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드린 만큼, 참아낸 만큼
<영하의 바람> 권한솔·옥수분
글 차한비 사진 김혜미 / Interview / 2019-11-27

“솔아, 네 친구들이다!” 창밖에 소나무가 보이면 아빠는 인사를 시켰다. 어린 권한솔에게는 나무를 친구로 두었다는 말이 놀림처럼 느껴졌는데, 아빠는 흐뭇하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하늘 높이 뻗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아빠가 소나무를 좋아하세요. ‘살아서 백 년, 죽어서 천 년’이라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제 이름에도 그런 의미를 담아서 지었대요. 나중에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이름 따라가나 보다’ 하며 놀라시더라고요.” 이제 권한솔은 곧게 자란 소나무를 바라볼 때 든든하고 정다운 마음이 든다. 언제나 푸르고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소망과, 믿을 만한 배우로 오래 이름을 남기고 싶은 자신의 꿈이 나란히 떠오르기 때문이다.

옥수분,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 못할 이름이다. 성부터 이름까지 전부 특이해서 10대 시절 별명만 해도 대여섯 개가 넘었다. “할아버지가 작명소에서 비싼 돈을 주고 지어 오셨다는데, 아무래도 요즘 이름 같지가 않잖아요.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옥수수니, 옥수수분이니, 한바탕 난리를 치러야 했어요.” 한자로는 지킬 수(守)에 나눌 분(分)을 쓴다. 연기를 시작할 무렵부터 이름이 품은 뜻을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지키고 나눈다. 그 문장은 한 인간이자 배우로서 삶을 꾸려가는 자세를 일러주었다. <영하의 바람>(김유리, 2019)에서 연기한 미진 또한 ‘수분’을 닮은 인물이다. 미진은 영하를, 혹은 영하와 지키고 나눈다.

가족 공동체의 부조리와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낸 <영하의 바람>에서 무엇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주인공 19세 영하(권한솔)와 미진(옥수분)이 보여주는 ‘단 한 사람’의 가능성이다. 영화 속 둘은 서로에게 변함없이 곁을 내어주는 소나무 같은 존재이자, 무엇이든 함께 지키고 나누는 유일무이한 관계다.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한복판에 서 있지만, 영하와 미진은 끝내 서로를 놓치지 않기에 봄을 희망할 수 있다. 첫 장편 주연작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안정적으로 극을 이끌어간 두 배우를 만났다. 2017년에 촬영한 <영하의 바람>을 개봉한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대화 내내 두 배우는 오랜 겨울을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새로 맞이할 봄을 기다리는 설렘을 번갈아 드러냈다.

 

 

긴 시간을 <영하의 바람>과 동행했어요. 이제 정말 떠나보내는 느낌일 텐데 기분은 어떤가요.

권한솔_ 엄청 떨려요. 영화제에서 상영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극장 개봉은 전혀 다르게 느껴지더라고요. 불특정 다수인 관객에게 공개하는 거니까요. 다행히 영화를 좋게 봐주신 분들이 많아서 한시름 덜었어요.

옥수분_ 말 그대로 시원섭섭해요. 뭐랄까요, 미진이를 평생 안고 가겠다는 마음으로 재작년부터 만 2년 동안 함께 지내왔거든요. 시사회를 마치고 돌아가는데 문득 ‘아, 이제 놔줘야 하나?’ 싶으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되게 주책이죠? (웃음) 당황스러울 정도로 쓸쓸하고 아쉬웠어요. 같이 동고동락하며 영화를 만들었던 식구들과의 추억이 온전히 담긴 작품이어서 그런 것 같아요.

권한솔_ 맞아요. 저는 <영하의 바람> 이후 다른 작품에 몰두하기 위해 제게 남은 영하를 다 씻어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새로운 영화와 캐릭터를 마주할 때마다 영하가 떠오르더라고요. 괜히 안쓰럽기도 하고, 지금쯤 어딘가에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며 응원하는 마음이 들기도 해요.

