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벚꽃 잎이 날리고 옷차림이 가벼워진다. 따뜻하고 향긋하니 어느 날엔 마음이 부풀어 오를 법도 한데, 그들은 도리어 점점 가라앉는 것처럼 보인다. 주대(이주대)는 심리 상담을 받으며 독일 유학을 계획하고, 연우(강연우)는 취업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경환(장경환)은 아르바이트하며 틈틈이 시를 쓰는데, 실은 고양이를 돌보거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들에게는 몇 해째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 성우(김철윤)가 있다. 성우는 홀로 헤매며 영화를 만들려고 하지만, 작업은 좀처럼 진척을 보이지 않는다. 20대 끝자락에 선 그들은 때로 이미 늙어버린 듯 무력한 표정을 짓는다. 나만 뒤처진 듯 불안하고 뭘 해도 예전만큼 즐겁지 않다.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던 친구들과도 자꾸 거리가 생기는데 돌이키기엔 멀리 와버렸다는 느낌이다. 그건 생경한 감각이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조바심에 새로워지리라 다짐해보지만, 꿈은 꿈처럼 아득한 곳에 머무를 뿐이다. <모아쓴일기>(연출 장경환, 2019)는 너무 더디거나 혹은 지나치다시피 빠르게 흘러가는 한 시절을 기록한다. 부산독립영화제에서 처음 영화를 소개한 후, 겨울 초입에 서울을 방문한 장경환 감독을 만났다.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영화답게 대화 역시 낯선 곳을 두리번거리며 나아갔다. 문득 영화 속 대사가 떠올랐다. “어디로 갈까, 우리는?”
두 차례 GV를 진행했다. 관객 반응은 어땠나.
항상 부담스럽고 긴장된다. 부산에서 상영할 때는 지인들이 와주어서 쑥스러우면서도 편안했는데, 서울에는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 보니 더 떨리더라. 다행히 생각만큼 무서운 질문은 없었다. (웃음) 픽션과 다큐멘터리가 혼합된 점 때문인지 대부분 제작에 관해 궁금해하더라. 근데 혹시 내 영화를 봤나?
물론. 영화 시작과 끝에 ‘Satin Camel(바다였던)’이 삽입된 걸 보고 반가웠다. 이승열 노래 중에서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곡인데.
맞다, 4집 <V> 앨범. 주기적으로 생각나는 곡이다. 불안하거나 힘들면 듣고 싶더라. 오랫동안 카페에서 일했는데, 마감 시간이 가까워져도 안 나가는 손님이 있을 때 틀어두면 효과적이었다. (웃음)
오프닝에서 눈에 띄는 다른 하나는 제작사 CANNETAPIA(칸타삐아)이다. 이름이 특이한데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
제작사라기보다는 일종의 동호회라고 보면 될 것 같다. 2016년 무렵 연출을 지망하는 다섯 명의 청년들이 만든 영화 모임이다.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별 ‘깐따삐아’에서 따왔는데, 언젠가는 칸 영화제에 가자는 장대한 소망을 담아 지었다. (웃음) 멤버들 모두 원래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고, 각자 전공이나 경력도 다르다. 서울로 떠나는 대신 어떻게든 부산에서 예술 활동을 하고 싶었다. 마땅한 일자리도 네트워크도 없어서 막막하던 차에 우리 힘으로 해보자며 모인 그룹이다. 누군가 영화를 찍을 때면 함께 돕기는 하지만, 제작사로 기능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도 다들 조금씩 하고 싶은 일에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이번에 한 친구는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다른 친구는 명필름랩에 합격했다.

필모그래피를 검색해보니 등록된 전작이 없더라. <모아쓴일기>가 첫 영화인가.
외장하드에 저장된 단편을 제외하면 정말 첫 작품이다. (웃음) <모아쓴일기>는 칸타삐아를 만나기 전부터 작업해오던 영화인데, 이전에도 늘 뭔가를 찍기는 했다. 사진을 좋아하고 지금도 여전히 필름 카메라를 지니고 다닌다. 특히 어딘가에 놀러 갈 때면 DSLR 카메라로 친구들을 촬영하고, 여행이 끝난 후에 영상을 만들어서 선물하곤 했다. <모아쓴일기>에 나오는 친구들이 카메라를 어색해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줄곧 연출을 꿈꾸었나.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일 거라고 예상했다. 극 중 경환은 시를 쓰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공상과 몽상으로 10대를 보냈는데, 드라마를 볼 때면 가상 캐스팅을 하거나 새로 이야기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음악도 좋아하지만 너무 못 부른다. 루시드폴 노래는 정말 자주 듣고 열심히 따라 불러서 잘할 수 있는데 다른 곡은 영 아니다. (웃음) 예전에는 시인을 꿈꾸기도 했다. 시집을 읽고 습작도 해보고 그랬다. 영화에 나오는 시를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루시드폴 홈페이지인 ‘물고기마음’에서 본 글귀를 참고한 부분도 있다. 이제는 꼭 감독이 아니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 좋을 것 같다. 근데 지금 왠지 횡설수설하는 기분이다. 인터뷰가 처음이라 걱정이다. 괜찮은가?
