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살고자 했던 노무현은 역대 대통령 중 최초로 퇴임 후 귀향한다. <시민 노무현>(2019)은 봉하마을로 내려간 노무현의 생애 마지막을 차분히 되짚으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시간을 스크린에 옮겨 놓는다. 백재호 감독은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영화 말미에 젊은 노무현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1988년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되어 대정부질문에 나선 노무현은 투박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더불어 사는” 이상적 사회를 말한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덧붙인다. “적어도 살기가 힘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없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이때 <시민 노무현>의 카메라가 비추는 장소는 의미심장하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천막을 세우고 농성했던 광화문과 생활고로 힘들어하던 세 모녀가 세상을 등진 송파구. 여성 혐오와 폭력에 관한 근본적 질문이 터져 나온 강남역 10번 출구와 강제철거와 과잉진압으로 31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용산 4구역. 영화에 담긴 공간들은 추모와 투쟁, 애도와 반성이 동시에 진행된 자리이며, 고인이 된 이의 목소리가 여전히 유효함을 알려주는 현장이다. 카메라가 바라보는 장소 중에는 구의역도 있다. 2016년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김군’은 지하철 스크린 도어를 정비하다가 달려오는 기차와 안전문 사이에 끼어 숨졌다. 제대로 된 안전장비를 갖추지 못했으며, 곁에는 단 한 명의 동료도 없었다.
‘구의역 김군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제2의 김군’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전에도 또 다른 ‘김군’이 있었다. 이름은 김동준, 2014년 당시 동아마이스터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프로그래머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입학했으나, 졸업이 다가왔을 때 눈앞에 놓인 선택지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그는 현장실습생 신분으로 CJ제일제당 진천공장에서 근무했고, 팀장에게 폭행당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은유 작가는 김동준과 그의 가족, 사건 담당 노무사, 사고로 목숨을 잃은 현장실습생 아들을 둔 아버지, 특성화고 재학생 및 졸업생 등을 2년에 걸쳐 인터뷰하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2019)으로 엮어냈다. 책에 실린 목소리들은 반문한다. 당신은 지금 더불어 살고 있냐고.
<시민 노무현>을 연출한 백재호 감독이 은유 작가의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선뜻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을 계속해서 이어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말하기에 앞서 듣고, 주장하기보다는 전달하기 위해 애쓰는 두 사람이 서로 공명한 지점은 어디일까. 모두가 침묵하고 외면하는 죽음에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를 준비 중인 백재호 감독과 은유 작가에게 만남을 청했다. 글과 영화로 알지 못하는 세상을 더듬거리고 어루만져온 그들은 이미 같은 자리에 함께 서 있었다.
첫 만남은 언제였나요.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 2019년 6월에 출간되었고, 그해 겨울쯤 감독님이 영화화를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감독으로선 책을 읽고 고민하는 시간도 꽤 필요했을 텐데요.
백재호_ 작년 여름에 책이 나오자마자 읽었어요. 전작을 함께했던 조은성 프로듀서가 읽어보라고 하더라고요. <시민 노무현>을 마무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어요. 차기작으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구상하던 중이기도 했고요. 조 프로듀서가 평소답지 않게 급한 투로 말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빨리 만들어야 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죠. 책은 한 번에 쭉 봤어요. 서문을 읽고 나서 손에서 놓을 수가 없더라고요. 게다가 북 콘서트나 유가족 모임 같은 행사가 예정된 상황이라 하루라도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어요. 마지막 장을 덮은 다음에 바로 조 프로듀서에게 연락해서 “이거 합시다”라고 얘기했죠. 작가님과는 8월쯤 처음 미팅했어요.
작가님은 연락받고 어떠셨나요. 감독이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 이유와 목표를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은유_ 관심을 가져준 것 자체가 검증 아닐까요? (웃음) 돈 안 되고 무거운 이야기인데 영화를 만들겠다고 하니까요. 그것만으로도 신뢰가 생겼고, 어떻게든 사회에 이 이야기가 계속 퍼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터라 흔쾌히 받아들였어요. 제안 왔을 당시에는 기획안을 함께 보내주셨어요. 제작사, 감독, 제작진 등을 소개한 내용이었고, 감독님이 만들었던 전작을 살펴보니 저에게도 익숙한 분야의 영화더라고요.

영화를 좋아하시잖아요. 독립영화도 즐겨 보시고요. SNS에 올린 영화 감상평을 살펴보니 <동주>(연출 이준익, 2015)나 <파수꾼>(연출 윤성현, 2010)은 여러 번 보신 듯하고, 최근 개봉한 <기억의 전쟁>(연출 이길보라, 2019) 시사회에도 다녀오셨더라고요.
