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서, 여자라며
SIDOF 2020 개막작 배꽃나래·김승희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Feature / 2020-05-24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발은 '여성'과 '기록'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하면서도 뚜렷한 개성을 지닌 두 작품을 개막작으로 선정했다. 배꽃나래 감독의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은 한글을 공부하는 할머니를 카메라에 담는다. 감독은 문자를 갖지 못한 여성이 겪었을 불편과 난처함을 헤아리는 동시에, 문자가 아닌 기억으로 기록을 감당하고 때로는 새로운 ‘쓰기’를 고안했던 여성의 삶을 발견해나간다. <호랑이와 소>를 연출한 김승희 감독은 호랑이띠 엄마와 소띠 딸이 나누는 대화를 리드미컬한 애니메이션으로 스크린에 옮긴다. 엄마는 ‘남자 없이’ 사는 여성을 향한 차별과 편견을 증언하고, 딸은 생존과 보호를 위해 엄마가 선택했던 방법에 질문을 던진다. 축제를 기다리는 동안 두 감독을 만나서 개막작 선정 소감부터 작품에 관한 이야기까지 고루 청했다.

 

 

영화제 첫 상영작이다 보니 떨리겠다.

김승희_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나서 되게 들떴다. 나는 ‘하이 텐션’인데 사무국에서는 담담하게 소식을 전해주시더라. (웃음)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작품을 상영하는 건 처음인데 뜻밖에 귀한 기회를 얻었다.

배꽃나래_ 일반 상영작으로 선정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기분 좋은 한편 살짝 긴장되기도 한다.

 

배꽃나래 감독은 2017년에 <트러스트폴>로 인디다큐페스티발을 처음 찾았다. 어떤 영화제로 기억하고 있나.

배꽃나래_ 당시 영화제에서 작업자들이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신경 써서 마련해주었다. 덕분에 우연히 마주치면 인사할 사람도 생기고 좋았다. 올해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아쉽다.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호랑이와 소>

김승희 감독은 <심심>(2017), <심경>(2014) 등 꾸준히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고 <피의 연대기>(김보람, 2017)에 애니메이터로 참여하기도 했다. <호랑이와 소>는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작품인데,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궁금하다. 

김승희_ 영어로는 Animated Documentary라고 한다. 줄여서 ‘애니닥’이라고 부르더라. 국내에는 생소할 수도 있는 장르이지만 해외에서는 활발하게 제작되는 상황이다. 특히 장편의 경우 <페르세폴리스>(뱅상 파로노드, 마르얀 사트라피, 2017)처럼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품도 많다. 그저 추측이지만 아카데미상을 염두에 둔 작업도 많은 거 같다. 내러티브와 다큐멘터리 양쪽 모두 아우를 수 있도록 영리하게 만든 작품이 자주 보인다.

 

어떻게 시작한 작품인가. 언젠가는 꼭 만들겠다고 벼르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김승희_ 맞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부터 만들고 싶기는 했는데, 엄마와 나 사이에 쌓인 경험이 워낙 복잡하고 다양한 레이어를 갖고 있기에 선뜻 꺼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렸을 때는 관계로부터 거리를 둔 채 사회적 맥락에서 엄마를 바라보기가 어렵지 않나. 그러다 작년에 서른다섯이 되면서 ‘엄마는 이 나이에 나를 낳고 혼자서 길렀구나’ 하며 엄마의 경험에 나를 대입해보게 되더라. ‘엄마가 겪었던 걸 지금 내가 겪는다면, 엄마가 나에게 한 만큼 나도 할 수 있을까?’ 싶었고, 엄마라는 사람을 좀 더 집중해서 바라볼 시점이 왔다고 판단했다. 개인적으로 한 챕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챕터로 나아가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 엄마를 미워한다는 것에 이제는 질리고 지치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말이야 이렇게 하지만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작업하면서 우울증이 다시 왔고 상담받으며 겨우 마무리했다.

김승희 ⓒ이영진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은 촬영 기간도 꽤 길었던 듯하다.

배꽃나래_ 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재학 당시, 과제로 5분 분량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 했다. 2015년 6월인데 한참 할머니가 한글을 열심히 배우던 때였다. 할머니랑 엄마가 같이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되게 재밌더라. 그때 찍은 장면이 영화에도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이번 작품을 시작한 건 재작년부터다. 촬영은 한 달에 3-4회씩 1년 정도 진행했다.

 

두 작품은 각각 엄마와 할머니, 즉 가족이자 본인보다 앞선 세대인 여성에게 주목한다. 친밀감이 드러나는 동시에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보려는 노력도 느껴진다. 사실 가족 내 여성이란 지극히 일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던지는 일 자체가 어렵기도 하다.

배꽃나래_ 홍콩에 여행을 갔을 때 먹고 싶은 음식을 먹지 못한 적이 있다. 광둥어를 읽지 못하니 사진을 보여주며 냉두부를 주문했는데 온두부가 나왔다. 그때 경험이 할머니에게까지 연결되었다. 문자를 모르는 사람은 어떤 세상에 사는지 궁금했고, 할머니 이야기를 좀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카메라를 들고 찾아갔다.

