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자론자다
『투명기계』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 김곡
글 변성찬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0-01-04

‘비타협영화집단 곡사’의 김곡 감독이 2018년과 2019년에 두 권의 책을 발간했다. 『투명기계 : 화이트헤드와 영화의 소멸』(이하, 『투명기계』)과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이하, 『영화란 무엇인가』)이 그것이다. 『투명기계』는 8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에 단단한 체계를 갖춘 이론서이고, 『영화란 무엇인가』는 영화에 대한 15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에세이 형식의 글 모음이다.

나는 아직 『투명기계』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인터뷰 준비를 위해 『영화란 무엇인가』를 한 번 읽었을 뿐이다. 흥미로운 만큼이나 어려웠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핵심적인 주장에는 대부분 동의가 되고 그 촌철살인의 수사에 짜릿한 쾌감을 맛본 순간들도 많았지만, 논지 전개의 뼈대가 되는 몇몇 개념들, 특히 김곡이 화이트헤드로부터 전유한 개념어들은 낯설고 생경하기만 했다(나는 아직 화이트헤드를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준비 부족을 인정하고 포기하려다 인터뷰를 강행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다소 개인적인 이유다. 내가 보기에 이 두 권의 책은 화이트헤드를 경유해서 베르그송(더 정확하게는 들뢰즈의 『시네마』)을 다시 읽자고 주장하는 책이다. 또는, 김곡이 『투명기계』의 서두에서 언급한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의 ‘화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말하자면, 영화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베르그송보다 화이트헤드가 더 적합하고 생산적일 수 있다고 제안하고 있는 책이다. 그 제안이 솔깃했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더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그 낯설고 어려운 개념어들 및 역설처럼 보이는 주장들의 행간에 담긴 김곡의 질문들이 긴급하고 절실한 것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미룰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김곡은 질문 하나하나에 봇물 터지듯 말들을 쏟아내었다. 정리하고 보니 너무 긴 글이 아닐까 우려가 되기도 했지만, 김곡의 말을 가능한 한 그대로 옮겨 놓는다. 쉽지 않은 두 권의 책에 다가가는데, 김곡이 던지는 질문의 절실함과 긴급함을 감지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오늘 이 자리는 『영화란 무엇인가』 발간을 계기로 마련된 자리다. 그러나 이 책은 작년에 발간된 『투명기계』와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 책이다. 늦었지만 먼저 『투명기계』의 집필 동기와 과정에 대해 듣고 싶다. 나는 왠지 이 책의 출발이 어느 날 끄적거리게 된 간단한 메모 같은 것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이다.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 메모가 쌓이다 보니 어느 날 조각들이 스스로 맞아 들어가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 『투명기계』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자동기술법으로 쓴 건 아니다. 『투명기계』의 도입부 및 결론부에 등장하는 네 가지 회로에 대한 아이디어는 집필 이전에 이미 있었다. 네 가지 회로를 골자로 한 개요를 먼저 쓰기 시작했다. 그때가 아마도 2007~8년 <고갈>을 만들 때쯤이었던 것 같다. <고갈> 촬영을 끝내자마자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시나리오 작업과 촬영장을 오가며 짬 나는 대로 썼다. 띄엄띄엄 쓰다 보니 시간이 좀 걸렸다. 탈고할 때 뒤돌아보니 10년이 지나 있었다. 그렇게 오래 잡고 있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가장 강력한 동기는 의구심이었다. 영화란 놈이 어떤 놈인지, 어떤 놈이기에 이토록 세상과 붙어 돌아가는지 궁금했다. 영화작업의 연장이기는 하지만 그 외전이기도 하다. 영화는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지 않으니까, 물론 그렇게 의도된 작품들이 있긴 하지만. 처음에 품었던 질문들은 괴랄했다. 『영화란 무엇인가』의 목차처럼. 괴랄한 질문과 대답을 도와줄 천군만마를 찾기 위해 처음엔 이론서를 뒤지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작가들(감독들) 인터뷰를 뒤지기 시작했다. 실상 작가들 인터뷰는 개념의 보고다. 만드는 사람들은 이론가들과 달리 언어가 정제되어 있지 않지만, 바로 그 때문에 자유로운 사유와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나 시간의 본질에 대해서 꿰뚫을 때가 많다. 엉뚱하지만 꽤 효율적이고 압축적으로 그렇게 한다. 또 많은 경우 그것은 우리가 영화에 대해 가지는 통념과 편견을 깡그리 부숴주기도 한다. 일견 괴랄해 보이지만 다른 어떤 이론가나 철학자의 개념보다 엄밀한 말들이다. 물론 여기저기서 횡설수설로 터져 나오는 말들이라, 조각을 맞추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투명기계』의 저자로서의 내가 한 일은, 다른 작가들, 다른 작품들이 횡으로 종으로 말해오던 것을 조각 맞추기 한 것일 뿐이고, 시스템은 그 부스러기들의 체계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말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만약 『투명기계』를 읽고서 횡설수설로 느끼는 분들이 있다면, 그건 작가들의 말로부터 가장 많은 연료를 공급받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이영진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준다면?

