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팔지 마라
<비행> 홍근택·차지현(feat.조성빈)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0-03-12

“마지막으로 저희 다 같이 한번 찍어주실 수 있나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텅 빈 스튜디오에 홍근택 배우, 차지현 배우, 조성빈 감독, 황영훈 피디가 나란히 섰다. 그들은 평범한 기념사진이라 했지만, 내 눈엔 특별한 졸업사진처럼 보였다. 긴 시간 동안 동고동락하며 서로를 품어 왔던 친구들은 이제 미련 없이 헤어질 준비를 마쳤다. 카메라 앞에서 그들이 내보인 환한 웃음은 <비행>에 최선을 쏟아 부었다는 자부일 것이다. 조성빈 감독은 20대에 골몰했던 고민과 감정을 담아 첫 장편을 완성했고, 두 배우는 각각 한국에 정착하려는 탈북민 근수(홍근택)와 호주로 떠나고 싶은 전과자 지혁(차지현)이 되어 위태로운 공모를 힘 있게 그려냈다. 취향도 성격도 다른 이들이 한 팀을 이뤄내며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어서 언제나 견딜 만했다. 어느덧 20대와 작별하고 30대를 시작한 세 사람. “놀다가 싸우고 그러다가 영화 얘기”하며 맞춰온 마음을 이제 세상에 내보일 시간이다.

 

 

세 사람은 감독과 배우라기보다 크루처럼 보인다. <비행> 이전에 단편 <햄버거맨>(2015)에서도 호흡을 맞췄던데. 게다가 두 배우는 이번 영화에서 공동투자에도 이름을 올렸다. 

조성빈_ 셋 다 청주대학교 영화학과를 졸업했다. 내가 08학번이고 지현이가 09학번, 근택이가 10학번인데 두 사람은 동갑이다. 나이로는 내가 제일 형이지만 다 친구처럼 지낸다.

홍근택_ 시작부터 거짓말을! 우리 나름 상하 관계 확실하다.

차지현_ 그럼, 형은 형이지.

홍근택_ 친구처럼 지내다가도 자기들 불리하면 “어디서 형한테 까불어?” 이런 느낌이랄까. (웃음) 두 작품을 같이 만들고 나니까 이젠 미운 정 고운 정 다 쌓였다.

조성빈_ 처음 만났을 당시 근택이는 연기로 인정받으며 작업을 이어나가는 중이었고, 지현이는 아직 제대로 된 작품을 못 만난 시기였다. 완전히 날 것 상태의 배우였지. 둘을 붙이면 시너지가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햄버거맨>을 같이 찍었다.

차지현_ 사실 첫인상이 독특했다. <햄버거맨> 미팅한다고 해서 나갔는데, 성빈이 형이 갑자기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해보라는 거다. 이전까지 나한테 영화는 즐기면 되는 오락이었거든. 근데 그 자리에서 각자 지닌 아픔이라든지 인생에서 경험한 굴곡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그런 대화도 생소했고 참 이상한 형이라고 생각했지. (웃음 근택이한테는 내가 먼저 친해지자고 했다. 학교에서 겉도는 편이었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과 특성상 워낙 개성 넘치고 리더십 강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섞이기가 어렵더라. 근데 근택이는 좀 달랐다. 산처럼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면서 주변도 돌아보는 우직한 친구다. 우리가 어울려 다니는 걸 보고 다들 근택이한테 한마디씩 하더라. 왜 차지현이랑 노느냐고. (웃음)

홍근택_ 지현이는 특이한 아웃사이더였다. 시끄럽고 할 말은 다 하면서 남이 시키는 건 절대 안 하는. 난 또 반대에 끌렸지. 학창시절에 단발로 머리를 기르고 구식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영화에도 나오는 빨간 패딩에 반바지 입고 한겨울을 나더라. 신발은 무려 크록스 샌들이었다.

조성빈_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차지현_ 호주로 떠나고 싶었거든. (웃음)

<비행>
<비행>

감독으로서 두 배우에게 처음 매력을 느낀 순간은 언제였나.

조성빈_ 아까 지현이가 말한 미팅에서 인생 얘기를 들었을 때. 두 친구가 말해주는 과거라든지 이들 자신을 이루는 배경 자체가 매력적이었다. 지현이는 어디 한 곳에 정지한 사람이 아니라 계속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았고, 근택이도 좋은 연기를 해낼 만한 배우라는 확신이 들었다. <햄버거맨>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어서 자연스레 <비행>까지 함께했다. 근데 촬영하며 싸웠지.

 

감독 대 배우로?

조성빈_ 맞다, 둘이 한 편이었고 나는 혼자였다. (웃음)

차지현_ 싸웠다기보다는 갈등을 겪었지.

