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까지 팔아야지
<속물들> 신아가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19-12-13

“본인이 가장 속물처럼 느껴질 때는 언제인가요?” 인터뷰를 마칠 무렵 신아가 감독에게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에게서 예상치 못한 답변이 나왔다.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영화에 관해 이야기할 때요. 나와 내 작품을 포장하는 동시에 그런 내 속을 들여다보게 되거든요.” 그는 기본적으로 영화를 무의식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의식 저편을 애써 더듬고 곱씹다 보면 미처 알지 못했던 ‘진짜’ 의도와 이유를 마주하게 된다고 부연했다. <속물들>의 모티브가 된 사건을 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세상에 이런 일이!’하며 놀라는 데서 멈추지 않고 ‘어떻게’와 ‘왜’를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태어난 선우정(유다인)이라는 인물은 부와 명예를 위해서라면 양심쯤이야 내다 팔 수 있다고 여기는 속물 중의 속물이다. 지지는커녕 공감조차 어렵지만, 그렇다고 마냥 모른 체하기도 쉽지 않다. 우정을 이해하기 위해선 감독이 영화 속에 그려 넣은 사회의 꼴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썅년’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우정 주변에 얼마나 많은 인물이 존재하는지, 그들 각자가 낯 뜨거운 욕망을 감춘 채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는지. 불편한 진실과 민망한 웃음으로 가득한 영화 <속물들>의 신아가 감독을 만났다. 그가 이상철 감독과 공동 연출한 두 번째 장편이며, 전작 <밍크코트>(2012)에 이어 다시 한번 한국사회의 계급 문제를 겨냥한다.

 

 

꼭 한겨울을 골라서 개봉하는 듯하다. <밍크코트>도 무척 추울 때 본 기억이 난다.

맞다. 7년 만에 경험하는 개봉이라 긴장도 되는데, 이제 내 품에서 잘 떠나보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이후 1년 동안 후반 작업을 다시 했다. 편집도 새로 손을 보고 음악도 전체적으로 바꾸었다.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하면서도 나 스스로 끝을 못 내겠더라. 끝이라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인지 모르겠다. (웃음) 그만큼 열심히 몸부림쳤다.

 

사실 영화를 보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번에도 공간 섭외가 만만치 않았겠다’였다. <밍크코트>는 병원이 주요 공간이었는데, 미술계를 배경으로 하는 <속물들>에는 갤러리와 고급주택이 등장한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해당 공간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촬영을 설득하기가 어려웠으리라 짐작한다.

우선 한숨을 크게 한번 쉬고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웃음) 갤러리와 고급주택은 영화에 등장하는 배경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공간이다. 프리 프로덕션 때부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인데, 사용 허가를 구했던 장소에서 갑작스레 약속을 취소하는 등 힘든 상황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촬영 직전까지도 마음을 놓기 어려웠고, 예산과 직결한 문제라 고민도 많았다. 특히 미술관의 경우,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여건이 되는 한 최선을 선택하고자 노력했고, 영화에 담긴 공간은 미술감독과 소품팀장 등 제작진들이 정말 발로 뛰어 헌팅해온 곳이다.

 

등장인물이 한자리에 모이는 클라이맥스 장면도 갤러리에서 촬영했다. 중앙에 무대를 설치한 구조가 특이하던데.

삼청동에 위치한 금보성아트센터에서 찍었다. 시나리오에는 무대와 관련한 내용이 없는데, 실제로 가서 보니 ‘아, 여기는 저걸 이용해서 가야겠구나. 인물을 무대 위로 올려서 발산하게 만들면 되겠구나.’ 하며 콘티가 나오더라. 공간이 지닌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다.

<속물들>

<속물들>은 미술계에서 불거진 여러 이슈를 모티브로 삼는다. 조영남 대작 사건, 예술대학 입시 비리, 천경자 화백 ‘미인도’ 위작 논란 등을 언급했는데, 그중에서도 주인공 이름인 선우정이 암시하듯 신정아 사건과 가장 많은 유사성을 공유한다. 실제 사건을 접하며 흥미롭게 다가왔던 부분은 무엇이었나.

신정아라는 인물 자체가 대한민국에서 전무후무한 캐릭터 아닌가. 당시엔 실제 상황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궁금해졌다. 누군가를 보면서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럴까? 왜 저렇게 말하고 행동할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지 않나. 현재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경험이나 환경 등 과거를 듣고 나면 뒤늦게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기기도 하더라. 신정아 씨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시나리오 작업 당시에는 신정아 씨를 소재로 다루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완성하고 나니 해당 인물과 사건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더라.

