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2020년 현재 동성결혼이 불법인 나라다. 2014년에 입법이 추진된 생활동반자법은 논의에만 머물고 있다. <담쟁이>는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는, 그러나 제도 바깥에 분명히 존재하는 가족을 다룬다. 은수(우미화)와 예원(이연)은 함께 아침을 차려먹고 쉬는 날에는 나란히 목욕탕에 가는 평범한 연인이다. 온기로 채운 일상이 평화롭게 이어지던 어느 날, 교통사고로 은수의 언니 은혜가 죽고 은수는 중상을 입는다. 혼자 남은 은혜의 딸 수민(김보민)을 집에 데려오지만, 세 사람이 바라는 ‘진짜’ 가족의 길은 요원하다. 다만 작은 잎과 가느다란 줄기로 시작해서 벽을 온전히 뒤덮고 끝내 넘어서기도 하는 담쟁이처럼,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내딛으려 애쓴다. 첫 장편영화를 완성하고 관객과 만나기를 기다리는 한제이 감독을 만났다.
제이는 본명인가. 다이노라는 제작사 이름도 특이하다. 영어로 DIE NO라고 쓰던데.
본명이다. 지을 제(製) 쉬울 이(易)를 쓴다. 제작사 이름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일단 내가 공룡을 좋아하고, 좋은 영화를 만들 때까지는 죽지 말자는 다짐도 들어갔다. 공룡처럼 죽어선 전설이 되자! 하는 마음. (웃음)
인터뷰 전에 전화했을 때 한참 마감 중이라고 들었다. 차기작 관련 일이었나.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각색 중이다. 마감은 못하고 인터뷰에 왔다. (웃음)
보통 어디서 작업하나. 글을 쓸 때 꼭 갖춰야 하는 조건이 있나.
집이 투룸인데 방 하나를 작업실로 꾸몄다. 물리적 환경보다는 글을 쓰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 같다. 최근에는 정산이나 배급 등 <담쟁이> 관련 실무를 처리하다 보니 집중하기가 어렵다. 스위치를 딸깍하듯 모드를 변경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담쟁이> 시나리오 초고를 3주 만에 썼다고.
‘그분’이 와주신 거 같다. 당시 도종환의 시 「담쟁이」를 메모장에 적어두고 종종 읽기는 했지만, 사실 시나리오를 쓸 상황은 아니었거든. 단국대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시나리오과에 재학 중이었는데, 졸업 한 달 전에 지도교수인 김태용 감독님이 “제이는 내년에도 학교 다니겠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촬영장에서 스태프로 일하던 중에 사고를 당했다. 다리가 부러진 바람에 꼼짝 못 하고 집에 머물렀는데, 그때 전화위복처럼 시나리오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현실보다 영화 속 세계가 진짜처럼 느껴졌다. 인물들에게 감정이입도 깊게 했다.
베테랑 우미화와 신예 이연, <생일>(이종언, 2019) <미쓰백>(이지원, 2019) 등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김보민까지 세 배우의 조합이 흥미롭다.
김보민 배우는 사실 <생일> 개봉 전에 캐스팅했다. <미쓰백>에서는 대사가 없어서 말하는 모습을 직접 본 뒤 결정하고 싶더라. 굉장히 준비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고, 미팅을 마친 다음 바로 같이하자고 제안했다. 예원 역할은 오디션까지는 아니지만 여러 배우를 일 대 일로 만나는 과정을 거쳤다. 사실 이연 배우를 처음 봤을 때는 너무 어려 보여서 망설였다. 극중 나이는 스물일곱인데 화면에서는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일 듯했거든. 다른 배우를 찾다가 결국 다시 연락해서 만났다. 이연 배우가 지닌 특유의 솔직한 매력이 마음에 들었다. 우미화 선배님은 처음 보자마자 반했다. 후광이 비추더라. (웃음) <그와 그녀의 목요일>이라는 연극을 보러 갔는데, 무대에 선배님이 등장하는 순간 은수라고 확신했다.
오래된 연인이자 한집에 사는 가족을 연기하다 보니, 배우끼리 친밀해지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였을 거 같다.
나는 데이트 비용만 지불한 다음 빠지고, 은수와 예원 둘이서 놀러가도록 주선했다. 공연도 보러 가고 길상사에서 산책도 하더라. (웃음)

예원은 원래 미술을 공부하다가 지금은 의류 매장에서 일한다. 왜 좋아하던 일을 중단했는지, 왜 하필이면 옷가게에서 일하는지 전사가 궁금해지더라.
예원은 집에 커밍아웃하고 나서 모든 지원이 끊긴 상황이라고 설정했다. 공부나 일보다는 사랑이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매장직의 경우, 비슷한 나이에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이기에 골랐다. 나 역시 의류 매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대학원에 붙었을 때 점장님이 매니저로 승진시켜준다며 그만두지 말라더라. (웃음) 영화에 등장하는 공간이 실제 내가 일했던 매장이다. 그때 인연으로 점장님이 대관료 없이 촬영하도록 도와주셨다.