홍근택_ <햄버거맨>은 컷마다 찍고 회의하기를 반복했다. 밀접하게 교감하며 작업한 기억이 있는데, <비행> 때는 그럴 수가 없는 거다. 셋 다 장편을 만들어본 적도 없고 스태프로 참여해본 적도 없는 터라, 형은 형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과부하가 걸리더라. 결국 중간에 내가 “형, 아무리 급하더라도 대화는 좀 하자”고 했다.

조성빈_ 너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홍근택_ 물론 공격적으로 말이 나갔겠지. 참고 참다가 터뜨린 거니까.

조성빈_ 정확히 기억난다. “나 뭐 하는 중인지 모르겠어”라고 했다.

홍근택_ 그때 감독도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나. 이미 절반을 찍었는데 주연배우는 난데없이 이게 뭔지 모르겠다고 하니. 아주 잠깐 먹구름이 끼었다가 다음날에 또 웃으면서 촬영했다.

차지현_ 내가 기억하는 버전이랑 좀 다른데? 싸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실제로 싸우지도 않았고, 나는 촬영장에서 매일 행복했거든. (웃음) 전작을 찍을 때는 아무래도 좀 어리바리했는데 <비행>은 준비도 많이 했고 작업 자체가 재밌더라. 근택이가 고민을 털어놓은 다음에야 ‘아, 그런가?’ 싶었다. 결국 형을 찾아가서 우리 생각을 전했더니 “내가 책임질 테니까 믿고 따라와”라고 하더라. 내 기억으로는 되게 멋있게 마무리한 회의였다.

조성빈_ 아니야, 네가 여기서 이러면 난 어떻게 하냐고 그랬어. (웃음)

차지현_ 근데 이건 근수와 지혁의 캐릭터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었을 수도 있다. 나는 현장에서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녔으니까.

조성빈_ 맞다. <비행>에서는 콘트라스트와 아이러니가 핵심이었거든. 두 인물이 분명히 다르듯 배우가 놓인 상황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지현이한테는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했다. 최대한 풀어두면서 톤이 어긋날 때만 잡았다. 반면 근택이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무조건 참으라고 했다. 가급적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고 요구한 상황이다 보니, 배우가 “뭘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도 일견 이해가 간다.

홍근택_ 4년이나 흘렀는데도 그때 감정이 다시 샘솟네. 잠깐 울 수도 있으니까 못 본 척해라. (웃음)

홍근택 ⓒ이영진
차지현 ⓒ이영진

<비행>은 감독의 졸업작품이자 첫 장편이다. 다른 배우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나. 정과 의리를 떠나서 어떤 확신을 가졌나.

조성빈_ 차지현과 홍근택, 둘과 함께라면 뭐든 되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신뢰하는 배우들이고, 나로서는 대안을 찾을 이유도 없었다. 지금까지 이 친구들과만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호흡은 정말 잘 맞는다고, 아니 잘 맞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다음 미션이 중요하겠지. 서로 떨어져서도 동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 이제 그런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햄버거맨> 또한 우연히 만난 두 인물이 돈을 매개로 얽히며 범죄에 가담하는 내용이다. 여러 면에서 <비행>과 나란히 놓고 볼 수 있는 작품인데, 단편을 촬영할 당시에 이미 장편 작업도 계획 중이었나.

조성빈_ 전혀 아니다. <비행>은 원래 단편으로 준비하던 영화다. ‘취업준비생 두 명이 돈을 벌기 위해 필로폰을 판다’는 내용이었는데, 영화에 마약이라는 소재가 들어오니 별 수 없이 긴 설명이 필요해졌다. 이야기가 늘어나면서 인물 설정도 달라졌다. 평범한 20대 한국인이 마약을 판다고 하면 매력이 떨어지더라. 한국에 정착해야 하는 탈북민과 한국을 떠나야 하는 전과자로 메인 캐릭터를 만들고, 인물 간에 콘트라스트를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시나리오 초고를 다시 봤는데 정말 많이 바뀌었더라. 여러 차례 시나리오를 수정했고, 심지어 촬영하면서 결말을 바꾸었을 정도로 고민이 많았다. 애초에는 지혁이가 아니라 근수가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는 엔딩이었거든. 이야기는 같지만 행위자가 뒤바뀐 셈이다.

차지현_ 형이 결말에 관한 고민을 공유해주었고, 배우들은 두 가지 버전을 다 준비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조성빈_ 결국 아이러니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지혁은 늘 경찰서에 붙잡혀가는 인물 아닌가. 근데 마지막에는 자신의 것을 도둑맞고 스스로 경찰서를 찾아가는 거다.

<비행>
<비행>

시나리오 작업할 때도 배우들과 긴밀하게 의견을 주고받았을 듯하다.

조성빈_ 배우들이 각자 맡은 캐릭터에 관해 많이 조사해왔다. 내가 어느 정도 틀을 만들면 배우들이 디테일한 부분을 채워 넣는 식이었다. 거의 같이 먹고 자면서 시나리오를 썼다. 글을 쓸 때 옆에 누군가가 있는 걸 좋아하거든.

