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개진 시간, 포개진 풍경
SIDOF 2020 <그곳, 날씨는> 이원우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Feature / 2020-05-24

이원우 감독에게 영화란 기본적으로 ‘움직이는 이미지’다. 교과서 귀퉁이마다 그려 넣은 거칠고 어설픈 낙서의 연쇄도, 자연이 만들어내는 변화무쌍한 그림자도, 모두 그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영화다. 필름을 직접 만지고 변형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그는 <난시청>(2008), <거울과 시계>(2009), <살 중의 살>(2010), <막>(2013) 등의 실험 단편을 꾸준히 내놓았다. 영화의 재료는 언제나 ‘나 자신의 솔직한 마음.’ 작업 스타일은 ‘농부처럼’ 근면하고 성실하게 씨 뿌리는 방식이었다. 이후엔 한국사회의 정신적, 실체적 불안을 들여다보는 <붕괴>(2014)를 문정현 감독과 공동으로 연출했고, 외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국가와 개인, 나와 세계라는 질문을 품고 첫 장편 <옵티그래프>(2017)를 완성했다.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발 국내신작전 섹션에서 상영되는 <그곳, 날씨는>(2019)은 이원우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이다. 타임랩스(촬영 속도를 조절해 정해진 간격마다 움직임을 찍은 후 시간을 압축해 보여주는 방법) 카메라로 찍은 창밖 풍경 위에 필름으로 찍은 일상을 포갠 이 영화에서, ‘움직이는 이미지’와 ‘솔직한 마음’은 서로 맑게 비춘다. 영화에서처럼 창밖 나무가 보이는 카페에서 이원우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곳, 날씨는’이라는 말처럼 안부를 묻는 인사가 어느 때보다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귀국한 지 두 달 정도 됐다고.

가족과 함께 미국에서 4년을 살았고 작년에 한국에 들어왔다가 다시 필리핀으로 이주했다. 나름 먼 길을 돌아서 이제 한국에 돌아온 거다.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항상 서울이 그리웠고 그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미국을 떠나고 나니 그곳이 그리워지더라. 마찬가지로 코로나 이후의 상황 속에서는 그 이전의 모든 일이 아쉬워지는 것 같다. 그리움은 늘 과거로 향하고 현재는 언제나 새로운 거지. 내게 <그곳, 날씨는>은 상영되는 장소나 계절에 따라 늘 다르게 보이는 영화인데, 요즘 상황에서 볼 땐 또 새로운 점이 있다. 영화에 마스크를 쓴 사람이 안 나오거든. (웃음)

 

상영 때마다 챙겨보는 편인가보다.

상영까지가 감독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서 긴장하고 고통받으면서도 본다. (웃음) 관객과의 대화 때 사람들의 얼굴과 반응을 보고 솔직한 감상을 듣는 것도 좋아하고. 또 워낙 극장을 사랑한다. 극장에서 보고 싶어서 집에서는 못 보는 영화가 있을 정도로. 열심히 작업한 필름이 극장 영사기에서 틀어지는 기쁨이 내겐 영화를 만드는 하나의 원동력이다.

 

작업은 주로 혼자 해온 거로 안다. 자신을 ‘디렉터’ 대신 ‘필름 메이커’라고 지칭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나는 사람도 좋아하고 대화하는 것도 좋아한다. 기본적으로 외향적이고 사교적이다. 그런데 작업할 때는 내 안으로 들어가는 걸 선호한다. 내가 정말로 생각한 것, 내가 진짜로 느끼는 바를 표현할 수 있는 매체를 만나서 행운이다.

<그곳, 날씨는>
<그곳, 날씨는>

영화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2000년대 무렵에 20살이 되면서 영화제도 가고 당시 소격동에 있었던 서울아트시네마도 드나들었다. 2002년에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자원 활동을 했고. 극장에서 신문이나 책에서 보지 못했던 세상을 마주하고는 굉장히 충격받았다. 많은 것들이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읽히더라. 그다음엔 서독제에서 관객심사단을 하게 됐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토론하는 과정이 정말 재밌었다. 마음 같아서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 하고 싶었다. (웃음)

 

미국에 체류하던 기간에 찍은 타임랩스 영상과 그전에 한국에서 찍어두었던 푸티지로 <그곳, 날씨는>을 만들었다.

