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속하면 행복
SIDOF 2020 <내언니전지현과 나> 박윤진
글 정지혜 사진 이영진 / Feature / 2020-05-28

1999년 국내 최초 레벨 없는 롤플레잉게임(RPG) ‘일랜시아’가 세상에 나왔다.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곳’ 일랜시아는 2000년대 초반 화려한 영광의 시간을 보내지만, 20여 년이 흐른 지금은 개발사조차도 더는 돌보지 않는 쇠락한 게임으로 잊혔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여전히 일랜시아에 남아 있다. 게임으로 사람을 만나고, 게임으로 행복을 꿈꾸는 일랜시아의 골수 유저들. 이들은 “아무도 찾지 않는 게임”, “이런 쓰레기 같은 게임도 없다”고 말하면서도 어째서 일랜시아를 떠나지 않는 것일까. <내언니전지현과 나>(2019)를 만든 박윤진 감독 역시 골수 유저 중 한 명이다. 게임 속 아이디 ‘내언니전지현’으로 게임 속 세상을 일궈온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게임 밖 일랜시아 유저들을 찾아가 묻는다. ‘당신은 어째서 일랜시아를 계속하는가.’ 그 질문과 대답을 듣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일랜시아의 역사와 일랜시아의 쇠락 속 유지의 방식이 게임 밖 세상의 변화 양상과 묘하게 맞물려 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발 국내 신작전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박윤진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로, 미디액트 28기 수료작이기도 하다.

 

 

겜알못인데 인터뷰 하게 됐다. 

상관없다. 나도 일랜시아 말고는 게임, 잘 모른다. (웃음)

 

언제, 어떻게 일랜시아에 입문했나.

초등학교 4~5학년 때부터 시작해 올해로 17년째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동생이 먼저 시작했다. 옆에서 보니 재밌어 보이더라. 정작 동생은 지금 다른 게임으로 넘어갔고 나는 여기 남았다.

 

아이디가 ‘내언니전지현’인데.

일랜시아를 시작할 때 배우 전지현 씨가 톱이었다. 동생 아이디는 ‘내형은권상우’였다. (웃음)

 

감독 자신을 포함해 유저들은 ‘아무도 왜 자신이 이 게임을 하는지 모른다’. 이러한 의문으로 일랜시아의 유저들을 직접 찾아갔는데.

중앙대 연출 전공을 하며 졸업 영화를 찍어야 했다. 정말 애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찍고 싶었다. 일랜시아에 관한 이야기는 언젠가는 꼭 찍을 생각이었는데 이번이다 싶더라. 2018년 2월에 테스트 촬영을 했고 카메라를 들고 길드원들을 찾아갔다. 무엇보다 일랜시아가 곧 없어질 것 같았다. (2019년 초 일랜시아를 만든) 넥슨의 매각 기사까지 나왔으니까. 2019년 들어서 본격적으로 촬영했다.

 

영화 작업 이전부터 길드원들과 오프라인에서 만나왔나.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만난 사람은 두 명이고 대부분은 게임하면서 친해져 실제로도 알고 지내던 사이다.

<내언니전지현과 나>
<내언니전지현과 나>

일랜시아의 매력은 뭔가.