잘 가고 있다. (웃음) 그럼 칸타삐아를 만들기 전에는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해왔나.
수능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서 누나 집에 얹혀살며 영화과 입시를 준비했다. 그 무렵 청소년 영화제작동아리 Agro를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활동하며 처음 영화란 걸 만들었다. 원래 기수가 낮으면 카메라를 맡기지 않는데, 내가 사진도 찍고 나이도 많은 편이라 촬영을 경험해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카메라 메고 남산 밤거리를 돌아다니던 기억이 난다.
이후엔 다시 부산으로 내려간 건가.
한참 Agro에서 활동하다가 스물셋에 입대를 했다. 군대가 워낙 좋아져서 일주일에 한 번씩 최신영화도 볼 수 있었다. 그때 <연애의 온도>(연출 노덕, 2013) 같은 작품을 재밌게 봤다. 휴가 나오면 동아리를 찾아갔고 서울로 나온 김에 이승열 공연도 보러 가고 그랬다. (웃음) 제대 후에도 한동안 서울에 살다가 몇 해 전에 부산으로 갔다.
영화, 시, 음악 중 무얼 가장 좋아하나.
음악을 가장 좋아하고 영화를 제일 안 보는 거 같다. 특히 영화를 만들 때는 음악을 들으면 들었지,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는 않더라. 요즘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서울독립영화제가 폐막할 때까지 서울에 머무를 계획인데, 영화도 많이 보고 ‘배우프로젝트-60초 독백 페스티벌’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배우에 관심이 많다. 연출부로 일할 때도 배우를 보며 에너지를 얻었고, 다음 작품에서는 많은 배우와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모아쓴일기>에서 연출과 연기를 겸했다. 앞으로도 직접 연기할 생각은 없나.
내가 출연하는 장면은 거의 눈감고 본 수준이다. 가능한 한 좋은 장면을 골라서 쓰긴 했지만, 편집할 때 다시 보면서 정말 괴로웠다. (웃음) 연기와 연출을 동시에 하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본분을 잊고 ‘멘붕’이 오더라. 이제 연출에만 집중하려고 한다.

2016년부터 약 3년간 촬영을 지속하며,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조합하는 형태로 영화를 만들었다. 전반적인 제작과정이 궁금하다.
2016년 4월 5일에 촬영을 시작했다. 실제로 주대가 7월에 독일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연우도 졸업시험과 취직을 준비하며 바쁘게 지내던 시기였다. 촬영 날짜를 맞추기가 어려웠고 친구들에게 타박도 많이 들었다. 한동안 작업을 멈추었다가 편집하는 과정에서 김철윤 배우를 만났다. 성우가 등장하는 장면은 2017년에 3박 4일 정도로 일정을 몰아서 찍었고, 그밖에 장면은 느슨하게 연결해나갔다. 영화에 해질녘 풍경이 자주 나오지 않나. 보통 촬영장에서는 일을 접어야 하는 시간인데, 나는 혼자 찍다 보니 좋아하는 풍경을 욕심껏 담아볼 수 있었다. 하루에 한 신 찍고 나면 맛있는 거 먹고 놀러가는 식으로 여유롭게 촬영했다.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가 모호한 영화이기도 하다. 어느 부분이 픽션인지는 알겠는데, 어디까지가 논픽션인지 모르겠더라. 단지 현실 속 장면을 그대로 찍었다고 해서 다큐멘터리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모아쓴일기>가 말하는 다큐멘터리는 무엇인가.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생각하면서 작업하지는 않았다. 다만 모든 출연자에게 대본을 주거나 “자, 이제 촬영 시작합니다!”라고 고지한 후에 찍는 방식은 아니었다. 내게 중요한 건 기록이었다. 2016년부터 2018년 사이에 일어난 역사적, 사회적 사건을 나와 친구들이 어떻게 경험하는지 기록하고 싶었고, 제목 그대로 일기처럼 보여주려고 했다. 서울도 마찬가지겠지만 현재 부산에 가보면 어디에나 공사 중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래된 건물을 철거하고 새 빌딩을 세운다. 아파트가 아파트를 가리는 상황이라 산을 보기도 힘들다. 익숙한 풍경이 사라지는 와중에 세월호, 가습기 살균제, 데이트폭력 등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도 발생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 많은 걸 넣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영화를 만들 당시에는 가능한 한 전부 포함하고 싶었다. 지진 같은 재해마저도 여력이 된다면 넣었을 거다.

