 이럴 때도 있구나’ 하며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슬럼프라면 슬럼프인데, 그건 늘 오는 거니까. 다만 이번에는 좀 크게 왔다.

 

지금 마음은 어떤가. 코로나19로 극장가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개봉 일주일 만에 1만 관객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2년 만에 스크린으로 관객을 만나는 작품이라 뜻깊을 거 같다.

사실 많이 보러 와달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나 역시 코로나 이후에 극장 가기가 힘들었으니까. 반으로 줄어든 객석에서 영화를 보고 마스크를 쓴 채 대화를 나누는 풍경이 기이하기도 하다. 극장까지 찾아와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라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 다만 영화가 개봉하기까지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거쳤기에 배우로서는 아쉬운 마음이 크다. 다행히 작품 내용이나 분위기가 팬데믹 현상과 어울려서 더 인상 깊게 관람했다고 말씀해주시는 관객도 있더라.

ⓒ소동성

<프랑스여자>는 전형적인 기승전결 구조로 사건을 전개하는 대신 시공간의 여러 경계를 허물며 진행되는 영화다. 보는 이에 따라서 난해하다고 평할 법도 하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는 어땠나.

보통 시나리오를 처음 읽을 때와 두 번 이상 읽을 때 느낌이 다르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제안받은 캐릭터를 중심으로 읽고, 두 번째부터는 관객이 된 입장에서 전반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프랑스여자>는 굉장히 이미지적인 시나리오였다. 평소에도 글을 읽으면서 이미지를 떠올리곤 하는데, 이 작품은 유독 그랬다. 영화 역시 회화나 사진처럼 정지된 이미지를 보는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그걸 구현해낼 수 있을지, 글을 읽으며 느낀 바를 관객에게도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감독님을 만나서 물어봤다. 왜 나한테 이 역할을 주셨냐고. 그랬더니 감독님이 자기 눈에 해란이랑 현아는 딱 나라는 거다. 대체 어느 부분이 그러냐고 물어봤지. 사실 감독님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거든. (웃음) 그때 감독님이 “재능 있고 자신만만한 젊은 여자 배우”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근데 난 스스로 재능 있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나 잘난 맛에 사는 사람도 아니거든. 차라리 그런 것 좀 느끼면서 살아봤으면 싶은 사람에 가깝지. 그날 감독님한테 솔직히 말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감독님이 원하는 느낌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웃음)

 

배우를 설득하려는 작전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감독님 얘기를 듣다 보니 점점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더라. 타인이 볼 때 내게 그런 면이 있구나 싶어서. 현아는 선배들 앞에서 술에 취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아주 시니컬하게 반응하는 순간도 있지 않나. 실제 나와는 다르지만 내 안에 그런 느낌이 있다면 연기해보고 싶었다.

 

근데 재능을 확신한 적이 정말 없나.

단 한 번도.

ⓒ소동성

재능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초조한가?

지금은 아닌데 어릴 때는 그랬다. 사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연기 전공으로 입학했을 때만 해도, 연기에 천재성 같은 건 없다고 여겼다. 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했지. 근데 똑같은 조건으로 학교에 들어와서 똑같은 환경에서 연기하는 친구들을 보며 타고나는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말로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보는 순간 느껴진다. ‘대체 뭐지?’ 싶은 번뜩이는 거. 내가 밤새 연습한 연기와 그 친구가 세 시간 연습한 결과가 비슷할 때, 심지어 그 친구가 더 잘할 때 당연히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 ‘아, 여기도 재능이 있어야 하는 곳이군. 큰일 났네!’ 했던 거 같다. (웃음) 게다가 재능 있는 친구들도 모두 열심이었거든. 타고난 사람도 저렇게 열심히 하면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은 절대 못 따라가겠구나 싶었다. 졸업하고 현장에 나갔을 때, 결국 또래 배우로서 다시 같은 출발선에 설 게 빤하니까. ‘지금도 갑절을 노력해서 겨우 채우는 상황인데, 현장에서는 그만큼 시간을 주지 않겠지? 그럼 아무도 날 안 쓰지 않을까?’ 하면서 불안했던 거 같다. 이제는 내가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뭐든지 한 번에 잘할 수는 없는 거다.

 

재능이 있다고 해서 매번 잘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타율이 높지! (웃음) 열 번 연기하면 누구나 열 번 다 힘들다. 그 안에서 누구는 팔 할 정도로 타율이 나오는데 나는 반타작일 수 있는 거다. 열심히 하는 건 다들 똑같으니까.