극영화에 시나리오가 있고 다큐멘터리에 구성안이 있는 것처럼, 나한테는 이미지와 사운드 자체가 베이스가 된다. 거기서부터 편집을 해나가며 영화를 만든다. <그곳, 날씨는>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보는 창밖의 풍경이 참 좋았다. 그걸 놓치고 싶지 않아서 타임랩스 카메라를 설치해서 찍은 거고. 그러다 미국을 떠날 무렵에 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때는 좀 지친 상태였다. 그동안 영화를 만들면서 내 안의 어둠 속으로, 깊은 우물 속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좋은 것만 보고 싶은 순간이 온 거지. 내 밝은 창문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영화 소개 글에 직접 썼듯이 쓸쓸함이나 그리움 같은 정서도 느껴진다. 어딘가에 거주하고 있지만 부유하는 느낌도 들고.

평소에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들도 외국인의 신분으로 타지에 나가는 순간 끊임없이 신경을 쓰게 된다. 내가 여기서 해도 되는 활동, 하면 위험한 일 같은 것들. <옵티그래프>를 만들 때는 그런 걸 역사적 맥락과 함께 생각해보게 됐다. 내가 그 당시(일제강점기)에 동양인의 모습으로 외국에 나갔다면, 국가관이나 모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을 거다. <그곳, 날씨는>을 만들면서는 내 맥락을 구체적으로 전하기 어려운 한계에 대해 계속 생각했던 것 같다. 미국에서 느끼는 외로움이나 피로를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그대로 말하기는 어려웠다. 미국에서 만난 좋은 이웃들에게도 내가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바를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단순화하게 되더라. 대통령이 탄핵당할 것 같다는 말이라든지, 세월호를 생각하는 마음이라든지…

 

영화에 사용한 푸티지에도 집회 장면들이 있다. 그런 장면을 마주할 때면, 안부를 전한다는 표현이 정말 와 닿는다.

세월호 1주기 때 광화문에 다녀오고 나서 미국으로 떠났다. 그곳 아파트에 수영장이 있었는데, 거기서 아이가 배 모양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만 봐도 마음이 힘들더라. 또 SNS나 유튜브를 통해 라이브로 뉴스를 보니까, 스크린에서는 밀양에서 강제진압이 벌어지고 있는데 내 뒤에선 새소리가 들리고 사슴이 거닐고 있는 거다. 그러고 밖에 나가서는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는 얘길 하게 되는 거지. 산다는 게 다 그런 것 같다.

 

사슴은 정말 신기하더라. 디지털 보정 때문에 컴퓨터 그래픽처럼 보이기도 하고.

사슴들을 볼 때마다 너무 좋고 반가웠다. 가끔은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미국에 도착했을 때 많이 막막하고 불안했는데, 사슴이 있으니까 위로도 되고 마음이 좋아졌다. 무슨 산신령처럼. (웃음)

이원우 ⓒ이영진

자연을 주의 깊게 보게 되는 영화다. 또 창틀을 통해서 본다는 아이디어가 마치 태초의 영화 같은 느낌도 든다.

한국은 꽤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필리핀에서는 (코로나로 인한) 락다운이 매우 엄중한 명령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또 미국에서 지냈던 볼티모어는 굉장히 위험한 강력범죄의 도시라서 외출하기가 그리 자유롭지 않았다. 거기다 육아라는 삶의 형태 또한 외부와 단절되고 고립되는 측면이 있지 않나. 그럴 때 나한테 주어진 그 창문이 바깥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 거다. 어떻게 보면 지금 집 안에 갇힌 전 세계의 많은 사람에게도 창문이 하나의 스크린이 되고 있지 않을까. 물론 넷플릭스를 볼 수도 있겠지만. (웃음)

 

타임랩스 카메라를 선택한 이유가 따로 있나.

필름으로 작업할 때 좋았던 건, 찍은 것을 바로바로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타임랩스 카메라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나올지는 결국 시간이 지나 봐야 확인할 수 있다. 이미지의 시간과 사운드의 시간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점도 좋았고. 그런 과정들에서 희열을 느낀다. 난 촬영도 눈이 아니라 몸으로 마주 보고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타임랩스 카메라 자체가 그런 느낌을 준다.

 

촬영분을 확인하며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겠다.

일단 나무가 많이 있으니,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지나는 변화가 어떻게 담길지가 굉장히 궁금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밤 풍경이 그렇게 좋더라. 달이 이쪽에서 떠서 저쪽으로 진다는 것도 촬영한 걸 확인하고서야 알았다. 그 집에 4년을 살았는데! (웃음) 정말 예상치 못한 기쁨이었다.

 

타임랩스 영상 위에 푸티지를 포개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창문에 직접 영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영상의 출처를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의 홈비디오로 만든 파운드 푸티지 같은 느낌도 있다.

