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기억하라
<호텔 레이크>
차한비 / Choice / 2020-05-01

해변에서 두 여자가 껴안은 채 춤을 춘다. 달빛은 저 멀리 수평선까지 환히 비추고 여자들은 서로 어깨에 얼굴을 파묻을 정도로 가깝다. 한 여자는 바다를 향해 몸을 돌렸기에 표정을 확인할 수 없지만, 다른 여자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바닷바람에 흰색 원피스 밑단이 파도치듯 펄럭이고 여자들의 손끝은 부드럽게 맞닿는다. 화가 윈슬로 호머가 1890년에 완성한 《여름밤》이다. 그림 오른편에는 바다를 구경하는 무리가 보이는데, 이들은 여자들과 달리 유령처럼 검은 실루엣으로만 존재한다. 인물들이 이루는 대비와 녹색과 파랑이 뒤섞인 신비로운 색조 덕분에, 그림은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묘한 매력을 품는다.

어느 여름밤, 유미(이세영)는 5년 만에 찾아간 ‘호텔 레이크’에서 이 그림을 두 차례 바라본다. 벽에 걸린 그림 액자가 이유 없이 떨어지며 시선을 끄는데, 이는 유미가 호텔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잇따라 벌어지는 기이한 일 중 하나다. 애초 유미에게 호텔은 되도록 멀리하고 싶은 공간이다. 유년 시절에 목격한 충격적인 광경을 상기시키는 곳이자 엄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소여서다. 어쩔 수 없이 호텔로 돌아가는 유미 곁에는 피도 섞이지 않은 어린 동생 지유(박소이)가 있다. 혼자 살며 취업을 준비하는 유미는 갑작스레 아이까지 떠맡을 상황에 놓이자 호텔 레이크를 운영하는 경선(박지영)에게 도움을 청한다.

<호텔 레이크>
<호텔 레이크>

유미의 엄마와 친구였던 경선은 자매를 반갑게 맞이한다. 마침 비수기로 투숙객 하나 없이 한산한 호텔에는 경선과 메이드 예린(박효주)뿐이고, 경선은 하루라도 더 머물라며 유미를 붙잡는다. 지유만 맡기고 떠나려던 계획이 조금씩 미뤄지는 동안, 유미는 엄마와의 기억이 떠오르는 탓에 괴롭다. 지유에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가 하면, 죽은 엄마가 등장하는 악몽과 까닭 모를 환청에 시달린다. 게다가 경선은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실종 사건과 연루된 듯 보이고 예린은 유미를 마주칠 때마다 섬뜩한 말을 늘어놓는다. 두려움에 휩싸인 유미는 호텔에서 벗어나려 급히 차에 올라타는데, 그날 밤 지유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끈질기게 유미를 따라다니는 공포는 엄마를 향한 죄책과 원망에서 기인한다. 미친 여자라고 손가락질당하는 엄마 때문에 기가 죽었고, 엄마답지 못한 엄마를 둔 탓에 외로웠다. 지유가 집에 가고 싶다고 조르며 친구들이 자꾸 괴롭혀서 싫다고 털어놓자, 유미는 “누가 너 못살게 굴면 그냥 도망가버려. 바보처럼 당하지 말고.”라고 쏘아붙인다. 살아남기 위해 엄마를 외면했고 지유로부터 달아나려던 유미는, 지유의 실종을 계기로 더는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제 유미는 호텔 레이크에 숨겨진 비밀을 대면하고 지유를 구하러 나선다. 이는 결국 엄마가 죽은 진짜 이유를 밝혀내는 일과도 이어진다.

<호텔 레이크>
<호텔 레이크>

《여름밤》 액자가 떨어지는 장면은 유미의 변화를 드러낸다. 첫 번째 추락이 유미에게 공포를 가중했다면, 두 번째는 유미가 진실을 추적해나가는 데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림에서 인물들은 빛과 어둠으로 나뉜다. 여자들은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한 채 춤을 추고 구경꾼들은 그림자처럼 검은 형상으로 칠해졌다. 영화는 이처럼 일견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두 무리, 즉 호텔 레이크에 사는 여자들과 그곳에 출몰하는 정체 모를 존재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파헤친다. 정육각형 홀을 중심으로 지상과 지하가 복잡하게 연결된 호텔 구조는 긴박감을 더하고, 고풍스러우면서도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미술은 공포 영화 특유의 질감을 살려낸다. 이세영과 박지영, 박효주의 아쉬움 없는 연기도 극의 긴장을 높이는 동인이다. 

 

호텔 레이크 Hotel reikeu 제공 스마일이엔티, 이수창업투자 공동제공 유니온투자파트너스, 쏠레어파트너스 제작 이에스픽쳐스, 인디스토리 감독 윤은경 출연 이세영, 박지영, 박효주, 박소이 배급 스마일이엔티 상영시간 100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20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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