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넘어선 사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정지혜 / Choice / 2020-01-13

사랑의 불꽃은 어떻게 사그라지지 않고 계속해 생명을 얻는가. <워터 릴리즈>(2007), <톰보이>(2011), <걸후드>(2014)에서 소녀들의 사랑과 정체성을 탐구해온 감독 셀린 시아마는 지난 5년간 사랑의 역학에 대해 질문하며 시나리오 쓰기를 거듭했고, 마침내 완성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은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과 퀴어종려상을 차지했다. 작고하기 직전의 아녜스 바르다가 더 많이 주목받아야 할 여성 감독으로 가장 먼저 손꼽았던 셀린 시아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사랑의 지속을 창작의 과정과 결합한 아름답고도 격조 있는 멜로드라마다. 셀린 시아마는 이 영화를 두고 비통하지만, 더없이 강렬한 러브 스토리이자 동시에 사랑의 기억에 관한 영화라고 말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들끓게 할 강렬한 욕망의 이야기이자, 사랑의 황홀경이 지나간 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고, 또 그것을 어떻게 간직할 것인지를 되묻는 영화라는 뜻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먼저 보여주고 그림이 완성에 이르게 된 경위를 거슬러 올라 설명한 뒤 다시 돌아와 제 방식으로 사랑의 흔적을 간직하며 사는 인물들을 제시하는 구조는 그러니까, 셀린 시아마가 직조한 사랑의 기억술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18세기 프랑스 브르타뉴의 섬마을. 당시엔 흔치 않았고, 있다 해도 존재를 드러낼 수 없었던 여성 직업화가 마르안느(노에미 메를랑)에게 백작 부인(발레리아 골리노)은 딸 엘로이즈(아델 하에넬)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마르안느가 완성한 초상화는 엘로이즈가 얼굴조차 모르는 밀라노의 정혼자에게 먼저 건네질 것이다. 이를 모르지 않는 엘로이즈는 “포즈를 취하고 싶지 않다”며 거부하고 저항한다. 그녀는 운명의 사슬에 매여, 짐짝처럼 팔려 가는 처지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때문에 마리안느는 산책 친구라는 구실로 엘로이즈 곁을 배회하며 그녀를 곁눈질로 관찰해 그림 그리기를 시도하는데, 한편 엘로이즈에게 자신과 달리 결혼하지 않고 아버지가 해온 그림 작업을 이어가겠다는 마리안느의 확신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매혹의 목소리다. 마리안느를 통해 엘로이즈는 관습적 세계 밖의 또 다른 가능성을 각성하고, 그렇게 오가는 두 사람의 시선 속에서 예기치 못한 사랑이 잉태된다.

연인을 예술의 영감으로, 사랑을 창작의 동력으로 묘사하는 비애극의 전형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단호히 결별한다. 대신 창작의 진행과 사랑의 진척이 동일 선상에서 함께 놓일 수 있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초상화 그리기에 있어 동등한 창작의 주체이며, 평등한 사랑의 당사자다. 화가와 모델 사이의 위계나 시선의 우위는 찾아볼 수 없고, 사랑하는 자와 조금 더 사랑하는 자 사이의 힘의 불균형도 불필요하다. “(마리안느) 당신이 (초상화를 그리려고) 날 볼 때 나는 누굴 보겠어요”라는 엘로이즈의 말 그대로 이들의 관찰과 시선은 동시적이며, 상호적이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게 일방적으로 포즈를 요청하는 게 아니라 엘로이즈가 자의로 사랑의 제스처를 해 보이고, 엘로이즈는 오히려 마리안느에게 이젤 너머 자기 쪽으로 와서 그림 그리는 당신의 자리를 보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는 예술가에게 따라붙는 ‘뮤즈’ 개념에 공공연히 반대해왔다. 많은 남성 예술가들이 ‘뮤즈’라는 말을 쓸 때 예술의 공동 창작자인 ‘그녀들’의 존재는 지워지고 대신 환상 속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으로서 물신화된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 초상화 그리기는 두 여인의 공동 작업이며, 이러한 작업의 방식과 시간은 곧 사랑이 진척되는 방식이자, 충만한 사랑의 시간과 똑 닮았다. 그러면서 영화는 더욱더 그녀들만의 사랑에 빠져든다. 초상화를 밀라노로 보내야 하는 날짜는 다가오고, 잠시 집을 비운 백작 부인이 결국 돌아와 딸의 결혼을 추진하지만, 영화는 이 한정된 시간을 걸림돌로써 부각하거나 걱정스레 상기하기보다 더 가열 차게 사랑에 몰두한다. 쓸데없는 감정싸움에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고, 눈요기나 자극을 위한 신에 눈 돌릴 필요도 하등 느끼지 못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지향하는 위계 없는 사랑은 당대의 계급과 신분의 벽도 훌쩍 뛰어넘는다. 마리안느, 엘로이즈, 하녀 소피(루아나 바야미)는 함께 카드 게임을 하며 큰 소리로 웃고 즐긴다. 요리하는 엘로이즈 옆에서 소피는 자수를 놓으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그 사이로 마리안느가 끼어들어 와인을 홀짝인다. 나란히 앉아 각자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온화하고 평화로운 이들의 한 때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과 이별에 관한 신화를 두고 세 여인이 해석을 덧붙이는 장면 또한 각별하다. 여인들의 발언은 최대한 공평하게 할애돼 있고, 해석에는 우열이나 평가 따윈 없으며, 저마다 다른 선택지만이 확인된다. 미래의 그녀들이 내릴 결단의 자기 예지처럼 읽히는 장면이다. 야행을 떠난 세 여인이 마을 축제에 합류하고 마을 여인들의 신묘한 코러스는 주술성 가득한 울림이 돼 밤의 정령처럼 그녀들을 에워싼다. 그리고 마침내 그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현현한다. 삶과 죽음, 발화와 산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위태로운 경계와 뒤섞임은 현기증이 날 만큼 아찔하다. 온전히 그리고 오롯이 여인들로 둘러싸인, 여인들의 유희와 사랑의 시공간. 그 한가운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있다. 그 심연이 우리를 지그시 바라볼 때, 사랑의 기억이 서서히 부활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Lady on Fire 감독 셀린 시아마 출연 아델 에넬, 노에미 멜랑, 루아나 바야미, 발레리아 골리노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주) 제작연도 2019년 상영시간 121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20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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