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진공, 운명의 여정
<바람의 언덕> 박석영(with 정하담)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0-04-21

박석영 감독은 <들꽃>(2014)으로 데뷔한 후 <스틸 플라워>(2015)와 <재꽃>(2016)을 연이어 만들었다. 관객과 평단은 세 작품을 ‘꽃 시리즈’라고 부르며 연작으로 인정했다. 단지 제목이 유사해서가 아니라, 손에 쥔 것 없이 세상에 나와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좌절하는 소녀를 향해 감독이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왔기 때문이다. 배우 정하담은 ‘꽃 시리즈’를 관통하는 중요한 연결고리다. 전작에 모두 출연했고 ‘하담’이라는 본명을 그대로 사용하며 주연을 맡았다. 그에게도 <들꽃>이 데뷔작이었고 이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배우이자 작업 파트너로서 감독과 협업했다. 정하담과 박석영이 동반한 여정에는 영화제 수상이나 극장 개봉, 관객 수라는 결과만으로 갈무리하기 어려운 독특한 성과가 있다. 두 사람은 의지와 기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한 가지 믿음을 공유했다. 영화를 만드는 일이란, 끝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할 타인을 집중하여 들여다보고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믿음이다.

감독과 배우가 각자 성장하고 변화함에 따라 영화에도 자연스레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의 언덕>은 박석영의 네 번째 연출작이자 정하담이 등장하지 않는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에는 혼자 떠돌며 생존하기 위해 분투하는 소녀 대신,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영분(정은경)과 그런 엄마를 미워할 수 없는 한희(장선)가 등장한다. 중심인물이 누군가와 마주 보는 순간을 드물거나 불안하게 그렸던 전작과 비교하면, 비슷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전혀 다른 위치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한편 박석영이 신작을 준비하는 동안 정하담 역시 낯선 자리에서 길을 일궈나갔다. 드라마 <나쁜 녀석들: 악의 도시>(OCN, 2018)와 <위대한 유혹자>(MBC, 2018) 등에 출연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고, <항거>(연출 조민호, 2019)에 이어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바람의 언덕>과 나란히 공개된 <젊은이의 양지>(연출 신수원, 2019)까지 분주하게 달려왔다.

<바람의 언덕> 개봉을 앞두고 두 사람을 동시에 초대했다. 박석영 감독에게는 2막을 여는 소감과 그간 쌓인 고민을 가감 없이 들려달라고 요청했고, 정하담 배우에게는 가장 가까이에서 감독을 지켜보고 작업과정을 함께 겪어낸 동료로서 질문해주기를 제안했다. 대화에는 지난날을 회상하는 반가움과 서로를 존중하는 온기는 물론, 이따금 애정 어린 긴장도 깃들었다. 두 사람 모두 도망치기보다는 마주보려고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열심히 봤어요. 누구를 인터뷰한 적은 없다 보니 실례하지는 않을까 싶어서요.

고맙네. 잘 부탁합니다. (웃음)

 

<바람의 언덕>은 개봉 전에 지역 커뮤니티와 극장을 돌며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를 진행했어요. 현재는 코로나19로 중단된 상황이지만 이미 강릉, 광주, 청주 등 여러 곳에서 관객과 만나셨더라고요.

로드쇼라는 프로그램 안에서 개봉도 진행하는 형태라고 생각해. 여건이 호전되면 개봉 후에 지역 상영도 지속해나갈 예정이야. 알다시피 독립영화 하는 사람으로서 기존 배급 방식에 의구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어. 상영관 게임에 뛰어드는 것이 과연 유의미한 방향인지 오랫동안 고민했지. 영화만의 특성과 만든 이의 자존감을 잃지 않는 배급 방식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관객과 깊이 있게 대화하는 자리를 꾸려보고 싶었어. 지역을 돌고 프로그램을 소화하면서 이전과 다르게 불안이 없어지더라. 방문하는 곳마다 상영 주체와 관객 구성원이 다르고 영화에 접근하는 방식도 달라. 영화를 정성스레 읽어내는 과정에서 저마다 인생을 나눠준다고 느꼈어. 감사한 일이지. <바람의 언덕>이 사람들 마음에 다가가고 있다는 걸 눈앞에서 목격할 때 기쁘더라. 달리 말하면 친구가 많이 생긴 거야. 우리도 영화제나 개봉 과정에서 참 열심히 했잖아. 그래도 결국 서울에 활동이 집중되다 보니 인사만 나누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있었지. 이제는 ‘연락해서 차나 한잔 마실까?’ 싶은 친구가 된 거야.

