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먹지 마!
<입문반> 한혜지
글 차한비 사진 김혜미 / Interview / 2020-02-19

“혹시 제가 노래를 골라도 될까요?” 카메라 셔터 소리가 잠시 잦아들었을 때 한혜지가 조심스레 물었다. 곧 스튜디오에는 익숙한 멜로디의 팝송 대신 사비나 앤 드론즈의 <Stay>가 울려 퍼졌다. 방금까지 쑥스럽다며 얼굴을 가리고 연신 웃음을 터뜨리던 그였는데, 음악이 시작되자 뭔가를 결심한 듯 차분하게 렌즈 너머를 응시했다. 마침 귓가에 머문 가사는 “How pick up the day has gone(지나간 날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겠어요)”였다.

한혜지를 처음 만난 곳은 어느 시사회 뒤풀이 자리였다. 축하와 감사를 주고받느라 시끌벅적한 종로의 한 호프집에서 한혜지는 유일하게 들뜨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테이블에 빈 맥주잔이 쌓여 가는 동안에도 그는 첫인사를 나눌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었고, 영화나 연기보다는 주로 사는 일에 관해 말했다. 요즘은 ‘도시농부’가 되는 재미에 빠졌다며 핸드폰 사진첩을 열어 작은 텃밭과 풍성하게 자란 바질을 보여주기도 했다.

작년 12월에 열린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한혜지는 <입문반>(연출 김현정, 2019)으로 독립스타상을 수상했다. 상이 주는 응원과 지지와는 별개로, 무리 속에서 종종 침묵을 지키고 스스로 생활을 가꾸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그라면 ‘독립스타’라는 호명에 마냥 부풀어 있지만은 않을 듯했다. 해를 넘겨 대화를 청했다. 질문은 여럿이었지만 거의 모든 대답은 한혜지가 지금 어디에 머물고 무엇을 결심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참고로 <입문반>은 2월 22일 서울아트시네마와 인디스페이스가 함께 마련한 ‘해피인디투게더’에서 볼 수 있다)

 

 

<Stay>는 갑자기 떠오른 곡이었나요?

네, 아까 집중을 못 하고 자꾸 웃음이 나와서요. 2014년에 알게 된 노래인데 당시 제 정서와 닮았던 것 같아요. 제가 출연한 영화 클립을 모아서 그 음악에 맞춰 편집해둔 영상도 있어요. 아마 SNS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예요. (웃음) 저한테는 초심을 상기시키는 곡이랄까요.

 

연기를 시작한 시점이 2014년인가요? 이전에는 간호사로 오래 일했다고 들었어요.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은 2015년 4월 무렵이에요. 2014년은 준비하던 시기이고요. 사실 준비라고 할 것도 없고, 그저 연기가 너무 하고 싶어서 애쓰던 때였죠. 직장 생활을 병행하며 퇴근한 후에는 스터디에 다녔어요. 저처럼 비전공자인 친구들이 모여서 연기를 하는 모임이었는데, 다들 나이도 직업도 다양했어요. 물론 몸은 힘들었지만 한참 열정적으로 보내던 시기 같아요.

 

필모그래피에는 <글로리데이>(최정열, 2015)가 첫 영화로 나오더라고요. 데뷔의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나요.

정말 10초 나와요. (웃음) 좀 우습지만 저한테는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유의미한 순간이었죠. 당시에는 방법도 모르고 딱히 알려주는 사람도 없으니 영화사에 찾아가서 직접 프로필을 돌렸어요. 이상한 사진 몇 장 갖다 붙여서요. (웃음) 근데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와서 받아보니 <글로리데이>인 거예요. 영화에서 이상희 배우가 맡은 간호사 역할에 오디션을 봤어요. 얼마나 긴장했는지 몰라요. 오디션 끝나고 나오면서 저도 모르게 “죄송합니다”라고 했을 정도예요. 앞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시간만 빼앗은 느낌이더라고요. 뜻밖에도 얼마 후에 출연을 제안하는 연락이 왔어요. “저는 괜찮은데 감독님도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라고 되물었다니까요. (웃음) 제대로 연기했을 리가 없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기쁘더라고요. 그때부터 여섯 마디 대사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외우며 연습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저는 ‘간호사’가 아니라 대사 없는 ‘간호사2’더라고요.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요. 당산과 합정 사이를 지나는 전철 안이었는데 한강 보면서 엄청나게 울었어요. (웃음) 막상 현장에서는 엄청 행복했지만요. 안병래 피디님과 여전히 연락하며 지내는데 “그날 현장에서 신난 사람은 너뿐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여러모로 소중한 경험이었죠. 상희 언니처럼 좋은 동료도 만났고요.