 

그럼 주인공 이름을 선우정으로 지은 이유는? 선도 우정도 없이 버티는 인물 아닌가.

신정아 씨에게서 따온 건 아니다. 모티브가 된 인물은 지인 중에 따로 있고, 그 친구가 선 씨라서 선우정이 되었다. 사실 시나리오 초고에는 우정과 소영의 이름을 바꾸어서 썼다. 주인공 이름이 소영이었고, 얘는 좀 탁한 캐릭터니까 탁 씨가 어울리겠다 싶었다. (웃음) 당시 영화 제목은 ‘속물들’이 아니라 ‘우정이 불타고 있다’였는데, 모니터링 과정에서 이름에 관한 피드백을 받았다. 주인공은 소영인데 제목에는 우정이 등장하니 어색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아, 그럼 주인공 이름을 우정으로 해야겠구나’ 하며 바꾼 거다. 정말 별 뜻 없이 지은 이름인데 상황이 재밌어졌다.

 

본래 『데미안』에 착안하여 두 여성 캐릭터가 중심인 영화를 구상했다고 들었다. 현재 영화에 결합한 이야기 조각은 무엇인지 궁금하더라. 말하자면 선우정은 싱클레어였던 건가.

그렇다. 선우정과 탁소영이 싱클레어 대 데미안의 구도로 이끌어가는 내용이었다. 『데미안』이나 『수레바퀴 아래서』같은 작품을 보면, 주인공과 그가 선망하는 인물이 나란히 등장하지 않나. 상반되는 두 인물은 결국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학창 시절에 누군가를 선망했고, 그때 기억에서 출발해 시나리오를 써보려고 했다. 근데 잘 안 풀리더라. 10대 시절에 느꼈던 감정을 온전하게 전달하기에는 시기를 한참 지나왔다는 느낌이었다.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거다. 그 무렵에 비엔날레 사태 등 미술계에서 벌어진 사건을 접했고 ‘어, 이거 한 번 써봐야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들어오면서 시나리오를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다. 내가 ‘막장’에 소질이 있더라. (웃음)

ⓒ이영진

각본 작업은 얼마나 걸렸나.

초고는 두 달 만에 완성했는데, 이후 2년 가까이 각색에 매달렸다. 이상철 감독은 초고를 보고 나서 “네가 아주 거대한 똥을 싸놨다”고 했다. (웃음) 수없이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 이야기를 왜 하고 싶은지 되물었고, 대사는 이상철 감독과 수를 놓듯 한 땀 한 땀 고쳐 나갔다. 시나리오 버전마다 클라이맥스도 전부 다르다. 마지막에 한 번은 뒤집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미술관에서 네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추가했다.

 

이상철 감독과 두 번째 공동연출이다. 어떤 파트너인가.

워낙 오랜 시간을 함께해서 소통이 빠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뭘 하고 싶은지 이해한다. 공동작업을 하는 이유는 결국 완성도를 높이기 위함이다. 각자 마음속에 ‘영화의 전당’이 있지 않나. 그곳에 올려둔 영화처럼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 보니, 때로는 공통분모를 찾고 합의해나가는 과정이 길어지기도 한다. 거의 모든 대사를 오랜 토론 끝에 확정했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는 관계이기도 한데, 이상철 감독은 특히 순발력이 대단하다. 주로 이 감독이 현장 진행을 맡고, 나는 연기 디렉팅에 주력하는 편이다.

 

요즘 찾아보기 쉽지 않은 블랙코미디 장르를 선택했다.

코미디에 관심이 많다. <밍크코트> 역시 나로서는 코믹함을 지닌 영화라고 생각하며 만들었다. 대놓고 웃긴다기보다는 돌아가는 상황이 웃음을 자아내는 거다. 어떻게 하면 재밌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

<속물들>

<속물들>에 등장하는 인물은 콤플렉스 덩어리, 거짓말쟁이, 기회주의자 등 기본적으로 실소를 자아내는 면이 있다. 관객으로서는 이입하기 어려운 캐릭터이기도 하다. 코미디를 구성할 때 어떤 점에 집중했나.