책에서 ‘분위기’를 설명하는 핵심용어로 쓰이는 ‘시압(time pressure)’이란 말은 타르코프스키의 글에서, ‘연극성’을 설명하는 핵심용어로 쓰이는 ‘전 연극(pre-theatre)’이란 말은 올리베이라의 글에서 가져왔다. 거의 훔쳐 왔다고 해야 할까. 물론 작가들이 번번이 딱 맞는 말, 딱 가져다 쓰기 좋은 말만 뱉는 건 아니다. 그들 각자가 정말 횡설수설 대마왕이고, 심한 경우 자신의 영화보다 말이 더 풍부할 때가 있다. 더구나 한 작가의 말은 그가 살아가는 동안 변화무쌍하게 변화한다. 예컨대 무쇠처럼 단단해 보이는  에이젠슈테인조차 개념이 미묘하게 변한다. 총 네 번의 사상적 전환을 겪는 것 같다. <파업> 때, <전함 포템킨> 때, 자아비판을 강요받던 슬럼프 시기, 그리고 「비무차별적 자연」을 집필하는 말년. 해독하고 조각 맞추는 입장에서 작가들의 말 자체보단 그 행간, 또 그 행간에 숨어있는 맥락과 대전제를 유의해야 한다. 행간을 잘 타지 않으면 백 마디 말도 모두 쓰레기가 된다. 반대로 행간을 잘 타면 한마디 말도 황금이 된다. 예컨대, 변영주 감독이 인터뷰에서 “영화를 안 만든다고 내가 죽는 건 아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사회와 영화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인데, 그 맥락에서 보면 그 말은 “민중이 존재하는 순간 영화는 존재한다”라는 의미로 뒤집어 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평생 새기고픈 엄청난 명언(?)이었다. (웃음) 물론 변영주 감독님에게 “이런 의미였죠?”라고 되묻는다면, “아닌데!”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어떤 작가도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그가 보고 살았던 현장과 세계의 단면을 방언처럼 내뱉게 되어 있고, 그 의미를 사투리로 떠들게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각들은 무한하다. 우리가 놓쳐서 그렇지, 그 조각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다.

<파업>(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1925)
<낮은 목소리 -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변영주, 1995) 

듣다 보니 ‘네 가지 회로’가 이 두 권의 책의 출발점이자 도달점인 것 같다. 아직 『투명기계』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이번 인터뷰 준비를 위해 결론 부분만 훑어보았는데, 너무 어려웠다. 독자들을 위해 그 ‘네 가지 회로’의 의미와 그 개념에 담긴 문제의식을 좀 풀어서 설명해 줄 수 있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시간의 네 가지 국면(과거ㆍ현재ㆍ미래ㆍ영원)으로 영화적 회로를 분류한 것이다. 진리는 일상에 있다. 일상적으로 쓰던 시제라면 그것이 영화가 써왔던 시제가 아닐 리 없다. 철학적으로 말해보면, 네 가지 회로는 두 원자가 마주치면서 발생하는 국면들이다. 베르그송이라면 두 원뿔이 마주치면서 발생하는 네 가지 국면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네 가지 회로는 원뿔이 단지 하나가 아님을 전제한다. 원뿔은 분명 여러 개이며, 고로 분명 마주친다. 또한 마주치면 반드시 변한다. 단지 원뿔 내부가 변화할 뿐만 아니라 원뿔 전체가 변형을 겪는다. 네 가지 회로는 두 원뿔이 마주치는 네 가지 방식이다. 물론 네 가지 회로는 분리 불가능하다. 어떤 영화도 하나의 회로만 취하고 나머지를 배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우리가 과거시제를 말할 때도 미래시제를 전제해야 하는 것처럼. 다만 어떤 영화가 어떤 한 시제, 한 회로를 강조할 수 있을 뿐이다. 오슨 웰스나 임권택의 영화는 분명 기억의 영화이지만 그것은 미래나 영원이라는 시제를 배제하고선 불가능하다. SF 영화와 옵티컬 프린팅 영화는 분명 상상의 영화지만 그것은 과거나 현재라는 시제를 배제하고선 불가능하다. 영화사를 수놓은 무수한 장르나 사조는 이미 이런 시제들에 대한 분류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린 무의식적으로 네 가지 회로로 영화사를 분류해왔고 그 세부 카테고리를 분류해왔다. 비록 하나의 장르, 사조, 유파가 하나의 회로에 국한되는 일은 없긴 해도 말이다. 어떤 장르, 유파, 사조도 네 가지 회로 중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배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회로가 나머지 회로를 어떻게 아우르는가에 대한 방식으로서만 정의된다. 흥미로운 것은 네 가지 회로에 대응하는 영화적 문법이나 기법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더 막말하자면, 당신이 어떤 영화적 문법을 선택하는 순간, 당신은 네 가지 회로 중 하나를 이미 선택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오해를 무릅쓰고 일갈해보면, 첫 번째 과거의 회로엔 플래시백과 트래블링이, 두 번째 현재의 회로엔 프레이밍과 플리커가, 세 번째 미래의 회로엔 내러티브와 프린팅이, 네 번째 영원의 회로엔 무대화와 변신이 각각 대응된다. 어떤 장르나 사조도 마구잡이로 분류되는 법은 없다. 네이밍이 너무 헐겁게 되거나 잘못되는 경우는 있어도. 차이는 어떻게 시간을 다루는가에 대한 방식을 의미하며 시간과 존재, 세계가 각각에 어떤 의미였나를 말해준다. 이를 놓친다면, 영화사를 장식했던 장르와 사조들은 정말이지 한낱 장식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투명기계』가 영화와 이론에 분류학적 접근을 취했다면, 바로 이 점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투명기계』는 네 가지 회로에 따라서 영화사를 분류한 계통학이자 생물도감이다. 『투명기계』는 처음부터 찬찬히 읽기보다는 색인과 목차를 따라서, 내키는 작품이나 작가를 따라서, 흡사 생물도감을 보듯 읽기를 권한다.