다양하다. 게임의 자유도가 상당히 높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다. 다른 게임은 캐릭터가 직업을 선택하면 바꿀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 직업과 관련된 캐릭터의 능력을 계속 키우거나 그걸 키우다 질리면 아예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다시 키워야 한다. 요즘 게임이 그런 식이다. 그런데 일랜시아는 캐릭터의 직업을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캐릭터가 가야 하는 정해진 길도 없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고 내가 찾아서 할 수 있다. 또 도트 그래픽으로 돼 있어 상당히 아기자기하고 디테일하다. 또 일랜시아에서는 캐릭터가 낚시해서 잡을 수 있는 생선의 가짓수도, 캐릭터가 할 수 있는 요리의 수도 수십 가지다. 또 내가 미용사 직업을 갖고 있는데 다른 캐릭터가 머리를 하고 싶다고 내게 돈을 내면 내가 직접 가서 머리를 해준다. 다른 게임은 머리를 한다고 하면 캐시 아이템을 사는 식이다. 일랜시아에서는 유저들끼리 서로 원하거나 필요한 걸 해주는 방식인데 그게 정말 사랑스럽다. 마지막으로 일랜시아의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는데 이 게임이 만들어지다 중단됐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게임 속에 숨겨져 있는 비밀, 유저들이 해석할 여지가 많다. 이를테면 어디로 들어가면 쥐구멍이 나온다던지, 고대 신화 속 이미지를 가져와 쓴 성당의 그림이나 문양을 보며 해석해본다든지 하는 식이다. 꼭 영화 같지 않나. 어떤 영화는 여러 번 보며 해석을 시도하고 숨겨진 지점을 찾아가고 발견하는 재미가 있으니까.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유저들은 운영진의 관리 없이 교란된 일랜시아 세계에서 각자도생하거나 기약 없이 버텨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그게 마치 게임 밖 유저들, 특히 감독을 포함한 2030 세대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과 묘하게 이어지는 것 같다.

다른 게임과 일랜시아의 차이가 바로 거기에 있다. 내가 경험한 다른 게임은 ‘이건 게임이다’라는 느낌이 강해 나와 게임 속 캐릭터가 분리돼 있고 현실과 게임이 연결되는 지점이 많지 않다. 그런데 일랜시아는 현실의 일부 같다. 우리가 사는 현실과 일랜시아 속 상황이 정말 비슷하다. 그래서 영화 편집할 때도 캐릭터들이 게임에서도 만나고 현실에서도 만나는 듯이 구성했다. 내게는 일랜시아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게 지극히 자연스럽다. 하나도 힘들지 않다.

 

게임 속 세상이 “절대 가상공간이 아니”라고 말하며 실제 몸이 아프면 ‘내언니전지현’ 캐릭터를 게임 속 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하더라.

내가 과하게 감정 이입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길드원들에게 그렇게 말한다. “나 실제로 아프니까 ‘내언니전지현’을 병원에 넣어둘게.” 그럼 길드원들은 ‘아, 뭐야’라고 반응하는 게 아니라 ‘그래, 그럼 이따 병문안 갈게’라고 한다.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 아닐까. 다른 게임의 경우, 유저가 게임에서 해야 할 게 너무 많다. 게임 용어로 ‘숙제’라고 하는데 그런 게 스무 개씩 쌓여 있다. 한국인들은 내가 해야 할 일이 쌓여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잖나. 유저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유저들끼리 같이 놀 시간이 없고 혼자 게임만 해야 한다.

 

영화에는 1997년 IMF 경제 위기 당시의 한국 상황을 보여주는 뉴스 기록물이 짧지만 의미심장하게 들어가 있다. 1999년 화려하게 등장한 이후 운영진의 방치로 버려진 곳 일랜시아의 운명과 한국의 경제사를 어떤 식으로 이어보려 했나.

그 장면을 어느 정도 깊이로 얼마만큼 영화에 넣을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 미디액트 지도 강사님들도 IMF 관련 부분을 좀 더 본격적으로 다뤄보자는 쪽과 아예 빼라는 의견으로 갈렸다. 영화의 톤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최종적으로 두 컷만 들어갔다. 일랜시아에 20대, 청년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 ‘이들은 왜 여기 있을까’가 궁금했다. 그 질문의 끝에 IMF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게 일랜시아의 역사와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일랜시아에는 오랜 유저들도 있지만 최근 이 망한, 버려진 게임으로 다시 돌아오는 유저들도 있다. 뭔가 맥락상 게임 외부와 게임이 처한 상황이 맞아떨어지지 않을까 싶더라.