 

너무 겸손한 건 아닐까. 사실 그동안 연기력으로 비판받은 적이 없다. 재학 시절 단편영화를 찍을 때부터 줄곧 잘해왔다는 느낌이다.

과연 그럴까. 그렇게 봐준다면 정말 고맙겠다.

ⓒ소동성

<프랑스여자>를 촬영했던 2018년에 류선영에서 류아벨로 개명하고 소속사를 현재 회사로 옮기는 등 여러 변화가 맞물렸다. 당시 배우로서 어떤 고민과 욕구를 안고 선택한 작품이었는지 궁금하다.

캐스팅 미팅할 때는 다른 회사에 있었고, 촬영할 때는 아무 곳에도 소속된 상태가 아니었다. 주변에서 많이 걱정했는데, 혼자 현장에 나가고 준비하는 게 내겐 익숙한 일이라 유별나게 힘들지는 않았다. 배우로서 갈증이야 항상 느끼기 때문에 특별한 욕구에 의해 선택한 작품은 아니다. 어쩌면 내가 배우라는 것, 여자라는 것이 너무 기본값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프랑스여자> 이전에는 첫 장편을 만드는 신인 감독과 작업할 기회가 많았다. 네 번째 영화를 만드는, 말하자면 연출 경험이 풍부하게 쌓인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결국 경험보다는 감독 성향에 따라 나뉘는 거 같다. 처음이라고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아니고, 많이 찍어 봤다고 걱정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김희정 감독님의 경우, 상황을 현실적으로 판단하는 면에서 빨랐다. 여태 만났던 감독님 중에서 프리 프로덕션을 가장 꼼꼼히 하시는 분이기도 했다. 감독님을 만나면 늘 커피를 마셨는데, 영화보다는 사는 얘기를 주로 했다. 요즘엔 뭐하며 지내는지, 어떤 것에 재미를 느끼는지 같은 소소한 것들. 감독님도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배우인지 모르고, 나 역시 감독님에 관해 아는 바가 없으니까. 감독님이 나를 궁금해하는 것만큼이나 나도 감독님이 궁금해서 서로 많이 물어봤다. 근데 사실 감독님은 이때 머릿속으로 계속 구상했던 거다. 얘는 호흡이 어떤지, 말하는 리듬은 어떤지 살펴보면서 영화에 배치할 방법을 고민했던 거지. 이미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캐릭터뿐만 아니라 캐릭터 간 관계까지 치밀하게 조성해놓으셨기 때문에, 오히려 촬영장에서는 배우들이 어떤 제약도 없이 맘껏 놀기를 바라셨다. 나로서는 선배님들과 작업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할 만큼 도움도 위안도 많이 얻었다. 실은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 좀 어렵게 다가오거든. 어릴 적에 그리기 과제를 받았을 때도 자유주제라고 하면 더 막막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번에는 캐릭터에 집중해서 선배님들이 끌어주시는 대로 반응하면 되는 입장이었다.

 

여러모로 배우로서 욕심나는 작품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세대가 다른 여성 배우들끼리 호흡을 주고받는 작품이 흔하지 않은 데다, 해란과 현아가 배우라는 설정도 매력적으로 느꼈을 듯하다.

배우라는 설정은 초반에는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캐릭터 서사를 만들어나가면서 점차 공감했다. 친구들과 공연을 준비하고 희곡집이나 연기에 관한 서적을 읽는 건 내 일상이기도 했으니까. 무대 안과 밖에서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는 면도 나와 주변 친구들을 떠올리게 했다. 배우로서 살아오면서 느꼈던 것들이 녹아든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시나리오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여자 선배와 연기할 때 참 좋거든. 귀감이 된다고 해야 할까? 딱딱하게 들리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귀감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린다. (웃음)

ⓒ소동성

<푸른 강은 흘러라>(강미자, 2008)로 데뷔해서 올해로 경력 13년 차인데, <프랑스여자>에서는 가장 ‘신인’이었던 셈이다. 김호정, 김지영, 김영민과 같은 선배이자 개성이 뚜렷한 배우들과 작업하면서 어떤 에너지를 얻었나.

굳이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충분했다. 함께 연기하다 보면 순간 자연스레 느껴지는 뭔가가 있다. 여성이자 배우로서 생각해볼 지점도 분명히 던져주신다. 오랫동안 활동해온 선배를 보면 대단하고 존경스럽다는 마음이 든다. 왠지 모르게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만 같고. 한편으로는 연기하는 상황 자체가 즐겁기도 했다. <프랑스여자>에서 해란은 상상 속 인물인데, 나이는 다르지만 한 공간에 있을 때는 전부 친구란 말이지. 언제 또 이런 관계를 연기해볼 수 있을까 싶었다.

