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가 일터에 머무는 시간, 현실(김예은)은 남들과는 좀 다르게 한낮을 견디는 시인 지망생이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무기력에 시달리면서도 현실은 바깥으로 나간다. 공모전 마감일은 점점 코앞으로 다가오는데, 마지막 시 한 편이 도무지 쓰이지 않는다. 시 쓰기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현실은 전 애인 민구(곽민규)나 한때 친했던 친구 주영(한해인)처럼 원치 않는 방식으로 끊어진 인연을 곱씹는다. 다만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듣고 어떤 상처와 추억을 마주하든, 시는 결국 오롯이 현실의 몫으로 남는다. 쓰고 지우길 반복하며 한 걸음씩 더디게 나아가는 현실은, 이제 막 첫 장편영화를 완성한 감독 김종재와 무척 닮았다. 감독이 보낸 ‘생각의 여름’에도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뿐만 아니라, 공백을 채우며 아름다운 것을 고민하는 시간 또한 깃들어 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갸우뚱할 수 있지만 보고 나면 단번에 이해가 가는 제목이다.
생각이 많은 사람이 주인공이고, 여름이 끝날 무렵 생각을 정리하니까. 원래 제목은 <호구>였고 주인공도 남성이었다. 곽민규 배우가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꾸면 더 좋을 거 같다고 아이디어를 냈다. 처음에는 겁을 좀 먹었다. 그동안 여성 캐릭터를 잘 만들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줄곧 주인공을 남성으로 설정해왔거든. 근데 곽민규 배우뿐만 아니라 당시 캐스팅을 논의하며 만난 다른 배우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다. 상상해보니 성별 하나로 달라지는 지점이 너무 많더라.
시나리오를 다시 써야했을 텐데.
기존에 생각해온 톤 자체가 바뀌는데,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감행했다. 사실 전작에서는 늘 감독이 주인공이었고, 영화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장편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거기서 좀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웃음)
시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이미 여러 작품이 있지만, 현실은 아직 등단하지 못한 지망생이라는 정체성이 좀 더 두드러진다.
나와 싱크로율이 높은 캐릭터다. 시나리오를 쓸 당시에는 아직 데뷔하지 못한 상태였고, 꿈을 좇는 사람들 대부분 나처럼 힘든 시기를 보내리라 생각했다. 그때 우연히 시를 접했다. 처음에는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SNS에 돌아다니는 감성적인 글귀를 읽다가 점점 시로 관심이 옮겨 갔다. 나중에는 좋아하는 시와 시인이 생기더라. 그때 황인찬 시인이 유튜브에서 낭송하는 영상을 봤다. 시인이 시를 읽는 모습을 태어나서 처음 봤는데 무척 좋았다. 그런 느낌을 영화에 녹여 보고 싶었다.

현실이 새로운 사람과 만날 때마다 시가 등장한다. 시는 대사로 표현되지 않는 인물의 상태와 관계를 암시하기도 하고, 영화에서 챕터를 나누는 역할도 한다. 이때 텍스트 대신 낭독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이 작품을 시작하며 “시가 영화로, 영화가 시로”를 기조로 삼았다. 텍스트를 삽입하면 애초 원했던 방향에서 어긋난다고 느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무엇보다 시에 집중하길 바라는데, 글자가 화면에 나오는 순간 시선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아예 시를 읽는 장면에서는 사운드도 전부 제거하고 목소리에만 집중하도록 구성했다.
시의 무엇에 빠졌나.
시는 새로우면서도 단순하고, 단순하면서도 큰 울림을 준다. 이런 시와 이런 기분을 많은 사람이 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황인찬 시인의 경우, 시에 드러나는 감정이 되게 영화적이라고 느꼈다. 아주 담백하면서도 영화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러고 보니 영화에서 낭독하는 시 다섯 편 전부 황인찬 시인의 작품이다.
<생각의 여름>은 황인찬 시인의 「무화과 숲」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했다.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나서 이야기 흐름에 맞물릴 수 있겠다 싶은 시를 찾았다. 작년 초에 사용 허가를 얻으려고 연락처를 수소문하다가 군대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역 기간에 맞춰 출판사를 통해 메일을 보냈는데, 그날 몇 시간 안 지나서 바로 답장이 왔다.
황인찬 시인 외에 좋아하는 시인은 누구인가.
송승언, 박준 시인도 좋아한다.

