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까지 내가 더 컸는데. 키도 더 컸고. 야구도 더 잘했었어.”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주수인(이주영)은 어려서부터 같이 운동한 이정호(곽동연)의 손에 제 손을 갖다 대며 이렇게 말한다. 3년 전 처음 생긴 백송고등학교 야구부의 유일한 여자 선수 수인. 134km의 강속구를 던지는 이 ‘천재 야구소녀’는 20년 만에 탄생한 고등학교 여자 야구선수라는 타이틀로 전국적 관심을 끌지만, 결국 백송고등학교 야구부가 3년 만에 이뤄낸 프로선수 배출의 주인공은 수인이 아닌 정호의 몫이다. 최윤태 감독의 첫 장편 <야구소녀>는 이제 다른 길을 찾으라는 주변의 압력을 견뎌야 하는 수인의 고독한 싸움으로 관객을 불러들인다.
여자 프로리그가 없는 한국에서 프로선수가 되려면 남자 선수와 경쟁해야 한다. ‘의학적으로 남성이 아닌 자’는 프로선수가 될 수 없다는 규정은 폐지됐지만 성별의 벽은 여전히 강고하다. 비하와 조롱을 참아내며 다져왔을 수인의 실력도 프로팀 스카우터 눈에는 서커스 묘기에 불과할 뿐이다. 150km에 한참 못 미치는 공으로 프로선수들을 대적할 수 있을까. 손도, 키도 작은 수인의 왜소한 체구 역시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에 투수로서 불리하다는 편견에 힘을 실어준다. 엄마(염혜란) 또한 안 되는 거면 빨리 포기하는 것도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다독인다. 그러나 수인은 오랫동안 품어왔던 프로선수의 꿈을 곱씹으며 시속 150km를 향한 무모한 도전을 계속한다.
<야구소녀>는 목표를 바라보다 길을 잃어버린 수인을 응원한다. 눈에 명확히 보이는 숫자는 성별의 벽을 뛰어넘을 가능성을 없애버린다. 이를 모르는 수인에게 지난날의 영광은 또 다른 장애물이다. 하지만 150km라는 목표에서 벗어나 야구의 기본으로 돌아가면 어떤가. 투수는 타자가 공을 받아치지 못하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강속구는 그 수많은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강속구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타자의 타이밍을 뺏을 수 있다면, 구속이 느리다고 프로 야구에서 못 뛸 이유가 없다. 영화는 새로 부임한 코치 최진태(이준혁)를 통해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는 수인에게 단점이 되어버린 강속구를 만회하려 하지 말고 볼 회전력이라는 장점을 키워보라고 재차 권한다.
선수로서의 장점과 단점을 제대로 알아봐 주는 사람. 사실 수인에게 지금껏 가장 부족했던 건 바로 이런 지도자였을 것이다. 남자의 체격 조건에 맞춰진 훈련과 교육법 안에서 수인은 특별한 선수 이전에 별난 여자였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차가운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성장하면서 남자의 신체와 점점 멀어져가는 수인의 몸은 보이지 않는 편견과 차별을 강화했다. 수인 자신도 이를 잘 알고 있어서 정호의 커진 손과 그의 향상된 실력을 등치시켰던 것 아닐까. 수인은 진태에게 훈련을 부탁하며 이렇게 말한다. “다른 애들은 빨리 어른 돼서 프로선수 되고 싶어 했거든요. 근데 전 안 그랬어요. 사람들이 다 저한테 고등학생 되면 야구 못할 거라 그랬거든요.”
이미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몇몇 장면으로 과거를 암시하고서 포기하지 않는 수인의 현재에 집중한다. 프로 진출에 실패한 코치, 생계를 책임지느라 꿈을 단념한 엄마, 공인중개사 시험에 계속 떨어지는 아빠(송영규), 외모로만 뽑는 걸그룹 오디션에서 탈락한 친구 방글(주해은)까지 현실의 벽에 부딪힌 주변 인물들은 그러한 수인의 영향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 수인의 단단한 눈빛은 주변 인물을 넘어 관객에게 위로를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심한 흔적이 뚜렷한 인상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야구소녀>가 동화처럼 보이는 건 현재의 변화에 집중한 선택이 감수해야 할 대가다. 시간이 흐를수록 야구에 적합하지 않은 신체가 되어갔던 수인, 그녀의 비애가 자신을 옥죄던 편견의 실체였다면, 야구소녀의 잠재력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는다.
야구소녀 Baseball Girl 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 감독 최윤태 출연 이주영, 이준혁, 염혜란, 송영규, 곽동연, 주해은 배급 싸이더스 공동배급 찬란 제공 영화진흥위원회 상영시간 105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0년 6월 1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