박석영 ⓒ이영진

개봉 직전인데 마음은 어떠세요?

편안해.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안타깝지는 않을 거 같아. 이미 누군가와 만나서 차고 넘치게 나누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계속 여정이 이어지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서.

 

<바람의 언덕>을 보면서 놀랐던 부분이 몇 군데 있어요. 저로서는 이전 작품과 다른 지점이 눈에 들어왔는데, 먼저 ‘키’가 되는 장면이 뭐였는지 여쭤보고 싶어요. 감독님은 항상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어떤 장면을 떠올리잖아요. <들꽃>에서는 한 아이가 병을 툭툭 던진다든지 <스틸 플라워>에서는 쫓겨난 하담이 자리에서 일어나 탭댄스를 춘다든지 하는 것처럼 영화의 단서가 되어주는 장면이요.

와, 정말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다. <재꽃>에서는 뭐였지?

 

하담과 해별(장해금)이 병을 불며 소리를 내는 장면이요. 늘 그런 주요 장면을 중요하게 여기셨고, 배우에게도 강조해서 말씀하셨어요. <바람의 언덕>은 어떤 장면에서 출발했나요?

원래 <재꽃>을 마치고 나서 찍으려던 영화가 따로 있었어. <포토그래퍼>라고 시나리오도 쓰고 아프리카에 현지답사까지 다녀왔어. 부산국제영화제 제작지원 펀드 심사에 두 차례나 올랐는데, <이 세상에 없는>(연출 박정범, 2019)과 <윤희에게>(연출 임대형, 2019)에 밀렸어. 연거푸 탈락해서 괴롭기도 했지만, 심사 위원에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으니까 마음이 너무 안 좋더라고. 영화는 흥미로운데 이 돈으로 정말 찍을 수 있냐는 건데. 케냐에서 촬영할 예정이었거든. 다음 방향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처음으로 엄마한테 힘들다고 말했어. 같이 산책을 다니자고 하시더라. 어느 날 엄마랑 같이 걷는데 불쑥 “돈을 좀 마련해줄 테니까 엄마 같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영화 한 편 만들어 봐”라고 하시는 거야. 너무 고민하지 말고 찍어보라면서. 정말 보험을 깨서 돈을 주셨어. 이전에도 영화가 완성되면 엄마가 극장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명함을 건네며 홍보하고 그러셨거든. <바람의 언덕>에서 영분이 한희가 운영하는 필라테스 학원 전단을 붙이잖아. 같은 행위를 실제로 하고 계셨던 거지. 엄마가 나를 위해 어떤 부끄러움도 없이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부탁하는 모습이 내 마음에 박혔던 것 같아. 엄마한테 만들어보겠다고 하고 태백에 갔어. 밤에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어떤 골목에서 걸음을 멈췄지. 영화에서 영분이 전단을 붙이고 나서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웃는 장면이 있잖아. 그때 진짜 그 장면을 본 거 같았어. 골목에 가로등이 비추는데 무대처럼 조명이 딱 내려앉더라. 거기 서서 ‘우리 엄마가 날 위해 전단을 붙인다면 어떤 표정일까?’ 생각했지. 되게 환한 얼굴일 거 같더라.

<스틸 플라워>
<재꽃>
<뱌람의 언덕>

기도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뭐랄까, 의식을 치르는 느낌이기도 했고요.