영화는 무기력과 불안처럼 깊은 감정을 다루면서도 웃음을 놓치지 않는다. 현실에게 말장난이나 농담은 지루하고 나른한 일상을 견디는 놀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이전부터 계속 코미디를 해왔는데 자신감을 잃은 상태였다. 그래선지 초고에는 유머 코드나 재미난 부분이 전혀 없었다. 특히 주인공이 남성일 때는 이미 어디서 본 것 같은 이야기처럼 기시감마저 들었다. 결국 내가 재미있다고 느끼는 걸 파고들어야 영화도 새로워질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대한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갖도록 고민하면서 대사를 다듬었다. 촬영 4일 전에 갑자기 추가한 대사도 있다.
김예은 배우의 또 다른 매력을 봤다. 엉뚱하면서도 진지하고, 종잡을 수 없지만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현실이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보이길 바랐나.
김예은 배우를 실제로 만난 건 작년이 처음이다. ‘설마 이걸 하겠어?’라며 기대 없이 연락했는데, 배우가 시나리오를 읽더니 자기 얘기라면서 흔쾌히 만나자고 하더라. 사실 처음에는 그동안 다른 작품에서 보여준 진지한 이미지 때문에 제안했다. 표현은 발랄할 수 있어도 내게 현실은 기본적으로 굉장히 슬픈 캐릭터거든. 근데 배우를 직접 만나 보니 미처 몰랐던 새로운 면이 많더라. 함께 대화하며 현실을 만들어나갔다. 최대한 기존 작품에서 보여준 이미지와는 다른, 좀 더 다양한 모습이 드러나기를 바랐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나 현재 영화 스태프로 일하는 친구 남희를 만났을 때, 현실은 계속 “재미없는 독립영화인!”이라고 놀린다. 감독은 어떤가. 나름 재밌는 영화인인가?
그냥 넣어본 대사다. ‘셀프 디스’는 아니다. 나는 재미없는 독립영화인은 아니거든. (웃음) 영화가 좀 더 다양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대사다.

영화에서 현실은 시인 것과 아직 시는 아닌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시를 영화로 바꿔보면 어떨까. 감독에게 영화인 것, 영화 같다는 것은 무얼 뜻하나.
시와 영화는 되게 닮은 매체 같다. 어떤 끝을 보고 나서도 잔상이 오래 남으면 영화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이미지일 수도 있고 감정일 수도 있다. 때로는 아주 어렸을 때 경험한 순간이 어떤 계기로 인해 불쑥 기억나지 않나. 그런 순간은 영화 같다고 말해도 좋을 거 같다.
단편 <변절자>(2011)가 첫 작품이다. 10년 만에 장편을 만들었고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을 앞두고 있다. 여러 순간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갈 거 같다.
단편이나 장편이나 촬영할 때는 똑같은데, 영화제에 출품하고 연락을 기다리는 마음이 무척 다르더라. 단편은 솔직히 안 돼도 별생각이 없었거든. 이번 작품은 정말 고생하며 찍어선지 마음을 비우기가 쉽지 않았다.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촬영 한 달 전까지도 일하다가, 결국 스트레스로 일을 관두고 여기저기에 돈을 빌렸다. 5년 만에 가는 영화제이고 경쟁부문에서 작품을 상영하는 건 처음이다.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뿐이다. 사실 최근에 전주국제영화제 때문에 너무 바빠졌다. 설렁설렁 후반 작업하던 중이었는데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 (웃음)
언제 처음으로 영화에 빠졌나.
중학교 때부터 ‘집돌이’였고 비디오를 빌려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부모님은 일하고 형은 학원에 가면 집에 혼자 남았거든. 형도 영화를 좋아했는데 나한테 비디오 심부름을 시켰다. 그럼 반납하기 전에 돈이 아까우니까 내가 한 번 더 보는 거지. 종일 누워서 영화를 봤다. 하루에 네 편씩 보던 시절인데, 어느 날 <파이란>(송해성, 2001)을 보면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뭐랄까, 리얼하다고 느꼈다. 그때부터 시나리오 비슷한 것도 써보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청소년 센터나 관련 기관을 검색해서 영화 강의를 찾아 들었다. 살면서 그때만큼 열심히 영화를 공부한 적이 없다. (웃음) 정말 노트까지 만들어가며 열성이었다.
영화 되게 좋아하는 거 같다.
좋다. 그건 변한 적이 없다. 물론 힘든 순간도 많은데, 영화를 안 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냥, 그냥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