ⓒ김혜미

그러고 보니 이상희 배우와는 간호사로 일했다는 공통점이 있네요.

처음부터 많이 의지했어요. 언니랑 고향도 같아요, 울산. <입문반>에서 가영이가 집에는 비밀로 하고 서울을 오가며 시나리오 수업을 듣잖아요. 당시 제가 비슷한 상황이어서 궁금한 것이 정말 많았어요. 영화나 연기뿐만 아니라 부모님은 어떻게 설득했는지, 직장을 관둔 후에 경제적으로는 어떻게 해결해나가는지 같은 현실적인 부분에 관해서도요. 곧장 전화번호를 물어본 다음 만나자고 연락했죠. (웃음) 언니가 집에 초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어요. 매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여전히 고민거리가 생기면 언니한테 전화하곤 해요. 그때 나눈 대화나 언니가 말한 문장이 불쑥 떠올라서 도움을 받는 순간이 있어요.

 

예를 들면요?

얼마 전에 통화를 길게 했는데 언니가 제 말을 조용히 듣고 나더니 그러더라고요. “혜지야, 과정 중에 있는 거야.” 그 말이 크게 남아요.

 

지난달 인디플러스 포항에서 열린 <입문반> 상영회에서 “간호사로 일하다 연기를 시작한 건 큰 용기가 아니라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는 이기심이었다”고 했어요. 그때 말한 ‘이기심’에 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볼 수 있을까요? 연기를 선택할 때 무언가를 외면해야 했다는 이야기처럼 들렸거든요.

간호사라는 직업에 관해 제 경험을 말하면서도 되게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어요. 물론 일하면서 보람도 느꼈지만, 결국 더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간호사를 관둔 거니까요.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오를수록 더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고요. 어쨌든 간호사에서 배우로 ‘퐁당’ 건너뛰듯 넘어올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한쪽 다리씩 천천히 옮겨야 중심을 잡겠더라고요. 종합병원과 개인병원 등 2-3년 주기로 직장을 옮기다가 끝에는 비교적 시간 여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연구 간호사로 일하며 연기 공부를 병행했어요. 양다리를 걸친 거죠. (웃음) 일일이 말하긴 어렵지만 그때 마지막 한 발을 떼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어요. 이기심이라고 표현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현실적인 고민 때문이었고요. 부모님이 심하게 반대하신 데다 저 또한 당장 수입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막막했죠.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을 들여다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 저를 위한 선택인데, 혹시라도 혼자 힘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어쩌나 싶었어요. 집에서 독립한 이후 한 번도 부모님께 기대지 않았고, 그건 저라는 사람을 이루는 큰 자부심이었거든요. 제가 인정하는 나 자신을 무너지게 만들면서까지 할 일인지 거듭 생각했어요. 결국 해야겠더라고요. 지금 못하면 평생 주변을 맴돌기만 할 것 같았어요. 그건 너무 슬프잖아요. 어떤 면에선 부모님을 외면한 것이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때 내가 하고 싶은 거 못하게 했잖아’라며 사는 내내 부모님을 원망하는 상황이 더 힘들 것 같았고요.

<면도>(2017)
<밸브를 잠근다>(2018)

환영하고 격려하는 사람보다 만류하고 염려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결정이었네요. 그럼에도 연기를 선택한 그 마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연기의 무엇에 그렇게 푹 빠졌던 거예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연기하는 마음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는데, 처음에는 ‘와, 저거 진짜 재밌어 보인다!’ 하는 막연한 호기심이었어요. 원래 이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가 2008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연극이란 걸 봤어요. 신기하게도 극장이 암전되는 순간부터 빠져들었어요. 다 새로웠죠. 무대도, 칠흑 같은 어둠도, 작은 빛과 함께 걸어 나오는 배우들도. 학창 시절에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나 가수를 보며 열광해본 적이 없거든요. 근데 그날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배우들에게 완전히 매료됐어요. 너무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고, 그 행복은 어떤 행복인지 궁금하더라고요. 몸이든 마음이든 오롯이 자기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 그토록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어요. 무대에서 내려온 다음에도 그건 변함없을 테니까요.