엄마가 실제로 그런 분이셔. 단순하게 깊이 믿는 사람. 예를 들어 내 핸드폰이 지저분하면 그걸 닦으면서 자연스레 날 위해 기도하시지. 몸에 그게 붙은 분이니까. 결국 이 영화에서 보고 싶었던 건 그런 이미지였나 봐. 나머지는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상상해냈고.

 

그것도 궁금했어요. 늘 촬영하다가 “이 영화는 이런 영화구나, 이것 때문에 만들어질 운명이었구나” 하면서 영화가 지니는 의미를 발견하시잖아요. 사실 배우로서는 시나리오를 볼 때도 그렇고, 현장에서도 잘 모르고 넘어가는 순간이라 신기했거든요.

<바람의 언덕>에서는 아마도 엔딩이 아닐까 싶어. 마지막에 영분과 한희가 만나는데 실은 끝까지 바꾸려고 했던 장면이야. 나는 만남을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쪽이거든. 그러다 보니 내가 써놓고도 찍기가 싫은 거야. 왜 그렇게 싫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결국 가족이라고 해도 절대로 이어질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영분과 한희를 따로 떨어진 공간에서 촬영한 다음 교차 편집하는 방식까지 고민했어. 근데 그날 현장에서 바람이 엄청나게 부는 거야. ‘이 정도 바람이면 잡스러운 생각쯤은 날려버리겠다’ 싶더라니까. 그래서 찍을 수 있었어. 판타지처럼 보이더라도 괜찮겠더라고.

 

예상치 못한 바람이 거들어준 셈이네요. 그래서 ‘운명’이라고 부르시는 걸까요?

참 어려운 거 같아. 내가 이해한 바에서 반 발짝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을 기다리거든. ‘내가 생각한 게 전부는 아닐 거다. 배우가 더 나은 걸 찾아낼 거다. 배우가 아니라면 자연이라도 뭔가를 알려주겠지.’ 늘 그런 마음을 품고, 실제로도 그래 왔다고 생각해. <스틸 플라워> 때도 네가 직접 캐리어를 끌고 다니면서 하담을 찾아낸 거잖아. 나 혼자가 아니라 같이 그렸던 그림이고, 경험이 쌓이면서 ‘영화는 이렇게 운명적으로 자기 길을 찾아내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지. 내가 써놓은 인물을 확신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솔직히 말하면 그게 더럽게 느껴져. 오히려 나를 떠나 배우 안에서 인물이 구현될 때 진실에 가깝다고 느껴. 나랑 작업하는 배우들은 정말 힘들겠지. (웃음) 내가 써놓은 대로 연기하는 것도 싫다고 하고, 심지어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말하지도 않으니까.

정하담 ⓒ이영진

군데군데 전작이 떠오르는 순간이 있어요. 영분이 전단지를 붙이는 장면은 <스틸 플라워>와, 영분과 한희가 다리 위에서 만나는 장면은 <재꽃>과 연결된다고 느꼈어요. 그러고 보면 엔딩은 <들꽃>과 비슷한 것 같아요.

듣고 보니 정말 그렇구나. (웃음) <들꽃>으로 잠시 이야기를 돌아가면 그때 친구들이 이후에도 함께 잘 지냈으리라 생각하지 않아. 헤어질 때 만나는 사람들이 있잖아. <들꽃>에서 보여준 관계가 그런 거 같아. 아마 인물들은 각자 다른 사람을 만나든지 아니면 혼자서 살아가겠지. 근데 <바람의 언덕>에서는 앞으로 다가올 관계가 두렵다고 말해. 관계에 믿음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 “무서워, 우리가 잘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 진짜 더도 덜도 아니고 딱 반 발자국만 내디딘 거야. ‘영화 네 편을 거치면서 겨우 그만큼 왔구나, 나라는 인간은 이토록 관계를 신뢰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

 

사실 엔딩에서 영분과 한희가 대면하지만, 그들에게 다가올 미래가 완전하지는 않아 보였어요. 감독님 영화에서는 인물들이 어떤 관계를 이룬다고 해도, 대개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에서 끝나잖아요. 좀 더 관계가 깊어진 상태에서 출발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으세요? 영분과 한희의 미래라든지요.