ⓒ이영진

『투명기계』와 『영화란 무엇인가』는 분량뿐만 아니라 형식도 매우 다르다. 『투명기계』 집필에 10년이 걸렸다고 했는데, 『영화란 무엇인가』는 1년 만에 나왔다. 두 책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또는 독자에게 어떤 것을 먼저 읽으라고 추천하고 싶은가?

『투명기계』를 탈고하면서 『영화란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탈고의 과정에서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상 『투명기계』는 무수한 영화들, 작가들, 개념들을 융단폭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근원적인 대전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몹시 인색하다. 가령 『투명기계』는 4부에서 ‘육체’란 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쓰며 영화의 필수적 요소인 것처럼 쓰고 있지만, 영화라는 매체에서 육체가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작 설명이 없다. 육체와 고통이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나누는 기준이라고 툭 던지듯 결론지을 뿐이다. 대전제에 대한 충분한 해명이 없다면 혹자에겐 『투명기계』 전체가 하나의 공상과학소설처럼 보일 수 있을 거란 공포감이 엄습했고, 하여 탈고하면서 부랴부랴 『영화란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영화란 무엇인가』는 『투명기계』가 눈치코치 없이 전제했던 대전제들에 대한 책이다. 그러니까, 『영화란 무엇인가』는 『투명기계』보다 더 먼저 나왔어야 하는 책이다. 그리고 더 먼저 읽어야 하는 책이다. 『영화란 무엇인가』는 『투명기계』처럼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소소하지만 더 근원적인 이야기다. 『투명기계』의 행간에 숨어있던 이야기들이고, 『투명기계』를 쓰는 10년 이전 10년에 이미 품고 있던 질문들이다. 이것이 『투명기계』를 쓰는 데는 10년이 걸렸지만, 『영화란 무엇인가』를 쓰는 데는 달랑 한 달이 걸렸던 이유다.

 

왜 화이트헤드인가? 그보다 먼저,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 중 누구를 먼저 만났던 것인지도 궁금하다. 