 

2년 전에 죽은 해란과 그런 해란을 닮은 현아를 1인 2역으로 소화했다. 두 인물을 연기하면서 의식적으로 비슷하게 혹은 다르게 표현하려고 했던 부분이 있다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이 굉장히 예민하다. 예민함을 감추려고 애쓰지 않지. 실제 나와는 거리가 있다. 난 예민해 보이고 싶지도 않고,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까 봐 참는 편이거든. 근데 영화 속 인물들은, 그들이 이루는 관계에서는 전부 표현할 수 있는 거다. 굳이 선을 지키거나 속마음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사이라는 점에 집중했다. 가시 돋친 말도 다 받아주는 관계이다 보니, 해란 역시 다른 이들 앞에서는 내색하지 못하는 감정까지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이건 디테일인데, 해란을 연기할 때는 좀 더 부드럽게 움직이려고 했다. 반면 현아는 움직임이나 표정에서 딱딱 끊어지는 느낌을 줬다.

 

<샘>에서는 1인 3역이었으니 이쯤 되면 다역 전문 배우라고 불러야 하지 않나 싶다.

안 되는데. (웃음) 그래도 사람은 누구나 입체적이고 다양한 면을 갖고 있으니까, 내가 그런 인물을 연기해볼 수 있다면 기쁜 일이다.

ⓒ소동성

해란이 등장할 때마다 영화는 조금씩 혼란스러워진다. 시점도 불분명해지고 인물이 서술하는 기억도 진위를 판단하기 어렵다. 그때 배우가 화면에 불러들이는 낯설면서도 어색하지는 않은 느낌이 인상적이었다.

해란은 미라(김호정)의 심연 속에 머무는 인물이기 때문에, 나 역시 영화를 몇 번쯤 보고나서야 비로소 해란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극장에서 크게 본 정면 클로즈업 샷이 문득 생각나곤 한다. 미라가 꿈속에서 본 얼굴이 그런 느낌이려나 싶고. 친구들은 나만 나오면 스릴러가 된다던데? (웃음) 맥락상 미라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신이기에 관객 입장에서는 무서웠을 수도 있을 거 같다. 「하녀들」을 재현한 장면은 굉장히 낯선 느낌을 준 듯하다. 실제 관객과 대화해보니 갑자기 왜 연극이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은근히 있더라. 근데 사실 미라가 거울을 볼 때 「하녀들」 공연 포스터로 카메라 포커스가 이동하거든.

 

영화에서 연극 「하녀들」(장 주네, 1947)과 「배신」(해럴드 핀터, 1978)을 중요하게 다루는데, 배경지식이 없다면 곧바로 흐름을 파악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은 든다. (*해란과 현아는 각각 「배신」의 엠마 역을 놓고 연기와 경험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하고, 해란은 미라의 환상 속에서 하녀 복장으로 등장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맞다. 그런 경우에는 영화를 보고 나서 따로 찾아보지 않는 이상 모르고 넘어갈 수도 있다. 성우(김영민)가 미라에게 책 「빈 공간」(피터 브룩, 1968)을 선물하지 않나. 이 작품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간에 느낌이 다를 거다. 다만 나에게는 너무 익숙한 작품이고, 오히려 시나리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촬영을 준비할 당시, 해럴드 핀터 작품을 한창 좋아했던 시기여서 반갑기도 했다.

 

「하녀들」을 재현할 때 원작에 등장하는 인물 중 누군가를 떠올리기도 했을까?

특정 인물을 떠올리지는 않았고, 어떻게 하면 이 장면이 연극처럼 보일지 고민했다. 감독님도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질감으로 연기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근데 생각보다 너무 어렵더라. 아주 튀지는 않으면서도 튀긴 하는, 미묘한 선을 건드려야 했다. 연기 톤과 리듬에 집중하며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어디서 어미를 끊을지, 몸을 어느 강도로 단단하게 쓸지 같은 부분을 신경 썼다. 앞서 말했듯 선배님들께 많이 의지했다. 현장에서 살갑게 굴거나 일일이 내색하지는 못했지만.

ⓒ소동성

믿을 구석이 있는 것과 없는 건 다르니까.