지금 준비 중인 차기작에서 그런 관계를 그려보지 않을까 싶어. 유사가족에 가까운 형태를 이루거든. 서로 교감하고 연애도 하고. 근데 어쨌거나 다 같이 껴안으며 마무리하는 엔딩은 아니지. (웃음) <재꽃>도 어떻게 보면 유사가족이라고 부를 법한 관계였지만,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다가 밥상을 엎어버리잖아. 내가 관계 안에 있는 상태를 힘들어하는 것 같아. ‘저 사람이 정말 내 마음을 깊이 알고 있나? 나는 저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어려워.

<재꽃>
<들꽃>
<바람의 언덕>

그래선지 감독님 영화에는 주로 외롭고 슬픈 사람이 등장해요. <바람의 언덕>에서 한희와 영분을 보여줄 때, 첫 장면에서부터 뭔가 결핍된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맞아. 나는 캐릭터 설정할 때 배우로부터 많은 아이디어를 얻는 편이야. 배우의 인격을 그대로 따온다기보다는 배우를 보며 상상하는 것들로 인물을 만들어나가는 거지. 지금까지 작업했던 배우들 모두 내 눈에는 쓸쓸해 보였어.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이 가지. 어쩌면 내심 ‘외로운 사람만 진짜야’라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고. 하담이도 다양한 면을 지녔지만 처음에 오디션으로 만났을 때 그런 걸 느꼈거든. 장선 배우도 외로워 보였지. <소통과 거짓말>(연출 이승원, 2015)이 <스틸 플라워>와 같은 해에 영화제에서 소개되면서 장선 배우와 마주칠 기회가 더러 있었어. 뭔가 인생사를 듣거나 알아서가 아니라, 내 눈에 보이는 인상이 그랬던 거 같아. 이번에 함께 작업하면서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어. 여기서 더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서로에게 있던 것 같아. 한번은 전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는데 평소에 작업 얘기할 때와 목소리가 전혀 다른 거야. 그렇게 한희라는 캐릭터를 찾아 나갔지.

 

영화를 보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어요. 인물들은 왜 슬플까? 외롭다고 슬픈가? 사람이 혼자 있다고 해서 외로운가?

사람이 산다는 게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어. 특히 엄마를 볼 때. 너는 어때? 엄마를 보면 삶이 참 외롭고 그 안에 혼자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 아주 많다고 느껴지지 않니?

 

엄마를 볼 때는 안 그래요. 오히려 ‘기발하게 잘 사는구나, 우리 엄마!’ 이런 생각이 들죠. 위기를 스스로 돌파해나가는 분이거든요.

맞아, 사실 화목한 가정이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게 하담이네 가족이지. 형제끼리도 친하고 대화도 잘 오가잖아. 그러니까 하담이는 별로 외로운 애가 아닌데도 유난히 내가 그런 모습을 찾아내려고 했던 걸 수도 있겠다.

ⓒ이영진

결국 감독님이 외롭고 쓸쓸하다 보니 인물도 그렇게 바라보는 거 아닐까요?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다들 혼자일 때 편안하게 살지 못해요. 결핍된 사람들끼리 만나서 어떤 관계를 잠시 이루기도 하지만 곧 어그러지고요.

