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 관한 다큐멘터리 <소성리>(2018)의 개봉(8월 16일)을 앞두고 박배일 감독을 만났다. <소성리>를 비롯한 그의 영화는 많은 경우 투쟁의 현장에서 시작돼왔다. 노동조합 결성에 나선 부산 지역 환경미화 노동자들을 그린 <잔인한 계절>(2010)을 비롯해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에 관한 두 편의 영화 <밀양전>(2013)과 <밀양 아리랑>(2014),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부산의 생탁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깨어난 침묵>(2016)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배일 감독은 영화감독이자 미디어 활동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굳건히 갖고 영화로 투쟁의 현장과 긴밀하게 연대해왔다. 그때마다 그의 카메라는 현장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날 선 공방을 주시하고 사안의 진행을 쫓기보단 현장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향해 있었다. 사랑과 결혼을 모색하는 장애인 주인공들을 따르며 속정을 나눴던 <나비와 바다>(2011)도 그런 연장선에서 언급할 수 있다. 동시에 작품이 거듭될수록 박배일 감독은 미학이라는 관점에서도 자신의 영화가 부족하지 않길 고심하는 듯하다. 어떻게 해야 투쟁 현장을 ‘영화적으로’ 더 잘 담아내 관객의 감각을 깨울 수 있는가. ‘현장’을 기반으로 한 영화와 ‘영화’적으로 현장을 담아낸 영화 사이에서 박배일 감독이 찾아낸 잠정적인 결론이 <소성리>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2007년부터 영화를 본격적으로 만들면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현장으로 달려가 그곳의 목소리를 부지런히 들어온 사람이 얻어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소성리>는 제작부터 공개까지 굉장히 빠르게 진행됐다. 당시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성주, 김천’에도 참여한 것으로 안다(‘미디어로 행동하라’는 미디어 활동가들이 밀양 송전탑, 삼척·영덕 원자력 발전소, 충북 유성기업 등의 투쟁 현장으로 가 4박 5일간 머물며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에 연대하고 결과물을 내는 프로젝트다. 이하 미행).
그놈의 ‘욱’ 하는 마음에 <소성리>를 시작했는데 너무 큰 프로젝트가 됐다. (웃음) 미행은 일정도 짧고 배급 주체도 없다보니 관객들과 만날 기회조차 없다는 한계가 있다. 사전에 미행을 준비하면서 소성리 관련 장편을 만들어야겠다고 이미 생각했고 미행 팀에게 프로젝트 후에 며칠 더 머물러 주기를 부탁했다. 영화를 만들기로 한 이상 최대한 빨리 완성하고 싶었다. 그래야 영화가 진행 중인 투쟁에 기여할 수 있을 테니까. 본 촬영부터 편집까지 3개월만에 완성했다.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발 포럼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지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영화의 형식에 대해 더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밀양 아리랑> 때 개봉 준비를 정말 열심히 했는데 최종 관객 수가 3천 5명이었다. 결과를 받아들고 보니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의미일까 싶더라. 영화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세상의 변화에 일조하고자 한 내 애초의 목적을 다시 돌아봤다. 그때가 마침 <깨어난 침묵>을 만들던 때인데 편집실에서 작업은 하지 않고 그 생각만 했다. 그러다 <깨어난 침묵>의 주인공분들이 한겨울 매일같이 사장의 집 앞에서 투쟁을 한다는 소식을 접했고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간 영화가 우선이 아니고 삶이 우선이다, 다큐멘터리가 투쟁에 긍정적인 도구이길 바란다고 말해왔는데 그 도구를 활용해야 할 사람이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나 싶더라. 영화가 뭔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는 만들면서 찾아가면 될 일이었다. 생각이 정리되자 <깨어난 침묵>을 완성할 수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소성리>도 가능했다.
미디어 활동가로서 투쟁의 현장을 전하고 싶은 마음과 영화감독, 창작자로서 만들고 싶은 영화라는 게 매번 일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잔인한 계절>의 오프닝에서도 얼마간 짐작되지만 <깨어난 침묵>부터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영화적 이미지, 구성에 대해 고민한 것 같다. <소성리>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셈이다.
