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이한의 베트콩, 베트콩의 따이한
<기억의 전쟁> 이길보라
글 정지혜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0-02-25

근래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가운데 감독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당사자성 너머의 역사를 영화적으로 재현하려는 일련의 고민이 있었다. <김군>(강상우, 2018), <나의 노래: 메아리>(정일건, 2018), <리틀보이: 12725>(김지곤, 2018)가 먼저 떠오르는데, 2월 27일 개봉하는 <기억의 전쟁>(2018) 역시 이러한 흐름에 해당한다. 사건 이후의 ‘기억’ 주체인 감독이 ‘사건’ 당사자의 목소리를 기록하면서 망각되거나 박제됐던 역사의 현재적 의미를 일깨우는 작품들이다. 이 관점에서 <기억의 전쟁>이 제기하는 질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군 32만 명이 파병됐던 베트남 전쟁을 2020년 한국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기록하는가.’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의 역사는 한국 사회에 얼마나 가시화되고 공론화되는가.’ 이길보라 감독이 직접 베트남에 가서 전쟁 피해자이자 생존자이며 학살 목격자들에게 대화를 청한 이유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기억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감독의 조부가 들려준 자랑스러운 회고와 몹시 달랐다. 이 기억의 격차는 대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지난 역사를 ‘과거사’라는 말로 손쉽게 정리하거나 청산할 수 있을까. <기억의 전쟁>의 초점은 ‘너머’로 향한다. 왜곡된 사실을 지적하고, 파묻힌 진실을 폭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서로 다른 상황과 입장에서 비롯된 당사자들의 역사-기억은 전쟁이 아닌 평화라는 새로운 지평 위에서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영화의 극장 개봉을 앞두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서울로 날아온 이길보라 감독을 만났다. 2015년부터 작업을 시작해 햇수로 5년 만에 개봉하게 된 자신의 두 번째 장편 <기억의 전쟁>을 내놓기까지, 지난한 숙고의 과정을 전해 들었다.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월남전’과 본인이 알고 있던 '베트남 전쟁' 사이에 뭔가 큰 차이가 있다는 데서 <기억의 전쟁>이 시작됐다.

어렸을 때부터 월남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전쟁에 참여했던 본인의 경험을 아주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는데, 집안 곳곳에는 참전으로 받은 각종 훈장과 표창장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랬던 할아버지가 고엽제 후유증으로 암 투병을 하다 돌아가셨다. 뒤늦게 나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전쟁 이야기와 내가 새롭게 알게 된 학살 이야기가 너무도 달랐다. 도대체 그 차이가 어디서 온 걸까.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알아봐야겠더라. 그게 이 영화를 시작하게 된 하나의 계기였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할머니께 베트남전을 비롯한 전쟁에 관해 여쭤보면 할머니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쟁? 나는 그런 거 모른다. 전쟁 같은 건 네 할아버지와 같은 남자들이나 알 일이다.” 그 말 또한 너무 이상했다. 물론 할머니가 직접 참전한 건 아니었지만 당신 역시 한국 전쟁을 겪었고,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할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지며 가족들을 먹여 살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할머니는 전쟁에 관해서 한마디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무엇이 할머니를 그렇게 말하도록 했을까. 여성의 눈으로 전쟁을 바라본다는 건 뭘까. 여성이 전쟁에 관해 말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이 영화의 또 다른 모티프가 돼줬다.

<기억의 전쟁>
<기억의 전쟁>

전쟁을 치른 조부모 세대의 가족사에서 영화가 비롯됐지만, 정작 영화에는 가족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가족 이야기나 감독의 내레이션이 들어가지 않은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창작자로서의 의도와 시도가 있었다. (참고로 감독의 전작 단편 <로드스쿨러>(2009)는 감독이 직접 출연해 내레이션을 진행했고, 첫 장편 <반짝이는 박수 소리>(2014) 역시 감독과 청각장애인 부모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처음에 베트남 현지로 갔을 땐 나와 내 할머니의 이야기를 엮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막상 영화의 중심이 된 인물들을 실제로 만나보니, 이분들 이야기에만 집중해도 좋겠다 싶었다.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파헤치는 게 영화의 목적은 아니다. 기억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 모습, 지금 우리의 모습에 관해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베트남 전쟁을, 이 학살을 어떤 자세로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나를 향한 질문이기도 했다.