 

게임은 자신이 노력한 만큼 결과로 돌아온다는 한 유저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게임 밖 세상과의 결정적 차이라고 느꼈다. 현실에서는 ‘나는 해도 안 되는 건가’라고 좌절하던 사람들이 게임 세상에서는 만족감을 느낀다. 애초 영화의 기획 의도는 추억 게임으로서의 일랜시아를 말해보는 것이었는데 막상 촬영하다 보니 대부분의 유저들은 추억 때문에 여기 있는 게 아니더라. 어릴 때 미처 할 수 없었던 것을 게임을 통해서 해보고 이룰 수 있다는 점과 매크로(캐릭터가 특정 행위를 자동으로 반복하도록 만드는 프로그램)의 재미 때문이라고 했다. 매크로를 작동하면 캐릭터는 작동 시간에 비례해 성장하니까. 대학생인 한 친구가 그러더라. 시험 기간에 도서관 갈 때면 컴퓨터로 게임을 켜두고 매크로를 돌린다고. 시험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면 수치가 딱 올라 있는데 그게 정말 뿌듯하다고. 공부는 한다고 해서 바로 성과가 나오는 게 아닌데 이건 바로 수치화되는 재미가 엄청나게 큰 거다.

박윤진 ⓒ이영진

본인은 어째서 일랜시아에 남아 있나.

나는 매크로를 잘 돌리는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추억 때문에 이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일어나지도 않을 일, 미래에 관한 걱정이 많다. 그런데 일랜시아는 굉장히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지금 일랜시아에 접속하면 그때의 행복이 지속하는 듯하다. 희망이 느껴진다. 일랜시아가 없어졌다면 나는 행복감을 어디서 찾았을까. 일랜시아만큼 순수하게 행복함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 없다. 왜 예전에 살았던 동네에 가보면 모든 게 변해 있잖나. 그런데 일랜시아의 세계는 그대로다. 이 세계에 내 캐릭터가 딱 서 있을 때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느낀다. 그리고 현실 세계의 나 또한 뭔가를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나와 캐릭터가 동일시된 달까. 일랜시아가 내게 희망과 자신감을 준다.

 

가장 큰 걱정이라면.

서울예대 영화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영화과로 편입해 올해 2월 졸업했다. 서울예대를 마친 뒤 뭐든 시작했어도 좋았을 텐데 불안하니까 또다시 학교에 들어간 거다. 사회의 틀에 나를 껴 맞추고 스펙이라고 하는 걸 쌓으려 하고. 진짜 하고 싶은 걸 아직도 못하고 미루고 있는 게 가장 큰 걱정이다.

 

정말 하고 싶은 건 뭔가.

웹툰 기획 작가 일도 잠깐 했지만 언젠가는 소설과 SF적,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웹 소설을 써보고 싶다. 

 

좋아하는 영화는.

<버닝>(2018, 이창동). 자기 안에 감추고 있는 것이 있어 보이는 종수(유아인) 캐릭터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대학 때 내가 쓴 글도 하나 같이 억눌려 있다가 끝에 가서 폭발하는 캐릭터들이 나온다. <밀양>(2007, 이창동), <마더>(2009, 봉준호)도 좋아한다. 그런데 SF나 판타지물을 만들고 싶다고 하고, 요즘은 로맨틱 코미디를 쓰고 있으니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웃음)

 

지금까지 공개된 작품 모두 본인이 직접 등장한 다큐멘터리였다.

극영화도 몇 번 찍어봤는데 그때마다 ‘아니 왜 내가 생각한 것과 자꾸 다르게 나오지?’ 싶더라. 머릿속 그림이 구현이 잘 안 된다. 내가 말을 잘 못하는 편인데, 스태프나 배우들을 설득하는 것도 어렵고. 완전히 내가 통제하고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반면 다큐멘터리는 언제든 수정, 보완할 수 있고 영화를 찍으면서 내가 깨닫는 바를 그대로 영화에 넣을 수도 있다. 영화를 만들며 내가 성장하는 느낌이다.

 

영화 말미에 일랜시아 유저들은 여전히 운영진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본격적인 활동을 계획 중이라고도 했고. 어떤 건가.