<잔인한 계절>부터 생각했다. 선배 다큐멘터리 감독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왜 운동이 다 끝나고 그 운동을 정리하는 방식의 영화로 운동에 복무하는가’가 의문이었다. 물론 그러한 방식도 유의미하겠지만 내 경우는 투쟁하는 그 당시에 현장에 도움이 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성리>는 긴 속보성 영상이다. 다만, 10년 넘게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그저 현장을 빠르게만 전해서는 제대로 그 현장을 책임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영화적으로’도 완성돼야만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점점 현장을 기반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으니 모든 조건이 충족된 상태로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도 없다. 다른 방식의 제작 가능성을 나부터도 상상해야 한다. <소성리>도 기존의 방식대로 하되 제작 기간을 줄인 경우다.

<잔인한 계절>부터 지금까지 작품마다 얼마간의 차이는 있지만 주되게 인터뷰로 영화를 구성해왔다.
=인터뷰가 가장 쉽고 그나마 내가 잘 할 수 있는 방식이다. 어떤 사안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보다는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데 더 관심이 간다. 투쟁 현장에 있는 ‘그 사람’을 들여다보는 게 내가 생각하는 다큐멘터리의 역할이다. 김태일 감독님이 말하는 ‘독수리의 시선이 아니라 벌레의 시선으로’ 인물을 보기. 최근의 작업에선 인터뷰를 쓰는 방식에 대해 좀 더 고민한다. <깨어난 침묵>은 노동자가 용감하게 자신의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했을 때 오히려 그 말들이 노동자를 침묵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걸 영화의 형식으로도 보여주려고 했다. <소성리>는 개별 인물 저마다의 흔적이 소성리라는 공간에 어떤 식으로 남아 있는가를 인터뷰로 전하고 싶었다. 그 전 작업에선 인터뷰를 빠르게 진행하고 인물들의 노동 현장을 담아 기능적으로 둘을 결합한 면이 있다. 매우 큰 나의 약점이지만, 뭐 어쩔 수 있나. (웃음)
인터뷰 방식에 대해 좀 더 말해보고 싶다. <밀양전>의 여성 농민들이 카메라 앞에 서 있을 때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나는 000입니다’ 등 자신에 대해 말하는 그녀들의 목소리가 흐른다. <깨어난 침묵>의 인물들도 말없이 카메라를 뚫어지라 응시하고, 그들의 목소리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나온다. 이러한 방식은 관객이 인물을 볼 수밖에 없게 할 뿐 아니라 카메라 앞에 선 인물들조차도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것 같다. 카메라 앞에 앉아본 경험이 거의 없는 이들이 말없이 카메라를 보는 시간은 영화 안팎으로 일종의 소격 효과를 낳는다.
촬영감독을 따로 두고 인터뷰를 진행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내가 직접 촬영하며 인터뷰한다. 인물과 내가 관계를 맺어온 시간이 있는데 측면 촬영을 한다는 게 어색하다. 또 주인공들의 정면 얼굴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분들이야말로 위대한 일을 하고 있으니까. <깨어난 침묵> 땐 주인공분들께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상상하며 카메라를 봐달라고 했다. 어떤 분은 울컥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웃기도 하고.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에 관해서라면, 어디에서도 말한 적 없는데 한번은 말해야겠다. (웃음) 얼굴을 오래 보여주면 상영시간이 길어진다. 투쟁 장면, 인물의 행동, 주변 환경 등 보여줄 게 많은 데 시간이 없는 거다. 그때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그런 걸 대신해준다.
그런 방식에서 감독이 관객에게 바라는 바, 이 영화에서 보고 듣기기를 바라는 것이 드러난다.
정말 나쁜 생각이지만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분명히 있다. 영화가 강력한 목적과 명확한 의도를 갖고 관객을 이끌어가는 게 좋은 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날은 좋지 않은 것 같다가도 또 어느 날은 영화란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는 고백이라면 그 고백을 충실히 하자 싶어 더 밀고 나가고도 싶다. 왔다 갔다 한다. (웃음)

<소성리>는 개인들의 사적 경험의 구술과 사드가 배치되는 소성리의 현재 상황, 자연적인 특징과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소성리의 특징 등을 엮어간다. 이때 개인의 전언과 외부 상황을 잇는 공통의 키워드가 있다. 전쟁, 죽음, 망자, 망령, 꿈, 환상과 같은 단어들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무섭고 기이한 전쟁과 죽음의 사적 경험, 바로 눈앞에 와 있는 공포인 사드를 그 공통어로 연결한다. <소성리>의 도드라지는 카메라의 흔들림, 장면 연출 역시 이 맥락 속에서 얘기될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 당시 성주의 문재인 지지율이 낮은 걸 두고 인터넷에 ‘(문재인을 지지하지 않은 성주는) 사드 안고 죽어버려라’라는 유의 댓글들이 올라왔다. 스스로 진보라고 말하는 이들조차 그런 말을 하더라. 그 댓글에 ‘욱’ 해서 그 길로 소성리로 향했다. 왜 그곳 사람들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됐을까 증명해 보고 싶었다. 사전 조사를 하면서 알게 됐다. 그곳 어르신들에게는 6.25 전쟁 등을 겪으며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 “나는 000이 아니다”라는 걸 끊임없이 증언하고 증명해온 역사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보수화된 게 아닐까. 거대 권력이 만들어낸 전쟁과 이념 갈등 속에서 자신을 부정해온 개인을 들여다본다면 사드 배치 문제와도 맞물릴 것 같았다.