차지현_ 그러면서 집에 가면 자꾸 영화를 보여주더라. “너희 이거 봤어?” 하면서 틀어주고 형은 자러 간다. 재밌는 영화도 있지만, 어떤 영화는 되게 지루하기도 했다. 그럼 우리는 잠든 형 바로 옆에서 흉을 보는 거지. (웃음)

 

레퍼런스 작품이었을 것 같은데.

홍근택_ 맞다. <로제타>(연출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1999), <하나비>(연출 기타노 다케시, 1997), <무산일기>(연출 박정범, 2010) 등 다양한 작품을 접했다.

차지현_ 돌이켜보니 인물이 처한 딜레마를 조명하는 영화들이었다. 나중에 연기할 때 큰 도움이 되더라.

 

배우들은 무엇을 채워 넣었나. 

홍근택_ 우선 언어를 습득해야만 했다. 북한 사투리를 구사해야 하는데 영상으로만 익히기엔 한계가 있었다. 무작정 평양냉면 식당에 찾아가서 직원인 탈북민이나 조선족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지금은 탈북민이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유튜버로도 활동하지만, 당시만 해도 거리감이 상당했다. “일없습니다, 저리 가시라요!” 하는 반응이 대다수여서 난감하던 차에 지인을 통해 탈북민을 만났다. 아는 형이 치킨 가게를 운영하는데 직원 중 한 명이 북한에서 온 스물한 살 청년이었다. 그 친구에게 말도 배우고 북한 생활도 전해 들었다.

차지현_ 근택이가 고생했다. 그때 우리는 청주에서 살았는데 치킨 가게는 파주에 있었거든. 먼 거리를 오가며 준비하는 모습이 대단해 보였다.

홍근택_ 지혁이도 만만치 않다. 실제로 중국집에서 일하며 헌팅까지 성공시켰다.

차지현_ 학교 근처에 우리가 섭외하고 싶은 중국집이 있었다. 다른 곳은 인테리어가 신식이라 영화에 어울리지 않았거든. 성빈이 형도 꼭 거기서 찍고 싶다고 하는데, 촬영 허가를 안 해주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다짜고짜 부탁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머리를 좀 굴렸다. 사장님한테 헌팅 얘기는 일단 꺼내지 않고, 역할을 준비하기 위해 무급으로라도 일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배달 일을 경험해두면 당연히 연기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시켜 달라고 실랑이하다가 결국 진짜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같이 일하다 보니 친해져서 나중에는 촬영까지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영화에서 지혁이가 근수를 뒤에 태우고 오토바이를 탈 때 계속 옆을 힐긋거리는데, 실제로 배달 오토바이 대부분에 사이드 미러가 없다. 그렇게 옆과 뒤를 확인하면서 탈 수밖에 없는 거다. 연기할 때 그런 디테일을 자연스럽게 가져왔고, 배역에 좀 더 가까워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행>
<비행>

중심 사건은 마약 범죄이지만, 크게 보면 <비행>은 이주와 정착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탈북민인 근수는 어떻게든 한국에 발붙이고 살아보려 하는 반면, 전과 기록에 발목을 잡힌 지혁은 유일한 탈출구로 호주 이민을 꿈꾼다. 어떻게 보면 둘의 욕망은 현재 속한 세계를 넘어서고 싶다는 점에서 거의 동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조성빈_ 지혁이는 나와 비슷한 캐릭터다. 20대 때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근수는 지혁과 대조적인 인물을 등장시키기 위해 떠올려낸 캐릭터다. 둘의 차이와 만남이 이야기를 끌어나갈 수 있도록 애를 썼다.

차지현_ 형 지금 거짓말하고 있다. (웃음) 사실 시나리오 자체에 부담감이 컸다. 이야기는 없는데 배우는 정해진 상황이니까. 형으로서 책임감을 느꼈던 거다. ‘얘네 데리고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어떤 이야기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평소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 출구가 없는 듯 갑갑하게 느껴지던 현실에 눈이 간 거다. 실제로 여기를 떠나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 과정에서 캐릭터도 취업준비생, 명문대 출신 등 계속 바뀌다가 어느 날 북한에서 마약을 들여온 딜러 이야기를 들었다.

홍근택_ 우리가 기사를 봤다. 북한에서는 필로폰이 담배처럼 흔하게 제조되고, 한국에서 유통된다는 내용이었다. 성빈이 형이 그 기사를 읽고 감을 잡는 것 같더라.

조성빈_ 어떤 탈북민이 한국으로 필로폰을 수입해서 팔았다. 그에게는 마약 거래가 일종의 ‘코리안 드림’이었던 거다. 그 기사가 캐릭터 모티브를 잡는 데 영향을 줬다.

