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색 않고, 변치 않기
<작은 빛> 변중희·곽진무·김현·신문성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0-01-17

“개봉까지 올 줄은 몰랐어요”라는 말에는 설렘이 묻어났다. 캐스팅 제안을 받을 때도, 촬영 중에도 이 영화가 정말 관객과 만나는 영화로 완성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감독은 언제나 진중하고 의지가 강했으며 그가 건넨 시나리오는 아름다웠다. 가족에 관해 말하지만 일상적이지 않았고, 잔잔하게 흘러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뜨거운 울림이 전해졌다. 귀 기울여 듣고 싶은 이야기이자 배우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곽진무, 변중희, 김현, 신문성 네 배우가 만났고, 한 가족이 되었다.

영화 <작은 빛>에서 진무(곽진무)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산다. 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엄마는 고향에서 홀로 지낸다. 이부형제인 누나와는 이따금 만나지만, 엄마가 다른 형과는 소식을 주고받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 뇌수술을 앞둔 진무는 의사로부터 치료 중에 기억을 잃을 위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무엇을 얼마만큼 기억하고 또 어떤 기억을 상실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진무는 엄마 숙녀(변중희), 누나 현(김현), 그리고 형 정도(신문성)를 차례대로 찾아가 캠코더에 담는다. 다 같이 살던 집은 일찌감치 사라졌지만, 짤막한 영상을 통해 가족들은 재회하고 서로를 확인한다.

인터뷰를 위해 모인 배우들은 오랜만이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근황을 전하는 대화 사이로 응원과 걱정이 스며들었다. 문득 그들 뒤로 집이 보였다. 벽에는 빛바랜 사진이 걸려 있고, 배우들은 다시 한 번 둥그런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대개 가족이 그러하듯 긴 말보다는 조용히 오가는 미소와 눈짓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조민재 감독이 시나리오 초고를 쓰자마자 곽진무 배우를 찾아갔다고 들었어요. 이번 작업 전부터 각별한 사이였나 봐요.

곽진무_ 2010년 무렵 영화 커뮤니티에서 처음 만났어요. 알고 지낸지는 오래됐지만 친분으로 작업을 결정하지는 않았어요. 민재가 종종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저는 되게 쿨한 사람이거든요. (웃음) 시나리오 받았을 때도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 결정할 수는 없어. 글을 읽고 난 다음에 선택할게.”라고 했어요. 민재도 바로 이해하더라고요. 사적인 관계를 떠나 배우로서 꼭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참여해달라면서. 서로 적당한 거리를 지키려고 노력했어요.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군요.

곽진무_ 좋아할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였어요. 저와 나이도 꽤 차이 나고 성격도 다른데, 글 안에 압축해 놓은 정서가 굉장히 와 닿았어요. 방바닥이 끈적거리는 질감이라든가 가족 간에 느껴지는 특유의 온기 같은 것이 관조적인 태도로 잘 쓰여 있었어요. 나중에 물어보니 실제로 가족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을 거쳤더라고요. 크레딧에 공동각본으로 이름이 올라가긴 했는데 사실 좀 쑥스러워요. 제가 뭔가를 직접 쓰지는 않았거든요. 다만, 출연을 결정한 후에 민재와 이런저런 대화를 많이 나누었어요. 각자 살아온 이야기부터 영화에 나오는 대사에 이르기까지 하나씩 천천히 묻고 답하는 방식이었어요.

곽진무 ⓒ이영진

2016년 늦가을에 촬영하고 개봉까지 긴 시간이 걸렸어요. 2020년을 <작은 빛>으로 열게 되었는데 지금 기분은 어떤가요.

신문성_ 얼떨떨해요. 개봉까지는 기대하지 않았거든요. 영화를 만드는 것도 지난한 과정이지만, 극장에서 상영한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에서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요. 촬영도 워낙 소규모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저희도 저희지만 감독님이 애써야 할 부분이 컸어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배우들이 모르는 힘든 순간이 많았을 거예요.