은유_ 특별히 독립영화라서 마음이 갔다기보다는 저랑 결이 맞는 것 같아요. 독립영화에서는 상업영화가 다루지 않는 이야기, 현실에서 가려져 있거나 사소하다고 치부되는 이야기를 보여주니까요. 제가 세상에 관심을 두는 부분과 맞닿는 거죠. 게다가 영화도 책과 마찬가지로 한 번 보기 시작하면 계속 보이잖아요. ‘저 감독은 이전에는 어떤 작품을 만들었지?’ 하면서 찾아보는 거죠. 영화 관람이 제게는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에요. 두뇌 활동을 쉬게 해주는 역할을 하죠. 책이 출간되고 나서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가 스트레스를 어떻게 감당했느냐는 거였어요. 당신도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풀었냐는 거였죠. 저는 글 쓰다가 너무 답답하면 극장에 갔어요. 영화가 참 좋더라고요. 두 시간만 보면 되잖아요. (웃음) 그 시간 안에 완결될 뿐만 아니라, 최대한 수동적으로 있어도 자극이 들어오죠. 아주 아름답게요.
백재호_ 영화 보면 죄책감도 덜하죠. 능동적으로 뭔가를 하지 않아도 시간을 영 허투루 보내지는 않는다는 느낌이거든요. (웃음)
두 분이 평소에도 주기적으로 만나신다고요.
은유_ 그렇죠, 이제 운명 공동체니까. (웃음) 누구나 작업할 때 외롭잖아요. 같이 얘기하는 게 좋거든요. 저도 책에 못다 한 이야기를 영화에서 어떻게든 좀 풀어볼까 싶기도 하고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공통 언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짐작해요. 나누었던 모든 말이 영화에 쓰이지는 않겠지만, 추후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 때 기준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백재호_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전에, 특히 유가족분들 뵙기 전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어요. 저로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측면에서 의견을 주시기도 하고요. 먼저 유가족과 관계 맺은 선배 입장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죠. 덕분에 유가족을 만나는 과정이 그나마 덜 힘들었던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가 아니기 때문에 책을 극화하면서 완전히 뒤집는 부분이 있거든요. 지금은 트리트먼트를 쓰는 단계인데, 한 번씩 보내드리고 피드백을 받아요. 저보다 훨씬 대중적인 시선으로 봐주시니까 큰 힘이 되죠.
은유_ 누가 누구의 부족함을 채운다고 할 수는 없어요. 저는 영화를 보는 관객일 뿐 창작자는 아니니까요.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이 영화적으로 재현되는 게 중요하지, 그냥 재현되기만 하면 좋은 게 아니잖아요.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어설프게 얘기했다가 감독님을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고요. 창작자는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는 있지만, 전부 다 창작에 반영하지는 않아요. 못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죠. 어쨌든 최종 선택은 감독님의 몫이고, 저야 조금 더 적극적인 독자이자 관객으로서 이야기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조심스럽지만 그냥 의견으로 들어달라고요. 대중성도 유일한 기준은 아닌 것 같아요. 물론 많은 관객이 보면 좋겠지만, 중요한 건 실패해도 최선을 다해서 실패해야 한다는 거죠. 사실 실패와 성공은 관객이 정해주는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결국 창작자인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봐야 미련이 없는 거죠. 감독님이 그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선배이자 동료로서 돕고 싶어요. 꼭 나이 때문은 아니지만, 작년부터 쉰을 앞두고 준비해온 게 있어요. 함께 글 쓰는 후배들, 열악한 환경에서 작가를 직업으로 삼고 생활하는 친구들을 위해서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요. 감독님이 그 친구들과 또래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슷한 마음이 생기고요. 나이를 떠나 유경험자로서 다가가려고 해요. 저에게는 피해자 가족을 만나본 역사가 있으니, 감독님께 제가 보고 겪은 바를 나눠드리려고요. 결을 살려내는 힘은 결국 지식과 경험에서 나오잖아요.
두 분이 같이 본 영화도 있나요?
은유_ 감독님이 <아들>(연출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2002) 등을 얘기해줘서 봤어요. <파수꾼>을 보고 나서는 이제훈 배우에게 푹 빠져서 다른 작품까지 다 찾아봤고요. (웃음) 얼마 전에는 이창동 감독의 <시>(2010)도 다시 봤는데, 결국 피해와 가해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책을 쓸 때 노동에 관한 르포는 거의 다 읽어보면서 참고할 만한 문장이나 장면을 정리했거든요. 영화도 그런 식으로 보는 것 같아요. 제 안에 화두가 있으면 모든 게 연결되어 보이잖아요. 요즘 영화를 볼 때마다 자꾸 책에 아쉬움이 남아요.