처음 만난 건 베르그송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가 들뢰즈 이펙트로, 베르그송과 스피노자가 대유행이었던 때다. 『창조적 진화』 4장의 ‘무의 관념’을 분석하는 대목을 읽다가 엄청나게 감동했다. 그땐 내가 이미 영화를 해보겠다고 까불거리던 때다. 화이트헤드는 누가 시킨 게 아닌데도 방학 때 독파해봐야지, 라는 마음으로 스스로 찾아 읽기 시작했는데, 10년을 읽었다. 이후 베르그송 읽기도 계속되었지만, 그때에도 뒤로 돌아서 화이트헤드와 라이프니츠를 읽었다. 난 원자론자였다. 지금도 그렇다. 누군가 내게 넌 베르그송주의자냐, 화이트헤드주의자냐, 라고 묻는다면, 난 원자론자다, 라고 대답하고 싶다. 나는 원자론자고, 라이프니츠주의자다. 물론 원자론은 구태의연한 학설로 많이 오인되곤 한다. 베르그송 텍스트에서도 ‘영화적’ 혹은 ‘기계적’이라는 말은 거의 “지성, 이 나쁜 놈아!”라는 의미와 거의 동급으로 쓰인다. 그러나 원자론은 세상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식의, 그런 조박한 사상이 아니다. 반대로 원자론의 핵심은 “마지막 원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솔직히, 오늘날의 사상계는 베르그송 경제다. 오늘날 우리의 말과 생각은 베르그송 모드에 익숙하다. 그러나 영화도 그럴까? 난 영화가 원자론자이고 내 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원자론적이고, 지속은 그것의 효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지속조차 원자들의 합생이 불러오는 결과라고 생각한다. 실상 오늘날 ‘지속’ 개념은 베르그송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많이 실체화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베르그송이 실체를 소거하기 위해 소멸까지 소거했기 때문에 생긴 역설적 효과다. 하지만 베르그송이 말하는 ‘순수기억’은 이미 소멸을 전제하고 있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반대로 원자론의 강점은 실체화를 대놓고 표방하면서도 소멸로 중립화한다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원자론은 생성과 소멸을 동급으로 본다. 반면 지속론은 으레 생성 뒤에 소멸을 감춰둔다. 생성이 가져다줄 심리적, 윤리적, 정치적 효과를 더 과장하기 위해서인데, 그 전리품이 바로 열림, 즉 ‘개방성’이다. 개방성은 이 시대의 모토가 되어버렸다.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유일하게 남은 자유주의 철학용어가 있다면, 그건 개방성이 아닐까? 하지만 영화가 정말 그렇게 존재하고, 그렇게 움직일까? 영화는 정말 열림이고, 개방할까? 영화는 열린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항상 더 닫으려고 하고 더 잘 개체화하고 한정하려고 하고 어떻게 하면 이걸 내 무대로 할까를 고민한다. 누군가는 고다르도 열지 않았나, 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고다르보다 더 잘 닫은 사람은 없다. 그가 말하는 ‘반성’이 이미 빛과 사유의 폐곡선을, 그 무대 짓기를 전제한다. 지금 말해지고 있는 ‘닫힘’이 문 걸어 잠그고 이제부터 못 나가, 라는 의미로 오해되질 않기를 바란다. 내가 ‘닫힘’이라고 말할 땐 ‘한정(definiteness)’을 의미한다. 무대화이고 재현이다. 재현을 명령하는 건 개체화다. 영화는 개체화를 너무도 사랑한다. 영화는 원자론자다. 오해를 무릅쓰고 말해보면, 화이트헤드는 플라톤의 계승이다. 반면 베르그송은 반플라톤주의자다. 화이트헤드의 진짜 욕심은 진정한 실체 개념을 다시 되살리고자 함이다. “이놈은 이놈 아닌가”라고, “그래도 동일성은 가능하다”라고 말하고 싶은 거다. 베르그송의 심연에 들어가면 동일성이 가능하지 않은 순수한 유동성의 세계인 반면, 화이트헤드는 바로 그런 유동에서야말로 “실체는 이거다”라고 말하고 싶은 거다. 화이트헤드가 플라톤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조차 플라톤의 후예라고 인정하는 이유다. 말하자면 화이트헤드는 지속 속에도 원자가 있음을, 아니 지속조차 원자의 집합임을, 그런 의미에서 원자란 개체(in-dividual, 잘릴 수 없음)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잠재태 개념을 대조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베르그송의 잠재태 개념은 회색이다. 빛나지만 어둠 속에 잠겨 반투명하다. 경험의 필터를 거치기 때문이다. 아니면 최소한 ‘나의 몸’이라는 지각의 필터를 거치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에게 그런 주관적 한계란 없다. 개인적 경험과 지각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도 잠재태는 우주 어딘가에 이미 주어지고, 또 이미 주어져 실재한다. 그런 점에서 화이트헤드의 잠재태라고 할 수 있는 ‘영원한 객체’는 반투명하지 않고, 투명하다. 기억과 지각이 빛을 쪼이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 빛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하다.’ 그것은 와도, 누군가의 시간 바깥을 돌아온다.