김현_ 완성된 영화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라요. 전체를 이어서 보니 소위 말하는 ‘한 방’이 있더라고요. 소소하게 쌓아나가다가 엔딩 즈음에는 마음 한 구석 어딘가를 찌른다고 할까요. 그러고 보면 감독님이 되게 치밀한 사람이에요. (웃음)

변중희_ 맞아요, 치밀해요. 일전에 현이 배우가 “조민재 감독은 대성할 사람”이라고 했는데, 어떤 뜻인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제게 <작은 빛>은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에요. 처음에는 후루룩 지나가듯 영화를 봤는데, 재차 보고 생각할수록 감독님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느껴지더라고요.

곽진무_ 민재가 첫 편집본을 들고 제가 사는 집에 왔었어요. 나란히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서 영화를 봤죠.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혹평했다면서 걱정하는데, 저는 그냥 그대로 참 좋더라고요. 대중적인 영화라고 하긴 어렵겠지만, 어디서든 소개가 된다면 좋아해주는 관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작은 빛>

말씀하신 것처럼 지난 해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죠. 자연스레 배우를 향한 관심도 높아졌고요. 하지만 촬영 당시 조민재 감독은 말 그대로 신인이고 영화 규모도 무척 작았어요.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과 드라마 등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김현 배우와 신문성 배우로서는 충분히 어려운 현장이 되리라고 예상했을 텐데, 그럼에도 출연을 결정했던 이유는 뭐였나요.

김현_ 대본에 반했어요. 희한한 힘이 느껴져서 끌리더라고요. 감독님도 비슷해요. 말수가 적은데 드문드문 잇는 말을 듣다 보면, 참 진솔한 사람이구나 싶어요.

신문성_ 말이 없어, 진짜. (웃음)

김현_ 캐스팅하고 싶다고 직접 공연장까지 찾아왔는데, 처음에는 눈도 잘 안 마주치는 거야.

신문성_ 나는 예전에 서운하다고 말한 적도 있어. 무뚝뚝해선지 원체 표현이 없더라고.

곽진무_ 다수가 서운해 하는 편이에요. 그건 사실이야. (웃음)

김현_ 메시지를 보내면 한참 후에야 답장이 왔거든요. 그땐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 ‘바쁜가보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작은 빛> 만들면서 계속 다른 일을 해야만 했더라고요. 작업하느라 밤새우고 난 다음에 겨우 연락했던 거죠. 그런 와중에 리딩이나 촬영장에서는 놀랄 만큼 꼼꼼했어요. 리딩 기간이 5개월 정도인데 때마다 카메라 테스트를 진행했어요. 대사 하나하나 차분히 검토하면서, 제 원래 말투와 분위기에 최대한 맞추고 다듬어나갔어요.

신문성_ 당시 연기를 많이 하고 싶던 때여서 ‘오케이’ 하며 기쁜 마음으로 들어갔어요. 사실 오디션 아닌 오디션을 통과한 거죠. 현이 누나가 감독님에게 절 소개했거든요. 단번에 캐스팅이 결정되지는 않았어요. 3-4번 정도 미팅한 후에야 제안하더라고요.

김현_ 같은 극단 식구예요. 영화에서 정도가 춤을 추잖아요. 바로 문성이 떠올라서 추천했죠. 이 친구가 춤을 좀 추거든요.

신문성_ 실제로는 현이 누나가 선배인데, 극중에서는 제 동생으로 나와요. 현장에서 남매로 만나니까 새롭더라고요. 춤추는 장면은 거의 즉흥으로 촬영한 거예요.

김현_ 오, 그냥 췄는데 그 정도야? (웃음)

신문성_ 덕분에 멋쩍어하는 느낌이 딱 나오더라. (웃음) 정도처럼 저도 어렸을 때 춤을 좋아했거든요. 리허설도 없이 한 번에 찍었어요.

신문성 ⓒ이영진

변중희 배우는 촬영 2주 전에 합류했다고 들었어요. 상대적으로 준비할 시간이 짧았는데, 극중 가족을 진짜 가족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해냈죠.

변중희_ 급한 상황인데도 처음부터 같이 하자고 안 하더라고요. (웃음) 문성 배우처럼 저도 몇 차례 미팅과 리딩을 거친 다음 출연이 확정됐어요. 한 번은 지하철 몇 번 출구에서 만나자는 거예요. 알고 보니 감독님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에 점심시간을 빼서 저를 만나러 왔더라고요. 식당에 들어가서는 밥도 제대로 안 먹고 40분 동안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해요. 저도 생각을 말했죠. 다른 배우들은 몇 달 동안 호흡을 맞춰 왔는데, 저는 불쑥 들어가는 거잖아요. 아무래도 어려운 부분이 있을 텐데 괜찮겠느냐고 묻더라고요. 영화에 출연한 경험도 거의 없고 모르는 것도 많지만, 가르쳐주면 열심히 하겠다고 했죠. 그렇게 발을 들여 놓았어요. (웃음) 캐릭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감독님이 본인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더라고요. 같이 밥 먹고 차 마시면서 수다 떨었어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편안하게 들려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죠.