 

영화의 핵심 인물들(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이자 전쟁으로 가족들을 모두 잃은 응우옌 티 탄 씨, 전쟁 피해자인 응우옌 럽 씨, 전쟁의 목격자인 딘 껌 씨)을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됐나.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관한 여러 자료를 살펴보다가 김현아 선생님의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전쟁과 여성』 등의 책을 읽었고 여성의 시선으로 전쟁을 기억하려는 시도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면서 나의 시선으로 베트남 전쟁을 다시 보기 위해 베트남에 직접 가기로 마음먹었다. 혼자 가면 아무래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제한되니까 2015년 1월, 2월경에 있었던 ((사)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가 진행하고 있는) ‘베트남 평화 기행’에 참여했다. 그때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이며 학살을 증언해줄 핵심 인물인 응 위엔 티 탄 씨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나의 부모님이 농인이라는 걸 아시는 분이 청각장애인인 껌 씨를 소개해줬다. 전쟁 때 설치됐던 지뢰가 폭발하는 바람에 시력을 잃은 럽 씨도 만났다. 이분들 모두 공적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가진 분들로 내 눈엔 이분들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농인인 부모가 있는 나 역시 이분들과 같은 바이오그래피가 있는 만큼 그들의 언어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언어가 어떻게 발화되는가가 나의 오랜 관심사였으니까. 그분들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이분들을 중심에 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후 탄 아주머니가 학살과 관련해 구체적인 액션을 취하면서 영화에 더 크게 자리하게 됐다.

<기억의 전쟁>
<기억의 전쟁>
<기억의 전쟁>

구체적인 액션이라고 하면, 2018년 4월 응우옌 티 탄 씨가 서울에서 열린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관련 시민평화법정에 증인으로 서게 된 일일 것이다. 또 영화는 현재 응우옌 티 탄 씨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한다.

촬영 중반까지만 해도 탄 아주머니의 한국 방문이나 시민평화법정 참석 같은 구체적인 계획이 전혀 없었다. 아주머니께서도 2015년에 한국을 처음 방문했지만 이후 두 번째, 세 번째 방문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셨다. 그런데 탄 아주머니께서 학살과 관련해 구체적인 자기 목소리를 내보자고 용기를 내셨고 인물의 변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게 됐다. 애초 계획했던 제작 기간보다 좀 더 길어지더라도 이 변화를 꼭 찍고 싶었다.

 

앞서 ‘공적 언어’라는 말을 했다. 그간 경험해온 공적 언어의 세계는 어떤 세계였나. 그것 아닌 다른 언어에의 관심에 대해 좀 더 들어보고 싶다.

그 의미는 상황에 따라 다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경험한 공적 언어는 남성, 비장애인, 백인 중심의 언어다. 청각장애인인 나의 부모의 언어는 공적 언어가 아니었고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나의 경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도 주류 미디어나 사람들이 <반짝이는 박수 소리>에도 나오는 농인 부모님과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인 나의 경험을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나의 공적 언어, 디폴트 값, 태어나고 자란 배경은 한국 사회에서 언제나 사소한 것으로 치부됐다. 내겐 가장 중요한 언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국인을 향한 응우옌 티 탄 씨의 복잡한 심경이 영화에 드러나기도 한다. 그녀에게 당신 조부가 베트남전 참전 군인이었다는 걸 말한 거로 아는데 그녀가 카메라 앞에 서기까지 혹은 당신이 그녀를 카메라에 담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나.

