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불러낸 우연
<페인 앤 글로리>
손시내 / Choice / 2020-02-06

유명한 영화감독이자 퀴어 예술가로 전성기를 보낸 살바도르 말로(안토니오 반데라스)는 이제 인생의 정체기를 지나고 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지 4년, 그 자신도 척추 융합 수술로 움직임에 어려움이 생긴 지 2년째다. 시시때때로 엄습하는 몸의 통증은 물론이고, 우울과 불안도 그를 끊임없이 힘들게 한다. 영화 만들기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그 무엇도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상황, 그런데 괴로움 속에 멈춰있는 이 순간은 다른 한편으론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볼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일상의 기척은 강인한 어머니와 함께했던 유년기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고, 32년 전 명성을 가져다주었던 영화는 새롭게 복원되어 찾아온다. 그 영화를 함께 만들었으나 사이가 소원해진 배우 알베르토(에시어 엑센디아)와도 오랜 세월을 건너 다시 만난다. 이 만남은 또 다른 계기로 이어지며 예상치 못한 연쇄작용을 일으키고, 살바도르는 그의 현재를 두드리는 반갑고도 애틋한 인연들을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21번째 장편 <페인 앤 글로리>가 보여주는 건 그 조우와 화해, 치유의 여정이다.

알려진 대로 영화는 감독인 알모도바르의 자전적 이야기에서 시작됐다. 그가 실제로 허리 수술을 받은 후 느낀 창작에 대한 두려움과 열정이 이 영화를 완성하게 한 것이다. 살바도르의 집 장면이 현재 알모도바르가 거주하는 아파트에서 촬영되었으며, 감독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 등이 소품으로 두루 쓰였다는 점이 흥미를 더하지만, 영화의 모든 요소를 감독의 삶에 비추어 꿰맞출 필요는 없다. 오히려 참조점이 되는 건 알모도바르의 지난 영화들이다. 살바도르 역의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정열의 미로>(1982), <마타도르>(1986) 등 알모도바르의 초기 대표작을 함께 했고 <내가 사는 피부>(2011)에선 비밀을 품은 성형외과 의사 로버트를 연기하기도 했다. 이번엔 보다 온화하고 섬세한 얼굴로 노년기의 초입에 선 예술가의 초상을 그려내는데, 이는 지난 제72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으로도 이어졌다. 이외에도 반가운 얼굴들은 알모도바르의 여러 전작에서 다양한 개성을 가진 어머니가 되어주었던 페넬로페 크루즈(<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 <귀향>(2006))와 줄리에타 세라노(<마타도르>,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88)). 여기선 각각 살바도르의 어머니 하신타의 과거와 현재를 연기하며 강한 생활력과 능청스러운 면모를 함께 보여준다.

<페인 앤 글로리>

<페인 앤 글로리>를 알모도바르의 영화로 만드는 건 물론 눈에 익은 배우들만이 아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구성, 모종의 진실을 드러내는 장치로서의 픽션, 그리고 이따금 출몰하는 강렬한 빨간색 등 그만의 독특한 인장을 영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난하지만 불행하지는 않았던 소년 시절, 살바도르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고 자신의 성적 욕망을 알아간다. 한편, 그 모습과 교차되어 보이는 현재의 그는 욕망과 열정을 잊은 지 오래다. 여기에 약간의 불씨를 지피는 건 알베르토. 그는 살바도르가 ‘잊기 위해’ 쓴 글을 바탕으로 1인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린다. 영화에 빠지고 연인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던 청년기의 기억을 담은 절절한 연극은 놀랍게도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인 페데리코(레오나르도 스바나글리아)를 살바도르에게 데려다준다. 젊은 시절의 기억과 지나온 삶에 대한 존중이 함께 드러나는 두 사람의 해후는 영화에서 가장 로맨틱한 순간을 만든다. 어린 살바도르의 감정을 일깨워주었던 청년 에두아르도(세자르 비센테)의 오래된 편지 역시 마침내 현재의 삶에 도착한다.

이처럼 영화를 이루는 조각들이 구성되는 방식은 알모도바르의 영화치고 전에 없이 안정적이다. 이야기들의 아귀가 꼭 들어맞는 것은 물론이고, 충격적인 반전이나 아슬아슬하게 숨겨진 비밀 같은 것도 없다. 결국엔 제자리를 찾아가는 결코 위협적이지 않은 삶의 파편들, 이는 자연스럽게 맞물려 돌아가는 인생에 대한 나이 든 감독의 깨달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내 삶에 우연히 도착한 것들이 실은 내가 스스로 불러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아이러니도 이 영화에선 유머러스하고도 감동적으로 표현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러한 영화의 태도를 한눈에 보여준다. 다만 그 와중에도 베일 한 겹을 두르고 있는 것은 바로 어머니 하신타의 이야기다. 남편의 빈자리를 바라보는 하신타(페넬로페 크루즈)의 시선과 젊고 아름다우나 삶의 무게를 이고 사는 그녀를 바라보는 에두아르도의 시선은 끝내 교차되지 않은 채 묘한 기운만을 남기고 슬쩍 가려진다. 죽음을 앞둔 어머니(줄리에타 세라노)와 살바도르가 서로에게 넌지시 내비치던 서운함도 결국 여백 속에 남는다. 한 사람의 삶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는 <페인 앤 글로리>에는 살바도르의 이야기 저편 ‘나’의 관점으로는 닿을 수 없는 빈칸에 어머니의 욕망 또한 보이지 않게 새겨져 있다.

<페인 앤 글로리>

 

페인 앤 글로리 Dolor y gloria(Pain and Glory)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출연 안토니오 반데라스, 페넬로페 크루즈, 에시어 엑센디아, 줄리에타 세라노 외 수입 조이앤시네마 배급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작연도 2019년 상영시간 113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20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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