풍자란 비판적 웃음이다. 아이러니한 웃음을 위해서는 캐릭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등장인물 모두를 사랑하고, 그들 각자에게 진실한 부분이 있다고 믿는다. 이번 작품 역시 인물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캐릭터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망가지는 순간이야 있지만, 인물 자체가 망가져서는 안 된다. 결국 무너지는 그 순간에 인물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가 핵심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하지 않나. 영화 속 인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서 관객이 끝까지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접착제가 필요하다. 나한테는 그게 ‘막장’이었고. (웃음) 고상해지고 싶은데 안 되더라.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 위해서는 통속적인 재미가 필요했다.

 

여성의 허영심을 꾸준히 탐구해오고 있다. 흔히 말하는 ‘사치스럽고 뻔뻔한 여자’란 과연 누구인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추적하면서 허영 자체를 사회화된 감정으로 설득해낸다.

사실 개봉을 앞두고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다. 어느 때보다 여성 연대와 정의로움이 활발하게 논의되는 시점에 선우정이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고민스럽다. 누군가는 여성 주인공의 비도덕성을 지적할 수도 있는데, 바로 그런 이유에서 깊이 들여다볼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속물들>은 나 자신에 관한 의문과 반성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나는 왜 이렇게 속물이지? 왜 이런 일에 욕심을 부리지?’ 하고 괴로워할수록 허영심의 정체가 궁금해지더라. 타고난 욕망인지 사회화된 욕망인지 의문스러웠고, 오랜 역사를 거쳐 만들어지고 학습된 사회적 욕망이라면 그 지점을 응시해야 훨씬 발전적인 이야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작품을 통해 질문해보고 싶었고, 여기에 유다인 배우가 큰 힘을 발휘했다. 다인 배우는 우정이 속한 세계를 바라보도록 이끄는 동시에 우정을 연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속물들>

미술 작가인 선우정은 재능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배우 또한 창작자이자 예술가로서 선우정이라는 인물이 지닌 열등감과 불안에 강렬하게 접속하는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유다인 배우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말로 하자니 전형적인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유다인은 정말 섬세한 배우다. 특히 클로즈업했을 때 발산하는 에너지가 굉장하다. 우정은 항상 뭔가에 화가 난 상태인데, 분노를 밖으로 내놓지 않고 꾹꾹 누르고 쌓아둔다. 다인 배우가 특유의 섬세함으로 우정을 만들어냈다. 배우 캐스팅에서는 일단 직관적으로 캐릭터와 이미지가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다인 배우의 경우에는 상상해온 이미지와 너무 흡사해서 걱정하기도 했다. <혜화, 동>(연출 민용근, 2011)을 보면 유다인 배우가 본래 지닌 이미지와 혜화라는 캐릭터가 조금씩 어긋나는 순간이 있지 않나. 그게 너무 좋고. 이번에 혹시라도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어쩌지 고민했는데, 다인 배우가 워낙 열심히 한 덕분에 우정과 잘 만나주었다.

 

만나줬다는 표현에 대해 좀 더 듣고 싶다.

연기 디렉팅에서 연출자의 역할은 안내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에 텍스트로 설명해놓은 캐릭터는 배우와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연기는 배우의 몫이고, 나는 중간에서 두 사람을 잘 만나게끔 안내하는 역할이다. 사전 단계부터 다인 배우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이렇게 연기해달라고 요구한다기보다는, 내가 생각한 우정과 다인 배우가 받아들인 우정 사이에서 격차를 좁혀 나가며 약속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배우와 연출자가 함께 손잡고 새로운 인물을 만나는 작업이라고 보면 될 거 같다. 나 역시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촬영하면서도 항상 어떤 모습을 마주할지 궁금했다.

 

현장에서 배우에게 가장 놀랐던 순간은 언제였나.

마지막에 “영혼까지 팔아야 진정한 작가”라는 대사와 함께, 유다인 배우를 클로즈업으로 잡았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다인 배우도 그날 자기가 어떻게 연기할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정말 몰입에서 나오는 순간이니까. 원래 클로즈업을 쓰지 않기로 했는데, B캠이 들어오면서 담을 수 있었다. 안 찍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지. (웃음) 유지현 역의 유재명 배우에게도 굉장히 놀랐던 순간이 있다. 애초 시나리오에는 우정과 만나는 장면에서 껌을 뱉고 전자담배를 피운다는 설정이 없었다. 그날 아침에 리허설을 앞두고 이렇게 연기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더라. 결과적으로 지현이라는 캐릭터를 정확히 설명하는 장면이 되었다. 너무 과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딱 적정선에서 잡아주더라. 무례한 행동에 중후하고 안정적인 목소리 등이 섞이면서, 속내를 분간하기 어려운 인물의 특징이 살아났다.