말한 대로 영화에는 네 청년이 떠안은 개인적 불안과 사회적 위기가 공존한다. 실제 당사자가 존재하는 사회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고민스러웠던 부분은 없었나.
무얼 담을지가 아니라 어떻게 담을지 고민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상태에서 옳고 그름에 관해 다 아는 것처럼 보여줄 수가 없더라. 극 중 경환이 동네 고양이에게 밥을 주지 않나. 그때 한 마리가 따라오려고 하자 경환은 가라며 내친다. 나 역시 길에서 마주치는 고양이를 돌보는데, 너무 힘들거나 여의치 않은 상황에는 고양이 밥을 챙기지 못한다. 성우는 데이트폭력을 목격하지만 망설임 끝에 도망치고,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도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그저 노란 리본을 만지거나 매는 정도로 그친다. 어떤 표현이 적절하지는 모르겠다. 다만 최소한의 태도라고 생각하며 만들었다. 한국에 사는 20대 중 한 명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적어도 내가 경험하는 일을 거짓으로 묘사하고 싶지는 않았다. 질문만 던지고 답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긴 한데, 오히려 영화를 만들면서 좀 더 깊이 고민해볼 수 있던 것 같다. 미래를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바르고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리고 세월호 참사 2주기였던 2016년 4월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전체적으로 봄이라는 계절이 두드러지는데 미리 계획했던 바인가.
벚꽃이 필 때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다시 이승열 이야기가 나오는데. (웃음) 2014년에 이승열이 사계절 공연을 한 적이 있다. ‘봄: 허공의 모서리’, ‘여름: 중첩’, ‘가을: 관찰’, ‘겨울: 마음의 핵’이라는 제목으로 계절마다 콘서트를 열었다. 그때 네 번 모두 참석했는데, 노래를 듣다가 문득 ‘언젠가 나도 사계절을 테마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작품은 여름을 배경으로 찍을 계획이다.
앞서 배우들과 작업해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차기작에도 친구들이 등장하면 재밌겠다.
솔직히 친구들은 단역으로라도 출연시키고 싶다. 고생하니까 미안하긴 한데, 내가 영화를 만들 때마다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웃음) 나이 먹어가는 모습도 담고 싶고,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보면 함께 성장해온 느낌을 나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네 사람 중에 성우 역만 전문 배우를 기용했다. 김철윤 배우의 출연은 어느 시점에 결정되었나.
애초 성우를 등장시킬 계획은 없었다. 연락이 끊긴 친구에 관한 내용은 있었지만, 성우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당시 주대가 유학을 가면서 촬영이 정지되었는데, 몇 달 동안 영화에 관해 생각하지 않다가 칸타삐아를 만들고 함께 작업하는 과정에서 자극을 받았다. 기존 촬영분으로 영상을 만든 다음 시나리오를 정리해서 김철윤 배우를 만났다. “철윤 씨가 이 영화의 마지막 퍼즐이라고 보시면 된다”며 배역을 제안했다. 사실 출연을 결정하고 촬영하기까지 얼마간 시간이 필요했다. 철윤 배우가 시나리오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고치고 다시 고쳤다. 결국 세 번 만에 통과했다. (웃음)
성우는 화자인 동시에 유일한 영화적 인물이다. 세 친구와 만나는 장면이 있다면 영화가 어색해지리라 예상했는데 끝까지 혼자 등장하더라.
편집 초기에는 배우가 등장하는 부분을 들어내야 할 것 같다는 피드백도 들었다. 아무래도 친구들과는 결이 다르기도 하고, 우리 넷이 친구처럼 보이지도 않으니까. 어떻게 하면 철윤 배우가 등장하는 장면을 잘 이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본래는 성우의 하루로 영화를 마무리하려고 했다. 성우와 경환이 만나는 엔딩을 썼고, 실제로 그 장면을 촬영하기도 했다. 이후 편집 과정에서 다시 보니, 둘의 만남이 명확해질 때 도리어 닫힌 느낌을 주는 것 같더라. 성우 캐릭터를 고려할 때, 개연성이 부족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배치가 맞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정서를 담당하는 가장 큰 축은 주대라고 느껴진다. 연우와 경환보다 다양하게 표정이 주어지고, 사라진 친구를 찾아 나서는 역할을 맡는다.
원래 주대를 주인공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실제로 연락이 두절되었던 친구이기도 하다. (웃음) 2년 동안 소식이 닿지 않았고, 그때는 내가 찾으러 다니는 쪽이었다. 영화에서처럼 집에 가서 메모도 남기고 시간이 날 때마다 연락해보고 그랬다. 영화의 많은 부분이 경험에서 나왔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신기하게도 연락이 끊긴 친구가 한 명쯤 있더라. 이유를 모르는 상태에서 관계가 끝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만나기도 하고 말이다.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이야기를 연결해주는 존재는 고양이인지도 모르겠다. 인물만큼이나 고양이가 자주 등장하는데.