 

듣다 보니 어릴 적엔 어떤 아이였는지 궁금해지네요. 배우를 꿈꾼 건 나중이지만, 돌이켜보면 기억나는 순간이 있나요?

지금은 오히려 장점인데 제가 울보로 소문이 자자해요. (웃음) GV 하다가도 잘 울고요. 어릴 때부터 감수성이 예민했던 것 같아요. 제 감정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해서도요. 이런 성향이 배우가 되는 데 도움이 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건 혼자서만 가끔 해보는 상상인데, 제가 지금도 손을 움직여서 뭔가 만들기를 좋아하거든요. 그림을 그린다거나 뜨개질을 한다거나요. 예전에 학교 선생님이 미술을 해보면 좋겠다고 한 적이 있어요. 형편상 어려울 거라고 짐작하면서도 엄마한테 미술학원 이야기를 꺼냈는데 당연히 반대하셨죠. 아마 그때 미술을 했다면 연기하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싶어요. 저에게는 표현 창구가 필요했던 것이지, 그게 꼭 연기여야만 했던 건 아닐 수도 있겠다고요.

 

손으로 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요새 텃밭은 어떤가요? 봄을 준비하는 시기겠죠?

맞아요, 올해는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도 함께한다고 해서 규모가 좀 커질 것 같아요. (웃음) 저는 취미를 여러 개 가진 사람인데, 생각해보면 일상에서 가능한 행복을 많이 찾고 느끼려는 것 같아요.

ⓒ김혜미

일상을 가꾸고 돌보는 일에 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인스타그램에 써놓은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 독립운동가, 자급자족프로젝트”라는 자기소개와도 맞닿는 거겠죠?

농사를 짓고 뜨개질을 하다 보니 언젠가는 이렇게 의식주를 해결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손으로 시작해서 내 손에서 끝마치는 일이 저한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사실 영화에서 배우는 처음과 끝이 아니라 중간에 있잖아요. 촬영할 때 일하는 거니까요. 가끔 모든 과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못내 불안했어요. 잘되고 있는 건가? 나는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한 건가? 하는 의문이 들어서요. 음악가나 미술가가 부럽더라고요. 기획부터 완결까지 자기 손으로 책임지니까요. 그런 마음에서 자급자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나 봐요. 말하다 보니 거창해지네요. 제가 의미 부여하길 좋아하거든요. (웃음) 뭐든 연기와 연결하는 병이 있는데 뜨개질할 때도 그런 생각해요. ‘이 실이 엉켜버리면 쓸모없는 쓰레기일 뿐이지만, 어떤 규칙으로 잘 엮어내면 가방도 되고 모자도 되는구나.’ 연기도 그와 다르지 않을 거라고요. 독립운동가는 정말 ‘중2병’ 같은 발상인데 자아라는 주권을 지키자는 다짐이에요. 외부에 휘둘리지 않고 나 자신을 지켜내겠다는. 아, 인터뷰하러 오면서 가장 걱정스러웠던 게 이 거창함인데 큰일이네요. (웃음) 제가 너무 포장할까 봐 두려웠어요. 한참 얘기하다 보면 뒤늦게 ‘내가 말한 게 진짜인가? 이게 진짜 나 맞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포장하면 더 좋을 수도 있잖아요. 왜 솔직해지고 싶어요?

오늘 집에서 일기장을 들고 왔어요. 이걸 보면 제가 뭘 했고 어떤 걸 느꼈는지 얼추 떠오르거든요. 여기 오면서 살펴보니 진짜, 가짜, 진심, 솔직하게, 그런 단어들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글쎄요, 솔직함을 겉으로 드러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적어도 자기 자신은 알아야 하는 거죠. 내가 지금 무얼 원하는지 인지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고, 연기할 때도 그렇더라고요. 잘 모르고 사실 느끼지 못했는데 그런 척하다 보면 언젠가는 분명 들키는 것 같아요. 제가 김희애 배우를 정말 좋아하는데, 예전에 어떤 방송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연기할 때 사심이 들어가면 제대로 안 나오고 미워 보인다. 결국 나중에 같이 작업했던 사람들한테 미안해진다.”