어떤 아쉬움인가요.
은유_ ‘아, 이렇게 바라볼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요. <파수꾼>을 보고 굉장히 충격받았어요. 영화는 세 남학생을 중심으로 폭력, 관계, 우정, 성장 등 여러 지점을 포착해내잖아요. 저에게 동준이는 부당한 폭력에 노출된 사회적 약자였고, 그 외에 다른 프레임으로 동준이의 죽음을 생각해볼 계기는 마땅히 없었어요. 청소년 노동자 산재 사건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했던 거죠. 책을 쓸 당시에 뭔가를 떠올렸다고 해도 내용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상상하고 짐작한 걸 쓸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아쉽더라고요. 원래 모든 일이 끝나면 아쉽잖아요.
백재호_ 저는 그래서 더 좋았거든요. 책에 나오지 않은 부분을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니까요. 제 경험에 비추어서 스스로 고민하고 추측해보는 순간도 있고요.
은유_ 줄곧 동준이에 관한 정보가 적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님을 통해서만 전해 들을 수 있는데, 어머님에게는 어쨌든 어머님의 목소리가 있으니까요. 그밖에 더 상상력을 동원해보지는 못했던 거죠. 근데 제 안에 ‘남자아이’라는 낯선 자아를 새로 들여놓고 생각하니까,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한 번은 감독님이랑 얘기를 나누다가 “동준이가 왜 죽었을까요?”라고 물어봤어요. 그때 감독님이 “눈이 내려서 그랬을 수도 있죠.”라고 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 싶었죠. 윤성현 감독이 <파수꾼> 개봉 당시, 어느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가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지나치게 단선적이라고 지적했더라고요. 10대 청소년의 자살이라고 하면 으레 성적 비관이나 실연 등을 원인 삼는데, 그렇게 단순하게 죽음을 요약해버리는 방식이 한 사람을 납작하게 만든다고요. 기사를 읽으면서 ‘저게 나야, 내가 그랬네’ 했죠. (웃음) 동준이의 죽음은 저한테 언제까지나 수수께끼일 텐데, 단서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너무 일찍 생각의 문을 닫지는 않았나 싶어요. 그런 후회와 반성을 하죠.
현재 영화는 어느 정도까지 진행된 상황인가요.
백재호_ 도서 판권을 계약했고 메인 제작사와 제작진까지는 정해졌어요. 예산 규모에 따라 추후 제작사가 더 생길 수도 있겠죠. 현재는 트리트먼트를 수정하는 중이에요. 재차 ‘새로 고침’ 상태예요. (웃음)
영화화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튀어나온 질문은 “다큐멘터리요?”였어요. 직전에 연출한 작품이 <시민 노무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책 자체가 실제 당사자의 구술을 엮어낸 인터뷰집이기 때문이었어요. 특별히 픽션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백재호_ 형식에 관해서 몇 차례 생각이 바뀌었어요. ‘어떻게 하면 이 사건을 더 알릴 수 있을까? 책에 담긴 내용을 영화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 효과적일까?’라는 고민을 바탕으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장단점을 하나씩 되짚어봤어요. 초반에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쪽으로 기울었어요. 이미 책을 통해 목소리를 냈던 유가족을 다시 카메라 앞에 데려와서 인터뷰한다는 것 자체가 조심스럽게 느껴지더라고요. <원더풀 라이프>(연출 고레에다 히로카즈, 1998)처럼 실제와 픽션을 섞어서 보여주는 형식이 낫겠다 싶었죠. 여러 고민을 거치다가 결국에는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자’는 일차적 목표로 돌아갔어요.