ⓒ이영진

클로즈업을 절제한 건 어떤 이유에서 세운 원칙이었나.

카메라는 반드시 중립을 지켜야 했다. 선악을 판단하려는 목적으로 인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뿐더러, 영화 자체가 감정을 이입하며 따라갈 수 있는 성격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관객들이 구경하듯 바라보기를 원했다. 현장에서는 최대한 촬영 소스를 확보해두었다가, 편집 과정에서 기사와 논의하며 많은 부분을 조율해나갔다.

 

우정을 중심으로 관계가 확장된다. 주요 인물 넷에 유재명 배우까지 더해지며, 배우 간 호흡과 밸런스가 중요했다. 캐릭터를 ‘안내’하며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대사를 나누는 장면에서 서로 눈을 바라볼 것을 요청했다. 특히 심희섭 배우가 맡은 김형중이라는 인물에게 그런 면이 중요했다.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으니 더 눈을 들여다보게 되고, 그때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라고 여기는 인물이기에 거짓말도 가능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영화와도 비슷하지 않나. 결국 이건 모두 거짓말이고 속임수인데, 그 안에 어떤 순간만큼은 진실을 내보이는 거다.

 

김형중 역의 심희섭 배우와 서진호 역의 송재림 배우가 보여주는 연기 호흡도 흥미롭다. 두 배우는 외모나 연기 스타일이 꽤 다른데, 거기에서 오는 긴장감이 있더라.

평소 좋아하던 배우들이다. 희섭 배우는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아껴온 동료이고, 재림 배우는 볼 때마다 다른 사람 같은 매력이 있다. 두 배우가 나란히 붙었을 때 느낌이 재밌더라. 아, 둘은 각각 개와 고양이를 키우는데 그중 누가 고양이를 키울 것 같나.

 

심희섭 배우?

송재림 배우가 고양이를, 심희섭 배우가 강아지를 키운다. (웃음) 혈액형은 송재림 배우가 O형, 심희섭 배우가 B형. 영화에서 형중과 진호는 처지에 따라 적이었다가 아군이었다가 하며 관계의 성격을 달리하는데, 배우가 지닌 의외성과 둘 사이에 어긋나는 듯 어울리는 묘한 느낌이 시너지를 냈다.

<속물들>

담지 못해 아쉬운 장면도 있나.

본래 서진호의 동료들도 각각 캐릭터가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다둥이 아빠였다. 해고 위기에 처하자 그는 “팀장님, 정말 죄송한데 제가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서진호를 등진다. 그 장면을 울면서 썼다. 어떤 일을 도모할 때 흔히 그러지 않나. 겉으로는 충성을 맹세하지만 뒤에서 다른 말을 옮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실 때문에 정의를 포기하고 돌아서는 사람도 있다. <속물들>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 중 하나였다. <빌리 엘리어트>(연출 스티븐 달드리, 2000)에서 아버지가 빌리를 발레 스쿨에 보내기 위해 파업 무리에서 빠져나와 다시 탄광으로 돌아가지 않나. 내 영화의 전당 꼭대기에 랭크된 ‘인생 장면’인데, 그런 힘겨운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을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은 전부 사라지고 치정이 남았다. (웃음) 그나마 흔적을 가진 인물이 서진호라고 생각한다.

 

여러 인물이 속고 속이며 맞물리는 과정에서 음악이 박진감을 더한다. 파국으로 치닫는 와중에 유쾌한 리듬을 유지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레드로우’라는 1인 프로젝트 밴드가 작업했다. 처음에는 <인 더 하우스>(연출 프랑소와 오종, 2012)처럼 스릴러 요소를 극대화하고 싶었고, 자연스레 음악도 좀 더 어둡고 긴장감 있게 만들었다. 근데 완성하고 보니 갑자기 살인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다더라. (웃음) 결국 재작업을 할 때는 현재 버전처럼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에 주안점을 두고 만들었다. 레드로우가 실제로 찰리 채플린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더라. 찰리 채플린이 인생이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런 느낌이 음악에 스며들었고, 영화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거 같다. 작업 과정에서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는데, 음악뿐만 아니라 카메오 출연까지 해주었다. 술집에서 소영과 싸움을 벌이는 역할이다. (웃음)

