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증명
JIFF 2020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신동민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Feature / 2020-05-30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는 별다른 사건이 없다. 엄마와 아들 동민(신정웅)이 주로 등장하는데, 둘은 서로 가만히 마주 보고 느리게 같이 걸을 뿐이다. 그리곤 사소한 수다를 떨고, 별로 웃기지 않은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건 이 가족에게 지금은 같이 살지 않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 정도인데, 어쨌든 엄마한테는 그리움이 남은 것 같고 아들은 종종 그런 엄마를 이해하기 어렵다. 3부 구성으로 이루어진 영화에서 엄마를 연기하는 배우는 두 명이다. 1부 ‘군산행’과 3부 ‘희망을 찾아서’의 엄마 혜정은 감독 신동민의 실제 어머니인 김혜정, 2부 ‘태평 산부인과’의 혜정은 배우 노윤정이다. 1, 2, 3부의 엄마는 일관된 캐릭터도, 그렇다고 각각 완전히 다른 인물도 아닌 기묘한 상태로 영화 속에 들어와 일하고, 말하고, 걷고, 눕고, 잠에 빠진다. 영화는 그런 엄마에게 오래도록 눈길을 두면서, 서사만으로는 온전히 포착할 수 없는 인물의 초상을 천천히 그려낸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는 가족이라는 단어로부터 시작된 영화지만, 영화를 보고 나누는 이야기는 어느새 가족을 훌쩍 넘어서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상영작이다.

 

 

첫 장편 영화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다.

내가 처음으로 가본 영화제가 전주국제영화제였고, 그때 가장 좋게 봤던 영화가 장건재 감독님의 <잠 못 드는 밤>(2012)이다. 그 영화를 보고 진짜가 뭘까에 대한 나름 진지한 고민이 시작됐다. 기대 없이 출품했는데 이번에 상영된다고 해서 많이 놀랐다. (웃음)

 

동아방송예술대학교와 용인대학교에서 각각 학부 전공으로 영화를 공부했다.

재수하면서 뭘 할까 생각해봤는데 딱히 할 게 없더라. 영화가 멋있어 보여서 연기 학원에 가볼까 싶었다. 그때만 해도 연출이라는 건 알지도 못했고. 그래서 아르바이트로 돈 모아서 학원에 등록했는데 자꾸 시나리오를 쓰라는 거다. 알고 보니 연출 학원으로 잘못 간 거였다. 그런데 소심해서 아니라는 말도 못 하고 쭉 다녔다. (웃음) 이어서 영화과에 가게 됐고, 17년도에는 장건재 감독님이 교수로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용인대학교에 입학했다. 올 2월에 졸업했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가 졸업작품인가?

그건 아니다. 1월에 졸업작품으로 일종의 에세이 필름을 만들었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의 장면들이 푸티지로 사용되는, 공간에 관한 영화다. 두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학교를 계속 다녔는데 무엇을 얻었나. 

좋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사람에게선 영화보다는 오히려 살아가는 방식을 많이 배웠다. 영화는 영화를 통해 배웠고. 또 학교에 있으면 계속 뭔가를 찍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런 시스템 덕을 많이 봤다.

 

가르침을 준 영화들은 무엇인가.

장건재, 장률, 아녜스 바르다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는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 차이밍량의 <너의 얼굴>(2018), 왕빙의 <미세스 팡>(2017) 같은 작품들과 닮은 지점이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간 찍었던 단편을 모아 하나의 장편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처음부터 이런 기획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단편을 계속 찍고 있었는데 장건재 감독님이 영화를 다 합쳐보는 건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하셨다. 닮은 구석이 있고, 모았을 때 모호한 것들이 명확해지는 순간이 있을 것 같다면서. 그런데 졸업 준비 때문에 흐지부지됐다. 그러다 작년 2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계기가 됐다. 뭔가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작업실에 자리를 잡았다. 배치를 고민하며 영화의 소제목을 다시 썼고 세부 편집도 바꾸었다. 처음엔 ‘가족에 대하여’나 ‘엄마의 노래’ 같은 제목을 고려했는데, 의미가 가족에 한정되는 게 좋지는 않더라. 영화는 서사로 묶이는 것보다 더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모호한 부분이 있는 제목을 생각하게 됐다. 엄마가 실제로 부르는 ‘안개’라는 곡에 나오는 가사를 일부 바꾼 거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배치를 고민하고 영화를 새롭게 매만지는 과정에선 어떤 것을 염두에 뒀나.

