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규는 10년 전 장애인 시설에서 탈출하여 자립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와상 장애인인 그에게 여러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하는 장거리 여행은 이루지 못할 꿈처럼 보인다. 철규는 넋두리하듯 제주도에 가고 싶다는 소망을 SNS에 적는데, 이를 본 친구와 동료가 함께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여행은 꿈이 아닌 현실로 구체화된다. 부성필 감독은 5일간의 제주 여행에 동행하며 철규가 이동하고 머무는 시간을 카메라에 담아 영화 <철규>(2019)를 완성했다. 비장애인의 편의를 우선시하는 사회에서 철규는 종종 문턱에 부딪힌다. 턱은 단순히 비유의 표현이 아니라, 매 순간 철규를 곤란하게 하고 가로막아 서는 실제적 차별이다. 감독은 철규 곁에서 눈높이와 보폭을 조정하며 모르는 것에 관해 질문한다. 철규의 대답을 허투루 흘려듣지 않고 하나씩 곱씹는 동안 영화도 여행도 종착지에 다다른다. 다큐인, 4.16미디어위원회 등에서 다양한 작업을 지속해온 부성필 감독의 첫 장편영화로 인디다큐페스티발2020 국내신작전에서 상영한다.
현재 원주에 산다고 들었다. 언제 이주했나.
2018년 12월쯤이다. 동료 감독들과 김성환 감독님이 사는 원주로 놀러 갔다가 우연히 작업 얘기가 나왔다. 당시에는 편집할 돈을 마련하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는데, 성환 감독님이 어떤 영화인지 묻더니 좋은 기획이라면서 <철규> 촬영 분량을 보여 달라고 하더라. 다행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웃음) 성환 감독님이 편집 장비와 숙식을 해결해줄 테니 원주로 와서 편집을 마무리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정말 몸만 가서 한 달 만에 편집을 완성했고 그대로 원주에 눌러앉았다.
작업자로서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둔 결정인가.
다큐멘터리를 시작하고 3년쯤 지나서 거처를 옮겼다. 그동안 장편영화를 연출한 경력이 없으면 여기서 살아남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촬영 아르바이트조차 급여가 다르고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은근히 무시당한다는 기분도 느꼈다. 말하자면 피해 의식 같은 게 생긴 셈이다. 한편으로는 고향인 제주에서 상경한 이후로 제대로 된 ‘내 공간’을 갖지 못했던 상황도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원주로 내려가기 전까지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2017년 5월부터 1년간 세월호 인양 과정을 기록했고, 이 시기에 목포신항에 함께 내려갔던 박종필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돌이켜보니 인생에서 벌어졌던 많은 일이 그렇다. 보통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저질렀다가 갈수록 생각이 많아지는 편이다. 목포에도 별다른 계획 없이 돈을 벌겠다는 목적으로 내려갔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서울로 모셔온 상황이었고, 솔직히 작업은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큐인을 관두고 나서 일자리를 구하던 중에 종필 감독님에게 연락이 왔다. 목포에 가자면서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씀하셨다. (웃음) 도착해서 실제로 세월호를 보니 그제야 기분이 이상하더라. 여기에 내가 와도 되나, 싶고 말이다.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마저도 생각할 겨를 없이 바쁘게 지냈다. 지정된 자리에서 종일 화면을 들여다보는 게 일이었는데 한 달에 딱 2박 3일을 쉬었다. 2017년 6월 16일에 종필 감독님이 휴가를 나가서는 연락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엄청나게 투덜거렸다.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왔는데 이게 뭔가 싶어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야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본래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이하 발바닥 행동)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박종필 감독의 제안으로 다큐인에 합류했다. 박종필 감독과는 어떻게 만났나.
다큐인에 들어간 건 발바닥 행동에서 나온 후다. 퇴사하고 나서 안성에 위치한 반도체 공장에서 반년 정도 일했는데, 아마 그때 종필 감독님은 나를 무척 의식 있는 젊은이로 여겼던 것 같다. (웃음) 인권 운동에 뜻을 품었지만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관두었거나, 혹은 일종의 위장전입 형태로 취업했다고 짐작했을 수도 있다.