 

마약 거래와 운반 등 범죄 행위를 묘사하기 위해 쉽지 않은 취재과정을 거쳤을 듯하다.

조성빈_ 최대한 실제에 근접하게 찍고 싶었는데, 취재가 수월하지는 않았다. 마약과 형사를 찾아가서 문의했지만, 돌아오는 이야기는 누구나 아는 정보에 그쳤다. 결국 구매자처럼 가장하고 온라인에서 딜러 수십 명과 접촉했다. 살 것처럼 하면서 다른 이야기만 하니까 연락이 끊기더라. 한참 고생하다가 ‘이번이 마지막이다. 안 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한 명에게 처음부터 솔직히 말했다. 영화를 찍고 싶은데 당신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지금도 무슨 일이었는지 모르겠는데, 몇 시간 후에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자신이 어떻게 이 세계에 들어왔고, 어떤 방식으로 거래하며 지금 어떻게 사는지 쭉 써주었더라.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익명의 누군가에게 큰 도움을 받은 셈이다. 마음 같아선 그분이 영화를 보러 오면 좋겠다.

조성빈 ⓒ이영진

마약에는 어떤 소품을 사용했나.

조성빈_ 실제로는 백반을 썼고 배우들이 먹는 건 박하사탕을 쪼개서 만들었다.

홍근택_ 중간에 좀 섞이기도 했지. 진짜 내 물건처럼 익숙해지도록 들고 다니라면서 촬영 시작할 때 가방을 줬거든. 그걸 멘 채 뛰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으니 안 섞일 수가 있나. 먹었는데 단맛이 안 나서 뱉은 적도 있다. 백반 먹으면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검색해봤다. (웃음) 촬영 막바지쯤엔 그 가방이 정말 소중해지더라.

 

차이가 분명한 두 인물이 공조하는 과정에서 배우들은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만들어내야 했다. 친하고 편한 사이라서 어려운 순간은 없었나.

홍근택_ 동갑내기 친구이지만, 한편으로는 선후배 관계이기도 해서 실제로 애매한 거리가 있다. 내가 재학할 때만 해도 선후배 관계가 딱딱한 편이었거든.

차지현_ 평소에도 약간 온도가 다르다. 서로 관심사나 상상하는 미래도 다르고, 무엇에 얼마만큼 공감하는지도 꽤 다르다. 막 찰떡궁합 같은 사이는 아닌 거다.

홍근택_ 그러니까 주변에서도 “쟤네가 왜 친하지?”라는 반응이었지. (웃음) 안 만나면 보고 싶다. 전화도 자주 하는 편인데, 막상 만나면 생사 확인하듯 살아 있네, 살아 있구나, 하면서 말없이 각자 할 일 한다.

차지현_ 우리가 본래 지닌 친밀함과 어색함이 영화에 배어 나왔던 것 같고, 촬영 중에는 서로 연기를 봐주며 피드백에 집중했다.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아도 두 인물에게 전사가 탄탄하게 마련되어 있다고 느껴졌다. 배우들과 논의한 내용을 듣고 싶다.

조성빈_ 전사는 확실히 만들어두었다. 지현이는 직접 긴 글을 써왔는데 꽤 설득력 있더라. 근택의 경우, 탈북하는 장면을 촬영했다가 편집 과정에서 뺐다.

홍근택_ 얼음물에 입수하기까지 했는데…

조성빈_ 탈북신을 오프닝으로 염두에 두었고, 촬영 순서상으로는 맨 마지막에 찍었다. 20일 동안 19회차 촬영을 강행하며 다들 지친 상태였다. 나도 디스크에 문제가 있었는데, 진통제로 버티다가 결국 중간에 한 번 쓰러졌다. 아무래도 다들 힘이 빠진 상태여선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사실 그 장면이 근수의 전사, 즉 형을 보여주는 신이다. 영화에 형은 나오지 않지만, 근수가 탈북하는 이유이자 한국에 정착해야만 하는 이유다.

홍근택_ 근수는 수동적인 인물이다. 탈북 역시 형이 주도해서 따라왔던 거고, 한국에서는 형을 찾겠다는 목표로 살아간다. 자연스레 큰돈이 필요해지는 거지.

조성빈_ 결국 영화는 실체 없는 무엇에 쫓기는 느낌으로 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내가 20대를 거치면서 느꼈던 감정이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근수의 머릿속엔 가득하지만 정작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 맥거핀으로 형을 처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영진

지혁이는 왜 하필 호주에 가고 싶어 하는지, 어쩌다 도벽이 생겼는지 궁금하더라.

