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씩, 하나씩
<파도를 걷는 소년>
차한비 / Choice / 2020-05-12

바다는 이른 아침부터 파도에 몸을 맡긴 서퍼들로 붐빈다. 다들 보드 하나에 의지한 채 지친 내색도 없이 가라앉고 뜨기를 반복한다. 멀찌감치 앉아서 바라보다 보면 ‘대체 뭐가 저렇게 좋을까?’ 싶어진다. 다른 놀이와 마찬가지로 서핑 역시 직접 해보기 전까지는 영영 그 재미를 알 수 없다. 물 밖에 있는 사람은 호기심과 소외감을 동시에 느끼며 점점 멀어지는 서퍼들을 지켜볼 뿐이다. 한낮 해변에서 담배를 피우는 김수(곽민규)도 꼭 그런 표정을 짓는다. 흥미롭게 눈을 반짝이면서도 아니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몇 차례 팔을 휘저어보고는 이내 성큼성큼 바다를 향해 걷는다. 옆구리에 낀 보드는 전날 쓰레기장에서 주운 파손품이다. 서퍼 해나(김해나)는 바다에서 연거푸 넘어지는 수를 초조하게 바라본다. 해나가 다가가서 “초짜가 강습도 안 받고 타시면 안 돼요”라고 지적하자, 수는 퉁명스레 쏘아 붙인다. “여기가 당신들 바다예요?”

이민노동자 2세로 태어난 김수에게는 ‘내 것’이 얼마 없다. 엄마는 고향인 하이난으로 재이주했고, 수는 가족 한 명 없이 제주에 홀로 남았다. 동네 친구 필성(김현목)과 함께 갑보(강길우)의 인력사무소에서 외국인 불법 취업 브로커로 일하며 근근이 먹고 사는 형편인데, 얼마 전에는 폭력사건에 휘말려 집행유예와 사회봉사 처분을 받은 상태다. 제주 방언을 구사할 만큼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음에도 수에게는 늘 이방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는다. 조선족인 갑보는 “내가 우리끼리 뭉쳐야 된다고 했제?”라며 동포애를 강조하지만, 사실 수는 그 누구와도 ‘뭉치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갑보는 돈을 매개로 수를 압박하며 위험한 일을 시키고,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조차 수의 ‘출신’을 비아냥대기 일쑤다. 불만 가득한 수의 얼굴에는 출구가 없다는 막막함과 가야할 곳을 모르겠다는 근심이 뒤엉킨다.

<파도를 걷는 소년>
<파도를 걷는 소년>

수는 사회봉사로 해안을 청소하다가 서핑에 빠져든다. 서프숍을 운영하는 똥꼬(민동호)와 해나는 수를 “꼴통”이라 부르면서도 살뜰히 챙긴다. 서핑 크루와 어울리고 파도치는 바다와 친해지는 동안 수의 시야에는 이전과는 다른 풍경이 담긴다. 서핑은 삶을 향유하는 행위다. 갑보가 말한 대로 매일 바다에 나간다고 해서 돈과 일자리가 생길 리 없다. 서핑은 먹고 사는 문제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이고, 그렇기에 수에게는 ‘내 것’으로 느껴봄직한 귀중한 순간이다. 어제만 해도 불가능했던 동작을 오늘 성공했을 때, 자신의 변화와 성장을 몸으로 경험할 때 수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하게 된다. 해나는 어느 날 문득 바다에서 길이 보였다고 들려준다. “파도를 잡겠다고 안간힘을 쓰”던 시기를 통과하자 옆에서 함께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해나에게 수는 “저도 서핑 잘해보고 싶어요”라고 고백한다.

<내가 사는 세상>(2018)을 연출한 최창환 감독의 두 번째 장편으로, 청년 세대가 겪는 빈곤과 노동 문제 등 사회적 이슈를 적극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전작과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부당한 현실과 경쟁에서 살아남기를 강요하는 목소리가 가감 없이 담겨 있고, 인물을 독려하며 ‘나답게’ 존재하는 길을 탐구해 나가도록 이끄는 넉넉한 태도 또한 계속된다. <내가 사는 세상> 이후 다시 한 번 감독과 호흡을 맞춘 곽민규 배우는 복합적인 감정을 정성 들여 연기하는데, 이 작품으로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장편경쟁부문 남자배우상을 받기도 했다. 필성 역의 김현목 배우는 쾌활하지만 현실의 무게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인물을 매력적으로 소화하며, <내 차례>(김나경, 2017)와 <입문반>(김현정, 2019) 등에서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였던 김해나 배우 역시 영화가 부여한 몫을 충실히 해낸다.

<파도를 걷는 소년>
<파도를 걷는 소년>

 

파도를 걷는 소년 The Boy From Nowhere 제작 컬쳐플랫폼 감독 최창환 출연 곽민규, 김현목, 김해나, 강길우, 민동호 배급 매치컷 상영시간 97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20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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