언젠가부터 관심을 두고 지켜보았다. 밥도 주고 아픈 애를 구조해서 병원에 다니기도 했다. 걔가 영화에 나오는 ‘로돌포’다. 제멋대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별난 친구인데, <보헤미안의 삶>(연출 아키 카우리스마키, 1992)에서 마티 펠론파가 연기한 주인공 이름을 따왔다. (웃음) 영화에 고양이가 등장하는 이유는 물론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재개발이 시작되고 집값이 오르면서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내가 사는 곳은 대부분 노인이 거주하는 동네인데, 결국 월세 때문에 양산 등 부산 외곽으로 이사를 하시더라. 길고양이가 처한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영화에 많이 넣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와 친구뿐만 아니라 고양이, 이웃, 가족도 보여주고 싶었다.
‘숙희 미용실’과 엄마가 등장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캐리어를 들고 어디론가 떠나는 엄마의 뒷모습이 영화와 닮았다. 막상 어디에 도착하는지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그렇고.
확실히 엄마가 나보다 연기를 잘하더라. (웃음) 끼가 많은 분이다. 그날 엄마가 고향인 제주도에 내려갔는데 따라가서 찍을까 싶기도 했다. 내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다 보면 엄마의 엄마도 궁금해지더라. 정말 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웃음)
오래된 주택이 다닥다닥 자리한 골목, 재개발을 앞둔 재래시장, 유채꽃이 핀 드넓은 초원은 정감 어리고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소멸이 예정된 위태로운 공간처럼 보인다. 전체적으로 부산이라는 도시가 기묘하게 다가왔다.
혼자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데, 이곳저곳 가다 보면 부산에 나를 자극할 만한 공간이 무척 많다. 서울보다 사람이 없어서 더 특별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센텀시티처럼 미래 도시 같은 지역도 있지만, 여전히 옛것이 남아서 낡은 대로 아름다운 공간도 적지 않다. 보통 촬영 전날에는 최종 답사를 갔는데 운은 반반씩 따라주었던 것 같다. 유채꽃이 핀 곳은 대저생태공원이다. 카메라에 전부 담지 못할 정도로 넓은 곳이고 옆으로는 낙동강이 흐른다. 전날 태풍이 와서 날씨를 걱정했는데, 다음날 새벽에 갔더니 하늘이 개면서 원하는 장면이 나왔다.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적당히 풀도 누워주었고.

화면을 이질적으로 만드는 데 사운드도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성우가 옥상에서 담배를 피울 때 삽입된 폭죽 소리가 인상 깊었다.
심장 뛰는 소리다. 믹싱도 직접 했는데 바람 소리, 빗소리 등을 찾다가 그 소리를 발견하고 너무 기뻤다. (웃음) 음악은 아완 씨가 작업해주었다. 사실 따져보면 고양이가 이어준 인연이다. 내가 매일 가는 ‘매일이 다르다’라는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그곳에 고양이가 들어와서 아이를 낳고 사는데, 아완 씨가 그중 두 마리를 입양했다. 영화에서 내가 우산을 씌워주는 조그만 고양이가 그 아이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다가 음악 작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찾아보니 정말 매력적이고 내 영화와도 잘 어울릴 것 같더라. 캐릭터마다 음악을 만들어주었고 덕분에 빈 곳을 채울 수 있었다. 당시엔 몰랐는데 알고 보니 박배일 감독과도 <라스트신>(2019), <소성리>(2018) 등 OST를 작업한 경험이 있더라.
끝으로 차기작에 관해 듣고 싶다. 극 중 경환은 연우의 증명사진을 찍어주며 “힘 들어갔는데 안 들어간 느낌”을 주문한다. 연출자로서 지향하는 바와 맞닿는 표현 같다.
영화는 늘 해오던 일이라 나에게만큼은 자연스러운 일상에 가깝다. 이제 30대가 되어서 여러 압박도 느끼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 길을 가지 않을까 한다. 언젠가는 잔뜩 힘을 준 영화도 만들어보고 싶다. 힘들여서 힘 들어간 느낌으로. (웃음) 일단 글을 빨리 써야 한다. 지원을 받아야 영화를 만들 수 있으니까. 여름에 부산 중앙동을 배경으로 촬영을 시작할 계획이다. 현재는 공간과 이미지만 정해둔 상황이다. 앞서 말한 ‘매일이 다르다’라는 카페와 ‘미묘북’이라는 독립서점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