차지현_ 호주라고 하면 단번에 워킹 홀리데이가 떠오르지 않나. 지혁이라면 정당하게 일하면서 살 수 있는 나라를 원할 것 같더라. 게다가 미국은 너무 거대하고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전과에 관해서도 많이 고민했는데, 범죄 목표나 규모도 고려해야 했다. 그러다가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물건을 훔쳐봤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아주 어릴 때 문방구나 친구 집에서 뭔가를 몰래 가져온 경험이 있지 않나. 절도 범죄를 저지른 전과자에 현재도 도벽을 가진 인물로 만들면 더 필사적인 느낌을 줄 수 있겠더라.

홍근택_ 지현이가 잘 훔친다. 사람 마음도 잘 훔치고. (웃음)

조성빈_ 내 마음도 훔쳤잖아. (웃음)

 

언어나 말하기 방식도 캐릭터를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다. 근수는 북한 사투리를 사용하는데, 기본적으로 과묵하고 목소리 높낮이에도 거의 변화가 없다. 근수가 핵심만 말하는 사람이라면, 지혁은 핵심 주위를 뱅뱅 돌며 본의를 감춘다. 말 대부분은 애꿎은 화풀이나 조롱으로 번지기도 한다.

차지현_ 깊게 생각하기보다는 전체 시나리오를 보며 이해하려고 했다. 대사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시나리오에 나온 대로, 누가 봐도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연기해내고 싶었다.

조성빈_ 지혁이 못된 면을 가졌다고 해도 미워 보이지는 않아야 했다. 디렉션 중에 가장 구체적으로 말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너한테 정이 안 가면 안 돼.” 장난꾸러기 같은 익살스러움은 본래 지현이가 지닌 모습이다.

홍근택_ 난 실제로는 말하는 거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이다. (웃음) 대사나 톤은 어차피 연기해야 하는 부분이니 지현이 말처럼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촬영이 가까워질수록 북한 말을 구사하는 데 대한 부담이 커지더라. 참고할 만한 레퍼런스가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당황스러웠거든. 근수는 낮은 톤으로 말하는 인물인데,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를 보고 연습하면 자꾸 북한 앵커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말투나 억양이 점점 세지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실제 탈북민을 찾아갔던 거다. 대본을 들고 가서 악센트 하나까지 다 표시해달라고 했다. 달달 외우다시피 연습했는데, 좀 아쉬운 게 촬영 3분의 2쯤 지났을 무렵부터 말문이 터지더라. (웃음)

<비행> 촬영 현장 

배우들은 액션 연기에 관해 할 말이 많지 않을까. 한겨울에 몸으로 부딪치는 싸움을 만들어냈다.

홍근택_ 성빈이 형과 작업하며 가장 좋았던 점 중 하나가 연습이다. 사실 다들 연습하는 거 싫어하지 않나. 배우들도 연습할수록 감정이 무뎌지니 막연히 두려워한다. 근데 형은 툭 하고 건드리면 바로 나올 정도로 연습을 많이 시켰다. 근수가 지혁을 오토바이에서 끌어내려 싸우는 장면 같은 경우에는 자전거를 놓고 여러 차례 리허설했다. 그러다 보니 실전에서도 불안하지 않더라.

차지현_ 이상하다. 난 연습을 안 했는데?

조성빈_ 이것도 사실 기억을 맞춰봐야 할 부분이다. 근택이는 연습을 많이 했다고 하고, 지현이는 연습한 적이 없다고 하고. (웃음) <햄버거맨>은 내 생각에도 연습량이 높았는데, <비행>은 신경 쓸 부분이 많다 보니 예전만큼 자주 봐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하긴 했거든. 미진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아예 안 하지는 않았는데.

차지현_ 난 기억이 안 나.

홍근택_ 우리 연습한 동영상이 있다니까.

차지현_ 우리가?

홍근택_ 우리가. (웃음)

조성빈_ 액션은 최대한 리얼하게 찍고 싶었다. 관객이 아픔을 느낄 정도로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배우들도 자연스럽게 합을 맞추도록 준비했다.

차지현_ 몸싸움하는 장면은 두 테이크 만에 찍었다. 나랑 근택이는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찍자고 했는데, 성빈이 형은 안쓰러웠는지 괜찮다고 하더라.

조성빈_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장면이 나와서다. (웃음)

차지현 ⓒ이영진

세 차례 추격전은 근수와 지혁의 변화하는 관계를 드러낸다. 처음에는 쫓고 쫓기는 관계였다가, 두 번째는 한 사람이 다른 이를 돕고, 끝에는 함께 도망가는 처지에 놓인다.

조성빈_ 마지막 추격전을 찍을 때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다. 사실 아무도 쫓아오지 않거든. 20대에 내가 느낀 감정을 반영한 장면이다. 난 대체 뭐에 쫓겨서 그렇게 쉼 없이 달렸을까. 결과적으로는 돈이지만 그때 그 감정을 구체화해서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돌아보지 말고 계속 뛰어”라고 했지.

