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이 아니라면
<더 터닝>
손시내 / Choice / 2020-04-03

음산한 저택과 거기 얽힌 모종의 사연을 특징으로 하는 소위 ‘귀신들린 집’ 영화는 그 수가 하도 많아 이젠 익숙하다고 말하기도 멋쩍을 정도가 됐다. 바람에 덜컹거리는 창문과 휘날리는 흰 커튼, 오래된 저택의 으스스한 공기가 자아내는 긴장감, 초자연적 현상이 빚어내는 공포에 점차 잠식당해가는 주인공…. 자칫하면 관습을 넘어 진부해지기 십상이지만, 소재 자체의 매혹이 강렬한 만큼 오래도록 많은 작품이 이 계열의 공포 영화를 표방해왔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 『나사의 회전』에 새로운 설정을 더한 <더 터닝>도 그중 하나다. <컨저링>(제임스 완, 2013) 시리즈의 각본가 헤이스 형제는 원작을 각색하며 시대적 배경을 19세기에서 1990년대로 옮겼고, 소설에는 서술되지 않는 주인공의 가족사를 덧붙였다. 감독인 플로리아 시지스몬디는 데이빗 보위, 마릴린 맨슨, 레이디 가가와 같은 뮤지션들의 뮤직비디오를 만든 것으로 유명한데, 그간의 작업처럼 색채와 사물을 통해 기묘한 분위기를 부각한 연출이 눈에 띈다.

이야기는 호수와 숲으로 둘러싸인 저택에 케이트(맥켄지 데이비스)가 입주 가정교사로 고용되면서 시작된다. 저택의 주인은 일찍이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플로라(브루클린 프린스)와 마일스(핀 울프하드) 남매. 이들을 나이든 가정부 그로스 부인(바바라 미튼)이 돌보고 있다. 새로운 생활에 들뜬 것도 잠시, 케이트는 첫날부터 기이한 일을 겪는다. 젊은 여자의 환영을 보는가 하면 남녀가 다투는 환청을 듣기도 하고 기분 나쁜 악몽에 밤잠을 설친다. 게다가 기숙학교에서 퇴학당해 집으로 돌아온 마일스는 시종일관 이상한 행동으로 그녀의 신경을 긁고, 활달하고 귀여운 플로라도 종종 수상쩍은 말을 던진다. 하루가 다르게 예민해지고 수척해지는 케이트. 그녀는 저택에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의심하게 된다.

<더 터닝>
<더 터닝>

비밀을 풀 열쇠는 비교적 손쉽게 쥐어진다. 말도 없이 그만뒀다는 전임 가정교사 제슬(데나 톰센)이 일기장을 남긴 것이다. 거기엔 마일스의 승마 선생이었던 퀸트(나이올 그레이그 펄턴)의 폭력적인 행태와 마일스와 퀸트의 관계를 염려하는 글이 적혀있다. 케이트는 남성성을 미숙하게 표출하는 마일스의 무례하고 거만한 행동도, 밤이면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도 모두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는 퀸트의 영향이라고 여긴다. 의혹을 품을수록 그녀는 퀸트와 제슬의 환영에 더 심하게 시달리고 결국엔 도저히 생활이 불가능한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하루빨리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동시에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망설이던 그때, 케이트에게 소포 하나가 날아든다. 바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가 보낸 시커먼 그림이다. 이를 본 그로스 부인은 느닷없이 가족은 고를 수 없고, 유전에서 벗어나긴 어렵다는 말을 흘린다. 케이트가 사실 자신의 망상 속에 있다는 뜻일까.

주인공이 겪는 일련의 일이 객관적 현실인지 머릿속 상상인지 구별되지 않는 모호함은 단연 원작의 특성이다. 『나사의 회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작품 중 <공포의 대저택>(잭 클레이튼, 1961)이나 <디 아더스>(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2001)처럼 절제된 방식으로 긴장과 불안을 조성하고 은밀한 의심을 흘리는 영화들은 그 모호함에 집중해서 호평받았다. 그런 선택은 나사의 미묘한 뒤틀림처럼 작은 계기로 인해 두 가지 가능성이 뒤섞이고 이야기 전체가 달리 보이는 흥미로움으로 이어진다. <더 터닝> 또한 케이트가 느끼는 혼란에 주의를 기울이긴 하지만, 과도한 시각효과에 기대고 캐릭터의 꺼림칙한 면모도 과장된 탓에 모호하다기보다는 어정쩡하고 뜬금없게 느껴지는 순간이 많다. 지난 1월 북미개봉 이후 이 영화는 로튼 토마토 신선도 12%, IMDB 평점 3.7점을 기록하는 등 관객으로부터 혹독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더 터닝>
<더 터닝>

하지만 원작을 많이 변형한 만큼 시대의 변화에 맞춰 곱씹어볼 만한 다른 지점도 있다. 특히 제슬과 퀸트의 관계를 다루는 부분이다.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맥락에선 그들의 성애가 ‘부적절한 관계’, ‘나쁜 짓’처럼 도덕에 어긋난 추문으로 묘사됐다면, <더 터닝>은 그것을 명확한 성적 폭력으로 재해석한다. 영화엔 여성의 사적 공간에 멋대로 침입하고 몰래 사진을 찍어 괴롭히며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접촉하는 남성의 행동이 드러난다. 이 영화의 공포는 일정 부분 여성이 그와 같은 남성적 시선과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데서 발생한다. 플로라의 트라우마나 제슬의 일기, 그리고 케이트의 결단에 이르기까지 영화 전반에 걸쳐 ‘탈출’이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것도 그런 흐름에서 보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투박한 진열에 그치고 있어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더 터닝 The Turning 감독 플로리아 시지스몬디 출연 맥켄지 데이비스, 핀 울프하드, 브루클린 프린스, 바바라 마튼 수입 CJ엔터테인먼트 배급 스마일이엔티 제작연도 2020년 상영시간 94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0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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