일단 촬영된 순서를 섞었다. 원래는 2부를 가장 먼저 찍었고 그다음이 1부, 마지막이 3부거든. 사실 처음엔 찍은 순서대로 배치하고 싶었다. 그게 내 삶의 시간과 맞닿아있는 거니까. 그런데 교수님께서 그걸 한번 섞어보면 어떻겠느냐, 영화로서 화학작용이 일어날 것 같다고 하시더라. 실제 내 어머니가 등장하는 1, 3부와 달리 2부에서는 노윤정 배우님이 어머니 역할을 맡아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어머니의 얼굴이 바뀌는 순간이 두 번 생긴다. 관객들로서는 익숙함이나 반가움도 있을 테고, 전체적으로 영화의 순환되는 지점과 부합하는 면도 있어서 결과적으로는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차이가 있지만 3편 모두 기본적으로 어머니와 가족에 대한 영화다.

나와 가장 밀접하기 때문에 가족을 찍는 것 같다. 맨 처음에는 가족이 겪은 일을 토대로 공포, 스릴러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그걸 왜 찍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더라. 그 당시만 해도 ‘진짜’ 감별사 수준으로 진짜에 대해 고민했거든. (웃음) 자연스레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가족의 사소한 일로 눈을 돌리게 됐다.

 

어머니가 본인 역으로 등장해 연기하신다. 어머니가 살아가는 모습과 그 존재를 담는 게 영화의 중심이 되는데.

페드로 코스타의 <행진하는 청춘>이나 <반다의 방>에서 영감을 많이 얻었다. <잠 못 드는 밤>도 그렇고. 그 영화들에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제작 방식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어머니와 같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 전에도 어머니에 대한 영화를 찍었지만 내가 엄마를 잘못 그리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이 남아있었다. 3부에 이르러서는 엄마라는 인물 자체를 담고 싶어서 얼굴에 집중하게 됐다. 찍는 과정은 다큐멘터리에 가까웠던 것 같다. 친한 사람들끼리 소풍 가는 마음으로 촬영했다. 3부에 나오는 분은 외삼촌이고, 숙취가 남아있는 엄마의 모습을 그대로 찍기도 했다. 완성된 영화를 보시고는 본인이 봐도 자연스럽게 잘했다고 하시더라. (웃음)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4:3 화면비로, 대부분 카메라를 고정한 상태에서 촬영했다.

4:3은 나에게 익숙한 비율이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4:3 비율의 컴퓨터 모니터를 썼다. (웃음) 그리고 좀 더 사진처럼 느껴지는 면도 있고,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지만 4:3으로 두 사람을 담을 때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때 인물들 간에, 그리고 인물들과 카메라 간에 생기는 친밀한 거리감이 좋더라. 카메라를 픽스하는 이유도, 아직은 움직일 필요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빈 종이에 무언가 쓰려는 장면이 반복된다. 2부에선 시 이야기도 나오는데, 혹시 시를 썼나?

2부 ‘태평 산부인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에 먼저 시로 쓴 거다. ‘내가 태어날 때 엄마는 나보다 더 많이 울었다더라. 그날 아빠가 우리의 소리를 들었을까?’ 이런 구절이 있었고, 실제로 동민 역할의 정웅 배우님이 시를 낭송하는 장면도 있었다. 장편화하면서 덜어냈지만. 요즘엔 시 안 쓴다. (웃음)

 

영화의 맨 마지막에 서툴게 찍은 캠코더 화면이 삽입돼 있다.

작년에 졸업작품 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그 캠코더가 생각났다. 그 안에 뭐가 들었나 궁금해서 프린트해보니 아빠가 촬영한 영상이 있더라. <군산행>에 사진으로 나오는, 엄마가 실제로 항암치료를 받으셨을 때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본능적으로 그 영상이 영화에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일종의 가족사진이다. 사소한 우리의 시간을 증명하는.

 

가족에 대한 영화는 계속되는 건가.

나도 내가 뭘 찍을지 모르겠다. (웃음) 공포 영화를 찍고 싶은 마음은 있다. 어릴 때 귀신을 아주 무서워했고, 엄마랑 동생이 실제로 귀신을 많이 보기도 했거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지금 사는 세계, 그리고 내 삶과 연결되는 영화를 만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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