은유_ 제가 영화를 좋아하는데, 이렇게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본 적은 없잖아요. 신기하더라고요. 주변에 시나 소설을 쓰는 친구들은 있지만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은 없거든요. 책이라는 명분도 있지만, 옆에서 감독님을 지켜보고 대화하는 이유에는 개인적인 호기심도 커요. 감독님 만나기 전에 시나리오 관련 도서를 여섯 권 빌려놓기도 했어요. 물론 책은 하나도 못 봤죠. (웃음) 트리트먼트를 쓰고 가지를 치면서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흥미로워요. 작년 말에는 감독님과 연극 <자전거도둑헬멧을쓴소년>(연출 윤한솔, 각색 김연주)을 같이 봤어요. 박완서 작가의 『자전거 도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청소년극인데,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도 모티브로 가져가서 이야기를 확장해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동안 청소년극에서는 늘 가족, 친구, 성적에 관해 이야기했지, 노동이라는 주제를 다뤄보기는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두 차례 미팅하면서 대본을 봤어요. 사실 저는 봐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이 글이 어떻게 연극으로 재현되는지요. 연극 보면서 새삼 놀랐죠. 영화 작업을 지켜보면서도 그런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 같아요.
책에는 김동준 씨가 남긴 기록을 재구성한 글을 포함해서, 동준 씨 가족과 담당 노무사 등 총 아홉 명의 목소리가 담겼어요. 주인공과 등장인물을 어느 범위에서 추려낼지 궁금해요.
백재호_ 누구의 시선으로 영화를 진행해야 할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내야 가급적 많은 관객이 공감할지 고민이에요. 한참 쓰고 나서 보면, 지나온 시간만큼 생각이 또 바뀌더라고요. 요즘엔 코로나19가 확산되는 광경을 보면서 또 다른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해요. 결국 마지노선까지는 계속 수정해보다가 ‘이거다!’라는 느낌이 왔을 때 결정하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 쓰는 버전에서는 주인공을 동준이의 동료로 설정했어요. 실제 책에는 나오지 않은 인물인데, 관객과 가장 익숙한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닐까 싶어요.

마지노선이라고 하면 언제까지인가요.
백재호_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는 촬영할 예정이라 5-6월 정도를 예상해요. 실제로도 그렇고, 계절적 배경은 아무래도 겨울이면 좋겠거든요.
두 분의 목표는 일치한다고 봐요. 이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이요. 자연스럽게 영화의 규모나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겠죠.
백재호_ 시나리오가 나와야 예산을 확정할 수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적어도 저예산 상업영화를 목표해야겠죠.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방식으로는 무리가 있어요.
투자, 캐스팅, 로케이션 등 생각해보면 무엇 하나 쉽지가 않겠더라고요.
백재호_ 동준이가 일했던 회사는 무려 CJ에요. (웃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는데, 만약 누군가가 영화를 방해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마케팅 효과를 보지 않을까요? 꾸며낸 허구가 아니라 이미 벌어진 실제 사건이잖아요. 은폐한다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하겠죠. 반대로 도와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도 반성했고 이제 환경을 개선했다는 의미로요.
김동준 씨의 경우 “큰 덩치와 강렬한 인상”이라는 특정한 외양 묘사가 나와요. 말 그대로 알지 못하는 인물인데, 책을 읽다 보니 그 묘사에 기대어서 이야기를 따라가는 순간이 있더라고요. 동준 씨가 어릴 적에 당한 놀림, 신체를 통해 느끼는 우월감, 직장에서 겪었을 굴욕 등이 몸에 반복적으로 저장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백재호_ 저도 책을 읽으면서 외모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초고 쓸 때는 동준이 실명으로 적었다가, 최근에는 가장 이미지가 비슷한 배우 이름으로 바꿔 쓰고 있어요. <작은 빛>(연출 조민재, 2018)에 출연한 곽진무 배우 이름을 빌려 쓰기도 했죠. (웃음)
은유_ 안 그래도 배우와 관련해서 몇 번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비슷한 나이의 배우 중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외모니까요. 제 친구도 책을 읽고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한 아이가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대략적인 이야기만 알았을 때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작고 왜소한 아이일 거라고 예상했다는 거죠. 어떻게 보면 동준이는 이중고에 처했던 거잖아요. 직장에서는 “일도 못하는 게 덩치만 크다, 덩치도 큰 게 우냐?”라는 식으로 공격받았을 테고요. 워낙 ‘몸평’이 일상화된 사회니까요.

어머니인 강석경 씨가 대화에 응하는 태도도 인상적이에요. 솔직한 이야기꾼이자 치유력을 갖춘 상담사 같았어요. 작가님은 실제로는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지, 영화에서 어떤 인물로 그려지길 바라시는지 궁금해요.