<거울>(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75)
<주말>(장 뤽 고다르, 1967)

베르그송의 원뿔을 뒤집은 부분이 이해가 잘 안 갔다. 베르그송에게 순수기억이라는 건 물질적 질료로 내려가는 방향이라기보다는 물질과 구분되는 정신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라서 위로 퍼지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나는 그게 더 이해가 안 됐다. “왜 원뿔의 밑면이 위로 올라가 있지?”라고 항상 생각했다. 원뿔의 심층으로 내려갈수록, 더더욱 활성화되어 물질과 닮아갈 텐데? 꿈은 카오스다. 엄밀히 말하면, 너무나 멀어져 필요성을 아예 못 느끼게 되거나, 꺼내 쓰려고 해도 못 하게 되는 게 순수기억이다. 순수기억은 찌꺼기 이미지, 잉여다. 원자론에서 순수기억은 단지 인칭적인 것이 아니라, 비인칭적인 것이기도 하다. 개개인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순수기억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주도 기억한다. 꼭 그리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기억할 수 있는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해보자. 두 원뿔은 마주친다. 그리고 그것은 꼭짓점뿐만 아니라, 그 밑면에서의 마주침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안 그러면 우린 절대 마주칠 수 없다. 불행히도 베르그송은 원뿔의 복수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물론 후대 베르그송주의가 생태계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원뿔로 보고자 하는 철학적 시도들이 있지만. 반면 화이트헤드 원자론은 이미 그런 구도를 지니고 있다. 원자 하나를 하나의 원뿔로 보자면, 그 밑면에서 항상적으로 교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이로 ‘영원한 객체’들이 드나든다. 이 학설을 받아들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순수기억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나만의 것인 순수기억은 없다. 모든 순수기억은 공공재다. 난 영화가 바로 이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영화란 무엇인가』의 6장(영화감독은 실재하는가?)을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 개념의 신비화나 물신화에 대한 비판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가령, 모리스 블랑쇼의 “언제나 시인에 앞서 시가 먼저 온다”는 말도 그런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블랑쇼의 말에서는 조용히 침잠한 채 시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어떤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김곡이 묘사하고 있는 영화제작 현장은 그런 침잠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서로 뭘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서로가 기다리는 게 다 다를 수도 있는 여러 사람이 우글거리는 시장바닥 같은 느낌이랄까?

바로 그게 이 책에서 말하려고 하는 바다. 영화는 기다려도 다 같이 기다려야 한다. (웃음) 작가 개념의 신비화에 대한 저항의 효과를 바랄 뿐, 그게 목적은 아니다. 촬영장에서 느끼는 바는, 감독은 정말 이 복잡다단한 움직임들에 이름만 빌려준다는 느낌이다. 그 고유한 색과 결을 지시하기 위해서 대명사로 동원되는.

ⓒ이영진

『영화란 무엇인가』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장 중의 하나는 영화의 본질인 ‘분위기’에 관객이 핵심적이라는 것이다. 이때 관객은 ‘장치이론’이 전제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매우 도발적인 질문이다. 심지어 그 관객을 보통 인문학에서 경멸의 의미를 담아 쓰는 ‘군중’이라는 말로 지칭하고 있다. 말하자면 김곡은 이 책을 통해 ‘군중에 대한 내기’를 제안하고 있는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부러 군중이란 말을 쓰는 것이다. 군중(mass)은 질량이고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민중은 얼마나 추상적인가. 모두가 민(民)을 말한다. 얼마나 추상적인가. 반면 덩어리로서의 군중은 몸무게를 가지며, 압력을 주고받는 개념이다. 영화는 왜 또 어떻게 시간이라는 형식을 통해 압력을 가할 수 있는가? 그 질료를 군중으로부터 빌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유일 수 있지만, 한계은유다. 오늘날 우리는 대중예술이란 말을 남발하지만, 그 기저엔 여전히 여러 사람이 만들어서 여러 사람이 다함께 향유하는 집단창작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어떻게든 자본이 투여되고, 극장에서 다 같이 하나의 화면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여전히 군중의 예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군중을 이어붙이는 접착제처럼, 즉 원자들을 이어붙이는 ‘영원한 객체’처럼 작동한다. 영화는 영원한 객체의 전시이고, 그런 점에서 아직도 타자성의 예술이다. 영화는 영원한 타자로 남아야 영화다. 분위기가 더 있거나 더 없는 영화란 없다. 모든 영화의 본질이 분위기다. 분위기라는 영화적 본질이야말로, VR과 게임이 난리법석을 떠는 이 시대에도 영화를 영화답게 하는 것이다. 시를 예외로 치자, 시는 너무나 특수한 장르다. 문학도, 사진도, 연극, 미술도 영화만큼 쉽게 또 풍부하게 분위기를 내진 못한다. 동굴 속에 다 함께 갇혀서 하나의 공통된 객체를 바라볼 때,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어둠, 습기, 답답함과 열광, 그것이 바로 분위기다. 그런 점에서 분위기는 군중이 스스로 풍기는 냄새 같은 것이다. 한 마디로, 분위기를 통해 군중은 자신의 모습을 본다. 겪는다. 살아낸다. 그런 점에서 반성적이지 않은 영화란 없다. “분위기에 내기를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만약 군중이 실패할 수도 있는데?”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내 대답은 이렇다. 분위기는 내기를 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의 유일한 소통방식이므로. 너무 비관하지 않기를. 다행히도 분위기는 승률이 매우 높다. 군중이 망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군중이 망하는 경우는 딱 한 경우뿐이다. 군중이 군중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파시즘’이라고 부른다. 물론 역사적 선례들도 있고, 지금도 어딘가에선 서서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서 장이 안 담기는 건 아니다. 콩만 나도 장은 담긴다. 구더기 몇 마리가 장의 가치를 떨어뜨리진 않는다. 파시즘이 분위기의 가치를 떨어트릴 수 있는 건 아니다.