 

모티브가 된 인물을 직접 만났네요. 어떤 점이 눈에 가장 들어오던가요.

변중희_ 생명력이라고 할까요, 삶은 이따금 의도하지 않은 대로 흘러가잖아요. 파고를 겪으면서 열심히 살아온 분이구나 싶었어요. 특히 자식을 지키고 가르치는 일에 큰 노력을 기울이셨는데, 중요한 순간마다 굉장히 명석한 판단을 내리셨더라고요. 그에 비하면 제 삶은 너무 평탄해 보이기도 했죠. ‘과연 내가 저 분과 접점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더라고요. 근데 자녀들과 나누는 평범한 대화를 곁에서 듣다 보니 마음이 열렸어요. 오고 가는 말에 서로를 향한 신뢰가 느껴진다는 점이 놀랍고 좋았어요.

<작은 빛>

영화 초반 숙녀와 진무가 마주앉아서 밥을 먹는 장면이나 가족들끼리 목욕탕에 다녀오는 장면에서 방금 이야기한 애정과 믿음이 고스란히 드러나요.

변중희_ 제일 힘들었던 장면이에요. (웃음)

김현_ 그게 첫 촬영이기도 했어요. 선생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죠. 영화를 찍기 전까지 오랫동안 정말 ‘선생님’으로 살아오셨잖아요. 지켜보는 감독님도 속으로 애가 탔을 거예요.

변중희_ 나는 40여 년을 학교에서 과학 선생으로 살았어요. 동료 교사들과 교육극단 ‘푸른숲’을 꾸려서 연극을 만들었고요. 극단은 이제 20주년이 되었어요. 처음에는 민폐만 끼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했는데, 10년쯤 지나니까 상대 배우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웃음) 우연히 <파스카>(연출 안선경, 2013)에 단역으로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천천히 영화를 만나는 중이에요. <작은 빛>의 숙녀와 실제 나 사이엔 거리가 있어요. 감독님은 아픔을 겉으로 꺼내지 않는, 강하고 씩씩한 느낌을 요구하더라고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너무 애잔하지 않게.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대사가 입에 붙지를 않아요. 욕도 자연스럽게 안 나오고요. 당연히 계속 NG가 났죠. 너무 착해서, 목소리가 고와서, 발음이 정확해서 도무지 숙녀처럼 안 보이는 거예요. 점점 밥상에 놓인 반찬이 없어지더라고요. 그때 내가 입에 밥을 물고 말하면 어떻겠냐고 아이디어를 냈죠. 조금이라도 발음을 뭉개려고요. 직업상 수십 년을 사용해온 말투인데, 한순간에 바꾸기는 어렵잖아요. 사실 대사에 들어간 욕설도 ‘처먹는다’ 정도인데 쉽지 않더라고요. 살면서 욕을 해본 적이 없다 보니. (웃음)

신문성_ 지금 말씀하시면서도 힘들어하시는 게 느껴져요. (웃음)

ⓒ이영진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당시에는 아찔했을 것 같아요. 오랜 시간 숙련해온 것, 몸에 밴 줄도 몰랐던 습관을 지워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변중희_ 아까 ‘발을 들여 놓았다’고 했잖아요. 첫 발이라 유난히 힘들었나 봐요.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들과 극단을 꾸려서 연극은 좀 해봤는데, 리딩 때 너무 연극 톤이라는 거예요. 연극 톤은 뭐고 영화 톤은 뭔지 알 수가 있나요. 그럼 진무 배우가 자상히 좀 일러줘야 하는데 너무 안 도와주는 거야.