<소성리>의 몇몇 장면을 말해보자. 농민 운동을 해온 주인공이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의 환영을 본 이야기를 할 때면 전작에서 본 적 없는 핸드헬드의 롱테이크가 이어진다. 또 카메라가 제 의지대로 산을 휘적휘적 오르더니 산 정상에서 휘청거릴 때 그 장면 위로 무서운 꿈 이야기를 전하는 또 다른 여성 농민의 목소리가 흐른다. 서서히 부유하던 카메라가 소성리를 부감으로 조망할 때면 무시무시한 전쟁의 기억을 전하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주인공들의 인터뷰를 먼저 진행했고 그 가운데 어떤 말을 쓸지를 편집해둔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갔다. 영화마다 촬영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정하고 들어간다. 인터뷰 장면은 고정 쇼트로, 꿈이나 망령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방식으로 찍고 싶었다. 롱테이크는 그 주인공분이 집에 들어가신다고 하길래 따라가며 찍다가 ‘이 부분은 망령 이야기랑 붙여야겠다!’ 싶어 끝까지 따라가고 조금 더 흔들거리며 찍었다. 카메라가 산을 올라 산 정상으로 가던 그 길이 사드를 배치하기 위한 길목이었다. 스테디캠으로 계속 찍어나갔다. 소성리 상공에는 사드 배치를 위한 헬기가 계속 왔다 갔다 했는데 그럼 헬기에서 내려다본 소성리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항공 카메라가 향하는 길이 곧 사드가 배치되는 곳이기도 했고 항공 카메라가 내는 소리가 사드 배치 때 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또 다른 주인공분이 꿈 이야기를 할 때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사드 배치 찬성 쪽) 화면의 색깔이 변한다. ‘빨갱이’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계속해서 색을 부여해왔듯 빨주노초 등등 여러 색을 넣어본 거다. 이 모든 게 <소성리>의 주인공들이 느끼는 불안을 이상한 방식으로 표현해 보고자 한 시도다.
<소성리>의 사운드 활용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음악이라기보다는 날 것에 가까운 소리를 하나씩 모은 것 같다. <깨어난 침묵>에서는 공장 내부 장면 위로 단조롭고 텅 빈 듯한 허밍 소리가 들린다. <소성리>는 서늘한 느낌의 음들이 하나씩 하나씩 들리며 시작된다.
<밀양 아리랑> 때부터 음악을 썼다. 이전에는 컷으로 리듬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굳이 음악을 쓰지 않았다. 음악으로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관객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영화와 호흡할 수 있을 것 같더라. 그렇다면 어떻게 음악을 쓸 것인가. 분위기를 잡거나 과하게 쓰고 싶지는 않았다. 감각을 전하는 방식으로, 촬영 현장에서 발생하는 소리로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 <밀양 아리랑>에서도 경찰들의 군홧발 소리를 활용했고 송전탑에서 나는 ‘괴앵~ 지잉~’ 하는 소리를 점차 쌓아갔다. <깨어난 침묵>은 주인공분들이 직접 찍은 영상을 사실상 내가 2차 가공한 셈이라 허밍과 호흡 소리 등으로 좀 더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소성리>는 첫 장면을 찍고 영상을 확인하는데 멀리서 ‘뽕, 뽕’ 하는 소리가 나더라. 아직도 그 소리의 정체는 모르는데 그게 소성리가 만들어내는 음이라면 그 음에서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사드가 들어올 때까지 소리음도 함께 쌓여가는 거다. 현재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 <사상>에서도 부산 사상 지역에서 나는 소리로 음악을 만든다. 또 그곳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오랫동안 노동하면서 자기 몸에서 나는 소리나 느껴지는 공명을 음악적으로 표현해보려 한다.