<군중>(킹 비더, 1928)
<총알탄 사나이>(데이빗 주커, 1990)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고, 지금 말을 들으면서도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그렇다면 김곡이 싫어하는 영화는 무엇일까?

속 보이는 질문이라 속보이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사실 『투명기계』와 『영화란 무엇인가』에 내가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영화들이 즐비하게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싫어하고 좋아하고는 개인적 취향의 문제다. 내가 싫다고 그 영화가 덜 위대해지는 건 아닐 터다. 책을 쓰면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와 싫어하는 영화를 구분치 않으려고 일부러 노력했다. 심지어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영화를 몇 바닥씩 분석한 경우도 있다. 내 개인적 취향을 떠나 그 영화 혹은 작가에 대한, 그리고 그들이 만났던 세상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내가 정말 경멸하는 것은, 좋고 싫음이라는 취향상의 구분이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라는 본질적 구분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흡사 존재론적 등급으로 굳어져 버릴 때다. 장르영화의 경우에서 이런 사유의 마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예컨대 우린 장르영화를 볼 때는 재미있게 봐놓고는 그것을 하나의 ‘작품’이라고 여기진 않는다. 시간 때우는 상품으로 여길 뿐. 그래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고는 온갖 개념을 각주로 동원해대며 분석하고 또 개념찬양을 일삼는 반면, 액션영화나 공포영화를 보고는 그렇게 하진 않는다. 그저 그렇게 스쳐가는 소비재인 것이다. 일례로 리들리 스콧은 작가 취급을 받아도 토니 스콧은 작가 취급을 받지 못한다. 아마존에 책 검색을 해보라. 리들리 스콧에 대해선 책이 여러 권 검색되어도, 토니 스콧은 DVD밖에 검색되지 않는다. 토니 스콧의 영화는 비평과 분석과 개념 찬양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소비재 무비인 것이다. 실상 국가와 속도에 대해서 이만큼 심오하고도 절절하게 해부한 작가는 또 없는데도 말이다. 미국의 역사나 국가 개념을 비웃는 건 쉽다. 하지만 그것을 그토록 아름답게 압축하여 장면화하고 거기서 어떤 필사적인 가능성을 발견해내리란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비평이 할 일이란 이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것도 버리지 않기. 어떤 필모그래피가 주어져도 그 세세한 결들을 따라가다가 어떤 에러와 공포, 가능성과 한계를 발견하기. 어떤 시대의 어떤 세상의 어떤 조각을 발견하기. 불완전함과 불확정성의 이유를 발견하기. 단지 이 영화가 왜 완벽한 영화인지를 철학서 각주들로 장식해서 꾸며주고 찬양하는 게 아니라. 물론 나는 비평가가 되지 못한다. 배짱이 없어서.

<탑건>(토니 스콧, 1986)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토니 스콧, 1998)

『영화란 무엇인가』에서 영화의 본질에 대한 주장은 전통적인 필름과 극장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게 들었다.