영화를 만들기 전에 미국에서 12년 정도 살았어. 당시에 힘든 일이 있어서 도망치듯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까 상황이 절망적인 거야. 엄마는 병이 들었고 조부모님도 일 년 만에 다 돌아가셨지. 결국에는 모두 헤어진다고, 다들 혼자 있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 그럼에도 어떤 의미가… 아니야, 난 망한 거 같아. 난 틀렸어. 관계를 맺다가도 대부분 망쳐버리거든. 영화를 만들면서 인간관계가 되게 협소해졌어. 아는 사람은 많지만 깊이 만나는 사람은 드무니까. 인연을 이어가는 소수를 들여다보면 그들도 각자 피폐한 사람들이고. 내가 만드는 영화에도 그런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어. 생각해보면 첫 영화는 욕심으로 만들었던 거 같아. 전계수 감독과 3년 동안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썼는데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지. 나를 증명하겠다는 욕구가 생기더라. 그러다가 점점 작업을 이어나가면서 생각이 바뀌었어. 영화가 내게 기쁜 일이 되었지. 무엇보다 친구들이 생겨서 좋았어. 영화가 아니라면 이토록 특별하고 근사한 친구들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싶으니까. 꽤 오랫동안 우리가 서로 마음을 헤아린다는 착각 속에서 살았던 거 같기도 해.

 

그게 착각이라면 지금 영화를 계속 만드는 이유는 뭐예요?

같이 작업해온 배우들과 다시 만나고 싶어. 그들도 나이를 먹잖아. 물론 나는 더 먹어버리고 있지만. (웃음) 나이에 맞는 고민과 이야기를 갖고서 다른 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해. 하담이가 지금 몇 살이지?

ⓒ이영진

스물일곱이요.

와, 스무 살에 처음 봤는데 시간 정말 빠르다. 그럼 난 이제 스물일곱이 된 너의 마음을 영화에 넣어볼 수 있겠다고 기대하는 거야. 너와 작업하고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은 언제나 상호적이었으니까. 말하자면 영화 안에서 가능한 가족인 거지. 일상적으로 의미하는 가족은 아니지만, 잠시 떨어졌다가 몇 년 만에 다시 영화를 통해 만나는 가족. 그걸 유지하고 싶어. 이상하지? 어떻게 보면 또 다른 유사가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좋네요. 이건 배우로서 늘 궁금했던 건데, 감독님과 인물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또 하나 중요했던 건 노동이었어요. 인물마다 직업을 부여하고 배우에게 실제로 그 일을 해보라고 하시잖아요. 막상 영화에서 일 자체가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아니라서 어떤 이유로 강조하시는지 듣고 싶어요.

어떻게 연기를 인도해야 할까, 라는 건 언제나 난감한 문제야. 시나리오는 언어적인 형태로 쓰일 수밖에 없는데, 사람은 결국 환경과 노동이라는 바탕에서 표현되거든. 시간이 쌓이며 몸에 밴 것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니까. 보통은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캐릭터 분석하며 리딩을 하잖아. 난 그걸 안 믿어. 배우들이 앉아서 대사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 ‘이번 영화는 망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차라리 인물이 경험했을 법한 일을 직접 해보는 것이 준비라고 믿어. 어떤 감정을 잘 연기해내는 배우는 너무 많지만, 인물에 다가가는 예의는 또 다른 영역이거든. 일하는 장면을 연기할 때 남의 손을 빌려서 한다는 건 말도 안 되지. 그 움직임에서 각자 리듬이 나오니까. 내가 어떤 사람을 ‘진짜’라고 느끼듯, 노동이 몸에 붙지 않은 연기는 ‘가짜’라고 생각해. 물론 여건상 어려울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불성실하기 때문이거든. 너무나 많은 부분을 시적으로만 표현하려고 하잖아. 예컨대 하담이도 <스틸 플라워> 촬영 당시, 뒷모습을 제대로 찾기 위해 일주일 동안 계속 걸었지. 걷는 일이 곧 삶인 친구인데 몸에 그게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고 하면서 말이야. <데어 윌 비 블러드>(연출 폴 토마스 앤더슨, 2007) 오프닝에서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곡괭이질 할 때, 정말 천만번은 같은 행위를 해본 사람다운 실루엣이 나오잖아. 실제로 촬영 6개월 전부터 땅을 팠다는 얘길 들었어. 난 그런 방식이 인물에게 다가가는 예의라고 생각해.

 

인물을 이루는 밑그림이 되는 거네요.