영화마다 유독 노래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노래를 한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잔인한 계절>도 노래 부르는 장면으로 끝난다. 주인공에게 이 장면을 마무리로 쓸 건데 노래를 한 곡 불러 달라고 했더니 30분 동안이나 선곡에 고심하더라. 결국 그 곡이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음악이 됐다. <밀양 아리랑>의 ‘내 나이가 어때서’도 할매들이 경찰들을 쫓는 장면과 붙으니 재밌지 않나. 노래가 극에 템포가 되고 의미와 재미까지 준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음악이 아니라 인물들이 직접 부르는 노래인만큼 쓸 수만 있다면 계속 쓰고 싶다.
밀양에 관한 두 편의 영화와 <소성리>는 특히 여성들의 구술사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나비와 바다> 때 재년 씨의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한 건 매우 아쉽다. 활동가로서,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여성 화자에 더 주목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나비와 바다> 때 그걸로 정말 욕을 많이 먹었다. 기술적으로 여성 화자가 이야기를 더 잘 해주는 면도 있지만, 현장에 오래 있다 보면 남성 서사도 충분히 끄집어내 만들 수 있다. 그보다는 세상을 바꿔나가는 여러 힘 가운데 여성들의 힘이 상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힘을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할 수만 있다면 여성, 장애인, 노동자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다. 그분들의 투쟁으로 세상이 변하고 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랐다. 지금도 부산에서 다큐멘터리 창작 공동체 오지필름을 만들어 활동한다.
어렸을 땐 방송국 드라마 PD가 되고 싶었다. 대학도 부산의 동의대 신방과로 들어갔다. 근데 막상 가보니 드라마를 만들 기회는 마땅치 않더라. 그나마 바로 만들어볼 수 있는 게 영화였다. 군대 가기 전에 몇 편의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군대에 가서 TV를 시청하는데 방송 제작 환경이 바뀌는 게 눈에 보이더라. 드라마 <올인>을 보는데 초반에는 이병헌 씨가 담배 피우는 장면이 나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예 담배 장면을 빼버렸다. 표현의 수위가 점점 낮아졌다. 그렇다면 좀 더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한 영화를 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마침 같은 날 입대해 같은 부대에 배치된 과 동기가 방송국 카메라 감독이 되고 싶어 했는데 그 친구랑 매일 같이 제대하면 영화를 만들자고 얘기했다. 전역하고 과에 영화 동아리를 만들어 1년 반 동안 극영화를 계속 만들었고 영화제에도 냈는데 번번이 안 됐다. 그러다 정말 마지막으로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심정으로 시나리오를 써서 교수님께 보여드렸다. 마침 그분이 다큐멘터리 전공 교수님이었는데 시나리오를 보시더니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라’고 권했다. 내가 그때만 해도 교수님 말씀을 잘 듣는 학생이라. (웃음) 그렇게 시작됐다. 가난한 어르신들 이야기인 <그들만의 크리스마스>(2007)를 만들면서 내가 알고 있던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동안 만든 영화는 세상이 뭔지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내 머릿속으로만 그린 세상이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세상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고,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몸으로 부딪혀 가며 세상 공부를 했다.
다큐멘터리를 따로 더 공부하거나 다큐멘터리 창작 공동체에 들어가 활동한 적은 없었나.
<그들만의 크리스마스>를 만든 후에 부산의 시청자미디어센터에 가서 다큐멘터리 수업을 들었다. 그때 강사분이 나를 좋게 봤는지 “배일아, 오랫동안 미디어 활동을 하며 영화를 만드는 평상필름이라는 곳이 있다. 같이 활동해볼래?”라며 제안했다. 내가 머리보다 몸이 빨리 움직이는 사람이라 “생각할 게 뭐 있냐. 내일부터 출근하겠다”고 했다. 알고 보니 평상필름이 미디어 활동을 하는 곳 가운데서도 가장 전위적인 곳이더라. 평상필름 사람들과 합숙하며 2008년부터 1년간 부산 서면 광장의 촛불 집회 현장을 찍었고,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가를 두고 토론하고 공부했다. 그곳에서 2년간 활동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가장 기초적인 눈을 갖게 됐다. 감사하고 귀한 곳이다. 평상필름과 비슷한 활동을 지금 오지필름에서 해보려는 거다.
