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유다인)은 직장에서 간신히 버티는 중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입사했고 먹고 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일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번번이 내몰린 끝에 이제는 노골적인 퇴사 압력에 맞닥뜨린다. 하청 업체로 파견 당한 정은은 어떻게든 1년을 견디고 본사로 복귀하리라 마음먹지만, 낯선 환경에서 정은을 기다리는 것은 더욱 복잡하고 다중적인 폭력이다. 영화는 노동이라는 커다란 틀에서 여성, 하청 노동자, 현장직 등에 대한 차별을 다루면서도 한 인물에 집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정은은 피로에 젖은 얼굴을 숨기지 못하지만, 그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해 나아간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문장은 폭력적인 세상에 자기 자신을 마냥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정은의 선언이다. 12년 만에 신작을 선보이는 이태겸 감독은 두 번째 작품에서 새 삶을 선택하려는 인물의 의지를 스크린 가득 채워낸다.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이 있다고 들었다. 어떤 사건이었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실제 사건도 비슷한 얼개다. 사무직으로 근무하던 여성 노동자가 강제 파견으로 현장직에 발령받은 후 끊임없이 회사의 감시에 시달렸다. 기사를 봤을 때 대략적인 이야기가 나오더라. 이후 시간을 충분히 갖고 2년 동안 각색에 매달렸다. 남성도 비슷한 상황이지만, 요즘 사회에서 여성 노동자가 한 번 퇴사하면 다시 복직하거나 경력을 보장받기가 어렵지 않나. 정은 또한 극한 상황에 내몰리면서 밑바닥을 마주하게 된다. 그때 어떻게 나 자신을 추스를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할지 고민해보고 싶었다.
오래 준비하며 차곡차곡 쌓아올린 영화라는 인상이다. 제작지원 역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에 걸쳐 받았던데, 전체 제작기간과 제작비를 마련한 과정도 궁금하다.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간다. 촬영은 2018년 10월에 26일간 19회차 정도로 진행했다. 사실 투자하겠다고 약속한 곳이 있었는데 촬영 한 달 전에 무산됐다. 다른 방법을 찾다가 제작지원을 계속 시도한 거다. 외부 투자가 어렵다 보니 자체적으로 융통한 부분도 얼마간 있다.
프리프로덕션을 완벽하게 진행해도 현장에서는 예기치 못한 변수가 생긴다. 기억나는 순간이 있나.
전부 군산에서 촬영했고 새만금 근처에 숙소가 있었다. 아무리 현장이 힘들어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 피로가 풀리더라. 나야 이 작품에 관해 오래 생각했지만, 전체 스태프와 합을 맞출 시간은 부족한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갔다. 당연히 아쉬운 부분이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안하더라. 유다인 배우의 힘이 컸다. 워낙 집중력 있게 연기해줘서 다들 몰입했다.

두 시간 남짓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유다인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점차 벼랑 끝으로 내몰리면서도 눈빛만큼은 지지 않는 담대한 인물을 연기했다.
감정이입을 굉장히 잘한다. 정은이라는 캐릭터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내면 연기가 필요한데 과연 어떤 배우가 적격일지 오래 고민했다. 유다인 배우를 실제로 만났을 때 확신을 얻었다. 내면 연기란 결국 깊이와 공력에서 나오지 않나. 개인적으로 현장에서 유다인 배우를 지켜보며 말론 브란도가 떠오를 정도였다. 감정을 쌓아가는 능력이 대단한 건 물론이고, 감정을 토해내는 장면에서도 내면의 결이 흐트러지지 않더라.
배우를 만나기 전과 후에 달라진 부분이 있을 거 같다.
유다인 배우를 중심으로 영화의 호흡이 형성된다. 본래 시나리오에서 정은은 더 거칠고 탁탁 치고 나가는 느낌이었는데, 배우와 이야기를 나누며 방향을 수정해 나갔다. 시나리오 버전에서는 강물이 굽이굽이 흐르는 호흡이었다면, 유다인 배우가 들어오면서 강물이 한 줄기로 묵직하게 흐르는 호흡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다인 배우는 “정은의 내면을 지키고 싶다”고 했다. 인물을 이루는 바탕, 정은이라는 여성의 인격이 붕괴하지 않기를 원했다.