일랜시아는 매출이 안 나온다는 넥슨의 다른 게임들과 비교해도 너무 심하게 버려져 있다. 완전 찬밥 신세다. 우리는 일랜시아에 엄청나게 많은 돈을 투자해 업데이트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다. 계속해서 게임을 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유지 가능한 상태를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악성 유저가 너무 많다. 일랜시아를 제대로 플레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일단 인디다큐페스티발을 통해 영화가 상영되고 입소문을 타면 넥슨 귀에도 들어가지 않을까. 그들이 고전 게임의 가치를 잘 모르는 것 같아 아쉽다. 생각해보라. 과거 일랜시아 유저들은 이제 20, 30대가 됐다. 게임의 주요 소비층이다. 게임을 잘 손보면 회사로서도 이득 아닌가. 물론 게임 업계는 몇 천만 원씩 쓰는 상위 5%의 소비층을 공략하는 듯하지만.

<내언니전지현과 나>
<내언니전지현과 나>

이 정도 되면 넥슨에 직접 취직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을 법하다.

너무 답답해서 그 생각도 해봤다. 그런데 게임을 기획하는 데는 지식이 없으니 마땅히 지원할 파트가 없었다. 일랜시아 관련 팀을 모집한다고 하면 또 모를까…. (웃음)

 

영화 속 일랜시아의 많은 유저는 이 게임을 통해 실제로 인간관계를 맺게 됐다는 데에 큰 의미를 두더라.

나는 친한 사람들과만 만나고 웬만하면 집에 혼자 있는 편이었다. 왜 학교에서 단체로 어디 가자고 하면 꼭 안 가는 사람 있잖나. 바로 내가 그렇다. 그런데 이 게임 속 사람들을 만나면서 처음으로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 오프라인에서 만나도 서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모른다. 굳이 궁금해 하지도 않고. 이 평등한 관계의 네트워크가 좋다. 15년 이상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의 유대감이 있다. 익명의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 앞에서 가장 나다워진다.

 

<내언니전지현과 나>, 어떤 분들이 꼭 보길 바라나.

내 나이 또래의 관객들. RPG를 한 번이라도 해본 분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 이 영화 찍으면서 나도 일랜시아의 세계를 처음으로 다시 읽어냈다. 나도 그렇고 또래들을 보면 당장 살기 바빠 지금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를 잘 모르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난관에 부딪혔을 때 ‘뭔가 이상한 거 아니야?’라고 의문을 갖기보다는 ‘그런가 보다’라고 넘어간다. 피곤하니까 바꾸려 하지 않는다. 내가 영화에서 (포괄임금제 폐지를 만들어낸) 넥슨 노조를 직접 찾아가 보고 그 후 넥슨 측에서 서버 점검 공지 등이 올라왔을 때 왜 진작 뭔가를 바꿔보려고 움직이지 않았을까 싶더라. 나야말로 매크로처럼 살고 있었던 게 아닐까. 문제라고 생각하면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다들 행복을 찾아갔으면 좋겠다.

 

행복이라는 말을 종종 했다.

행복은 평등이다. 저것은 내가 해도 안 되는 일,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싫다. 우린 ‘흙수저’라서 안 된다며 마음을 접는 일이 많다. 뭐든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이 행복의 시작이다. 게임 업계가 이런 지점을 건드려야 젊은 세대 유저들에게 호소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되레 더 게임 안에서 빈부 격차를 벌리고 있으니. 요즘 세대에게 게임이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게 뭔지, 온라인 게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다시 되어야 한다.

 

앞으로 ‘내언니전지현’은 어떻게 될까.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이것저것 해보면서 목적 없이 살 것 같다. 게임에서 내가 목공 능력이 있는 상인이라 ‘내언니전지현의 보트’, ‘내언니전지현의 뗏목’을 만들었다. 미용도 할 수 있다. 재단 능력을 키워서 내 이름의 브랜드 옷을 만들어 소수의 캐릭터에게 입혀보고 싶다. 다큐멘터리도 찍었으니까 잘 팔리지 않을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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