오지필름은 어떻게 만들었나.
부산에서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영상 집단을 만들어보려 했다. 푸른영상 같은. 마침 오지필름 대표인 문창현 감독이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고, 그럼 우리끼리 작지만 하나 만들어볼까 싶더라. 둘이 도서관에 앉아서, “이름을 뭘로 하지?” 하다가 일전에 내가 오지필름이라고 지은 게 있어 그걸 그대로 썼다. 소외된 곳, 우리가 잘 모르지만 힘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의 오지이기도 하고, 영화가 운동의 도구로써 잘 활용되게끔 ‘오지게’ 활동해보자는 뜻이기도 하다. 그 후 김주미 감독도 합류했다. 사실 주미, 창현 모두 대학 때 만든 그 영화 동아리 <V/LAB>의 멤버였다. 아, 내가 몇몇 사람들 인생을 망쳐 놓은 건가. (웃음) 내가 그때 나와 동아리에 대한 장편 다큐멘터리를 한 편 만들었는데 아직까지 그 누구에게도 공개한 적이 없다. 언젠가, 정말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 친구들에게만 살짝 보여줘야겠다.
영화를 만들어오면서 작업에 변곡점이 돼준 시점이나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내가 운이 참 좋다. 2007년 초 다큐멘터리를 해야지 마음먹었을 때 김동원 감독님의 강의를 들었다. 내가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하면 감독님처럼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 수 있나.” 감독님의 답이 이랬다. “라면 좋아하느냐. 난 라면을 굉장히 좋아한다. 영화 만들라고 시키는 사람도 없고 만든 영화를 은폐하려고 드는 사람도 없으니 라면 먹으면서 만들면 된다.” 감독님 인터뷰 등을 찾아보며 그 속뜻을 어렴풋이 짐작해봤다. 가난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긍정하면 된다는 의미 아닐까. 이때 가난을 긍정한다는 건 가난해도 괜찮다는 게 아니다. 부족한 게 있으면 현장의 연대자, 공동체 구성원들과 그 부족을 나누면 된다. 연대를 구하고, 연대를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김동원 감독님께는 따로 더 그 의미를 여쭤본 적은 없다. 그리고 2008년의 평상필름이 나를 굳건하게 다져줬고,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잔인한 계절>을 상영한 것도 컸다. 일하는 즐거움이라는 게 때론 누군가의 인정과 함께 오지 않나. 2004년부터 영화를 만들었는데 한 번도 그럴듯한 성과가 없었다. 그러다 그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나비와 바다>가 장편독립 다큐멘터리 AND 펀드를 받았고, <잔인한 계절>이 상영까지 했다. 계속 해보라는 응원 같았다. 무엇보다 <잔인한 계절>을 좋게 봐준 주현숙, 문정현 감독을 만난 게 컸다. 지금까지도 서로의 작품에 피드백을 해주는 사이다. <밀양 아리랑>(2014)을 관심 갖고 봐준 김동령, 박경태 감독 역시 내게 영향을 많이 줬다. 하나의 주제(기지촌 여성)로 15년 이상 작업해온 분들이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작업해왔고 그 현장을 영화적으로 담아내는 방식을 나보다 더 오랫동안 깊이 있게 고민해온 분들이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이 배웠다. 어쩌면 내 미래일 수도 있어서 더욱 더.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 큰 변곡점이 돼 준 건 무엇보다도 밀양(송전탑 투쟁 현장)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변곡점이 참 많네.
현장의 공동체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영화를 찍을 것인가, 또 현장을 어느 정도까지 영화로 담아낼 것인가 역시 고민일 것이다.