ⓒ김혜미

<입문반>은 어떤 시기에 만났나요. 사심 없이 솔직할 수 있었던 작품인가요.

작품에 담긴 이야기와 당시 제 정서가 맞아떨어졌을 때 발생하는 힘을 믿어요. 어떤 인물과 만날 무렵에 제가 깨달은 것이나 고민하는 바가 타이밍 좋게 연결될 때요. <입문반> 작업 당시 그리 밝은 상태는 아니었어요.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는데, 저는 삶에 흔들림이 찾아오면 숨어버리는 경향이 있거든요. 웬만하면 바깥과 차단한 채 혼자 지냈고, 어쩔 수 없이 밖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면 여지없이 힘들었죠. 혼자일 때나 함께일 때나 쉽지가 않더라고요.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양가감정으로 가득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삶이 벅찰 때 이따금 작품으로 도망간다는 생각해요. 현실 속 제 고민을 잠깐 꺼두고 영화 속 인물을 고민하는 거죠. 뾰족한 해결책이 있다기보다는 그저 잠시 시간을 가져야 하는 문제가 있잖아요. 그 무렵에 <입문반>과 가영이를 만났어요. 집에서도 내내 가영이를 생각했죠. 가영이는 왜 그럴까? 어떤 마음일까? 하면서요. 

 

이제 막 새로운 장에 진입해서 부침을 겪는 가영을 멀게 느끼지 않았을 듯해요.

필름메이커스에 올라온 배우 공고를 보고 지원했어요.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웃음)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소외였어요. 비슷한 경험이 없지 않았기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고요. 정작 촬영 준비하면서는 가영과 거리를 조정하느라 애먹었어요. 어떤 날엔 아주 가까웠다가 또 며칠 후엔 저만치 멀게 느껴져서요. 특히 촬영이 가까워졌을 무렵에 갈피를 못 잡아서 무척 불안했던 기억이 나요.

 

가영은 요동치는 내면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요. 지망생, 창작자, 여성, 후배 등 위치와 정체성에 따라 갈등은 겹겹이 쌓이고 증폭하는데, 가영의 말에서 속내를 전부 헤아리기란 쉽지 않죠. 연기하며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을 텐데 준비 과정이 궁금해요.

방금 말한 불안과 연결되는데, 가영을 답답하다고 느꼈던 순간이 있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 친구한테 자꾸 조언하는 거죠. 속에는 훨씬 커다란 감정이 있는데 표출되지 않으니, 촬영할 때 손발이 묶여버린 기분이 들더라고요. 실제 저는 말도 많고(웃음), 생각을 어떻게든 표현하려고 하는 사람에 가까우니까요. 결국 저와 인물 간의 차이를 소화해야 했고, 그런 면에서 가영을 더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영의 감정을 제대로 느끼는 것이 중요한 상황이었죠.

<입문반>(2019)
<입문반>(2019)

성공한 것 같나요?

감독님과 어느 정도 들킬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를 오래 나눴어요. 가영이라는 인물을 지켜내면서도 관객이 들여다 봐줄 수 있을 만큼은 들켜야 하니까요. 사실 영화가 완성되고 처음 봤을 때는 두려웠어요. 저뿐만 아니라 어느 배우든 처음에는 자신이 나온 영화를 정확히 보기가 어려울 거예요. 좀 더 들켜야 했나, 더 잘해야 했는데, 하는 반성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영화제 상영 전에 다시 반복해서 봤어요. 그때 보니 괜찮더라고요. (웃음) 영화 속 가영이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사이에 제가 변해선지 가영이가 가영이로 보였어요. 일상에서도 그렇잖아요. 같은 사진도 기분에 따라 달리 보이고, 어느 날엔 내가 했던 말이 후회스럽다가도 또 시간 지나면 그럴 만했지 싶고요.