딱 그거다! ‘내 연기가 정 아니면 아니라고 하시겠지. 모르면 물어봐도 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웃음) 믿을 구석이자 비빌 언덕이었던 셈이지. 사실 프리 프로덕션 때부터 촬영까지 나는 주로 감독님과 일 대 일로 대화했고, 다른 배우들과는 거리를 둔 채 지냈다. 현아는 선배들 관계에 잠깐 끼어든 인물이고, 해란은 친구이긴 해도 더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 아닌가. 감독님이 캐릭터와 관계를 그런 식으로 세팅해주신 거다.

 

무드를 지켜줬군.

무드를 지켜줬고 꼭 지켜내야 할 거 같더라. (웃음)

 

해란과 현아 모두 감정에 기복이 있고 히스테릭한 면을 지닌다. 김희정 감독은 “여자 배우들은 특히 내면이 위태로워지기 쉽다”며 이런 인물에게 갖는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실제 류아벨은 어떤가. 내면을 다스리고 지켜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나.

요가에서 calm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작년쯤에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겠더라. 요가뿐만 아니라 다른 행위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단순히 조용한 느낌이 아니라, 자신만의 리듬을 찾는 거다. 예컨대 달리기를 하다 보면 러너스 하이처럼 영원히 달려도 괜찮겠다 싶은 순간이 있다. 외부와 상관없이 자기 안에 정적이 생길 때, 그때 비로소 내 리듬과 포즈를 찾는 거 아닐까. 예전에는 매일 실천하는 루틴이나 크고 작은 계획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딱히 없다. 어떤 규칙을 만들다 보면 점점 나를 가두게 되더라. 지금은 원하면 받아들이고 싫으면 아니라고 말하는, 편안한 상태를 만들고 싶다.

 

함께 작업한 감독들이 공통으로 꼽는 강점이 몇 가지 있더라. 각도와 표정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달라지는 마스크라든지 화면에서 뿜어내는 생기 같은 것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칭찬을 들을 때 가장 기분이 좋은가.

평가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좋은 배우가 된다는 것과 좋은 동료가 된다는 것이 참 비슷하면서도 때로는 다른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게 직업적인 지향이다. 배우로서는 정말 그 인물처럼 보인다는 말이 제일 기쁘고.

ⓒ소동성

인터뷰를 위해 그간 기사화된 인터뷰와 사진을 찾아봤다. 얼굴도 정면과 측면 느낌이 다르고, 왼쪽인지 오른쪽인지에 따라서도 분위기가 바뀌더라.

맞다. 왼쪽이 좀 더 샤프한 느낌이다. 배우 입장에서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부분인데, 나는 이런 얼굴을 꽤 좋아한다.

 

그래선지 비밀스럽다고 해야 할까,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캐릭터를 잘 소화해낸다.

내가 의뭉스럽지, 좀? (웃음) 나는 나를 잘 모르겠다. 어느 부분은 알지만, 모르는 면도 분명히 있을 거다. 다만 어떤 역할을 맡든 하나의 캐릭터로서 미스터리를 갖는 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스터리란 결국 관객에게 호기심을 품도록 만드는 요인이지 않나. 명랑하고 가벼운 캐릭터여도 비밀을 가질 수 있다. 저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떻게 자랐기에 저런 사람이 되었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인물을 만들고 싶다.

 

그동안 맡은 배역의 직업만 봐도 다양한 매력을 짐작해볼 수 있다. 종잡을 수 없고 불안에 시달리는 배우부터 어느 직장에나 한 명은 있을 법한 회사원까지 생생하게 그려냈다. 캐릭터를 준비할 때 거치는 본인만의 절차가 있나.

역사를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화면에 나오지는 않더라도 중요한 과정이다. 어떤 직업을 가졌을 경우, 해당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다. 똑같은 사물을 볼 때도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거든. 기생 역할을 맡았을 때는 악기를 배우기도 했다. 악기도 거문고나 가야금을 연주할 때와 바이올린을 켤 때 자세가 완전히 다르다. 기본적으로 어떤 일을 오래 해온 사람만이 갖는 스탠스가 있다. 몸의 중심을 이해하면 자세와 호흡이 달라진다. 연기란 결국 누군가의 인생에서 짧게 지나가는 순간을 화면으로 옮겨와 보여주는 행위 아닌가. 그렇다면 그의 인생 전체를 알 수는 없어도 생각은 해봐야 한다. 그게 배우의 일인 거 같다.

<연애담>(2016)
<인사3팀의 캡슐커피>(2018)
<샘>(2018)

나한테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배역이 있다면.