많은 질문을 받는다. 예컨대 “넷플릭스 영화는 어쩔 거냐?”라는 질문들. 『투명기계』와 『영화란 무엇인가』, 이 두 책은 분명히 필름스트립이 영사되고 대형스크린을 관객 모두가 응시하는 영화관을 모델로 한 것이 분명하다. 특히 필름스트립과 영화관이 영화의 본질적 일부를 이루고 생각을 강하게 전제한다. 한 마디로 이 두 권의 책은 영화가 아직은 필름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플라톤의 동굴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다. 이 두 권의 책이 전제하는 영화관 모델은 분명 동굴이지만, 플라톤의 경우처럼 광원이 그 밖에 있는 그림자의 동굴이 아니라, 광원이 그 안에 내재해있는 스스로 빛나는 동굴이다. 그런 점에서 두 권의 책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영화가 그림자의 세계이고 거짓의 환영이란 것이 아니라, 반대로 또 다른 세계이고 또 다른 실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관을 가는 이유는 그것이 환영이어서가 아니라, 또 다른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실재의 탄생을 목도하고 또 참여하기 위해서 아직도 극장을 간다. 팝콘을 먹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지만, 영화에서 관객은 이처럼 중요한 본질적 역할을 한다. 동굴 안에서, 우리끼리, 공개체화한다. 저 바깥의 시간과는 또 다른 시간을 만들어내며. 이런 의미에서 영화관을 들어가기 위해 입장권을 사는 행위는 매우 상징적이고 크리티컬한 행위다. 내가 이제껏 살아오던 시간을 포기한다는 선언이다. 영화의 입장권은 시간 포기 각서다. 일단 들어가면 2시간 동안은 내 일상과 단절할 거고, 다른 세계의 다른 사람이 될 거라는 일종의 계약. 문제는 바로 상징성이 약화할 때다. 개인도 1인 코뮤니티가 되는 SNS의 시대에 와서 이제 그 입장권의 가격은 0원이 되어간다. 우린 이제 거의 공짜로 언제 어디서고, 일상과의 단절선언을 따로 하지 않아도 손쉽게 영화를 접하고 소비하는 시대에 있다. 상황이 그렇다면, 분위기는 해체되었나? 동굴은 폐업했나? 나는 그렇다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핸드폰을 들고 다니면서 영화를 보는 것은, 동굴의 폐업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이젠 핸드폰도 동굴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뉴미디어나 미디어 플랫폼은 아직은 영화의 동굴 모델에 의존한다. 디지털의 도래 이후에도 아직 몽타주의 형식에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의존 현상은 분위기의 약점을 보여주기는커녕 분위기의 강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채널의 무한증식 덕택에 극장의 입퇴장이 너무나 손쉬워지고, 그 입장 가격이 무한히 낮아지고, 동굴 모델이 완전히 해체되어, 영화적 분위기가 완전히 증발해버리는 날이 올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영화는 몽타주도 같이 잃을 것이다. 그리고 몽타주가 없는 영화는 더는 영화가 아닐 것이다. 분위기와 몽타주는 둘 중 어느 것을 떼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분위기가 있어서 몽타주가 있는 것이고, 몽타주가 있어서 분위기가 있는 것이다. 몽타주는 분위기의 인식 근거고, 분위기는 몽타주의 존재 근거다. 둘은 분리불가능하다. 동굴 없는 영화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동굴이 폐업하면 그땐 영화는 더는 영화가 아닐 것이기에.

 

영화에서의 ‘내러티브’에 대한 주장도 파격적이다. 문학은 내러티브를 포기할 수 있어도 영화는 그럴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결론부터 섣불리 말해보면, 내러티브가 문학 자체인 건 아니다. 문학과 내러티브는 구분된다. 문학의 본질은 내러티브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이 내러티브를 포기할 수 있는가, 라고 물을 수 있겠다. 대답은 분명하다. 문학은 이미 내러티브를 무던히 포기해왔고, 지금도 분주하게 포기하고 있다. 그 본질에 내러티브가 필연적이지 않아서다. 이번엔 반대로 물어보자. 그렇다면 영화의 본질엔 내러티브가 포함되는가? 그렇다. 바로 그 때문에 영화는 문학만큼 내러티브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령 평행몽타주는 이미 내러티브의 형식을 암시한다. 평행몽타주를 하는 순간, 우린 영화를 내러티브로 인식한다. 달리 말해, 영화의 본질에 평행몽타주가 포함되어 있는 한, 영화에 내러티브는 본질적이다. 아마도 영화가 내러티브를 포기할 수 있는 순간은, 그가 몽타주까지 포기하는 순간일 것이다. 물론 영화가 내러티브를 대놓고 포기한다고 선언한 적은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영화가 쉽게 내러티브를 포기 못 하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영영 내러티브를 포기할 수 없다. 내러티브가 하나의 목표 지점을 향한 경주와 희생, 결단과 변신인 한 그렇다. 그러니까, 내러티브가 원자화의 통시적 전개인 한, 영화는 내러티브를 포기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문학과 영화의 비교작업은 프루스트의 영화화와 같은 문학 번안의 경우보다는, 차라리 초현실주의와 영화가 경쟁하던 시대를 연구하는 것이 더 유익하단 생각이 든다. 초현실주의 시기는 진정 영화가 순수한 문학성과 경쟁하던 시대였다.

<로마의 휴일>(윌리엄 와일러, 1953)
<거짓말>(장선우, 1999)

참고 문헌을 보고 연극에 관한 글들이 많아서 놀랐다. 특히 마당극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느껴졌다.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관심을 두게 되었나?