 

김현정 감독과는 이번이 첫 작업인데도 영화에서나 영화 밖에서나 서로를 향한 믿음이 느껴지더라고요.

하루도 쉬지 않고 8회차를 촬영했는데 현장에 있는 매 순간 행복했어요. 스태프 호흡도 완벽했고 모든 일이 서로를 돕는 방향으로 진행됐어요. 전체적으로 방방 뜨지 않고 다들 영화를 위해 달려간다는 집중력이 돋보였죠. 제가 본 감독님은 진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웃음)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굉장히 열정적이죠. 가장 고마웠던 순간은 마지막 호프집 신을 촬영할 때였어요. 감독님이 테이크를 여러 번 가는 편인데 그날따라 제가 뒤로 갈수록 헤맸거든요. 초반에 붙잡았던 감정을 놓친 상황이었고 ‘이건 내가 해야 해. 아무도 도와줄 수 없어.’라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서 외롭고 무서웠죠. 그때 감독님이 다가와서 저를 가만히 바라봤어요. 감독님 눈을 보니까 뭘 해야 할지 알겠더라고요. 이 사람도 나와 같은 마음이구나, 우리가 지금 같은 걸 보고 있구나. 말이 아니라 눈으로 디렉팅을 준 거죠. 덕분에 그 장면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어요.

 

방금 이야기한 장면은 영화에서 가영이 조금이나마 속내를 비치는 결정적인 순간이죠. 아마도 그때 가영은 살면서 처음으로 타인에게 화를 낸 것이 아닐까 싶었어요.

맞아요, 가영이가 화를 낼 때 아주 삐걱거리잖아요. 촬영하기 전에 연습 영상을 찍었는데, 그때는 훨씬 세련된 방식이었다고 할까요. 현재 영화와는 결이 달랐어요. 그 삐걱거림 때문에 저도 현장에서 당황했던 거고요. 지금 이 순간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은 이게 맞는데, 정말 이대로 표현해도 괜찮을지 확신이 서질 않아서요.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다행히 맞더라고요. 가영이는 사건에 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잖아요. 누군가에게 해를 가할 의도도 없고 망신을 주려는 목적도 아니죠. 다시 영화를 보면 피식하고 웃음이 나는 장면이 몇 군데 있어요. 가영이가 눈으로 말할 때가 있거든요. (웃음) 가영이 나름대로 자기 자신을 주장하고 표현하는 방식 아니었을까 싶어요.

ⓒ김혜미

<입문반>으로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과 독립스타상을 받았어요. 특히 배우상은 수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더라고요.

영화가 좋다는 피드백 덕분에 요만큼 기대하긴 했지만 예상은 못 했어요. 시상식 때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어쨌든 이름이 불려서 나가긴 했는데 ‘왜 내가 여기에 있지?’ 싶었죠. 수상 직후에는 오히려 좀 가라앉더라고요. 늘 그렇듯 혼자 시간을 보냈죠. 방에 누워 있으면 남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한혜지라는 배우가 상을 받았네. 그게 전부였어요. 한편으로는 이 상으로 혹여나 어떤 기대를 주거나 실망하게 만드는 일이 생길까 봐 두렵기도 했어요. 물론 감사한 마음이야 당연하지만, 저로서는 이 상을 즐기거나 누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거리를 두다 보니 딱 한 달 후에 좀 편안해지더라고요. 이전까지는 친구들이 “어이, 독립스타!”라며 놀리면 농담으로라도 못 받아주겠더라고요. (웃음)

 

한 해를 마치고 새해를 시작하는 기분이 남달랐겠네요.

사실 2019년을 시작할 때는 한참 지쳐 있었어요. 연료를 다 쓴 자동차를 억지로 밀고 가는 느낌이었죠. 연료가 찼다는 느낌이 들기 전까지는 일단 기약 없이 쉬어보자고 마음먹었고, 반년 동안 정말 푹 쉬었어요. 농사짓고 기타 배우고 요가 하면서요. (웃음) 다행히 6월쯤 뭔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프로필도 돌리고 일도 시작했어요. 2019년은 배우로서 전에 없이 수확을 거둔 해였어요. 2019년이 아니라 그보다 전에 뿌려둔 씨가 결실을 본 거였죠. 작년에 받은 힘으로 올해 기운 내어 보려고 해요. 2020년 시작하면서 ‘애쓰다’라는 단어가 훅 하고 떠올랐어요. 애쓰며 살아보고 싶어요. 실패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요. 2019년에 받은 응원 덕분에 조금 실패해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그만큼 에너지가 생겼어요.