막내씨를 연기한 오정세 배우와 이뤄내는 호흡도 매력적이다. 서서히 인간적 유대를 쌓아가며 서로를 동료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줬다.
사람 좋은 이미지를 가진 배우 아닌가. 언젠가 말하길, “왜 좋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나? 좋은 사람이 잘사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고 하더라. 오정세 배우 역시 보통은 아니다. 유다인 배우가 말론 브란도 같은 배우라면, 오정세 배우는 데카르트적이다. (웃음) 참에 도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회의하고 질문하는 자세를 갖췄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도 캐릭터 연구를 거듭했고, 현장에서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하청 업체가 처한 부당한 상황은 물론, 전기 기술 노동자가 수행하는 노동과 일하는 환경을 구현해내는 데 집중한다. 굉장히 밀착한 상태로 노동을 지켜보고 옮긴 거 같다.
영화에 디테일하게 드러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은이 처한 노동 환경 자체는 아주 흔한 상황이다. 자료 조사하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기보다는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실제 건설 노동자를 찾아가서 여러 번 인터뷰했다. 그중 한 분이 이명에 관해 이야기해주더라. 전기 작업을 하다 보면 소리가 들리는데, 작업을 끝내고 집에 와서도 계속 귓가에 그 소리가 맴돈다는 거다. 굉장히 중요한 증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정은에게 현재 상황은 일종의 이명이라고 봤다. 음악 감독님과 작업할 때도 그 부분에 집중했다. 계속해서 징, 지지직 하는 전기 소리가 이명처럼 영화에 깔린다.
탕탕 하고 울리는 금속성 음향도 인상적이다.
비슷한 맥락이다. 따로 만들어낸 사운드가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서 녹음한 소리다. 철탑에 장구가 부딪히는 소리를 동시녹음해서 이후 사운드에 삽입했다.
한편 영화는 송전탑의 이미지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높이 솟은 철탑은 등장인물의 일터이자 정은이 변화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쓰인다.
인물, 공간, 미쟝센은 결국 연결된다. 철탑은 정은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자 눈앞에 마주하는 현실이다. 동시에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며, 정은이 놓인 현실을 드러내는 디자인기도 하다. 여기까지는 명확한데 하이 앵글이 없는 조건에서 이걸 어떻게 보여줄지가 문제였다. 실제로 철탑을 보면 무섭기도 하지만, 복잡한 구조와 기하학적인 규칙성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도 한다. 철탑은 결국 정은에게 삶이기에,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배우가 끝까지 철탑을 올라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 있는 힘, 그걸 가져가는 순간이 작품에서 절정이 된다고 봤다. 촬영에서는 해의 위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찍었다. 저예산 영화처럼 보인다 혹은 보이지 않는다 같은 평가를 떠나서 정서에 집중했다. 딱 하루만 지미짚을 불렀다.

영화제 이후 계획은 어떻게 되나.
배급과 개봉을 준비하며 가급적 많은 사람이 영화를 만날 방안을 찾는 중이다. 영화에서 다루는 이슈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를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낸다면 좋겠다. 사실 노동이라는 건 진지하게 접근할 문제이지만, 동시에 누구나 가슴에 ‘깊은 빡침’으로 떠안고 있는 부분이지 않나. 영화를 보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논의가 이뤄지도록 노력하고 싶다. 그 또한 영화를 만든 사람으로서 가질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로 개봉 준비가 쉽지는 않겠다. 계획해둔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도 했을 텐데.
사실 특정한 시기를 타는 영화는 아니라서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현장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끊임없이 나오지만, 결정적으로 변화하기 어려운 구조상의 문제가 있다. 결국 황당할 정도로 비극적인 일이 되풀이 된다. 영화를 공개할 시점을 고려했을 때, 언제든 적절한 시기인 거다. 불행히도.
계속해서 노동이라는 주제에 끌리는 이유는 뭘까.
원래 성향이 휴머니즘인 거 같다. 영화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 동료 아닌가. 물론 노동 현장은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다양한 법과 시스템으로 난도질당한 상황이다. 다들 파편화되어 각개 전투하며 버티지만, 기본적으로 일이라는 건 누군가와 함께하는 행위다. 특히 정은처럼 물리적으로 위험한 일을 할 때는 더욱 동료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 영화에서는 막내씨가 그런 흐름을 만들어주는데, 결국 사회가 갖춰야 할 바탕이자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예의라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