내가 활동가로서 현장과 연대하고 공동체의 일원이 됐던 친밀감에 비하면 내 영화는 투쟁 현장으로부터 거리가 있다. 영화는 영화다워야 하니까 그 거리가 필요하다. 현장에서 작업할 때도 연대자들과 어울리거나 함께 술 한 잔 기울이는 일이 별로 없다. 그래야 작업에 속도가 붙기도 하고. 내가 가진 영화라는 매체로 연대하겠다고 현장에 들어간 거니까. 매번 하던 대로 비슷하게 만드는 건 나부터 지쳐 오래 못 한다. 영화 미학, 영화 형식에 대한 고민은 어찌 보면 인정욕구이기도 할 테고. 늘 생각한다. ‘왕빙 감독처럼 만들어보고 싶다. 근데 난 못하겠지’라고. (웃음)
‘왕빙 감독처럼’이라는 건 어떤 건가. 본인이 지향하지만 할 수 없다거나, 아직까지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만드는 이의 태도, 촬영의 방식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나.한글 자막 없이도 그 긴 <철서구>(2003)를 다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내가 그 현장에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왕빙의 영화적 감각 안에 내가 완전히 들어가 보는 경험이랄까. 왕빙은 현장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정확히 알고 현장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무엇을 찍어서 그 현장을 드러내야겠다는 계획이 있다기보다는 현장 상황의 맥락을 이미 알고 있어서 그 공동체에 스며들 듯 찍을 수 있는 것 같다. 감독이 영화로 주장하거나 요구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상황을 바로 그 옆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나는 현장의 이런저런 그림들을 미리 생각하고 어떻게 영화 안에 넣을지를 미리 생각하면서 찍는다. 왕빙처럼 찍으면 영화가 안 나올 것 같은 불안감이 있다. 또 내 영화가 현장에서 조금 떨어져 나와 그곳을 바라보게 한다면, 왕빙은 현장을 체험하게 한다. 성격의 문제일 수도 있다. 난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도 그 관계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걸 멀리하는 편이다. 현장과 관계 맺을 준비가 덜 된 관객이 접근하기에 편하게끔 하는 면도 있고. 그렇지만 언젠가는 오롯이 현장을 감각하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내 나름 굉장한 포부를 갖고 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10년 이상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오고 있는 감독”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현재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자각하고 뭔가를 더 책임지고 해나가야 한다는 말로도 들린다. 그래서인가. <사상> 작업과 동시에 올해 1월 문을 닫은 부산 국도예술극장을 비롯한 독립예술 극장들에 관한 기록 <라스트 신>의 후반 작업도 진행 중이다. 문창현 감독의 <기프실>(2018), 김설해, 정종민, 조영은 감독의 <사수>(2018)의 프로듀서로도 합류했다.
어떤 사람들은 <깨어난 침묵>부터 나에게 ‘예술병’에 걸렸다고 말한다. 영화보다 더 영향력 있는 매체도 많은 현재의 상황에서 결국 영화감독은 영화 미학으로 자기 영화에 책임을 다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예술병에 ‘제대로’ 걸려야 한다. 그 ‘제대로’를 찾아가는 과정인데 어렵다. 지금은 그런 상태다. 2007년부터 <깨어난 침묵> 전후까지는 현장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큰 의미를 뒀다. <깨어난 침묵>부터 <라스트 신>, <사상>까지는 내가 현장을 어떻게 감각하고 있고 그걸 영화적으로 어떻게 표현해낼까에 집중하던 시기다. 그렇게 단 한 번의 쉼도 없이 왔다. 마흔이 되면 얼마간 작품 기획은 하지 않고 영화 공부를 하며 환기를 좀 하고 싶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지만 그 세 번째 시기의 첫 작업은 무엇이 될까. 구상해둔 게 있을 것 같은데.
극영화나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만드는 건 다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 노동이 원래 그런 것 같다. 또 작업이 고통스러워야 작업이 잘 나오고 있다는 증거 같기도 하고. 그 힘든 과정을 감수하는 유일한 이유는 영화가 좋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도록 관심을 두고 해온 일이 거의 없는데 영화만큼은 지금까지 하고 있다. 극영화든 다큐멘터리든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맞는 방식을 찾아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로 계속 영화를 하고 싶다. 극영화도 스태프를 5명 정도로 꾸려서 진행해볼 생각이다. 규모를 키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떠안기 보다는 작은 규모이지만 참여자들이 모두 책임을 분담하고 함께 이루어가는 방식이 좋다. <사상>을 끝내면 아마도 다음 영화는 극영화가 되지 않을까. 내용은 밀양 이야기가 될 것이다. 시나리오도 밀양 할매들과 같이 쓰고, 할매들이 직접 연기도 하고. 오래전부터 밀양 세 번째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고 그건 SF적인 요소가 가미될 테니 극영화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또 모르지. 어느 날 또 ‘욱’ 해서 뭔가를 시작할지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 그게 참 재밌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