 

<입문반>을 포함해서 그동안 출연작 대부분을 여성 감독과 작업했어요. 일상적인 성차별이나 권력 구도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 많았고요. 배우이자 인간으로서 지향하는 바와 맞닿은 선택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제가 페미니즘이나 인권 문제에 관해 많이 알고 단단한 생각을 가져서라기보다는 아직 물렁물렁하기에 그런 작품에 끌리는 것 같아요. 같이 잘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고, 작업을 마치고 나면 이야기의 힘을 빌려서 저도 한 걸음 성숙해져요. 영화를 준비하며 감독님들께 많이 묻고 배워요. 그 과정에서 미처 인지하지 못한 사실을 새롭게 깨닫기도 하죠. 특히 여성영화제에 출연작이 상영되면서 직접 관객과 만나고 다양한 영화를 접한 것이 큰 공부가 되었어요. 사실 그동안 명확하게 언어로 표현하지는 못했어도 지금까지 여성이자 배우로 살면서 저 역시 느껴왔던 부분이 있던 거죠. 종종 일기를 다시 읽는데, 타인의 시선에 갇혀서 답답해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곤 해요. 저항하고 싶어 하죠. 지나고 보면 덜 익은 생각도 많겠지만 현재를 기록해두는 의미가 있다고 봐요. 상희 언니가 쓴 표현을 빌리자면 다 ‘과정 중에 있는’ 것 아닐까요. (웃음)

<입문반>(2019)
<입문반>(2019)

주로 관계와 삶의 태도에 진중하게 접근하는 영화를 찍어 왔어요. 관객으로서도 그런 작품을 좋아하는 편인가요?

때마다 다른 것 같아요. 배우로서 시나리오를 선택할 때 당시 제 상황에 비추어 보는 것처럼 관객으로서도 시기마다 와 닿는 작품은 분명히 있으니까요. 요즘에는 치열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에 끌려요. 삶을 충실히 살고 싶은 시기인가 봐요. 다르덴 형제의 작품을 보면서 생존과 윤리가 부딪치는 딜레마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고요. 절망하거나 포기할 틈도 없이 계속해서 살아내잖아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도 제발 겁 좀 안 내고 살았으면 좋겠다. (웃음)

 

특별히 사랑하는 캐릭터가 있나요? ‘와, 저건 나야!’라고 생각할 만큼 가깝게 느낀 인물이라든지요.

지금 딱 떠오르는 건 드라마 <아들과 딸>(MBC, 1993)에서 김희애 배우가 연기한 후남이네요. 팬이다 보니. (웃음) 일차적으로는 연기에 반했지만, 생각해보면 극 중 사회는 남아선호사상으로 점철된 곳이잖아요. 한날한시에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귀남과 후남은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전혀 다른 위치에 놓이죠. 딸인 후남은 대학도 안 보내주고 심지어 자기 힘으로 가겠다고 하는데도 못마땅해하고요. 도와주기는커녕 냉대를 일삼는 환경이지만, 그때도 후남이는 자기 욕구를 알아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파악하고, 그 길을 일궈나가기로 결정하죠. 멋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다음에 보여줄 인물이 기다려지네요. 끝으로, 연기하며 스스로 이것만은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부분이 있다면요.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했고, 다음엔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를 두기도 했어요. 잘 모르면서 그냥 연기할 때도 있었고요. 최근에 연기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결국 누군가의 마음을 살피고 알아주는 일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제가 이타적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배우나 관객이나 인물을 만날 때 기본적으로 같은 마음인 거죠. 그랬구나, 하고 들여다봐주는 거요. 어떤 책에서 봤는데 배우는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주는 직업이래요. 사람들이 너무 바빠서 혹은 알 방법이 없어서 지나치고 마는 감정들, 계절이나 바람처럼 사소한 변화들을 예술가가 포착해야 한다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잘 곱씹으며 느껴야겠죠.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런 자세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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