은유_ 첫 만남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평택역에서 만났는데 화사한 스카프를 매고 환하게 웃고 계셨거든요. 그때 놀라면서 비로소 깨달았죠. 나한테도 어떤 ‘피해자다움’의 상이 있었구나. 자식을 잃은 엄마라면 응당 그러할 것이라는 편견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의욕을 전부 상실한 피해자의 모습을 예상했던 거죠. 사건 이후 3년이 지난 무렵이었어요. 그동안 강석경 씨는 아들의 죽음을 수천수만 번 곱씹었을 거예요. 책에도 썼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말 좋았어요. 저로서는 이르러보지 못한 사유의 지점을 보여주셨거든요. 삶을 숙고하고 통찰해내는 힘을 길러내신 거죠. 관계에서 약자의 자리에 놓인 사람이 지닌 예민함이 있잖아요. 얘기 들으면서 많이 배웠어요. 물론 슬프고 속상하기도 했어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감정에 저를 데려가 주는 분이니까요. 하지만 분명히 가르침과 기운을 얻는 시간이었어요. 자기 치유를 거쳐서 다시 이야기하는 것,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결심하신 것 자체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책은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에서 출발해서 같은 맥락에 놓인 다양한 사회 문제를 짚어내요. 삼성반도체 노동자 황유미 씨와 반올림도 나오고, 세월호 유가족과의 만남도 언급하죠. <또 하나의 약속>(연출 김태윤, 2013)과 <생일>(연출 이종언, 2018) 등이 떠오르는데, 앞선 작품과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지도 궁금해요.
백재호_ 책에서 이야기하는 사건은 현재로서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고, 지금도 일어나는 일이에요. 저와 제 주변 사람이 당사자가 될 가능성도 늘 있다고 생각하고요. 영화가 그저 유가족만의 이야기라든지 특수한 사건으로 보이기를 원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자기 얘기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죽음은 정말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남겨질 테니까요. 영화의 시선이나 주인공은 최대한 관객과 가깝게 정하려고 해요. 동준이가 작업 상태에서 사고를 당한 게 아니라 자살을 선택했다는 점도 분명히 의미하는 바가 있고요. 피해와 가해가 얽히는 지점이라든지, 폭력을 방관하며 공범이 될 가능성 같은 부분도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물론 완성된 영화는 전혀 다를 수도 있겠지만요. (웃음)
대부분 유가족에게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사건의 현재성을 말하고 싶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일상이 얼마나 회복되기 어려운지, 개인의 죽음이 얼마나 복잡하게 사회와 맞물리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요. 사건 이후 누구보다 큰 폭으로 변화하는 인물이기도 하고요. 다만 익숙한 방식이라 관객에게는 이미 다 아는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봐요.
백재호_ 맞아요. 작가님과 함께 동준이 산소에 가면서 꽤 길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당시에는 동준이 어머니 시점으로 글을 썼는데, 그러다 보니 영화를 시작했던 첫 마음과 점점 멀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애초에 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동준이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요. 작가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제가 놓쳤던 부분이 보였고, 다시 환기해주셔서 길을 다잡을 수 있었죠. 그래서 가상의 인물인 동준이 동료를 영화에 불러온 거예요. 동준이나 동준이 어머니가 아닌, 아예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죠.
은유_ 슬픔이 없다고 말해도 안 되지만, 슬픔이 전부라고 말할 수도 없어요. 사람들이 영화를 보며 엉엉 울고 나와서 “역시 자식을 잃은 부모는 슬퍼”라는 결론에 다다르지는 않았으면 해요.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청소년 노동자이지, 유가족의 슬픔이 아니거든요. 그럼 세월호나 다른 산재 피해를 다룬 기존 영화와도 크게 차별성이 없고요. 우리의 노동 문제를 생각해보자는 의미에서 가장 취약한 노동자인 청소년 노동자를 이야기하려는 것이고, 가장 낮은 지점에서부터 채워나가며 보편적인 이야기에 도달할 때 영화의 기획 의도와도 좀 더 맞지 않을까 싶었어요. 사실 책을 만들 때도 편집자와 가장 중요하게 논의했던 부분이에요. 유가족이나 그들이 느끼는 슬픔에 앞서, 어떻게든 청소년 노동자가 주인공으로 드러나는 방향에 역점을 두었어요.

작가님은 타인의 죽음을 본인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가만히 사회 구조만 비판하는 한계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요. 영화도 비슷한 위험을 안고 있죠. “그래도 나는 이 문제를 알아, 돈 주고 이런 영화를 봤어”라는 식으로 면죄부를 얻는다고 해야 할까요. 한편으로는 사회 문제를 다루는 작품의 경우, 매번 보는 사람들만 찾아본다는 한계도 있어요.