탄 아주머니의 막내딸과 동갑이다. 처음 갔을 때부터 마치 딸의 친구를 대하듯 호의적으로 맞아주셨다. ‘밥 먹고 가라, 자고 가라’고 하실 정도였다. 반면에 한국에서 온 40, 50대 남성들을 보면 몸을 부르르 떨며 힘들어하셨다. 학살을 저질렀던 군인들이 딱 그 정도 나이대의 한국 남성들이었을 테니까 그때 생각이 많이 나셨던 것 같다. 사실 처음 탄 아주머니를 뵈었을 땐 나를 환대해주는 아주머니를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굉장한 죄책감을 안고 그곳으로 갔던지라 그분의 호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참전국에서 온, 참전 군인의 손녀이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인데 어째서 이토록 따뜻하게 맞아주는 걸까. 저 사람의 관용에는 뭐가 있을까. 이런 질문을 아주머니께 직접 여쭤본 적은 없지만 내 안에 일어난 질문을 따라가 보면 나름의 대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안고 가려는 그녀의 자세에서 우리가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한다.

ⓒ이영진

영화를 찍으면서 생각이나 감정의 변화를 겪은 게 있나.

예를 들면 참전 군인을 향한 나의 태도 같은 거다. 그분들이 하는 집회에서 촬영하고 있으면 그분들이 심한 욕을 하고 소리를 막질렀다. 처음에는 무섭기만 했다. 어째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나도 그분들과 똑같이 할 수도 없고 그럴 깜냥도 안 됐다. 그런데 계속해서 그분들을 쫓아다니며 촬영을 하고 촬영 푸티지를 여러 차례 돌려보다 보니 조금씩 알 것도 같았다. 저분들이 계속해서 집회에 나오는 것도 어쩌면 탄 아주머니와 같은 이유가 아닐까 싶더라. 자신의 자리가 없어서,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아무도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니까, 국가도 사회도 그 누구도 자기를 기억해주지 않아서 이렇게 거리로 나와 소리를 지르고 발악하는 것이 아닐까. 이해가 되는 지점이 생겼다. 초반 편집본을 본 분들이 영화나 지나치게 선과 악, 흑백 구도로 진행된다는 코멘트를 많이 해줬는데 영화를 찍으며 깨달은 것들을 바탕으로 편집 방향도 좀 더 바뀌었다. 참전 군인들을 그저 악의 축이나 학살 피해자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으로 그리기보다는 전쟁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 담아보고 싶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배우고 알게 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참전 군인들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전쟁과 학살은 무엇이었나를 담는 쪽으로 가게 됐다. 참전군인과 베트남 피해자 등 전쟁의 역사를 기억하는 분들, 전쟁 박물관과 그곳을 찾는 관광객의 모습, 베트남 시민평화법정을 준비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아우르면서 영화가 좀 더 깊이 있게 이 문제에 접근하게 된 것 같다. 다양한 세대, 서로 다른 위치에서 이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묻게 된 거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에게 인터뷰를 통해 그때의 기억을 다시금 끄집어내야 했을 때 감독으로서 경계하거나 주의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베트남 전쟁과 학살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둘러싼 태도에 관한 영화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학살과 관련된 이야기를 청해 들을 수밖에 없었다. 탄 아주머니는 이미 모의 법정에 올라 증언까지 하셨고 그걸 모두 촬영한 상태였다. 하지만 영화에는 세팅된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로서 전달해야 하는 장면이 필요했다. 카메라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할 때의 탄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무드라는 게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학살 관련 증언을 해달라고 청하기가 너무도 죄송스러웠다. 많이 주저했고 결정을 내리기까지 어려웠다. 유독 학살에 관해서만 주목하는 건 아닌지, 어떻게 해야 다른 접근을 할 수 있을지. 그런 자문 끝에 촬영 막바지에 가서야 아주머니께 청할 수 있었다.

<기억의 전쟁>
<기억의 전쟁>

탄, 럽, 껌 씨 모두 영화를 봤나.

