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에 접어든 오복(정애화)은 수산시장에서 일한다. 자신은 먹지도 못하는 생선을 팔아 세 딸을 키웠고, 이제 첫째가 결혼을 앞둔 상황이다. 상견례를 마치고 기분 좋게 시장에 돌아가 술자리를 가진 그날 밤, 오복은 동료 상인이자 시장 재개발 대책위원장인 기택(김병춘)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오복이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끙끙대는 사이,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간다. 마침내 입을 열자 비난의 화살은 술에 취한, 죽도록 저항하지 않은, “눈 딱 감고 넘어가면 될 일로 젊은 사람 발목을 잡은” 오복에게 돌아온다. <갈매기>는 이처럼 성폭력 피해자를 거듭 좌절하게 하는 상황을 현실적으로 담아내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주인공을 통해 현실을 딛고 일어서는 용기를 이야기한다. 김미조 감독의 첫 장편영화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온라인 상영한다.
<갈매기>는 단국대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졸업 작품이다. 원래 영화를 전공했나.
4수 끝에 사범대학에 진학했다. 영화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부모님께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더라. 졸업하면 당연히 교사가 되리라 기대하셨고, 나로서는 이미 수능을 네 번이나 봤으니 할 말이 없던 거다. 고민하다가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그때 나 자신에게 처음으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진짜 뭘 하고 싶은지 말이다. 귀국해서 복수전공으로 영화과에 들어갔다. 늦게 시작했다는 생각에 초조했는데 배우인 셋째 언니가 많이 응원해주었다. <갈매기>에서 지애 역으로 나온 김가빈 배우가 친언니다.
영화처럼 실제로도 가족이 많은가보다.
우리 집은 딸만 넷이고 내가 막내다. 언니들 이름이 차례대로 인혜, 선혜, 지혜인데, 아들을 낳으려고 내 이름에는 돌림자 대신 ‘조’를 넣었단다. 결국 실패하셨지만. (웃음) 얼마 전 대학원 졸업영화제에 가족을 초대했는데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는 평을 들었다. 인애와 지애라는 등장인물의 이름부터 시작해서 실제 가족으로부터 가져온 부분이 꽤 많거든. 다행히 집안 망신이라는 소리는 안 나왔다.
단편 <혀>와 <혐오가족> 역시 여성과 폭력이라는 키워드로 묶을 수 있다. 일관된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어려서부터 ‘변태’를 많이 만났다. 성추행과 불법 촬영을 당한 적도 있다.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는데 한참 생각해보니 그럴 이유가 없더라. 힘들어야 하는 쪽은 내가 아니라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이니까. 속으로 앓는 대신 주변에 알리고 대화하면서 극복했다. 사실 사명감으로 영화를 만든 건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했고 당시에 가장 흥미롭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따라왔을 뿐이다. 한데, 이렇게 세 작품을 이어놓고 보니 맥락이 생기더라.

<갈매기>는 어떤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나.
길을 걷다가 천변에서 어떤 아주머니를 따라간 적이 있다. 뒷모습이 엄마랑 비슷했다. 아주머니 바로 뒤에 젊은 남자가 있었는데 덜컥 겁이 나더라. 괜히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계속 지켜봤고, 그때 문득 엄마가 떠올랐다. ‘만약 엄마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쩌지?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하는 생각이 멈추지 않더라. 시나리오 초고는 딸의 시점으로 썼다. 이후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딸보다 당사자인 엄마의 기분이 궁금해졌고, 거기에 주안점을 두며 현재 버전으로 완성했다.
중장년 여성의 성폭력 피해는 단지 영화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소외당해온 주제다.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굉장히 생동감 있게 상황을 묘사해서 놀랐다. 특히 피해자가 맞닥뜨리는 2차, 3차 가해를 충실하게 담아낸다.
정말 어려웠다. 관련 서적과 기사를 찾아봤지만 성폭력 피해 자녀를 둔 어머니를 위한 설명서나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를 위한 매뉴얼이 전부였다. 정리된 내용이 없으니 시야를 넓히는 수밖에 없었다. 서지현 검사와 박창진 전 대한항공 사무장 등이 고발한 사건을 타임라인대로 되짚으며, 피해자가 가해자, 조직, 사회로부터 겪은 가해 상황을 영화에 끌어왔다. 실제 부모님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엄마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끝까지 숨기겠다고 하시더라. 영화는 현실과 떼어 생각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어려운 일을 이뤄내는 것 또한 영화가 지닌 몫이라고 생각하며 이야기를 구상했다.
가해자인 기택은 재개발 투쟁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기택이 인권과 정의를 말하는 순간, 오복이 짓는 표정을 잊기 어렵더라.