백재호_ 계속 이어지는 고민이에요. 책보다 영화는 훨씬 수동적인 매체잖아요.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관객 각자 집과 삶터로 돌아가서도 계속 생각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삶의 어떤 순간에 참고가 될 만한 영화로 완성하는 게 바람이에요. 영화 속 누군가와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어떤 선택을 내려야만 할 때요. 결국 강요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일종의 세뇌를 거듭해야겠죠. (웃음) 영화 안에 하고 싶은 말을 잘 심어놓으면서요. 영화는 이미지로 보여주다 보니 책보다는 좀 더 쉽게 가닿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어요.
은유_ 글을 쓰고 강연하는 저에게도 정말 어려운 문제에요. 얼마 전에 수업하면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어요. 환경 문제를 다룬 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사실 안 읽어도 되는 사람들이라고요. (웃음) 제 책도 마찬가지죠. 대중과 소통하고 싶은 작가라면 분명히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에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무조건 얘기할 거야. 안 듣는 사람은 어쩔 수 없어.”라는 방식으로는 안 돼요. 어떻게 하면 통로를 만들 수 있을까요. 무관심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이들 또한 본인 삶에 이 이야기를 갖고 올 수 있도록 길을 터주어야 할 텐데, 아직은 방법을 잘 모르겠어요.
백재호_ 출판사가 이 책을 작가님에게 제안한 이유가 바로 그거라고 생각해요. 누구보다 작가님이 이야기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가닿으리라는 판단을 내렸겠죠. 저 역시 그런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요. <그들이 죽었다>(2014)는 친구들과 함께 보고 싶었고, <대관람차>(공동연출 이희섭, 2018)는 독립영화를 즐겨 보는 관객들이 볼 거라고 생각했어요. 대중이라는 집단을 상상한 건 <시민 노무현>인데, 그러면서도 결국 관객은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 주변분들 정도일 거라고 예상했죠. 이번 작품은 확실히 달라요. 좀 더 욕심이 나죠. 최소한 저예산 상업영화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이유예요. 예를 들어 <도가니>(연출 황동혁, 2011)는 큰 규모로 제작되었고 흥행했어요. 개봉 이후에는 사회 인식에 영향을 미치며 일명 ‘도가니법’이라는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데 힘을 발휘했고요. 그런 성과를 거두는 방향이 맞지 않나 싶어요. 한편 연출자 입장에서는 예술도 하고 싶고요. 지금도 그 사이에서 마음이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거죠. (웃음)
은유_ 소위 말하는 결과나 의미란, 판단을 내리는 시점이 언제인지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봐요.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에 형사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지도록 요구하는 긴 싸움에서 이뤄진 하나의 유의미한 시도였죠. 생각해보면 세상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변화하는 것 같아요. 반올림 활동가 중 한 분이 감격했다면서 해준 얘기가 있어요. 활동 초반에는 다들 반올림이 뭐 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검색하기도 어려웠는데, 몇 년 지나서 어느 날 택시를 탔더니 기사가 반올림을 알더래요. 인식의 변화를 확인하기까지는 시간이 정말 더디게 흐르지만, 길게 보면 분명히 일어나는 일이에요. 어떤 지향은 가지되, 결과를 너무 빠르게 판단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하는 거니까요. 실패도 성공도 어쩌면 먼 훗날에야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떤 관객을 기대하나요. 책에는 기성세대에게 관심과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도 있지만, 무엇보다 동준 씨와 비슷한 또래인 청소년을 향해 건네는 메시지가 선명해요.
은유_ 독자를 누구로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책의 대중성이 어느 정도 정해지듯 영화도 비슷하리라 생각해요. 감독님에게 어떤 관객을 상상하는지 물어봤을 때 회사원이라고 대답하더라고요. 이건 청소년 노동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일터 괴롭힘 문제를 다루잖아요. 조직에서 제일 취약한 위치에 놓인 청소년 노동자가 피해를 본 거죠. 나이가 어려서, 몸이 약해서, 여성이라서, 경력이 낮아서 등 약자의 위치성은 계속 바뀌어요.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라고 해도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전혀 다른 직종으로 재취업을 한다면, 처음부터 다시 일을 배워야 하겠죠. 동준이 어머니가 말씀하셨듯이 그때 우리가 서로를 살필 수 있는 눈과 가슴을 가진다면 좋겠어요. 얘기하다 보니 생각나는데, 아까 오는 길에 강연 섭외 전화를 받았어요. 고등학교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교재 삼아서 함께 읽고 비경쟁 토론을 진행한대요. 앞으로 이런 기회가 주어질 때 영화도 같이 보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아이들은 영상을 훨씬 익숙하게 받아들이니까요. 책 한 권을 읽을 때보다는 상황을 더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요. 청소년에게는 인권이라든지 노동에 관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창구가 생각보다 부족하거든요.