 

실제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영화에 참여하며 디테일을 살린다. 백수장 배우가 연기한 작가 찰스 장과 동명이인인 팝아티스트 찰스 장의 그림이 10여 점 사용됐고, 유현경 작가의 <연수>는 마치 영화를 위해 그린 듯 우정과 높은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보통 배우에게만 캐스팅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나는 스태프를 꾸릴 때도 일종의 캐스팅을 진행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그림도 하나씩 캐스팅하는 과정을 거쳤다. 국내 팝아트 작업을 쭉 늘어놓고 보면서 찰스장 작가를 발견했고, 후반부에 절치부심한 우정이 그린 <연수> 또한 수소문해서 찾아냈다. 처음 유현경 작가를 찾아갔을 때, <연수>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대략 어떤 그림이면 좋겠다는 느낌 정도만 있었는데, 작업실에 놓인 <연수>를 보자마자 ‘이건 선우정이다!’ 싶더라. (웃음) 두 작가가 흔쾌히 참여를 결정해준 덕분에 현실감을 더할 수 있었다.

<속물들>

“예술가가 모이면 돈에 관해 말하고, 장사꾼이 모이면 예술을 논한다”는 대사에서 감독이 느끼는 아이러니를 짐작해보게 되더라. 영화 역시 창작 영역에 놓인 예술이자 산업 시스템에서 생산해내는 상품이다. 작업을 지속하는 과정에서 감독 자신이 속물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을 텐데.

언젠가부터 내가 만든 영화에 관해 이야기할 때 솔직하기가 어렵더라. 창작에는 무의식이 작용하는 부분이 크다고 느끼지만, “그냥 생각 없이 했는데요?”라고 대답할 수는 없으니 그럴듯하게 들리도록 포장하게 되더라. 게다가 한 꺼풀 벗겨내면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했던 적이 있나 싶기도 하다. 결국 내 선택에는 인과가 있고, 되짚어나가다 보면 의도를 발견하게 된다. 선우정이든 신정아 씨든 타인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드러난 면만 보고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지점이 있는 거다. 살다 보면 종종 ‘나는 왜 이렇게 허영도 심하고 속물적일까?’ 싶은 순간이 찾아오는데, 다행히 그때마다 주변에서 동료들이 쓴소리를 해준다. 내가 나를 속물이라고 다그치는 것 또한 스스로 하는 쓴소리이기도 하다. 그런 말을 듣기 싫어하는 순간 진짜 속물이 되겠지. 인간은 때로 너무 변하지 않고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서 절망스럽기도 한데, 일단 내부의 못난 면을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속물이든 꼰대든 정직하게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않을까.

 

앞으로 하고 싶은 작업에 관해 듣고 싶다. 차기작은 언제쯤일까. 또 7년 후는 아니었으면 한다.

어찌 알겠나. (웃음) 영화를 만드는 작업자라면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들 할 거 같은데 나도 비슷하다. 다행히 최근에는 걱정과 압박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진 상태다. 쓰고 싶은 이야기도, 쓰고 있는 이야기도 많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좀 낯간지럽지만 ‘어떻게 하면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요즘 내 화두다. 기본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정도를 잘 지키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힘을 고려할 때 뭔가 사회에 좀 더 보탬이 될 만한 주제를 풀어내 보고 싶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영화를 만들어온 시간을 생각해보면 내 화두는 줄곧 이 사회였던 거 같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조차 돈에 의해 계급이 나뉘는 풍경을 목격했고, 그 이후로 나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꾸준히 계급 문제에 초점을 맞춰 왔는데, 앞으로도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작업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특히 요즘엔 역사에 흥미를 느낀다. 계속 공부하며 시나리오를 고민하는 중이다.

 

역사라면 사극을 준비하는 건가? 어떤 이야기인지 살짝 들려준다면.

일제 강점기에 나라 팔아먹은 놈도 많지만, 그에 버금가는 ‘썅년’도 있더라. 이상하게 나는 자꾸 나쁜 년한테 마음이 간다. (웃음)

ⓒ이영진
Interview
무거운 봄, 보이는 밤
<봄밤> 강미자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2025-07-11
Interview
마그마를 찾아서
<귤레귤레> 고봉수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5-06-09
Interview
1974, 김미옥
<케이 넘버> 미오카 밀러·조세영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5-05-21
Interview
이것이 전부란 말인가
<숨> 윤재호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5-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