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모양 귀와 구름 같은 꼬리,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큼직한 하트 무늬 코를 가진 마로나(리지 브로체르). 안타깝게도 영화의 시작에 마로나는 사고를 당해 쓰러져 있다. 죽음을 예감한 마로나는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에서 제 삶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귀한 혈통의 아빠와 거리의 잡종인 엄마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나 ‘아홉’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곧 떠돌이 신세가 되고만 강아지. 아홉은 위험한 도시에서 이리저리 치이다가 곡예사 마놀(브루노 살로몬)을 만나 ‘아나’로 불렸고, 건설업자 이스트반(티에리 한시세)을 만나 ‘사라’가 되었으며, 사춘기 소녀 솔랑주(쉬렐 메이-바르)를 만나 ‘마로나’라는 이름을 얻었다. 지난해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장편 부문에서 대상과 관객상을 거머쥔 안카 다미안의 <환상의 마로나>는 인간 주인과 함께 마로나가 걸어온 일생을 강렬하고 매력적인 화풍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환상의 마로나>는 사실적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나의 저승길 이야기>(2011), <매직 마운틴>(2015) 등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주목받은 루마니아 출신의 여성 감독인 안카 다미안은 어느 인터뷰에서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이 (다큐멘터리 정체성을 흐리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이야기를 좀 더 가시적으로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애니메이션이 고유의 방식으로 현실을 재구성한다는 뜻이다. <환상의 마로나> 또한 우리의 경험과 정서를 주관적으로 시각화해 또 다른 보편의 장으로 인도한다. 마로나의 풍부한 호기심 덕에 영화 속 세상은 제목처럼 환상적이고 다채롭다. 마로나의 눈에 비친 서로 다른 사람들, 마로나가 냄새로 느끼는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영화는 2D, 3D, 컷아웃(그림의 작은 조각들을 한 프레임씩 분리해 움직임을 표현하는 기술) 기법 등을 두루 사용한다. 캐릭터들의 모양과 특성도 저마다 제각각이다. 사람과 사물을 편견 없이 보는 마로나처럼 영화 또한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위계 없이 한데 모은다.


그 가운데서도 마로나가 차례로 만나는 인물들의 독특한 개성이 인상적이다. 곡예사의 몸을 구성하는 건 기본적으로 변화무쌍한 곡선이다. 그는 어떤 모양으로도 휘어질 수 있고, 어떤 크기로도 변할 수 있다. 그렇게 자유로운 만큼 쉽게 우울해지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몸에서는 곡선들이 흘러내리고 마구 엉켜버린다. 변화를 갈망하는 곡예사에게서 불행의 냄새를 맡은 마로나는 “인간이 자기 길을 갈 수 있도록” 그의 집을 떠난다. 마로나가 다시 거리를 떠돌다 만난 건설업자는 단단하고 단순하게 그려져 있다. 힘세고 투박한 인물인 그는 종종 차와 집에 들어가기 위해 몸을 억지로 구겨야 하는데, 강한 몸과 달리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는 외로움과 서글픔이 가득 담겨 있다. 밤이 되면 난동을 부리는 노모와 지나친 허영심의 아내 때문에 걱정을 가득 안고 사는 그는 마로나와 함께 작은 위안을 찾는다. 마로나도 그를 깊이 사랑하지만 결국에는 건설업자 또한 마로나를 떠나보내고 만다.
거리의 유기견을 구조해 임시 보호했던 감독의 실제 경험으로부터 출발한 영화는 우리가 수긍할만한 반려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준다. 늘 헌신적인 사랑을 주는 개는 주인의 얼굴을 핥고 잠든 인간을 지킬 때가 가장 행복하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주지 못하는 인간은 언제나 개를 외롭게 만들어버리고 만다. 풀숲에서 작은 소녀 솔랑주를 만난 마로나는 이제 누군가의 집에서 머물 수 있기를 예전만큼 기대하지 않는다. 행복이 가고 나면 어김없이 고통이 온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로나는 그 집에 생각보다 오래 지내게 된다. 여기엔 쉽게 사랑하고 쉽게 싫증내는 소녀, 너무나 지쳐버린 싱글맘,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 그리고 마로나를 업신여기는 고양이가 있다. 캐릭터들은 여전히 특징적으로 표현되지만, 마로나가 보는 세상이 이전처럼 신나고 신기하지만은 않다. 영화는 그런데도 여전히 주인을 사랑하며 그 곁에 있고 싶어 하는 개와 그 마음을 알아보지 못하는 인간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예정된 끝을 향해 나아간다. 슬프지만 교훈적이거나 반성적인 결말은 아니다. 인간의 편에서 미안하다고 서둘러 말하는 대신, 영화는 마로나의 소우주를 온전히 구성해보려는 구상을 기어이 실현한다.


환상의 마로나 L'Extraordinaire Voyage de Marona (Marona's Fantastic Tale) 감독 안카 다미안 출연 리지 브로체르, 브루노 살로몬, 티에리 한시세, 쉬렐 메이-바르 수입 에이유앤씨 배급 찬란 제작연도 2019년 제작국가 루마니아, 프랑스, 벨기에 상영시간 92분 등급 전체관람가 개봉 2020년 6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