책 서문에 보면 “인터뷰 원본에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울 것인가는 글 쓰는 사람의 선택”이라는 말이 나와요. 영화를 만드는 연출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숙제겠죠. 결국 자기 자신에게 믿음이 없다면 시작하지 못할 영화 같아요.
백재호_ 어쨌거나 완성은 한다는 믿음? (웃음) 중도에 포기하며 엎어버린 적은 아직 없으니까요.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최소한 거짓말은 안 할 거예요.
은유_ 무슨 거짓말이요?
백재호_ 흉내 내기요. 모르는데 아는 척, 안 하면서 하는 척하지는 않을 거예요. 친구들 만나서 이 작품에 느끼는 부담감을 털어놓을 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분명히 저보다 잘 만들 수 있는 감독이 많은데, 그들이 안 하는 바람에 제가 한다고요. (웃음) 이 이야기가 저에게까지 온 이상 어떻게든 책임감을 갖고 해내야죠.
은유_ 남들이 안 해서 하는 거랑 다르죠. 만날 연이니까 만난 거예요. 운명이니까 만났다고 생각하세요. (웃음) 게다가 감독님에게는 저와는 다른 장점과 강점이 있거든요. 저는 제 한계를 분명히 알아요. 노동 문제에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저만의 프레임이 확고하죠. 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동시에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한계라고 생각해요. 감독님은 저나 그 누구와도 다르게 접근할 수 있는 관점과 안목이 있어요. 분명히 노동 문제에 긴 시간 천착해온 감독이 있을 거예요. 굳이 비교하면 감독님보다 더 깊이 있는 경험과 지식을 가졌겠지만, 같은 맥락에서 그분도 한계가 있는 거죠. 감독님은 감독님만 할 수 있는 영화가 있어요.

감독님 전작을 펼쳐놓고 보니 연결이 어색하지 않더라고요. <시민 노무현>도 그렇지만, <대관람차> 또한 지금 여기에 부재한 누군가를 애도하는 마음이 담긴 영화잖아요. 은유 작가님은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이전에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인터뷰집 『폭력과 존엄 사이』를 펴내셨고, 다양한 지면을 통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를 전달해오고 계세요. 두 분은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요. 왜 이런 이야기에 자꾸 마음이 갈까요.
은유_ 흥분이 주는 강렬함이 있어요. 피가 아주 빠르게 도는 느낌이요. 흥분이라는 단어가 오해를 사기 쉽지만, 지금으로서는 대체할 만한 단어를 찾기 어렵네요. 대개 흥분이라고 하면 분노라는 감정과 연결하죠. 혹은 소재주의적으로 접근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고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내적 동기예요. 있는 줄도 몰랐던 세계에 들어섰을 때,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거대한 슬픔을 마주할 때 몸과 마음이 반응하는 거죠. 오래전부터 저를 진정으로 흥분시키는 이야기는 그런 거였어요. 사보 기자로 일하던 시절에 유명한 사람도 많이 만났는데 다들 진부해서 재미없더라고요. 모든 고난과 실패는 성공을 위한 디딤돌이라고 말하는 식이니까요. 첫 문장만 읽어도 결말이 보이는 글인 거죠. 아, 제가 그래서 상업영화를 별로 안 좋아하나 봐요. 매일 보는 권선징악도 지루하잖아요. 속으로 ‘그래, 훌륭한 사람은 훌륭해서 훌륭하지’ 하며 김이 빠지죠. (웃음) 아무 긴장도 없는 이야기보다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좋았고, 좋아하니까 더 나누고 싶었나 봐요. 고상하게 말하면 삶에 관해 지적인 영감을 주는 일이고, 신체적으로는 흥분이 일어나는 일이죠. 너무 슬프니까 안 슬프도록 뭔가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겨요. 그런 내적 동기가 없다면 진작 그만두었을 거예요. 좋아하지 않는데도 지속하기엔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압박이 상당한 일이니까요. 저는 글 쓰는 활동가라고 자칭해요. 과거에 사회 문제를 바라보며 이데올로기나 거대한 독재 정권, 악덕한 자본가 등을 떠올렸다면, 이제는 한층 더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결에서 고민해요. 우리 삶에 들어온 악과 폭력의 실체를 목격했을 때, 현실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내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백재호_ 저는 다 가식이고 위선입니다. (웃음) 사실 어릴 적에는 늘 외면하고 방관했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저한테 뭔가 바꿔낼 힘이 있었는데, 그때는 몰랐거나 모른 척하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도 저라는 사람은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니면 안 하더라고요. 영화도 작업하기로 약속을 했으니까 겨우 움직이는 거예요. 더구나 영화는 혼자 만들 수 없잖아요. 여러 사람이 얽혀 있으니 지킬 수밖에요. 천성은 게으른데, 일은 또 자꾸 이런 게 들어오니 별수 있나요. (웃음) 발등에 불이 떨어질 때까지 미뤘다가 진짜 불을 보면 정신이 번쩍 드는 거죠. 다만 가능하면 덜 아쉽게 살고 싶어요. 그 마음이 영화를 만들 때나 삶을 살아갈 때나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요즘 코로나19로 사회가 더 경직된다는 느낌을 받아요. 어떤 재난이든 가장 취약한 곳부터 무너진다는 걸 실감하고요. 두 분의 시야에는 어떤 풍경이 담기고 있나요.