김승희_ 엄마는 내 삶의 중심이었다. ‘엄마가 없으면 나는 안 된다’라고 생각했고, 우리한테는 서로뿐이라고 배웠다. 어릴 적부터 엄마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출근할 때마다 정말 전쟁터에 싸우러 나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대학에서 여성학 수업을 들으면서 ‘엄마는 그토록 주체적으로 살아왔으면서도 어째서 자기 자신을 혐오할까?’ 하는 의문이 들더라. 오랫동안 엄마가 나였고 내가 엄마인 시간을 보내다가, 독립을 고민할 때쯤 파리 시테 국제 레지던시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다. 파리에서 돌아오면 따로 살자고 말했더니 되게 충격을 받으셨다. 엄마에게 내 독립은 결혼으로 성립하는 일이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하셨던 거다. 심지어 내가 엄마를 버린다거나 쫓아낸다고 여기기도 하셨다. 결국 엄마와 거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서 만든 작품 같다.

<호랑이와 소>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배꽃나래 감독은 일반적인 할머니와 손녀보다 훨씬 가까워 보였다. 카메라가 있는 상태에서도 긴장감보다는 친구나 자매 같은 친밀감이 두드러진다.

배꽃나래_ 본가에서 독립하기 전까지는 줄곧 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내가 장난도 많이 치고 애교도 많이 부린다. 어릴 때도 할머니가 남동생을 훨씬 예뻐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별로 화가 안 나더라. 남동생 준다고 먹을 거 숨겨놓으면 몰래 찾아서 먹고 그랬지. (웃음) 나와 전혀 다른 세대를 살아온 여성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선지 이상하게 밉지가 않았다.

 

밉지는 않지만 바꾸고 싶을 때는 있을 거 같다.

배꽃나래_ 물론이다. 지금도 계속 얘기한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내내 짧은 머리였는데, 아직도 볼 때마다 기르라고 하시거든. 남자도 만나고 결혼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 “할머니, 멋있는 사람은 그렇게 얘기하면 안 돼”라고 받아친다. 할머니는 듣다가 “어휴!” 하시고 다음에 만나면 또 같은 대화를 반복한다. (웃음)

배꽃나래 ⓒ이영진

한글학교에 다니는 다른 할머니들과는 어떻게 친해졌나.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니 비결이 궁금해질 정도였다.

배꽃나래_ 전부 한글학교에서 처음 만난 분들이다. 카메라를 들고 가면 부담스러워하시니까 초반에는 핸드폰으로 찍었다.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촬영만 하다가, 다음 날에는 사탕을 사서 가고 그다음 주에는 과일도 사서 놀러 갔다. 그렇게 점점 비비다가 나중에는 집까지 찾아간 거다. 할머니에게 따로 소개받지 않고 느낌을 믿었다. ‘아, 뭔가 재밌을 거 같은데’ 하는 느낌이 오면 인터뷰를 청했다. (웃음) 사실 인터뷰는 사용하지 않은 분량이 훨씬 많다. 보통 노인 여성을 수다스럽다고 평가하지 않나. 결국 그들에게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뜻이 아닐까 싶더라. 인터뷰를 시작하면 최소 3시간이 걸렸고 어느 때는 5시간 동안 이어진 적도 있다. 그들에게 대화란 자신을 기록하는 행위이자 서로를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작품에서 목소리는 중요한 장치다.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은 엔딩 크레디트를 포함하여 영화 내 모든 텍스트를 음성언어로 전달한다. 할머니가 말하는 문장을 표준어로 바꾸지 않고 입말 그대로 자막에 표기한 점도 인상적이다.

배꽃나래_ 문자를 못 읽는 사람에 관한 영화인데, 할머니가 영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순간이 있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오프닝에서 할머니가 암글과 수글에 관한 글을 읽는 장면의 경우, 관객이 속도를 느끼길 바랐다. 글을 모르는 사람이 글을 마주할 때 겪는 답답함이 무엇인지 표현하고 싶었고, 그렇다면 관객을 할머니의 속도로 끌고 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랑이와 소>에서는 육성의 매력이 돋보인다. 대화를 주고받는 리듬이 애니메이션과 맞물리면서 마치 음악이 삽입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김승희_ 와, 기분 좋다. 사실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직접 만들기도 한다. 영화 작업할 때도 컷 편집을 통해 묘한 박자를 만들어낼 때 재미를 느낀다. 이번에도 제작 초반에는 목소리로 어떤 장난을 쳐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막상 작업해보니 전달력이 떨어지더라. 그래도 시작점이 그래선지 리듬감이 붙었나 보다. 인터뷰 때는 엄마를 부추기는 역할만 했다. 맞아! 진짜? 하면서 이야기를 두 시간 정도 들었다. 원래 엄마랑 나는 옛날 얘기하면 꼭 싸우거든. 기억을 떠올린다는 게 엄마한테나 나한테나 힘든 일이다. 이후 녹음본을 반복해서 들으며 내 말을 따로 얹었다. 물리적 거리를 확보하니 객관적으로 흐름을 잡을 수 있더라.