신문성_ 드디어 말씀하시는 건가요? (웃음)

변중희_ 물 먹은 솜이라니까. (웃음) 그때 현이 배우가 내 구세주였어요. 나서서 뭘 지적하고 가르쳐준다기보다는 훌륭한 예시가 되어준 셈이죠. 목소리가 크지도 않고 특별히 꾸미는 기색도 없는데 자연스럽더라고요. 옆에 앉아 지켜보면서 ‘아, 저렇게 하라는 거구나’ 싶었죠. 그날부터 현이 배우를 흉내 내기 시작했어요.

김현_ 사실 배우 입장에서는 상대 연기에 관여하기가 쉽지 않아요. 자칫 잘못하면 도움을 주기는커녕 해를 입힐 수도 있고요.

변중희_ 나는 신인이잖아.

김현_ 경력에 관계없이 지켜야 할 선이 있어요. 각자 맡은 캐릭터가 다르기도 하고, 그날 현장에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왔는지 모르니까요.

곽진무_ 선생님이 정말 힘드셨을 거예요. 오롯이 혼자 해내셔야 하는 순간이었거든요.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면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고요. 아무 내색 없이, 처음과 변함없는 태도로 계속 연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신문성_ 서로를 살피는 방식이 달라서겠죠. 영화에도 그런 모습이 담기잖아요. 결코 충분하지 않을 수 있지만, 어쩌면 가장 좋은 노력은 묵묵히 지켜봐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진무 배우가 “선생님, 여기는 그렇게 하시면 안 되고…”라는 식으로 개입했다면, 괜히 의식하는 바람에 더 이상해지거나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났을 수도 있고요.

변중희_ 그러게, 처음에는 속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묘하게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나는 나대로 하자, 내 연기에 몰입하자!’고 다짐했죠. 목욕탕 다녀와서 집으로 걸어 돌아오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걸 찍고 나니까 상당히 편해졌어요.

변중희 ⓒ이영진

한편으로는 본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도 더러 있어요. 숙녀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며 노래하는 장면이 인상적인데, 분명히 변중희 배우가 직접 선곡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변중희_ 맞아요, 감독님이 아무거나 부르고 싶은 노래를 하라고 했거든요. 퍼뜩 장욱조의 <고목나무>가 떠올랐어요. 제 생각에도 숙녀의 삶과 잘 어울리는 노래예요. 마침 ‘그 분’이 오셨는지도 모르겠어요. (웃음) 가사가 이래요. “서산마루 깊은 밤 산새들도 잠들고 우뚝 선 고목이 달빛 아래 외롭다. 옛사랑 간 곳 없고 올 리도 없지마는 만날 날 기다리며 오늘이 또 간다.”

김현_ 이렇게 읊어주시니까 너무 좋네요. 예전에는 저도 좋아하는 노래 가사 찾아서 읽고 외우고 그랬는데. (웃음)

변중희_ 얼마 전에 감독님이 찍은 단편영화에 현이 배우와 같이 출연했어요. 거기서도 노래하는 장면이 나와요. 심수봉의 <젊은 태양>을 불렀더니 감독님이 울컥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너나 없는 나그네.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라는 가사로 끝나요. 감독 감성과 맞았나 봐요. (웃음)

 

변중희 배우가 노래하고 신문성 배우가 춤출 때처럼 종종 극중 인물에 배우가 겹쳐 보여요. 신숙녀이자 변중희인 짧은 순간에 영화는 자연스레 풍성해지고요.

김현_ 현장에서 감독님을 보며 미덕이라고 느낀 부분이 그거예요. 슛하고 바로 촬영에 들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많이 기다려주고 지켜봐줬어요. 누굴 연기하든 결국 제 안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감독님은 그걸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힘을 가졌어요. 덕분에 극중 인물을 그냥 나 자신이라고 봐도 될 법한 연기를 할 수 있던 것 같아요.

신문성_ 기본적으로 감독님은 제게 없는 걸 요구해서 만들어내려고 하기보다는 “자, 보세요.”라고 제안하는 태도에 가까웠어요. 변중희 선생님이 감독님 어머니를 만났던 것처럼 저는 형님을 직접 뵀어요. 영화에 나오는 집과 카센터가 실제로 형님이 머무는 공간이에요. 말하자면 실존 인물이 눈앞에 있는 상황이잖아요. 사람과 풍경을 대면하고 나니 어떤 정서인지 알 것 같더라고요. 특별히 뭘 배우고 따라하지 않아도 저절로 감정과 분위기가 스며들었어요. 정도가 세차를 하거나 혼자 골목을 오르는 장면은 저도 참 좋아해요.