사실 처음에는 그 창을 통해 집안 벽에 비치는 그림자를 찍으려고 했다. 나한테는 그 자체가 영화였으니까. 그러다가 오히려 창밖을 보게 된 거다. 그리고 이걸 나만의 파운드 푸티지라고 볼 수 있겠지. 영화의 타임라인은 결국 필름 메이커가 만드는 것이지 않나. 내가 오랫동안 찍어왔던 그 필름들의 시간도 다 뭉개지고 없어져서 결국엔 영화 속의 새로운 시간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그래서 재밌었는데, 만들고 보니 아쉬운 점도 있더라. 겹치는 순간에 나뭇잎이 어떤지, 낮인지 밤인지에 따라 안 보이는 부분이 생기니까. 그래서 푸티지에 찍힌 사람들한테도, “(당신이) 영화에 나온다, 그런데 안 나올 수도 있다”고 말한다. (웃음)

<그곳, 날씨는>
<그곳, 날씨는>

필름에 대한 애정은 여전할 텐데, 필름 생산이나 현상(現像) 문제 등 고민되는 지점이 많겠다.

아마 2013년에 영화진흥위원회의 필름 현상소가 문을 닫았을 거다. 그래서 그 직전까지 갖고 있던 필름을 그때 현상했고, 그 이후에 촬영했던 건 미국에서 지낼 때 캐나다 토론토에 가서 현상해왔다. 사실 지금도 필름 작업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니다. 필름 판매도 하고 있고 현상할 수 있는 랩도 전 세계에 몇 군데 있다. 물론 예전보다는 훨씬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방법에 대한 건 늘 열어두고 있다.

 

작년에 다른 작업을 좀 했다.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해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기획한 <100×100>(100초짜리 단편 100편이 수록된 옴니버스 영화)에 들어간 <윈드>(wind)를 만들었고,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기획한 전시 ‘겨울에는 왕을 죽여야 한다’에 <랜덤 서울 시티 투어>라는 싱글 채널 영상으로 참여했다.

그게 사실은 ‘와인드’다. 필름을 리와인드(rewind) 한다고 하지 않나. 다시 되돌린다는 뜻으로 썼는데, 만나는 사람들이 다 ‘윈드’라고 읽더라. 그래서 누굴 만나면 꼭 이렇게 정정해준다 (웃음) 미국에서는 누군가를 추모하면서 벤치를 많이 기증하는데, 거기 추모하는 대상의 생몰년이 새겨져 있다. 미국에 사는 내가 한국영화 100년사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인상 깊게 보았던 그 숫자들을 떠올렸다. 그해에 누군가는 태어났고 누군가는 죽었고, 또 새로운 영화도 나왔을 테고 엎어진 영화도 있을 거 아닌가. 그래서 3개 주(州)를 다니면서 1919부터 숫자 100개를 모았는데, 결국 3개를 못 찾아서 베를린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완성했다. 그렇게 의뢰를 받고,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작업하면서 마감을 지키는 걸 좋아한다. (웃음)

 

또 하나 수확했다는 마음인 건가. (웃음)

그렇지. 벼농사를 짓는데 옆에서 토마토가 열렸다는 느낌으로. 전시는 한국에 잠깐 들어와 있을 때 연락을 받아서, 내가 그동안 찍었던 서울의 모습과 다시 와서 잠깐 머무는 동안의 서울의 모습을 가지고 만들었다. 우리 아이가 만 2세가 되기 전에 한국을 떠나서 4년을 살다 오니까 한국을 무척 낯설어했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외국인 관광 투어처럼 다니곤 했고, 그중 하나가 서울 시티 투어 버스를 타는 거였다. 그 버스가 대한문, 서울역, 용산, 남산을 코스로 다니는데, 거기서 다 박근혜 복권 집회, 보수집회가 열리고 있더라. 그곳들이 예전에는 쌍차 분향소나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가 있던 곳이고, 용산 참사 장례식, 참사 100일 살풀이 같은 것도 열렸던 데다 보니 접점을 찾아서 나름 재밌게 작업했다.

 

많은 것들이 취소되거나 지연되는 상황이다. 우울하지 않게 일상을 보내는 게 중요할 텐데, 최근에 가장 기쁘게 하는 건 무엇인가.

최고 난이도의 질문이다. (웃음) 혼자 작업하다 보니까, 내가 잘하려면 내가 건강해야겠더라. 그래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고 2~3년 즈음부터는 의식적으로 운동을 하려고 했다. 요즘에도 나를 정말 기분 좋게 하는 건 근력운동이다. 내가 운동을 진짜 못한다. 체육으로 전교 꼴찌도 해봤다. 그런 내 몸에 집중하는 게 너무나 즐겁다.

이원우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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