지난해 2월 베트남을 찾아가 제사를 지내고 주인공들과 마을에서 작은 상영회를 열었다. (매년 음력 2월 베트남에서는 민간인 학살로 한날한시에 집단 학살을 당한 이들을 기리며 제사를 지낸다.) 탄 아주머니 댁 TV로 베트남어 자막이 있는 영화를 상영했다. 다들 굉장히 좋아해 주셨고 자랑스러워하셨다. 특히 베트남전 당시 다른 마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서로 잘 몰랐던 상태라 영화를 통해 알게 된 게 많다고, 베트남과 한국 양국에 이 이야기가 더 많이 알려지길 바란다고 했다. 같은 마을에 사는 럽 아저씨는 과거에 껌 아저씨를 본 적이 있다고 기억하고 있지만, 시력을 잃은 지금은 그를 볼 수 없다. 또 시각장애가 있는 럽 아저씨와 청각장애인인 껌 아저씨 두 분이 아무리 말해도 서로 소통이 안 되니 내가 중간에서 두 분의 통역사가 됐다. 껌 아저씨의 홈 사인(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나누는, 몸짓에 기반한 의사소통)을 얼추 알아듣고 베트남-한국어 통역사께 전달하면 그걸 럽 아저씨에게 전달하는 식이었다. 지켜보던 마을 분들이 신기해하더라. “한국에서 온 보라가 베트남 사람들 말을 누구보다 잘 알아듣고 있다”라며. (웃음)

 

서로 다른 언어를 번역하고 통역하는 과정에서 혹시 예기치 않게 알게 된 사실이나 뜻밖에 인터뷰이의 진의가 드러난 게 있을까.

껌 아저씨가 증언하는 방식을 두고 농인 언어학자분이 해준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분의 말은 거짓일 리가 없다. 자신이 본 걸 정직하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하더라. 농인의 말이 전부 다 사실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농인이 사용하는 홈 사인의 특징에 관한 이야기였다. 껌 아저씨는 수어를 배운 게 아니라서 홈 사인으로 의사를 소통했다. 홈 사인의 특성상 자신이 보고 들은 걸 얘기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의 말이 진실에 가깝다는 의미다. 또 다른 청인 언어학자분도 그러더라. 다른 사람들은 전쟁에서 자신이 본 걸 얘기하면서 그때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덧붙여 말하는데 껌 아저씨는 오로지 자신이 본 것, 즉 정보 전달만 하고 있다고. 껌 아저씨의 그러한 발화 방식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흥미롭기도 하다고 말씀하시더라. 그분이 가진 언어의 한계, 언어의 환경이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기억의 전쟁> 촬영 현장
<기억의 전쟁> 촬영 현장 

가족사가 영화의 실마리가 돼줬다. 영화 작업을 마치고 가족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 부분이 있나. 이에 대해 가족들끼리 나눈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 달라.

가족 중에 농인이 많다 보니 아무래도 영화를 보더라도 정보 접근이 쉽지 않고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아빠는 영화를 보고 베트남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며 너무나 충격적이고 슬프고 눈물이 많이 났다고 하셨다. 고모는 자신에게 베트남은 아버지가 그곳에서 가져온 미국 용품들과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으로 기억됐는데 영화를 보며 아버지가 벌어온 돈은 사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얻게 된 것이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학살 생존자들이 50년 넘는 세월 동안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됐다고 말했다. 내 가족들에게도 당시 베트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또 영화가 처음 공개됐던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 때 젊은 관객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베트남 전쟁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발화하기 시작했다는 게 내게는 큰 의미로 남았다. 영화의 시민평화법정 장면에 등장하는 중학교 학생들도 영화를 보고는 ‘자신들이 참여한 이런 활동이 기록과 역사가 될 수 있다는데 놀랐고, 그런 기록이 모이며 영화도 된다는 걸 알아서 또 한 번 놀랐다’고 말해줬다.

 

<기억의 전쟁>의 조소나 프로듀서는 영화가 다루는 주제가 주제인 만큼 방송 플랫폼으로 유통돼 그 파급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플랫폼 고민을 포함해 베트남 현지 개봉 등의 배급 계획도 하고 있나.

기획 초반부터 이 이슈는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향후 방송 플랫폼 유통을 염두에 두고 있다. 또 개봉 비용을 마련하고 베트남 전쟁으로 피해를 당한 희생자분들을 추모하는 뜻에서 베트남에 조화를 보내기 위해 텀블벅 후원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이 영화가 잘 돼 베트남 현지 상영을 비롯해 적극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길 진심으로 바란다.

 

지난해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는 역사적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후속 세대,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사건 이후의 기억 주체가 자신만의 관점과 방법으로 역사적 사건에 접근하는 영화들에 관한 포럼이 있었다. 그 하나의 사례로 <기억의 전쟁>이 얘기되기도 했는데.