홍근택_ 어떤 촬영 기술을 사용해서 빨리 달리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 수 없는 장면이다. 그때 한 친구가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촬영감독이 그 뒤에 타서 둘이 몸을 묶었다. 오토바이가 달리면 우리는 점점 멀어지는 카메라를 쫓아가는 거다. 정말 필사적으로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

차지현_ 지혁이가 한참 뛰다가 중간에 넘어지지 않나. 촬영 당시 내가 쓰러지면 어떻겠냐고 아이디어를 냈는데, 사실 정말로 못 뛰겠더라. (웃음)

조성빈_ 테이크를 열 번도 넘게 갔다. 처음에는 나란히 달렸는데 촬영을 거듭할수록 간격이 벌어졌다. 자연스레 위치가 조정되면서 영화적으로도 만족스러운 그림이 나왔다.

 

영화에서 발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맨발로 뛰는 장면도 인상적이고, 따져 보면 근수와 지혁이 처음 관계를 맺는 계기도 신발이다.

홍근택_ 근수에게 ‘나이키’ 신발은 어떤 징표이기도 하고, 누가 왜 주었든 가장 소중한 물건이다. 근수가 태어나서 처음 받는 선물이라고 봤다. 북한에서는 상품이라는 개념이 없고 공동생산품을 쓰니까.

조성빈_ 추격전 이후 근수 발을 클로즈업하는데, 그 발에 지난 행적이 묻어 있다고 생각했다. 근수라는 인물이 거쳐 온 길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는 의미가 있다.

차지현_ 마지막에 근수가 혼자 서울로 갈 때 새 신발을 신는다. 원래 옷과 신발 모두 기존에 쓰던 걸 사용하기로 했는데, 방금 형이 말한 의미를 고민하다 보니 새 것이 필요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촬영 중간에 피디 형에게 전화를 걸던 모습이 떠오른다.

홍근택_ “나이키 운동화, 흰색, 285mm!” (웃음) 발이 큰 편이라 매장에서 원하는 신발을 사본 적이 없다. 일단 사이즈를 말하고 갖다 주는 신발 중에서 제일 괜찮은 걸 고르곤 했거든. 그 신발을 구해온다고 피디 형이 고생했다.

조성빈_ (황영훈 피디를 바라보며)지금 저렇게 웃지만, 촬영 내내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엄청 고생했다. 현장 상황이 시시각각 달라지다 보니, 결국 촬영장에는 오지도 못하고 계속 다음 신을 준비하기 위해 돌아다녀야만 했다.

<비행> 촬영 현장

촬영은 어디서 했나. 도시의 야경과 불빛 한 점 없는 산속, 조용한 주택가와 유흥시설이 가득 들어찬 번화가 등 묘한 대비를 이루는 공간이 매력적이다.

조성빈_ 근수 집은 내 집이고, 지현이가 배달 간 집은 황 피디 집이다. (웃음) 촬영은 대부분 청주에서, 내가 잘 아는 곳에서 진행했다. 집으로 따져 보면 반경 5km 내에 있는 공간들이다. 늘 산책하는 길이나 자주 시켜 먹는 중국집처럼 기본적으로 익숙한 공간에서 찍었기에 확실히 유리한 부분이 있었다. 대개 협의도 수월했고, 영화과 학생들이 드나드는 동네이다 보니 촬영에도 협조적인 편이었다.

홍근택_ 청주에 놀 거리가 많지 않아서 학생들은 학교 주변에서 많이 어울린다. 지역 주민과 친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한편으로는 주택가와 유흥가가 정말 한 골목 차이로 맞붙은 이질적인 모습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영화는 굳이 희망을 길어 올리려고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희망을 차단하고 냉혹하게 내버려 두는 쪽에 가까운데, 결말에 이르기까지 어떤 고민을 거쳤는지 듣고 싶다.

조성빈_ <햄버거맨> 때부터 그런 엔딩을 꼭 해보고 싶었다. 뚝 끊기면서 아이러니하게 마무리하는 느낌을 주려고 했고, 결국 모두 ‘가짜’를 향해 이토록 달려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결말이 헷갈린다는 반응 때문에 조금 더 친절해야 했나 싶기도 하지만, 하고 싶은 걸 했으니 후회는 없다. 특히 그때 당혹스러워하는 지혁의 얼굴이 굉장히 마음에 든다.

차지현_ 난 처음부터 결말을 좋아했다. 일종의 블랙 코미디라고 봤거든. 형이 시나리오 모니터링 과정에서 부정적인 의견도 들었는데, 그때마다 너무 고민할 필요 없다고 다독였다. “난 그거 좋은데? 재밌잖아. 꼭 모두에게 우리 영화를 이해받아야 하나? 그 아이러니와 코미디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까지?” 이제 와서 고백하면, 촬영 중간에 결말을 맺는 인물이 지혁이로 바뀌어서 좋았다. 혼자 괜히 뿌듯하기도 하고 기분 좋더라. 배우로서 내가 갖는 피해의식일 수도 있는데, 근택이로 시작하고 근택이로 끝나면 좀 서운할 것 같았거든. 근택이는 이미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여러 작품을 경험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으니 좀 더 갈증을 느끼던 상태였다.