요즘에는 실제 나보다 발랄한 캐릭터를 맡고 싶다. 연기도 일종의 만남이라서 캐릭터와 주고받는 에너지가 있거든. 장르로는 판타지를 해보고 싶다. 상상이나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인물, 꼭 사람이 아니어도 좋겠다. 외계인이나 『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거인처럼.

 

팬들 사이에서는 다정하기로 유명하다. 매력 중 하나로 ‘언니다움’을 꼽더라.

내가 그냥 (나이로) 언니여서 그런 거 아니야? (웃음)

 

<멜로가 체질>에서 보여준 언니다움이 있지. 후배인 은정(전여빈)에게 <여자 사람 배우>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안하고 뒤에서 든든히 받쳐주는 영화 제작자를 연기했는데, 분량에 비해 확실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나도 보면서 저런 언니 있으면 좋겠다 싶더라. 남모를 고민도 털어놓고, 필요할 때는 도움을 청하기도 하는. 물론 동료들이 있지. 내 주변은 예술가로 범벅이다. (웃음) 분야가 달라도 마음이 통한다. 오히려 다른 시각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 대부분 그런 면에서 잘 맞는다.

 

그런 사람들만 곁에 남겨두었나.

사실 한 사람한테 온전히 마음을 쏟기도 힘든데, 모두에게 잘하기란 어렵지 않나. 그런 면에 동의할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거 같다. 나아가 이제 내가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다. 어렸을 때는 먼저 그럴 위치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뭔가가 될 때까지는 누구한테 연락하지 말아야지’라든가 ‘일단은 나나 잘하자’ 같은 마음이었다면, 요즘에는 당장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미루지 말자. 뭐, 안 되면 못하는 거지만.

ⓒ소동성

혹시 일기 쓰나.

아니. 쓰면 좋을 거 같아서?

 

쓸 것 같은 느낌이라서. 혼자 있을 때 자기 얘기를 쓰지 않을까 싶었다.

텍스트적인 사람과 이미지적인 사람이 있다면, 나는 후자에 가깝다. 글보다는 영상 매체를 자주 접하는 편이다. 음, 대신 포스트잇을 많이 사용한다. 영화를 보고 좋았던 거나 떠오르는 것을 메모한다. 생각이 바뀌거나 해야 할 일을 완료한 후에는 쉽게 버리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제이 로치, 2020)을 보고 나서 인스타그램에 “올해 나를 움직이게 한 영화”라는 짧고 굵은 평을 남겼던데.

처음에는 시사회에 초대받고 어리둥절했다. 헤디 라머를 다룬 동명 영화가 개봉했을 때 토크에 참여한 적이 있거든. 재개봉인가 싶었는데, 완전히 다른 영화였지. 최근에 본 작품 중에 가장 좋았다.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할까? 샤를리즈 테론과 니콜 키드먼은 이름만 말하면 전 세계가 아는 배우인데, 영화에서 그 배우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들고 그냥 폭스 앵커처럼 보이더라. 마고 로비는 최근에 해왔던 캐릭터와 비슷한 톤으로 연기했지만, 자신만을 위해 마련된 감정 신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가장 좋았던 건 역겨운 장면을 찍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성폭력 현장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닌데도 머릿속에 전부 그려지더라. 대개 영화를 보면서 등장인물에 이입하지 않는데, 오랜만에 나를 깊이 흔들어 놓는 영화였다.

 

어떤 영화 좋아하나. 계속 다시 보는 영화가 있나.

너무, 너무 많다. (웃음) 잡식성이다. 유년 시절에는 홍콩, 중국, 일본, 대만, 한국 등 아시아 영화에 푹 빠졌다. 여전히 향수를 느낀다. 왕가위 감독의 전성기 시절 작품을 가끔 다시 보는데, 역시 젊음이란 저런 거지 싶다. 다들 미숙하고 혼란스럽고, 그러면서도 참 아름답고.

ⓒ소동성

본래 영화음악을 작곡하고 싶어서 영화를 공부했다가, 우연한 계기로 연기에 입문했다고 들었다. 하려던 일을 관두고 방향을 틀 만큼 연기에 매료되었다는 뜻으로 들리더라.