해외에 있다 보니 함께 논의된 작품을 다 보지는 못했다. 그 중 <김군>은 볼 기획가 있었는데 상당히 재밌었다. 감독이 본인의 시선을 명확히 하며 극을 이끌어나가는 힘과 그 감각이 돋보였다. 지금 젊은 세대의 창작자들이 수십 년 전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그걸 영화화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 자연스럽게 나올 시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전 세대와는 다른 방식, 감각으로 말이다. 사건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는 거리감, 온도 차이 때문일 수도 있고 세대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이영진

18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홀로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며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단편 다큐멘터리 <로드스쿨러>(2009)를 만들었고 『길은 학교다』를 펴내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TV에서 방영되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걸 좋아했다. 고래며 상어가 나오는 해양 다큐멘터리를 특히. 또 세계 곳곳의 사람들 이야기를 보면서 지구 반대편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나도 그런 이야기를 담아보고 싶어졌다. 사실 영화가 뭔지 전혀 모른 채 영화 만들기를 시작했다. 카메라 온‧오프 정도만 할 줄 알았는데, 영화를 찍으면서 영화를 배운 셈이다. 내가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고 하니 지인들이 자기 주변에 새 카메라를 구매한 분이 있다며 소개해줬고 그분께 어떤 영화를 찍겠다는 기획서를 보여드리고 카메라를 후원 받아 촬영한 게 <로드스쿨러>다. 유튜브에서 공개돼 있으니 찾아볼 수 있다. 19살 이길보라의 내레이션을 들어보고 싶다면 한 번 보시라. (웃음) 나를 포함해 제도권 학교 너머, 그 밖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만의 배움을 이어가고 있는지를 인터뷰 형식으로 담았다.

 

다큐멘터리 작업이 주는 즐거움은 무엇인가.

여러 이유가 있다. 재밌기도 하지만 때론 사명감으로 찍기도 하고 어쩔 때는 그 이야기가 내게 왔기 때문에 작업하기도 한다. 픽션보다 논픽션이 훨씬 재밌고 가능성도 더 크다고 생각한다. 현실이 픽션보다 더 픽션 같으니까. 지금까지 내가 만든 영화는 결국 나의 이야기였다. 신작 <아워 바디스>도 나와 엄마, 할머니가 각자 경험한 낙태와 임신중지에 관한 얘기고 여성의 몸과 재생산권에 관해 질문하는 영화다. 세 여성의 역사에서 짚어내야 할 게 정말 많다.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발화되지 않았고 더 많이 발견돼야 한다.

 

특별히 흠모하는 감독이 있나.

아피차퐁 위라세타쿤과 벨라 타르. 특히 아핏차퐁의 영화를 볼 때면 ‘아, 내가 만들려고 한 영화인데!’ 싶다. (웃음) 소재나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지만, 어딘가 감각적으로 그의 영화와 나의 작업이 연결된 것 같다. 언어로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겠다.

<기억의 전쟁>
<기억의 전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을 졸업하고 2017년 9월 Netherlands Film Academy에 입학해 지난해 졸업했다. 그곳에서는 어떤 공부를 했나. 그때의 배움이 이후의 작업 방식과 태도에 영향을 준 게 있다면 들려 달라.

