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야기는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함과 누구나 공유하는 보편성을 지닌다. 바닷가 마을에 사는 11살 소녀 보리(김아송)의 사연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엄마(허지나)와 아빠(곽진석), 축구를 좋아하는 귀여운 동생 정우(이린하)와 함께 사는 보리의 하루는 언제나 별 탈 없이 흘러간다. 이들은 쏟아지는 햇볕을 쬐며 다 같이 낮잠을 자고, 손잡고 즐겁게 동네 축제에 가는 화목한 가족이다. 다만 가족 중 보리만 유일하게 청인(聽人), 즉 들리는 사람이고 다른 가족은 모두 들리지 않는 농인(聾人)이다. 그 때문에 보리는 다 함께 있을 때도 종종 외로워지고 만다. 수어(手語)만을 사용해 대화하는 가족들 사이에 자신이 온전히 속하지 않는다고 느껴져서다. 자라면서 가족에게 갖게 되는 미묘한 감정들, 유년에 찾아오는 정서적 파고는 보리와 다른 상황에서 자랐어도 쉽게 공감할만한 지점이다. <나는보리>는 보편적인 성장 이야기의 범주에 들어가면서도, 그러한 분류만으로는 곧장 상상하기 어려운 다른 삶의 모습을 사려 깊게 그려낸다.
듣지 못하면 가족들과 똑같아지지 않을까? 그러면 더는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것 같은 보리는 매일 소리를 잃고 싶다는 소원을 열심히 빈다. 물질을 많이 한 탓에 귀가 잘 안 들린다는 해녀를 TV에서 보고는 바다에 훌쩍 뛰어들기까지 한다. 온 가족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그 날 이후 보리는 안 들리는 척 행동하는데, 그로 인해 그간 체감하지 못했던 일들을 가까이 느끼게 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바깥에서 마주하는 들리는 세계와 안 들리는 세계 사이의 마찰은 집에서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보리를 시무룩하게 만든다. 학교에서 정우가 겪는 곤란이나,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사람들이 습관처럼 내비치는 편견과 연민을 보리 또한 피해갈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장애에 대한 차별을 노골적으로 부각하거나, 적나라한 현실을 맞닥뜨리고 충격받는 인물을 조명하는 식으로 흘러가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나와 타인은 언제나 다르다는 사실 자체를 주목하고 그 다름의 지점에 머물면서, 소박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서로 다른 사람들의 공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정우의 고민은 다소 동화 같은 영화의 균형을 잡아주고 핵심을 짚어준다. 학년이 올라가고 교과목이 어려워지면서 정우의 학교생활은 점점 지루해진다. 어쩌면 정우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축구를 예전처럼 계속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데 병원 검사 결과, 정우에겐 청력을 얻는 ‘인공 와우 수술’이 가능하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부모님도 정우도 크게 기뻐하지만, 보리는 내심 의아하다. “소리를 듣고 싶어?” 궁금해하는 보리에게 정우는 대답한다. “그렇기보다는, 친구들이랑 대화하고 싶어. 친구들이 다 수화 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러고 보니, 네가 들리든 안 들리든 우리에겐 똑같이 사랑하는 딸이라고 말했던 아빠 또한 비슷한 얘길 한 적이 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와 같거나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대화가 안 될까 봐 걱정했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정우와 아빠의 말은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결국 중요한 건 다름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공유하는 일, 대화하고 소통하는 일이라는 통찰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친구들이 다 수화 할 수 있’는 세상은 자연스럽게 찾아오지 않을 테고, 영화는 그즈음에서 이만 착하고 교훈적인 결말로 향해간다. 다만 아이들은 여전히 성장 중이다. 영화의 맨 첫 장면에서처럼, 맨 마지막 장면에서도 보리는 혼자서 둑 위를 걷는다.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이 만나는 곳이다. 날아서 혹은 헤엄쳐서, 보리는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보리와 정우처럼 농인 부모를 둔 자녀를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라고 부른다. 그건 영화를 만든 김진유 감독도 마찬가지로, <나는보리>는 감독 자신의 경험담에서 출발해 완성된 영화다. 감독은 이전에 만든 <높이뛰기>(2014)라는 단편에서도 농인 어머니와 함께 사는 청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던 바 있다. 집 안에서의 언어와 집 밖에서의 언어가 교차하는 곳에 존재하며, 방황하고 고민하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해가는 코다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면, 이길보라 감독의 다큐멘터리 <반짝이는 박수 소리>(2014)나 ‘소리의 세계와 침묵의 세계 사이에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 『우리는 코다입니다』(2019)를 참고해 봐도 좋겠다.


나는보리 Bori 제작 파도 감독 김진유 출연 김아송, 이린하, 허지나, 곽진석 배급 영화사 진진 제작연도 2018년 상영시간 110분 등급 전체 관람가 개봉 2020년 5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