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정류장은
<이태원>
차한비 / Choice / 2019-12-07

서울 용산의 이태원은 외국인 거주지이자 외래문화 집결지로서 초국가적 성격을 띠지만, 들여다보면 그만큼 국가주의에 복무하는 지역도 드물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군사기지였던 용산은 해방 후에는 미군 주둔지로 이용됐고, 이 과정에서 이태원은 기지촌의 대명사로 불렸다. 1970년대부터 미군을 상대하는 유흥업소가 대규모로 들어섰으며, 이때 형성된 ‘후커힐’은 이태원의 중심 상권으로 자리 잡게 된다. 외화를 벌어들이며 호황을 누리던 이태원의 명성은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급속히 힘을 잃는다. 뉴타운 지정 이후 불어 닥친 재개발 바람과 미군 부대의 평택 이전 결정으로 상권은 급속도로 쇠락했다. 정체된 공간에 청년 예술가와 사업가가 이동해오며 활기를 되찾는 듯했지만, 현재는 전형적인 젠트리피케이션 사례로 설명된다.

이처럼 이태원은 자본과 권력의 흐름에 따라 흥망성쇠를 겪어온 지역이자, 시기마다 수많은 사람이 각기 다른 목적을 갖고 드나들던 공간이다. 영화 <이태원>은 ‘후커힐’에서 긴 세월 동안 주민이자 노동자로 살아온 삼숙, 나키, 영화를 찾아간다. 세 여성은 이태원의 역사를 증언할 수 있는 당사자인 동시에 ‘기지촌 여성’이라고 낙인찍히며 철저하게 비가시화된 존재다. “택시 기사한테 이태원 가달라고 하면 위아래로 쭉 훑어보잖아.” 40년 넘게 클럽을 운영해온 삼숙은 시선에 관해 말한다. 그는 이태원에서 먹고사는 여성을 향한 비난을 오랫동안 견디고 학습해온 사람 중 한 명이다. 스스로 키워낸 사업과 클럽을 거쳐 간 수백 명의 웨이트리스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과는 거리를 둔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앞머리를 세우고 긴 속눈썹을 붙이는 나키는 화려한 시절을 되새긴다. 아픈 몸을 이끌고 부지런히 일하는 와중에 내심 클럽에서 다시 일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있다. 영화는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주했다가 1년 만에 돌아왔다. 한국을 떠난 여동생과는 20년 가까이 연락이 닿지 않고, 현재는 남동생을 대신하여 조카를 양육하며 산다.

<이태원>

‘이태원’이라는 제목은 감독 본인만의 방식으로 공간을 새롭게 구성하겠다는 선언이며, 등장인물과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에 마땅한 위치를 부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에서 세 주인공은 한 번도 같은 자리에 모이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 카메라 앞에 앉아 개인적 영광과 불행을 회고하는데, 이때 그들이 경험한 이태원은 단일하지 않다. 세 여성의 기억과 의견뿐만 아니라 풍경 역시 섞이고 충돌하기를 반복한다. 계단에 걸터앉아 호박잎을 다듬는 고요함과 핼러윈을 즐기는 떠들썩한 움직임이 교차하고, 구름처럼 밀려든 관광객이 빠져나간 후에는 적막한 언덕이 남는다. 결국 영화는 서로 다른 것을 병치하고 연결함으로써 ‘이것도 이태원이다’를 넘어 ‘이것을 제외하고서는 이태원일 수 없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젊음과 늙음, 풍요와 가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태원을 온전히 말하기 위해서는 세 여성이 필요하다. 그들은 오랜 시간 주변부로 밀려나기를 강요받았으나, 공간의 번영과 쇠퇴를 온몸으로 관통하며 언제나 중심을 지켜낸 존재이다. 누구와도 다른 개성 강한 인물인 동시에 역사에서 삭제된 수많은 여성을 암시하고 대표한다.

“할 짓은 다 해봤잖아. 후회는 없어.” 덤덤하게 내뱉은 영화의 말에는 부끄러움 없는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 최선을 다해 삶을 일궈온 사람, 아무리 지반이 위태로울지언정 깊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려 애쓴 이에게서만 발견 가능한 긍지다. <이태원>이 이뤄낸 중요한 성취 중 하나는 이처럼 여성이 깨우친 지혜를 기록한다는 데 있다. 그들은 가계를 책임지고 자신과 타인을 돌본다. 일상을 지탱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이해하며, 오늘도 클럽을 열고 설거지를 한다. <이태원>은 변화무쌍한 공간에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생존해온 세 여성을 통해 삶에 관한 여러 질문을 던진다. <모래>(2011), <진주머리방>(2015) 등 여성주의 시각을 바탕으로 공간과 역사를 꾸준히 탐구해온 강유가람 감독의 첫 개봉작이며, 2016년 제8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시작으로 다수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최근작 <우리는 매일매일>(2019)은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한국장편경쟁 부문 작품상과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차지했다.

<이태원>

 

이태원 Itaewon 제작 영희야놀자 감독 강유가람 출연 삼숙, 나키, 영화 배급 KT&G상상마당 제작연도 2016년 상영시간 94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19년 12월 5일

 

 

Choice
삼마이 나가신다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
손시내
2025-03-21
Choice
오직 한 번
<두 사람>
차한비
2025-02-12
Choice
아이 없는 학교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손시내
2024-12-26
Choice
나침반이 없어도
<힘을 낼 시간>
차한비
2024-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