<작은 빛>

자전적인 작품이기에 감독과 오래 이야기하고 내밀한 감정을 공유하는 과정이 필연적이었을 듯해요. 다만 캐릭터를 준비하면서 부담을 느낀 적은 없는지 궁금해요. 특히 곽진무 배우는 감독과 가장 닮은 인물을 연기했잖아요. 단순히 말하면 ‘조민재처럼 보여야 하나?’ 같은 고민은 없었나요.

곽진무_ 물론 관찰이야 했지만 부담스럽지는 않았어요. 감독을 따라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고, 오히려 극중 진무를 한 인간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어요. 진무는 노동자이고 고립된 삶을 살아가요.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어떤 계기로 가족과 만나며 조금씩 감정을 드러내죠. 그런 변화에 주목했어요.

 

감독과 배우를 혼동하는 분도 있더라고요.

곽진무_ 민재가 들으면 되게 싫어할 것 같은데. (웃음)

김현_ 약간 비슷한 면이 있지. 진무 배우도 글 쓰는 거 좋아하고.

신문성_ 진지하고. (일동 웃음)

 

엄마가 진무를 캠코더로 찍는 장면은 촬영 3일 전에 변경되었다고 들었어요. 애초 계획은 놀이하듯 캠코더를 주고받는 정도였는데, 결국 진무가 아버지라는 부재한 대상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속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으로 완성되었죠. 클라이맥스다운 감흥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장면인 데다, 말이 갖는 무게를 고려할 때 연기하기가 쉽지는 않았으리라 짐작해요.

곽진무_ 음, 살짝만 진지하게 대답해볼게요. (웃음) 저도 극중 진무와 비슷한 아픔을 겪었어요. 제가 여덟 살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불현듯 그리워지는 순간이 찾아와요. 나이를 먹어갈수록 생각도 많아지고요. 만약 내가 내성적이지 않고 애교 많은 아이였다면, 아버지가 살아계시지 않았을까. 자식이 눈앞에서 살갑게 귀여움을 떨면, 아버지도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의지를 갖지 않았을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민재도 똑같은 생각을 해봤다고 하더라고요. 서로 마음이 맞은 거죠. 무거운 장면이었지만 한 번에 찍었어요. 제 안에 정서적으로 연결고리가 있어선지 촬영 자체는 빠르게 마쳤는데, 한편으로는 모른 척 지나치고 싶을 만큼 어려운 장면이기도 했어요.

변중희_ “칼을 들고 확 죽여 버릴까 싶었다”는 대사가 힘들더라고요. 최대한 감독이 일러주는 정서를 쫓아가려고 노력했어요. 대사가 입에서 겉도는 바람에 어려웠지만 재밌기도 했어요. 숙녀가 수녀에게 남자를 소개받았다면서 “수녀가 알면 뭘 알겠냐”고 말하잖아요. 그 대사가 너무 웃기더라고요. 제가 성당에 다니거든요. 시사회 때 친한 수녀님을 초대했는데, 그 장면에서 혼자 깔깔댔어요. (웃음) 앞서 말했지만 감독님 어머니를 만난 경험이 큰 도움을 줬어요. 누군가를 반영한 인물을 연기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실제로 그 삶을 살아온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아요.

김현 ⓒ이영진

조민재 감독은 배우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거듭 전했어요. 배우들이 연기뿐만 아니라 여러 역할을 맡는 현장이었다고요. 촬영하며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든 점은 없었나요.

곽진무_ 당시에는 힘든 걸 느끼지 못했어요. 워낙 좋아서 하는 일인 데다가 배역에 푹 빠져 있었거든요. 광기와 같은 열정에 휩싸여서 못할 것이 없는 상태였죠. 손이 모자라면 당연히 함께 일하고요. 아, 근데 지금 또 너무 진지해질까 봐 말을 아끼게 되네요. (웃음)

김현_ 체중 조절은 힘들지 않았어?

곽진무_ 쉬웠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딱히 불만을 갖지도 않았어요. <작은 빛>을 촬영하기 전에 다른 작품 때문에 살을 좀 찌웠는데, 감독이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해달라고 했거든요. 영화 엔딩은 본 촬영을 마치고 2년 후에 새로 찍은 장면이라 약간 달라요.