내 이야기에는 운명 같은 시작이 없다. 연기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어쩌다 언더스터디를 맡았는데, 공연 직전에 해당 배우에게 사고가 났다. 무대에 올라가야 하니까 연출자가 속성으로 연기를 가르쳤다. 앵무새처럼 대사, 말투, 동작, 표정을 똑같이 외운 거다. 처음 연기라는 걸 하고 나서 생각했다. ‘와, 정말 하나도 재미없다!’ (웃음) 이게 뭐라고 다들 죽기 살기로 매달리나 싶었다. 왜 그토록 진지하게 고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도리어 궁금해지더라. 이전까지는 연기는커녕 남들 앞에 서는 상황조차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신선한 시작이다. 연기 경험이 불만스러워서 호기심이 생겼다는 건데.

묘한 반발심으로 연기 수업에 들어갔다. 근데 지난 연극 때 연출자가 알려준 것처럼 뭔가를 따라 하는 게 아니더라. 갑자기 아! 아! 하면서 발성을 연습하라고 하질 않나, 몸을 움직이라고 하질 않나. 그러다 보니 더 궁금해졌다. 연기와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이 모든 행위는 도대체 뭐지? 이게 어떻게 연기로 이어진다는 거지? 조금은 얼렁뚱땅하게 흘러갔던 셈이다. 사실 고등학생 때도 영화를 만들었는데 당시엔 촬영 전공이었다. 영화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뚜렷했지만, 현실적으로 계속 촬영 일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부모님께 카메라를 사달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거든. 카메라는 너무 빠르게 변하고 새로운 모델도 끊임없이 나오니까 감당할 수가 없더라.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지 고민하다가 연기에 눈이 갔다. 이건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럼 연기를 본격적으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시점은 언제쯤인가. 나는 이걸로 먹고살겠구나 하며 받아들인 계기가 있나.

운 좋게 연기 전공으로 합격하고 나니까 또 잘하고 싶더라. 뭐든 대충하지를 못하는 성격이다. 좌절도 심했다. 잘하는 사람이 워낙 많은 환경이었으니까. 고민하다가 일단 대학을 다닐 동안만이라도 최선을 다해 보자고 결심했다. 그다음엔 뭐가 됐든 내가 결정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결국 영화를 만드는 작업에 많이 끌렸다. 생계에 관한 걱정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밥 벌어 먹고사는 게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팀을 이뤄서 호흡을 맞추고,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며 영화를 만드는 일 자체를 좋아한다.

ⓒ소동성

음악을 향한 관심은 여전할 거 같다. 음악으로 기억하는 영화를 말해준다면.

그것도 너무 많은데! (웃음) 다들 좋아하는 거 나도 좋아한다. <시네마 천국>(쥬세페 토르나토레, 1988)이나 <아마데우스>(밀로스 포만, 1984) 같은 작품들. 명작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아까 왕가위 감독을 얘기해선지 <중경삼림>(1994)이나 <화양연화>(2000)도 떠오른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음악에는 확실히 힘이 있다. <해피 투게더>(1998)도 빼놓을 수 없을 거 같다.

진짜 좋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이과수 폭포 장면이 기억난다. 폭포가 그려진 랜턴을 들여다보던 인물이 마지막에 정말 이과수 폭포에 도착하는데, 그때 미장센이 주는 감흥이 대단했다. 아주 작은 이야기가 웅장한 현실로 확장되는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의 관계도 비슷한 것 같고.

 

영화 정말 좋아하는구나. (웃음) 영화제나 상영회에서 토크에 참여한 적도 여러 번이다. 관객들이 영화를 어떻게 봤는지 궁금해 하면서 계속 마이크를 넘겨주려고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왜 자꾸 나한테 시키는지 모르겠다. (웃음) 근데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다른 사람은 어떻게 영화를 봤는지 궁금하다. 나도 용기를 내서 앞에 앉긴 했지만, 사실 관객 입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말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거든. 극장에 있는 모든 사람과 자기 얘기를 나누는 거니까. 어떻게 보면 영화에서 관객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관객 없이 연기하는 건 늘 하는 일이기에, 그런 자리에서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하고 느꼈는지 좀 더 듣고 싶다.

 

연기 외에 다른 분야로 작품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도 있나.

항상 있지. 예전에는 촬영을 하고 싶었고 요즘은 조명에도 관심이 많다. 조명이 분위기를 결정짓는 순간 마술 같다고 느낀다.

 

연출은? 언젠가 할 거 같다.

아, 깜냥이 안 된다. 다른 것도 깜냥이 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연출은 특히 전 분야를 이해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뚜렷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기도 하고. 뭐든 잘하는 사람한테 맡겨야지. 연출은 감독에게, 글은 작가에게. 나도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계속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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