사실이 아닌가? 장애 운동은 어떻게 시작했는지, 관심을 둔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궁금하다.
제주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오랫동안 기자를 꿈꾸었고 기존 메이저 언론보다는 독립 언론에 관심이 많았다. 뉴스타파 하계연수과정 1기 수료생이기도 하다. 제주의 한 지상파 보도국에서 촬영 보조로 잠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기자들의 구태를 목격하면서 실망과 분노가 커졌다. 당시 취직을 앞두고 답답한 상태였지. 무작정 서울 사는 친구 집으로 왔는데 마침 친구가 장애인 활동지원사로 일하던 중이었고, 이용자가 발바닥 행동 대표였다. (웃음) 마침 단체에서 사람을 구하던 시기여서 면접을 보고 들어갔다. 그러니까 돈을 벌려고 입사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운동’을 하게 된 거다. 사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둘 수밖에 없었다. 투쟁 과정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몸싸움이나 현장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어렵더라. 한 번은 시위 도중에 도망간 적도 있다. 경찰은 강제로 사람을 끌어가고, 활동가는 소리 지르며 버티고, 옆에 있던 창문이 부서지고… 나는 ‘공구리’를 칠 때 필요한 시멘트를 옮기던 중이었는데 순간 겁이 나서 그 자리에 내려놓고 빠져나왔다.
그러고 보면 다큐인에서 다른 감독들이 홈리스와 장애인에 주목하며 작업을 이어갈 때 감독은 랜덤 채팅 어플리케이션이라는 전혀 다른 소재로 단편 <목소리톡>(2016)을 만들었다. 일부러 새로운 주제를 찾아보려고 했던 것인가?
종필 감독님이 다큐인을 함께하자고 했을 때, 카메라를 만져본 적조차 없는 상태였다. 영화라고 하니 막연히 재밌어 보였고, 솔직히 직접 투쟁하지 않고 거리를 둔 채로 촬영하는 역할이라면 덜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다큐인에 합류한 뒤 종필 감독님이 미디액트 독립다큐멘터리 제작 수업을 보내주었는데, 처음에는 당연히 장애 인권과 연관된 작업을 구상했다. 그랬더니 강사와 수강생으로부터 “본인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피드백이 돌아왔다. 그동안 세상을 굉장히 협소하게 바라봤다는 생각이 들었고, 고민하다가 <목소리톡>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다큐인에서는 굉장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욕을 하도 먹어서 꼬인 마음에 촬영본은 전부 지워버렸고 상영도 1년쯤 지나서야 했다. 그때 관객으로부터 재미있다는 감상을 처음 들어봤다. ‘누군가는 내 영화를 좋아하는구나. 어쩌면 나는 다큐인과 잘 맞지 않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더라.
그런 맥락에서 <철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맞다. 나에게도 비슷한 느낌이다. 다만 <철규>는 내가 만든 영화라고 말하기에는 좀 민망하다. 사실 되게 비뚤어진 마음으로 다큐인을 나왔다. 혼자서도 잘할 거라고 씩씩댔지. 근데 영화를 만들어 보니 연출자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 <철규>는 기본적으로 여행과 영화를 기획한 이상엽 형의 힘이 컸고, 거기에 철규 형이 초보 감독을 위해 멋진 연기를 선보인 덕분에 가능했다. 거의 “옜다, 받아라~”하는 식이었달까. (웃음) 내가 영화를 위해 한 일이라고는 정말 한 달 동안 편집한 것 외에는 없다. 게다가 다큐멘터리 감독 중에는 몇 년씩 촬영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 나는 겨우 5일 촬영하고 완성한 거다.


철규 씨의 어떤 점에 가장 매력을 느꼈나.