김현_ 제 아들 호선이로 나오는 친구도 그새 훌쩍 키가 자랐더라고요. 다시 만난 날 우리끼리 되게 놀랐어요.

 

영화 중반부에 현과 호선이 아파트 복도를 걸어가는 장면과 엔딩을 비교하면 정말 지나간 시간이 느껴져요. 그때 현이 아들에게 “똑바로 걸어”라고 말하는데, 마지막까지 핸드폰을 보며 걷더라고요.

곽진무_ 그 대사 참 좋죠. 안 그래도 현이 배우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었어요. 원래 시나리오에는 없던 대사인데, 엄마와 아들이 이루는 호흡을 직관적으로 보여주잖아요.

김현_ 진지하다니까, 역시. (웃음)

신문성_ 극중에서 가족 구성원 각자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데, 어색하고 불편한 와중에 가족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 담겨요. 아주 살갑지는 않아도 서로 바라본 시간이 느껴지죠. 엔딩을 촬영할 때 참 좋았어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부 한자리에 모이잖아요. 실제로 오랜만에 만나서 찍으니까 극중 상황과 맞물리며 묘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작은 빛>

엔딩에서 정도가 입은 셔츠도 눈에 들어오던데요. 약간 삐딱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인물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의상이었어요.

신문성_ 제 옷이에요. 대부분 의상을 직접 준비했어요. 이게 잘 되려니까 다 맞아 떨어지나 봐요. (웃음)

 

다른 배우에겐 어떤 현장으로 기억에 남았는지 듣고 싶어요.

변중희_ 저는 짠했어요. 풍족하지 않은 환경에서 다들 어려움을 무릅썼거든요. 제 자신이 부르주아처럼 느껴질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죠. 저는 평생 한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일하다가 이제 퇴직했고 연금도 나와요. 나름 치열하게 연기한다고 하지만, 남들 눈에는 제2의 인생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어쩌면 그런 식으로 비교될 법한 삶인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현장에서 감독과 스태프를 지켜보며 ‘이렇게 영화를 만드는구나, 정말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 일이구나.’ 라고 생각했고, 여전히 그때를 곱씹어요.

김현_ 현장마다 조건은 다르기 때문에 어디가 더 낫고 못하다는 이야기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때에 따라 상황을 인정하고 적응하는 것 또한 배우의 일이기도 하고요. 다만 영화도 결국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라 누군가와 부딪치는 순간이 오죠. 그때는 문성이랑 얘기하면서 풀었어요. 그 외에는 다 괜찮았던 것 같아요.

신문성_ 강원도 정선에서 11월에 촬영했는데 참 따뜻했어요. 본 촬영에는 변중희 선생님하고 붙는 신이 아예 없어서 정선에 한번 놀러갔어요.

변중희_ 왔었어? 나는 기억도 안 나. 내 앞에 둔 숙제가 너무 컸나 봐.

신문성_ 맞아요, 초반에 어려운 신이 몰려서 정신없으셨을 거예요. 현이 누나 이야기에 덧붙이면 작품마다 규모가 다르잖아요. 현장에서 결정되는 상황도 무시할 수 없고요. 모든 작업이 끝난 후에 돌아보면서 감독에게 새삼 놀랐어요. 정말 절박하고 절실하게 영화를 만들었거든요. 많은 사람이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뭘 쓰려고 해, 시나리오를 갖고 있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행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어요. 감독님은 <작은 빛>을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했고 나중에는 보충 촬영을 위해 적금까지 깼죠. 어떻게든 하고 싶은 걸 해내는구나 싶었어요. 일단 시작하면 끝까지 책임지는 거죠.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애쓰면서요. 주변에 연기하는 동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진짜 쉽지 않은 일인데”라는 말이 제일 먼저 나와요. 얼마 전 시사회에서 오랜만에 감독님을 만났는데, 이전과 또 다른 느낌이더라고요. 작품에 관해 말하고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서 많이 영글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작은 빛>

<작은 빛> 이후 다들 바쁘게 활동했어요. 신문성 배우는 얼마 전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KBS2, 2019)에서 ‘흥식이 아빠’로 활약했죠. 그러고 보면 보통 날카롭고 센 연기를 자주 보여주는데, 정도처럼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인물은 오랜만이었던 것 같아요. 평범해 보이지만 툭툭 던지는 말에서 아픈 속내와 자괴감이 드러나죠. 상처를 이야기하면서도 너무 불편하지는 않게끔 깊이를 조절했어요.