백재호_ 드디어 남자들이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구나. (웃음) 코로나19 이후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무엇이 달라지고 또 달라지지 않을지 궁금해요. 저는 그동안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제 안의 혐오를 발견하고 놀랐는데, 다른 사람도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해요. 반성하고 토론한다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겠죠. 그건 비단 정치인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활동하는 사람들의 몫이기도 해요.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이 나아갈 방향과도 맞물리는 고민이에요.
은유_ 확실히 사람을 만날 기회가 줄어들었어요. 일주일에 한 번은 강의에 나갔는데 그마저도 중단되었거든요. 되게 심심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제가 소규모 강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요. 이럴 때 책을 좀 읽으면 좋은데, 집에서는 아이들 때문에 도리어 집중력이 떨어지더라고요. 대신 그동안 못 봤던 영화들이나 감독님에게 추천받은 작품을 보고 있어요. ‘1일 1영화’ 하면서 지내요. (웃음) 영화만큼이나 극장을 좋아해서 그동안 컴퓨터로 영화를 보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요즘엔 좀 끊어야겠다 싶을 정도로 보네요.
극장이 정말 한산하더라고요. 코로나19와 무관하게 영화를 보는 플랫폼 자체가 많이 바뀌고 있지만요.
백재호_ 유튜브를 즐겨 보는 사람들이 영화를 잘 못 본다고 하더라고요. 10분 내외의 짧은 호흡에 익숙해지다 보니 그 이상으로는 힘든 거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단편으로 만들면 어떨지 고민하기도 했어요. 관객과 대화하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90분 정도 소요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거죠. 차차 고민해야겠지만 장편을 완성한 후에 유튜브 버전으로도 만들고 싶어요. 극장에 가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은유_ 극장이 주는 안락함과 매력이 있잖아요. 시공간을 이동하는 기쁨이 큰데, 젊은 친구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넷플릭스로도 충분하다는 거예요. 원할 때 어디서든 영화를 볼 수 있으니까요. 저는 종이책에 연연하듯 극장에 연연하는데, 그들에게는 이미 전자책과 넷플릭스가 너무 편안한 거죠.
백재호_ 맞아요, 다만 영화를 극장에서 볼 때 얻을 수 있는 에너지도 분명히 존재해요. 독립영화를 볼 때 특히 그렇죠.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여기에 와 있구나, 하면서요. 어떤 사회 문제에 관해 같이 고민하는 동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좌석 사이에 간격을 두거나 지그재그로 앉으며 서로 배려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해요. 일단 극장까지 온다는 것 자체가 능동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그런 관객과 대화할 때 즐거움도 크고요.
그럼 능동적인 예비 관객에게 한 마디 전해주세요.
백재호_ 저는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관객과의 대화를 상상해요. <그들이 죽었다>나 <대관람차>를 만들면서는 구체적인 얼굴과 풍경이 그려지기도 했죠. 근데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같은 경우에는 관객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아요. 지금도 그렇고, 아마 영화가 완성된 다음에도 그저 가능한 한 많은 관객이 봐주기를 바랄 뿐이겠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영화가 나오기 전에 책을 먼저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책을 본 사람이 영화를 보고, 영화를 본 사람이 책도 읽으면서 같이 생각해봤으면 해요. 서로 채워지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은유_ 어쨌든 책은 한 사람이라는 우주의 일면을 보여준 거잖아요. 영화가 나온다면 그 우주가 좀 더 풍부하게 존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요. 저도 옆에서 기다릴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