 

듣다 보니 세 사람의 20대가 궁금해진다.

조성빈_ 너무 치열하게 살았다.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만 자면서 계속 일했다. 카메라 장비 렌트샵에서 일하다가 스물셋에 광고 프로덕션에 들어가서 3년을 보냈는데, 그때 심적으로 굉장히 지쳤던 것 같다. 영혼을 팔았다는 생각까지 들더라. 회사를 나오면서 결심했다. 복학해서 영화 찍을 거라고, 다시 하고 싶을 거 하면서 살겠다고. 그때 감정이 <햄버거맨>과 <비행>에 녹아들었다. 내가 사회에서 겪고 고민했던 바를 가능한 한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이제는 회사를 차렸다. <비행>을 찍고 나니 또 돈이 없더라. 당시 살던 집 보증금까지 끌어다 쓰며 만든 영화거든. 기왕 영혼을 팔아야 한다면 좀 더 많이 벌며 팔자는 생각이다. (웃음) 친한 친구와 ‘써드아이비디오’라는 프로덕션을 만들어서 현재 광고 일을 겸한다. 다행히 20대 때 느꼈던 불안과 공포는 잘 추슬렀다. 영화를 찍었던 4년 전과 완성했던 2년 전,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고 느낀다.

<비행>
<비행>

촬영 후 완성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조성빈_ 첫 가편집본 러닝타임은 1시간 55분이었다. 세상에 나와선 안 될 영화라는 생각이 들더라. 도대체 무슨 짓을 했나 싶어서 영화도 멀리하고 배우들과도 거리를 두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시켜놓았는데 미안해서 도저히 못 보겠더라. 그러다가 2017년에 전주국제영화제에서 <T2: 트레인스포팅 2>(연출 대니 보일, 2017)를 봤다. 내가 <트레인스포팅>(1996)을 정말 좋아하거든. 마지막 상영 전날에야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내려갔다. 극장을 나오는 길에 불현듯 ‘나도 여기서 영화 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러고도 마음이 오락가락해서 인도에 여행을 갔는데, 계속 영화만 생각나는 거다. 결국 한국에 돌아와서 넉 달 동안 편집과 후반작업에 매달렸다. 신을 쳐내고 나니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하더라. 물론 어설픈 구석이 있지만,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은 갖추었다는 확신이 생겼다. 솔직히 그 이상으로 큰 기대는 없었고, 완성했으니 됐다는 느낌이었다. 근데 정말 전주영화제에서 상영하게 된 거다. 수상(CGV아트하우스 배급지원상)까지 했을 때는 ‘이번 생에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나?’ 싶어서 한동안 멍했다. 수상소감도 제대로 말하지 못 했다.

홍근택_ 형이 진짜 무미건조한 사람인데 무대에서 울더라.

차지현_ 근택이는 그걸 또 카메라로 찍으면서 울고.

홍근택_ 영화제 선정 소식을 내가 제일 먼저 알았다. 형이 해외에 일정이 있어서 출국하는 바람에 접수를 대신 했거든. 형이 만들어두고 간 출품 신청서를 보내면서 내 메일 주소를 기재했다. 발표가 일주일 정도 미뤄졌는데, 기다리는 사람 입장에서는 미치겠더라. (웃음) 하루는 꿈을 꿨다. 고양이한테 인정사정없이 물어뜯기다가 결국 귓불이 떨어지는 꿈이었다. 너무 찝찝하고 불안해서 인터넷에 해몽을 찾아봤다. 근데 되게 좋은 꿈이라는 거다. 노력해온 일에 결과를 얻는 꿈이라는 해석을 보고 ‘설마?’ 싶었다. 바로 몇 시간 후에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날 이후로 내가 신년이면 사주를 본다. (웃음)

차지현_ 영화진흥위원회 배급지원 심사를 기다릴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난 사주를 찾아보거나 믿지는 않는데, 평소 내 이야기를 잘 털어놓는 편이 아니다 보니 가족들이 걱정되는지 한 번씩 보고 와서 말해준다. 그때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면서 “무대에 한 번 올라가겠네”라고 했다더라. 그 말을 듣고 성빈이 형한테 연락해서 우리 될 것 같다고 그랬지.

조성빈_ 안 되면 책임지라고 했다. (웃음) 사실 영화제 이후에 개봉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배급사를 못 만나서 일 년 반 정도 표류하다가 아예 직접 배급해보자고 나섰다. 이것도 공부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준비했고 영진위 배급지원 사업에 합격했다. 지원금을 확보한 다음에는 배급사와 홍보사도 생겼다. 돌이켜보면 <비행>은 독립영화에 찾아올 수 있는 기회를 부족함 없이 누린 작품이다. 말 그대로 운이 따랐다. 개봉에서 엄청난 성과를 기대한다기보다는 이 운이 어디까지 닿을지 궁금하다. 나는 나대로 열심히 살 테니 배우들에게 좋은 기운이 전해지면 좋겠다.