혹시 이번에 작업하며 주인공에 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나?

김승희_ 작품을 통해 뒤늦게 이유를 알아차린 사건은 있다. 영화에서 “승희 아빠는 뭐 하세요?”라고 엄마한테 묻고 태도를 달리한 분이 내 친구 어머니거든. 어느 날 친구가 “우리 엄마가 너랑 놀지 말래”라더라. 어린 시절에는 그런 경험이 자존감을 떨어뜨리지 않나. 이번에 엄마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그런 맥락이 있었구나 싶더라.

배꽃나래_ 영화에 나오는 ‘기릉지’에 관해선 예전에 들었던 적이 있다. 할머니한테 타투를 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무슨 여자애가 부모님이 내려주신 몸에 그런 짓을 하냐"면서 펄쩍 뛰셨다. 근데 얼마 후에 사실 본인도 어렸을 때 친구들과 먹물로 점을 새겼다고 말씀하시는 거다. 당시에는 그게 유행이었다고 하셨는데 솔직히 ‘주작’이라고 여기고 넘겼다. (웃음) 이번에 촬영하다가 그때 이야기가 문득 생각나서 다른 할머니한테도 정말 기릉지가 있는지 물어봤다. 신기하게도 여러 할머니에게 흔적이 남아 있었고, 영화를 상영하면서 만난 관객으로부터 “우리 할머니도 기릉지가 있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다. 유행이라면 정말 멋있는 유행 아닌가. 그 점에 인물과 사연이 다 포함된 거다.

 

기릉지는 일종의 우정 타투이자 당사자만 공유하는 내밀한 경험이다. 어린 시절 친구와 비밀 일기를 교환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배꽃나래_ 맞다, 무엇보다 다른 곳에서 자란 여자들이 비슷한 문화를 공유했다는 점에 놀랐다. 듣다 보니 궁금해져서 시연을 부탁드렸다. 실에 먹물을 적시는 방법부터 살에 뜨는 방법까지 굉장히 비슷하더라. 편지를 주고받을 수도 없고 전화로 소식을 물을 수도 없던 시절에 그들만의 문화를 이뤄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두 작품 모두 여성이 차별과 제약에 맞닥뜨린 순간을 언급한다. 할머니는 여자라서 학교에 갈 수 없었고, 엄마는 남자 없이 애를 키우는 여자라며 무시당한다. 현재 감독에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훼방을 놓는 목소리가 있나?

배꽃나래_ 이제 그런 사람과는 관계를 빠르게 정리한다. (웃음) 내 경우엔 유년시절부터 외모를 지적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짧은 머리에 치마도 안 입는다고 말이다. 십대 때 축구선수였는데 “여자가 무슨 축구냐”는 말만큼이나 “여자인데 잘하네”라는 말이 기분 나쁘더라. 영화를 촬영하는 현장에서도 “여자인데 장비도 잘 들고 힘세다”라든지 “촬영도 할 줄 아네”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칭찬인 듯 굴지만 결국 비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승희_ 여중, 여고, 여대를 다닌 덕분에 열린 분위기에서 자랐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여자가 집안을 이끌어나가는 가정이 많다. 자연스레 강해지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여자라서 못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여자라면 이런 것도 해야지!” 라는 느낌이랄까.

배꽃나래_ 나도 비슷하다. 친구들과 “야, 여자가 1종 면허 정도는 따야지” 같은 말을 농담처럼 주고받는다. (웃음)

 

이후 작업에 관해 계획한 바가 있나?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배꽃나래_ 사회적 격리를 틈타 기술을 연마하는 중이다. 유튜브를 보며 편집과 촬영을 공부한다. 기술을 쌓아야 다른 걸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언젠가는 극영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도 있다. 현장 경험이 그리 좋지 않아서 극영화 연출은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이 생겨서 함께 영화를 찍으면 잘할 수 있을 거 같다.

김승희_ 공감한다. 나 역시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익히며 알차게 이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유튜브에서 다른 작업을 찾아보면서 그동안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일했는지 반성하는 동시에, 세상이 빠르게 변화한다는 걸 실감한다. 다음 작품 역시 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될 거 같다. 해외에서 차기작을 묻는 말에 싱글맘이라는 주제를 꺼냈다가, 아직도 한국에는 그런 편견이 남아 있냐는 질문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 한국은 멀었지!’ 하며 구시렁대면서도 이상하게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더라. 그때 대화했던 친구가 <호랑이와 소> 영어자막을 검수해줬는데, 얼마 전에 말하기를 본인이 남성이어서 나이브했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 몰라서 그런 식으로 반응했던 거라고 말이다. 사실 구글에 singlemother family라고만 검색해도 agony, grief 같은 단어가 쭉 나오거든. 서구 대 아시아의 수준 차이라기보다는 남성과 여성의 경험에서 오는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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