‘Artistic Research in and through Cinema’의 석사 과정을 마쳤다. 리서치를 기본으로 예술적 연구를 한다. 학기별 연구 주제가 주관성, 방법론, 실험, 개념화였는데 그 가운데서 주관성을 공부할 때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또 변화했다.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작업할 때 내가 정말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해야지 어째서 사적 다큐멘터리를 찍느냐. 왜 그렇게 감독의 가족 이야기를 하느냐’라는 얘기였다. 그런 말에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폄하하고 깔보는 시선이 있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의기소침해졌고 ‘왜 나는 좀 더 거시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지’라며 자문하곤 했다. 그런데 네덜란드에서 공부하면서는 이런 나의 관심과 주제가 전혀 다르게 해석되는 경험을 했다. 한국에서는 사적 다큐멘터리라는 말로 치부됐던 게 이곳에서는 에세이 다큐멘터리나 민족지학 연구로 분류됐다. 창작자의 자기 시선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도 했고.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되면서 나의 시야가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자기 주관성이 정말 중요하더라. 그렇다면 나의 주관성, 나의 시선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바로 여성, 20, 30대, 장애인 부모를 둔 가정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 아시아인이었다. 나를 이루는 이러한 것들을 창작의 무기 삼아 영화화로 나가야 한다. 어떻게 하면 예술가로서 지속 가능한 작업을 할 수 있을까에 관한 대답을 찾고 싶어서 유학을 간 것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공부하며 깨달은 건 영화 한 편을 시작하고 끝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영화를 성공과 실패로 따져 물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거다. 그런 접근이야말로 다분히 자본주의적 발상이었다. 중요한 건 나의 핵심적인 연구 주제를 작품마다 다양하게 시험해보는 과정이라는 데 있다. 결국 그곳에서의 공부는 그러한 태도를 훈련하는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작품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탐구하고 싶은 중심 주제는 무엇인가.

그동안 나는 내가 소수자로 태어났기에 소수자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한국 사회가 나를 그렇게 규정했고 이름 붙였기 때문이다. “쟤는 청각장애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으니까 청각장애인, 농인 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거야”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고 그러면서 나조차도 내가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네덜란드에서 주관성에 관해 공부하고, 한국과 거리를 두고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나는 청각장애인의 언어, 그 침묵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좀 더 그 언어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간의 영화와 책 작업 모두 그런 맥락에서 만든 거더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내가 소수자라서 소수자 이야기를 한다고 했을 땐 일종의 사명감이 커져서 뭔가를 더 해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다른 언어를 쓰는 분들을 내가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작업자로서 좀 더 자유로워졌다.

<반짝이는 박수 소리>
<반짝이는 박수 소리>

석사 졸업 작품으로 만든 단편 <아워 바디스>가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기간에 열리는 Berlinale Talents(참여 창작자가 전 세계 필름 메이커들 앞에서 준비 중인 작품을 프리젠테이션 하고 국제적인 네트워킹, 멘토링, 펀딩의 기회를 탐색하는 장이다.)의 Doc Station에 선정됐다고 들었다.

이 영화를 장편영화로 만들고 있다. 이번 기회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영화인들 앞에서 영화의 중간 단계 결과물을 선보이게 됐다. 향후 작업을 같이할 동료들을 미리 만날 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거라 기대한다. 2022년쯤 완성하는 걸 목표로 일단 기획부터 차근차근해나가야겠지.

 

영화 외에 또 다른 활동이나 작업을 준비하는 게 있다면.

3월 말이나 4월 초쯤 네덜란드에서의 유학 경험을 묶은 『괜찮아, 경험』이 나온다. 아빠가 늘 하는 말씀이 바로 ‘괜찮아, 경험!’이다. 농인인 아빠는 책, 문자 언어, 신문, 방송 등으로 얻는 지식에 한계가 있다 보니 모든 걸 경험과 체험으로 얻는다. 그래서일까. 걱정 많은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마다 아빠는 항상 “괜찮아, 경험”이라고 말씀하셨다. 가서 직접 해봐야 알 수 있다고. 돌이켜 보면 나는 10대 때 학교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 세상을 직접 경험했고, 영화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영화를 찍어가며 영화를 알게 됐고, 네덜란드로 여행을 갔다가 그곳에 영화학교가 있다는 걸 알게 돼 유학도 갔다. 나의 삶의 태도 역시 ‘괜찮아, 경험’이었던 거다. 조만간 네덜란드 생활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이주할 계획이다. 새로운 환경이라 기대만큼 걱정도 되지만 금방 또 이렇게 말하면 된다. 괜찮아, 경험! (웃음)

 

특별히 어떤 분들이 <기억의 전쟁>을 봤으면 하나.

전쟁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의 관객들이 많이 봐줬으면 좋겠다. 각자의 위치에서 베트남 전쟁과 학살을 말하고 기억하는 기회와 자리가 많아지길 바란다. 그들의 시선으로 전쟁을 말할 때 비로소 평화를 얘기할 수 있을 테니까.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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