홍근택_ 정상에서 만나자, 이런 건가? (웃음)

홍근택 ⓒ이영진

두 배우도 <비행>을 촬영하고 개봉하며 각자 20대를 돌아봤을 것 같다. 홍근택 배우는 <너의 결혼식>(연출 이석근, 2017), <두 번 할까요>(연출 박용집, 2019) 등 다수 상업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제작부 경력도 있더라.

홍근택_ 어찌 보면 연기가 멱살 잡고 여기까지 끌고 와준 거나 다름없다. 포기할라치면 캐스팅 연락을 받는다든지 소속사가 생긴다든지 하는 기회가 생겼다. 이제 정말 현실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시점인가 싶어서 답답할 무렵에, <비행>으로 영화제에서 관객을 만났던 거다. 20대는 그렇게 여느 배우 지망생처럼 살았다. 연기하다가 돈 떨어지면 아르바이트하고, 우연히 기회가 찾아오면 또 연기하는 식이었다. 배우 일이 불안정하다 보니 언제나 ‘세컨드 잡'을 구하는 데 애를 먹는다. 졸업하고 서울로 오니 먹고살기가 더 막막하더라. 한동안 윈드서핑 강사도 했고 스키장에서도 일했다.

조성빈_ 둘 다 몸 쓰는 걸 잘한다. 지현이도 스포츠 좋아하고.

홍근택_ 맞다, 나한테 처음 스노보드를 알려준 사람도 지현이다. (웃음) 나뿐만 아니라 다들 현장에서 많이 일한다. 우린 기본적으로 품앗이거든. 촬영팀, 조명팀, 소품팀 등 여러 곳에서 일했다. 그렇게라도 영화와 연기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조성빈_ 지현이는 드라마 촬영 퍼스트까지 했고, 근택이는 얼마 전에 개봉한 <찬실이는 복도 많지>(연출 김초희, 2019)에서 그립팀에 있었다. 황 피디는 <이장>(연출 정승오, 2019) 제작부였다. 다들 공교롭게도 같은 달에 개봉하는 경쟁작 스태프가 되었네. (웃음)

 

차지현 배우는 어땠나. 홍근택 배우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시간을 보냈을 듯하다.

차지현_ 나는 20대를 평범하게 보냈던 것 같다. 하루하루 즐기면서 살려고 노력했다. 배우를 꿈꾸면서 막연하게 언젠가 나도 좋은 배우, 유명한 배우가 되리라 생각했고, 주어진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내가 좀 긍정적인 편이거든. 그렇지?

홍근택_ 긍정의 아이콘이지. (웃음) 좋아하는 것도 많고 다재다능한 친구다.

<비행>
<비행>

영화가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불안하지는 않았나.

차지현_ 솔직히 말하면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본래 기대를 많이 하는 스타일인데 어느 순간 학습이 되더라. 아,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구나. (웃음) 완성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래, 우리 추억을 멋지게 마무리하자’ 정도로 생각했지, 개봉은커녕 영화제에 갈 수 있을 거라고도 예상하지 못했다. 인터뷰여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나한테 <비행>은 20대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안겨준 작품이다. 어쩌면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연기하는 이유는, 그때 그 행복과 재미를 다시 느끼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마무리하며 서로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다.

홍근택_ 성빈이 형한테는 4년 동안 정말 고생했고 개봉까지 애써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지현이와 나는 꽤 잘 맞는 콤비라고 생각한다. 한 쪽이 처지면 다른 사람이 북돋고, 너무 과하다 싶으면 눌러주기도 하면서 재밌게 작업했다. 우리가 한 작품에서 만나는 일은 오랫동안 없겠지만, 언젠가 또 같이 연기해보고 싶다.

차지현_ 나도 마찬가지다. 고맙다는 말은 우리끼리 평소에도 자주 하니까 생략하고, 이제 형은 좀 자유로워지면 좋겠다. 동생들 이끌어온 건 여기까지만 하기로. 앞으로는 어떤 책임에도 국한되지 않고 그저 본인이 하고 싶은 영화 만들기를 바란다.

홍근택_ 난 좀 더 이끌어주면 좋겠는데? (웃음)

조성빈_ 아니, 딱 여기까지다. (웃음) 둘 다 이 영화를 디딤돌 삼아 더 좋은 작품과 더 훌륭한 감독을 만났으면 좋겠다. 차기작은 아마 단편이 될 것 같다. 옴니버스 형태로 엮어낼 예정인데, 특이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밝고 가벼운 이야기를 구상 중이다.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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