김현_ 원래 그거 전문이에요. (웃음)

신문성_ 지인들은 보고 나서 “그냥 신문성인데? 네 거 했네.”라고 해요. 연기 변신이 아닌 거죠. (웃음) 정도는 여태 참여한 작품 중에서 가장 편안하게 연기한 인물이에요. 기본적으로 대사가 묵직하니 계속 심각한 톤으로 가면 안 되겠더라고요. 영화 자체가 그렇잖아요. 다들 들여다보면 고단한 일도 많고 사정도 각기 다른데, 그걸 들쑤시면서 헤집어놓으려고 하지 않아요. 적정 거리에서 관찰하며, 그들은 그저 살아가고 살아내려고 애쓴다는 사실을 보여주죠. 저도 그런 태도에 발맞추며 연기했던 것 같아요. 우리 계속 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김현 배우는 드라마 <위대한 쇼>(tvN, 2019), 영화 <생일>(연출 이종언, 2019) 등에서 심지 곧고 강인한 인물을 연기했어요. <작은 빛>에서도 현은 별다른 말없이 얼굴만으로 감정을 설득해내요. 뭔가를 체념하는 순간에도 결코 약해보이지는 않아요. 실제로는 어떤 사람인지, 곽현과 김현 사이에는 어떤 공통분모가 있는지 궁금해요.

김현_ 현실 속 저도 그런 것 같아요. 마냥 순탄하고 평화롭게만 살지는 못했거든요. 파도치듯 꿀렁꿀렁하며 때로는 오르고 때로는 내려가는 인생이에요. 원래 제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스레 그 과정을 거치며 변화한 부분도 있겠죠.

신문성_ 처음 극단에서 누나를 봤을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느낌이 달라요. 정말 처절하다 싶을 정도로 준비를 많이 하던 사람이거든요. 창고 같은 곳에 틀어박혀서 몇 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혼자 연습을 하는 거죠.

김현_ 대과거로 말해야겠다. 그랬‘었’었지. (웃음)

신문성_ 워낙 고군분투하며 자기 안에 쌓아둔 게 많다 보니 이제 놓을 줄 알더라고요. 가진 걸 버릴 수도 있는 배우가 되었구나 싶어요. 집착하거나 연연하지 않고요.

김현_ 요즘은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홈>을 촬영 중이에요. 이응복 감독님이 연출하고 동명 웹툰이 원작이에요. 이 작품 때문에 처음으로 웹툰이란 걸 접했는데 엄청 몰입해서 봤어요. 거기서도 강인한 캐릭터로 등장해요. 폭력적인 남편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끝까지 단단히 버티고 맞서요. 내면에는 누구보다 큰 용기를 지닌 인물이라 촬영하면서도 힘을 얻었어요.

<작은 빛>

김현 배우는 지난해 9월부터 촬영한 <스위트홈>을 다가오는 2월에 마무리한다. 다음 작품에서도 캐릭터와 마음을 맞대 연기하고 싶다. 신문성 배우는 나현 감독의 신작 <야차>(가제)에 합류하여 박진감 넘치는 첩보 액션을 그만의 느낌으로 소화할 예정이다. 변중희 배우는 얼마 전 개봉한 <기억할 만한 지나침>(연출 박영임, 2019)에 출연했다. 앞으로도 배우는 자세로 알 듯 모를 듯한 영화라는 세계를 탐구해나가려 한다.

곽진무 배우는 개봉을 앞두고 관객에게 인사를 전했다. “개인적으로 <작은 빛>은 가부장제의 고별사라고 생각해요. 극중 둘째 딸인 현을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숙녀는 결혼해야만 했어요. 호주제가 폐지되기 전이었으니까요. 부조리한 제도로 역경에 처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모든 숙녀에게 감사와 존경을 전하고 싶고, 극장에서 많은 분과 함께 이 작고 결연한 빛을 마주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역시 모두가 인정하듯 진지한 인사이자 낯선 이에게 보내는 조심스러운 초대였다.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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