자기 소개할 때도 그렇잖아. 나는 땅 파는 사람이야, 나는 전기 기술자야, 나는 필라테스 강사야… 이렇게 무슨 일을 하는지 이야기해. 영화 속 인물도 마찬가지지. 근데 같은 노동을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손끝에 어떤 위험이 닿는지, 일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모르잖아. 배우로서는 무척 힘들겠지만 긴 시간 노력해야 할 부분이기도 해. 자칫 잘못하면 장면 하나에서 영화 전체의 리얼리티가 날아 가버릴 테니까. 몸으로 부딪치며 시간을 보낸 사람이 연기하면, 내가 앙상하게 썼던 순간조차 마음으로 연결된다고 느껴져.

<바람의 언덕>
<바람의 언덕>

‘마음’이 나와서 말인데, 이번 영화가 전작과 가장 다르게 느껴졌던 이유는 감독님의 태도 때문이었어요. 지금까지는 ‘저 인물이 어떤 마음인지 나는 모른다’는 태도였다면, <바람의 언덕>은 마치 실제로 아는 사람을 데려와서 찍은 것 같아요. 직설적인 대사도 많고 인물도 과거부터 추측할 수 있게끔 구성했어요.

아무래도 그동안 내가 알 수 없는 인물에 관해 말해왔잖아. 여성과 세대 이슈를 놓고 함부로 답을 내릴 수 없는 입장이었지. ‘나는 모른다, 배우들이 찾아와주길 바란다’고 얘기했던 거 같아. 이번에는 은경 선배나 준배 선배와는 얼추 나이대가 비슷하고, 작업 전후로 엄마와도 자주 대화했어. 훨씬 정리된 상태에서 진행하는 느낌이었지. 사실 한희는 <재꽃>의 해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어. 그 애가 자랐다면, 그래서 혼자 됐다면 어떨까. 다이렉트하게 잇지는 않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내 안에서 연결되는 부분은 있던 것 같아. 해별이 밝게 자라서 엄마를 만난다면 어떨지 정도로.

 

좀 더 내밀하면서도 속 시원하게 만든 영화처럼 보이는데 어떤 변화일까요?

나 역시 안 해봤던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야. 물론 <스틸 플라워>에서 하담은 온몸으로 말하지만 언어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잖아. <재꽃>도 마찬가지야. 하담이 혼자 있을 때 독백하는 거니까. 이번에는 대면한다고 생각했어. 한 번은 만나야 한다,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자각이 있었지. 너무 빤하지? (웃음) 근데 네 말대로 확실히 다르긴 한 것 같아. 마음도 그렇고 영화를 만드는 과정도 그랬어. 은경 선배가 연기한 영분은 결국 내 얘기라고 느꼈거든. 나랑 영분이 닮았고, 엄마가 한희랑 좀 닮았지. 엄마한테 힘들다고 말했을 때 정말 속이 시원하더라. 엄마도 툭 터놓고 말씀하셨어. “창문이 조금만 더 넓었으면 얼마나 여러 번 ‘흘러내리고’ 싶었는지 모른다”고 하셨지. 듣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어. 엄마는 말 그대로 헌신적인, 비유도 과장도 없이 정말 날 위해서 전단을 붙이는 분이잖아. 한희가 영화에서 영분에게 “나쁘게 말하지 마”라고 하는데, 실제로 엄마가 하는 말이야. 나쁜 말은 하는 것도 듣는 것도 힘드니까 제발 하지 말라고. 안 좋은 일이 벌어져도 한희처럼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시지.

<바람의 언덕>
<바람의 언덕>

한희가 ‘고아’라는 단어를 쓰잖아요. 지금까지 인물이 단 한 번도 그렇게 표현한 적은 없어서 되게 놀랐어요.