바른 말하는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할 때, 말하는 사람과 그 입에서 나온 말이 일치하지 않을 때 느껴지는 혼란스러움이 있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종종 가해자는 책임을 면한다. 온전히 벌을 받는 대신 여전히 기득권으로 남는 경우를 자주 봤다. 결국 기택은 한 인물인 동시에 사회라고도 생각한다. 사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진영’을 묻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어느 편에 있는지 궁금하다는 거다. 나는 편을 가르려는 것도 아니고, 옳고 그름을 심판하는 사람도 아니다. 다만 오복이라는 인물을 애정으로 들여다보고 싶었다. 오복은 여성성이 배제된 존재로 치부되기 쉬운 중년 여성이자 누군가의 엄마다. 교육 기회를 충분히 얻지 못한 여성이기도 하다. 오복이 ‘재난’을 통해 어떻게 성장해나가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오복을 연기한 정애화 배우는 영화 초반과 후반에 얼굴이 달라진다고 느껴질 정도로 인물의 변화를 탁월하게 설득해낸다.
내게 오복은 투사이고, <갈매기>는 결국 어떤 투쟁의 기록과도 같다. 한 대 맞으면 두세 대로 되갚는 기세가 필요했는데, 정애화 선배님이 딱 그랬다. 작은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굉장히 단단하고 야무지다. 엔딩에서는 ‘황야의 무법자’다운 당당함을 지니길 바랐다. 본래는 쇼트를 여러 차례 나누었는데 편집에서 전부 들어냈다. 이런저런 수식어를 붙이기보다 두 다리를 땅에 붙이고 선 오복을 정면으로 보여줄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캐스팅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들었다.
우선 60대 여성 배우라고 했을 때 선택지가 많지 않고, 규모가 작은 영화는 더 힘들다. 정애화 선배님은 일전에 촬영장에서 뵌 적이 있는데, 이상하게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자꾸 떠오르더라. 사실 처음 제안했을 때는 거절하셨다. 영화가 다루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단독 주연으로서 작품을 잘 소화할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렵다고 하시더라.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싶었는데, 주변에 다른 배우가 오복 역할에 딱 어울리는 배우가 있다면서 애화 선배님을 추천했다.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긴 편지를 썼다. “잘하려고 만드는 영화가 아니라,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만드는 영화”라며 열심히 설득했다.
거짓말 아닌가. 잘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컸을 텐데.
당연히 거짓말이지. 영화는 과정만큼이나 결과가 중요하니까. (웃음) 이후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했다. 사실 나를 제외하면 현장에 있는 모두가 베테랑이라 처음에는 좀 부담스러웠는데, 촬영을 시작하고 나서 기우란 걸 깨달았다.

제목은 왜 하필 <갈매기>인가.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좋아한다. 언젠가 장편을 만들면 제목은 무조건 ‘갈매기’로 지을 거라고 다짐했다. (웃음) 갈매기는 바다 저 멀리까지 날아가지만, 결국 육지에 둥지를 틀고 산다.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은 이미지였고, 자연스레 오복이라는 인물을 만들 때도 대입했다. 오복은 각박한 세상에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지막까지 현실이라는 육지에 제대로 발을 붙이고 살아가려는 사람이다.
촬영과 색감이 독특하다. 레퍼런스로 삼은 작품이 있다면.
<하녀>(김기영, 1960), <겨울 여자>(김호선, 1977), <꼬방동네 사람들>(배창호, 1982) 같은 오래전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후반 작업 당시 일부러 색을 진하게 보정하며 최대한 필름 룩을 구현하려고 했다. 레퍼런스로 <바보선언>(이장호, 1983)을 가져와서 비슷하게 맞췄다.
방금 말한 작품의 어떤 면에 끌리나.
누군가는 촌스럽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지나치게 세련되고 정돈된 것에는 눈길이 가지 않는다. 물론 카메라 워크라든지 구성 면에서 산만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당대 한국영화에는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대담함이 있다. 그 활력과 기세를 마주하면 왠지 모르게 피가 끓는다. (웃음) 매끄럽고 유려한 영화보다는 툭툭 끊겨도 날 것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영화가 좋다. <갈매기>도 그런 작품이기를 바랐다.
곧 관객을 만난다. 기분은 어떤지, 앞으로는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 듣고 싶다.
감독은 카메라 뒤에서 말하는 사람이지 않나. 과연 누군가에게 내 말이 들릴 수나 있을지 걱정하며 지난 2년을 보냈다. 이제 기약 없는 시간을 마치고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기쁘다. 차기작으로는 어머니와 딸 넷이 등장하는 일종의 모녀 합동 복수극을 쓰는 중이다. (웃음) 복수라는 키워드에 천착하기보다는 관계와 감정을 다루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