촬영하며 ‘내가 찍지만 너무 좋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나.
장례식장 장면 때는 나를 포함해 전부 숨죽이고 지켜봤다. 사고 이후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던 은수가 처음으로 감정을 폭발하는 순간이다.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장면이 나왔다. 영화에서 은수가 예원에게 준 편지도 기억난다. 우미화 선배님이 직접 썼고, 촬영 때까지 이연 배우도 나도 어떤 내용인지 몰랐다. 원래 해당 장면에서 내레이션으로 시 「담쟁이」를 읽을 계획이었는데, 편지가 너무 좋아서 바꿨다. 은수와 예원이 목욕하는 장면부터 베드신으로 이어지는 흐름도 좋아한다. 베드신을 촬영할 때는 스태프 전부 밖으로 보내고 나와 배우까지 셋이서만 찍었다. 현장 여건상 배우가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만들기 어려워서 그날만 분장차를 부르기도 했다.
은수와 예원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영화를 열고 닫는 인물은 수민이다. 수민의 표정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 특히 엔딩 장면이 그렇다.
시나리오를 다듬으면서 현재 버전으로 이야기가 확장되었지만, 애초에 <담쟁이>는 엔딩 장면에서 출발했다. 어느 날 수민이의 표정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이 아이에 관해 써보고 싶어졌다. 엔딩을 촬영할 당시, 김보민 배우에게는 카메라를 은수 이모라고 생각해보라고 제안했다. “이모가 널 여기에 두고 갔어. 어때? 원망스러울 거 같아?” 수민이는 이모를 원망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모만 원망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어떤 감정을 강요하기보다 결말에 다다랐을 때 관객 스스로 묻기를 바랐다. 수민과 은수, 예원이 지금 이 상황에 놓인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다.
감독이 생각하는 가족이란 무엇인가.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이 내 목표라면, 꿈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거 아닐까 싶다. 영화에서 셋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순간, 그 모습만으로도 참 행복해 보이더라. 같이 밥 먹고 대화하고, 힘든 일이 생기면 마음을 나누며 곁에 있는 사람들. 그게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가수 김사월이 음악감독을 맡았다. 어떤 인연인가.
아무 인연도 없이 배우보다 먼저 음악감독을 캐스팅했다. (웃음) 엔딩곡을 김사월 씨가 부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가사도 같이 썼다. 처음 제안할 당시에는 3곡 정도면 될 거라고 이야기했는데, 결국 13곡이나 만들어줬다.
언제 처음 영화를 만들었나. 그때는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도 궁금하다.
원래 전공은 생명공학이다. 서른 살에 처음 대학원에 들어가서 영화를 만들었다. 외장하드에만 저장해 뒀는데 공개할 마음은 전혀 없다. (웃음) 당시 김태용 감독님이 위로라며 하신 말씀이 “나는 처음에 더 심했어”였다. 오래전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안정적 생활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 두려웠다. 상업영화 미술팀에서 일할 때 어떤 분이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 감독이 되고 싶어 한다며, “집이 부유하지 않다면 여기서 그만둬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차라리 돈을 벌고 영화는 취미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의학전문대학원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다.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내내 공부하는 쳇바퀴 삶이 즐겁겠나. 타협안으로 찾은 직업이 방송국 PD였고, 한동안 예능 조연출로 일하기도 했다.
돌고 돌아서 결국엔 영화를 선택했다.
하고 싶은 걸 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한참 고민하던 시기에 무작정 정성일 평론가에게 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긴 답장을 받았는데 요약해보면 이렇다. 첫째, 일과 창작을 병행하기는 어렵다. 둘째, 우선 영화학교에 가라. 셋째, 당신 영화를 만들어라. 그 메일을 읽고 나서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늦게 시작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나진 않았나. 이런저런 부침에도 영화를 선택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담쟁이>를 만들기까지 줄곧 달렸다. 어떻게든 빨리 결과를 내고 싶었다. 학교 다니며 시나리오 쓰고, 단편 찍고, 각색 아르바이트하고 정말 정신없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사느냐는 말까지 들었다. 나는 대학원에 갈 때부터 ‘서른다섯까지 데뷔 못 하면 포기하자’고 마음먹었다. 물론 그랬더라도 계속하지 않았을까 싶긴 한데. (웃음) 어쨌거나 하고 싶은 일을 배운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고, 버틸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아, 얼마 전에 이십대 때 디렉터 스쿨에서 만난 친구를 다시 봤다. 내가 그때부터 영화감독이 될 거라고 말하고 다녔다더라. 당시 친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렇게 작품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너무 뿌듯하고 기쁘다는 감상을 들려줬다. 그러고 보면 영화도, 사는 일도 참 재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