태백에서 돌아다니면서 다리를 발견했어. <재꽃>에서 너랑 해금이가 춤췄던 다리랑 비슷한 거야. ‘거기서 인물들이 만나면 어떨까? 그 만남이 뭐가 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스치듯 만날지 아니면 정말 대면을 할지 고민하는데, 왠지 마주할 수 있겠다 싶었어. 그럼 좋겠다는 마음이기도 했고. 여전히 하담이라는 캐릭터에 미안함을 느끼거든. 걔는 누군가에게 자기 마음을 온전히 토해내본 적이 없잖아. 한희가 말하는 건 그런 마음이야.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겠다. 당신이 나를 버린다고 해서 망가지지 않을 거다.” 거기서 영분도 물러서지 않지. 어지간하면 대충 얼버무리면서 도망가거나 그냥 고생했다면서 끌어안고 넘어갈 법도 한데 “나도 제대로 살아보고 싶었다”고 말하잖아. 우리가 살면서 보통 꺼내지 않는 마음인데,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 영화에서 인물들이 속마음을 풀어내본 적은 없으니까. 그나저나 하담이랑 얘기해선지 자꾸 전작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시작할 때는 독립적인 영화라고 여겼는데 지금은 이전 작품과 이어진다는 느낌이 들어. 못다 한 말을 여기서 해봤구나 싶네. 밉다는 말, 그래도 좋다는 말, 근데 나는 싫다는 말까지 전부.

 

택시 기사로 나온 김준배 배우는 그동안 감독님 영화에서 못 봤던 캐릭터였어요. 대개 연기에도 감독님 색깔이 섞여들기 마련인데, 준배는 전혀 다른 결을 지니면서도 자연스럽게 녹아들더라고요.

준배는 태백 같은 사람이야. 한 공간 또는 자연에 가까운 인간. 태백에 가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보니 은근히 외지인이 많더라. 탄광촌이었으니까 원주민이 훨씬 많을 것 같았는데, 돈을 좇아서 들고 나는 인구도 만만치 않은 거야. 택시도 이상하게 많고. 이방인인 나를 묘한 거리에서 받아주는 느낌이었어. 그렇게 준배라는 캐릭터를 만들었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바보짓을 하잖아. 수많은 사람을 상처 입히고 미안함을 느끼고, 그러면서도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지. 그게 중년을 넘어가는 삶 같기도 하거든. 영분이 한희의 존재를 확인하고 두려워하는 순간,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평가하지 않고 “그렇군요” 하면서 끄덕여주는 사람과 마주치길 바랐어. 두 시간 정도 막걸리 마시면서 이야기하면 폭 안겼다가 나올 수 있을 거 같은, 다음날에는 다시 보고 싶지는 않은 사람. 영분에게 준배가 그런 셈이지. 준배 선배가 자신의 인생과 태백이라는 공간을 엮어서 대사를 생각해오셨어. 내 영화에서 한 번도 없던, 어떻게 보면 무해한 캐릭터지.

 

처음에 하려던 질문을 가장 마지막에 하게 되네요. 왜 하필 태백이었어요? 안 그래도 탄광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멀고 낯선 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했거든. 『너는 검정』(김성희, 창비)이라는 그림책을 보고 태백에 관심이 생기기도 했고. 근데 탄광을 말하기에는 내가 깊이를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했어. 탄광 이야기를 시작하면 정선 카지노 등 사회적 이슈와 연결될 텐데, 애초에 내가 그린 그림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태백이 주는 느낌만 영화에 가져 와야겠다고 결정했지. 음악을 많이 쓴 이유도 공간과 이어져. 인물이 마음을 표현하지 않을 때, 음악이 인물을 바라봐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산처럼 곁에 서서 지켜봐달라고.

ⓒ이영진

장면으로 시작해 인물을 거쳐 공간으로 끝맺은 긴 대화였다. 말과 말 사이에는 빠짐없이 ‘마음’이 등장했다. 배우와 감독의 마음이었고, 묻는 사람과 답하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애틋하고 정겨운 시간을 그 마음 어딘가에 저장한 채 두 사람은 헤어졌다. 때로는 집이 되고 때로는 길이 되는 영화가 있으니 곧 다시 만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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