영화 만들 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실제로 김선은 초창기에 희곡도 썼었고. 우리가 연극연출을 해본 적은 없다. 다만 영화연출을 하면서 연극연출을 감지할 뿐이다. 영화의 본질적 요소로서 말이다. 두 책에서 부단히 강조하는 것처럼, 영화의 연극성은 연극보다 더한 것이다. 또한 현대연극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점점 동양적인 색채를 띠게 되는 것도 사실이고. 결국은 퍼포먼스다. 결국 관객이 더는 관객이 아니게끔, 반대로 무대 안의 모든 사물도 하나의 배우가 되는 그런 연극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이것이 영화가 일찌감치 자신의 본질로 자랑하던 바가 아닌가. 방금 인용했던 ‘무대 위 사물들이 각자 배우가 되는 연극’은 사실 브레히트의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것을 영화가 연극보다 더 연극적일 수 있는 그만의 ‘연극성’이라 부르고 싶다. 그런 점에서 『영화란 무엇인가』에서 분석했던 테렌스 영의 <어두워질 때까지>는 영화의 연극성을 아주 재미있게 활용하고 또 표현하고 있다. 거기서 맹인 주인공이 자신을 가둔 무대를 빠져나가기 위해 방 안 모든 사물과 협력관계를 맺는데, 말하자면, 방 안 모든 사물이 주인공을 위한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신발의 소리를 듣고서 누군지 알아내는 식으로. 구두 깔창이 주연을 돕는 조연이 되는 셈이다. 영화의 힘은 카메라가 비출 수 있는 모든 사물들을 배우로 만드는 능력에 있다. 그런 점에서 연극보다 더 연극적인 거고. 영화는 사물들의 오토마티즘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연극보다 더한 연극이다(『투명기계』와 『영화란 무엇인가』의 결론 장에서 논한다). 반대되는 견해로 리얼리즘을 말하는 사람도 있을 터다. 하지만 리얼리즘이 과연 작위에 대립하는 자연을 추구하는 방식이었던가? 그런 실례가 있었나? 심지어 바쟁의 텍스트가 그런 걸 말하고 있었나? 다시 돌아보라. 그런 경우도 없었고, 그런 텍스트도 없었다. 작위와 자연을 대립시켜서, 한쪽엔 연극, 다른 쪽엔 영화를 놓고는, 영화는 연극보다 덜 작위적인 장르, 고로 리얼리즘이다, 라고 연역해버린 것은 역사도 바쟁도 아닌, 그저 우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네오리얼리즘? 펠리니보다 더 잘 무대화했던 작가가 있었나? 한국 뉴웨이브? 이장호와 장선우보다 더 마당극스럽고 무당극스러울 수 있나? 어떤 작가와 사조에게 리얼리즘이라고 덧씌우던 비평가들이 있을 뿐, 작위와 자연까지 대립시켜가면서 사물의 오토마티즘을 부정했던 리얼리스트는 이제껏 영화사에 없었다. 단 한 번도.

 

책의 저자 소개에 “본업은 영화감독이다”라고 썼고, 지금 새로운 영화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까지도 영화작업과 글쓰기를 병행해 왔지만, 왠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쓰고 싶은 세 번째 책이 있나?

있다. 꼭 세 번째 책이 아니어도, 죽기 전에 쓰고 싶은 책은 ‘한국영화’라는 제목의 책이다. 물론 내공과 별개로 용기가 나진 않는다. 나 자신이 현장에 섞여 있기 때문에, 비겁하게도 한국 감독들에 대해서는 입이 잘 안 떨어진다. 하지만 자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폭망한 영화를 줄줄이 만드는 감독도 하나의 분위기, 그 계열을 이룰 수밖에 없고, 그것은 반드시 세계에 대해서 방언 한 마디, 사투리 한마디씩 하고 간다는 사실이다. 그건 그 감독이 잘나서도 못나서도 아니고, 그게 영화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라는 책을 쓴다면, 가장 공들여야 할 장르로 ‘호스티스물’을 꼽고 싶다. 당시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보러 몇십만 명씩 몰려갔고 수많은 비평문을 쏟아냈으나 호스티스물은 그저 쓰레기 영화로 치부되었다. 내가 지금 존경하는 비평가와 이론가들조차 당시엔 호스티스물을 한국영화사의 오류이자 불발탄처럼 간주하고 말았고.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건 태어나지도 않았다. 분명 호스티스물에도 그만의 분위기가, 그만의 군중이, 그만의 아우성이 있다. 연구해야 한다. 아니면 우리는 스스로 시간의 낙오자임을 인정하게 된다. 불발탄인 영화는 없다. 군중은 불발탄을 쏘지 않는다. 파시즘만이 그의 유일한 불발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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