일단 말이 잘 통한다. 이제껏 봐온 장애 활동가와는 좀 달랐다. 나랑 스타일이 맞는다고 해야 하나? 시설에서 나오고 나서 처음에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함께 투쟁도 하고 시위도 나가고 그랬는데 이제는 아니라고 하더라. 이유를 물어보니 “성필 씨, 나는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것 자체가 운동이에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형은 장애인 콜택시를 타지 않고 일부러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같이 나가 보면 욕하는 사람도 많고 불쌍하다면서 천 원짜리 주고 가는 사람도 종종 있다. 그럼 형은 가만히 당하는 게 아니라 항상 목소리를 낸다.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에서 철규 씨가 여행하는 제주는 감독에게 고향이기도 하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지만 철규 씨와 동행할 때는 또 다른 제주를 경험했으리라 짐작한다.
물론 나한테도 제주는 마냥 아름다운 섬은 아니었다. 가정환경도 안 좋았고 행복한 기억만 있는 곳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차별하는 곳인 줄은 몰랐다. 아예 들어갈 수조차 없는 곳이더라. 고향 친구들은 “어떻게 너 같은 애가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냐”면서 놀라기도 한다. 과거에 나 역시 장애인을 비하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은 변화한 부분이 있지만, 철규 형과 제주를 돌아다니면서 마음 한구석이 찔리기도 했다.
카메라는 철규 씨를 내려다보지 않으려고 애쓴다. 카메라와 인물이 대부분 동일 선상에 위치하는데,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장면에서는 소리 없이도 대화하는 느낌을 주는 효과가 있더라.
박종필 감독님에게 감사한 부분이다. 감독님이 촬영하러 나갈 때마다 삼각대를 들고 따라가서 지켜봤다. 트라이포드는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인물을 담아내는 태도를 포함해서 편집을 염두에 둔 촬영, 화면 구성, 녹취 등 감독님이 강조하고 훈련시켜준 부분에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이켜보니 정말 잘 배웠다는 생각이 들더라. 계속 몸을 구부려야 하니 힘들기도 했지만, 일어선 자세로 누운 철규 형을 찍었다면 전혀 다른 느낌이었을 거다.


엔딩에 삽입된 영상은 휠체어에 고정해둔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다. 평지라고 말하는 곳이 얼마나 울퉁불퉁한지 드러나는데, 심지어는 위협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영상을 처음 혼자 봤을 때 어땠는지 궁금하다.
되게 우스운 이야기인데 사실 처음에는 버려야 할 영상이라고 생각했다. 김성환 감독님에게 촬영본을 보여줄 때도 “고프로 카메라도 빌려서 찍었는데 망했습니다”라면서 창피해했다. 형이 앉아서 휠체어를 타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카메라를 달지도 않았을 거다. 나는 휠체어에 설치한 카메라가 수평으로 부드럽게 이동할 줄 알았다. 쭉 연결되며 풍경이 담기는 ‘예쁜 그림’을 기대한 거다. 영상을 확인한 성환 감독님이 무슨 소리냐면서 “이거 없으면 영화 망한다”고 하더라. 그러고 나서야 뭐가 정말 중요한지 깨달았다. 영화를 공개한 다음에 “엔딩이 살렸다”는 평도 많이 들었다. (웃음)
철규 씨는 뭐라고 평하던가.
보고 나서 딱 한 마디 했다. “그거 봐요!" 자기가 될 거라고 하지 않았냐는 뜻이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걱정이 많았다. 영화에 참여한 사람들과 어떻게 의견을 조율해야 할지, 작품을 완성할 수는 있을지 고민이 쌓이던 시기에 철규 형을 만나서 불안하다고 털어놓았다. 그때 형이 자신을 믿어보라고 하더라. 자기는 국가인권위원회 대상까지 반납한 사람이라면서. (*선철규 씨의 탈시설과 자립을 다룬 단편 <지렁이 꿈틀>은 2010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주최한 인권영상공모전에서 대상작으로 선정되었으나, 선철규 씨는 이명박 정권과 당시 인권위원장의 파행운영에 항의하며 수상을 거부했다.)
첫 장편을 완성한 소감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치유 받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자신의 모습대로, 꿈꾸고 바라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라는 다독임을 느꼈던 거 같다. 동시에 책임이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리기도 한다. “감독님”이라는 소리를 계속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에 이상한 게 생긴다. 정확히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좀 더 책임지는 삶을 살며 건강하게 작업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