<영하의 바람>

올해 의외의 순간에 두 배우를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어요. 3월 개봉한 <악질경찰>(이정범, 2019)에서 소희로 출연한 권한솔 배우를 보자마자 ‘어, 영하다!’ 했죠.

권한솔_ 실제 촬영은 <악질경찰>이 먼저였어요. 영하와 비교하면 소희는 스스로 만들어내야 하는 부분이 훨씬 컸어요. 영하는 시나리오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캐릭터에 관해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소희는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인물이었어요. 초반에는 어려웠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재밌더라고요. 제 마음대로 만들어볼 여지가 있으니까요.

 

공교롭게도 두 작품에서 연이어 집을 떠난 10대를 연기했어요. 영하에게 미진이가 있다면, 소희에게는 미나(전소니)가 있죠.

권한솔_ 다행히 누가 꼭 곁에 있어주더라고요. (웃음) 지금까지 어떤 역할을 연기했냐는 질문을 받으면, 농담처럼 “주로 집을 나가는 편”이라고 말해요. (웃음) 그럼 상대는 불량한 청소년을 떠올릴 텐데 설명하기가 좀 애매하죠. 딱히 불량하거나 노는 친구는 아닌데, 집을 나가야 할 이유가 생긴 거니까요. 역할 크기에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소희는 워낙 전사가 없는 인물이라서 저로서는 영하를 연기할 때 굉장히 새롭게 느껴졌어요. 미진이와 함께 만들어나가는 부분이 크기도 했고요.

 

옥수분 배우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정가영 감독의 신작 <하트>(2019)에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더라고요. 원래 연기 외에도 영화 일을 지속해왔나요.

옥수분_ 연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관심이 생겼어요. 혼자 시나리오를 써보기도 하고, 언젠가 연출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영화 제작 워크숍을 수강했는데, 수업이 종료되는 날 뒤풀이에서 정가영 감독님을 만났어요. 이후로 <극장에서 한 생각.>(정가영, 2017)에 짧게 출연했고요. 작년 여름에 감독님께 전화가 왔는데 <하트> 프로듀서를 제안하시더라고요. 이전까지 한 번도 경험이 없던 터라 무척 놀랐어요. 덕분에 운 좋게 기회를 얻었죠. 6회차로 비교적 짧은 일정이었지만, 아마 촬영 내내 저 때문에 감독님이 고생하셨을 거예요.

권한솔 ⓒ김혜미
옥수분 ⓒ김혜미

연기를 늦게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권한솔_ 수분 언니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어요. <영하의 바람> 캐스팅이 완료된 후에 첫 미팅을 하러 나갈 때 되게 설렜어요. 감독님이 “수학과를 나온 수줍음이 많은 배우”라고 귀띔해주셨거든요. (웃음) 저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계속 연기만 해왔던 터라, 다른 직업군에 있는 사람들이나 연기 외에 또 다른 공부를 했던 사람에게 호기심이 생기더라고요.

옥수분_ 연기는 어릴 적부터 막연히 꿈꿔온 길이었어요. 영화과 진학을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때만 해도 ‘깡’이 없어서 선뜻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20대가 되자 갈증이 커지면서 더 늦기 전에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5세가 된 해부터 오디션을 보러 다녔으니 다른 배우와 비교하면 늦게 시작한 편이에요. 아무래도 저 같은 체형이나 이미지가 흔하지 않다 보니,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주어졌어요. 제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어쩌다가?”라며 많이 신기해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거든요.

권한솔_ 수학이 연기에 도움이 된대요.

옥수분_ 이렇게 말하려니 좀 쑥스러운데. (웃음) 굳이 연관을 찾자면 수학은 사고력을 키워내는 학문이잖아요. 연기에서도 나무를 넘어 숲을 보는 게 중요하고요. 지금도 계속해서 연기를 공부해나가는 입장이지만, 수학을 배우며 생각하는 힘을 길러온 시간 또한 제 자양분이 된 것 같아요.

<영하의 바람>

권한솔 배우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권한솔_ 예고에서 연기를 전공했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무대에 선다거나 누군가를 따라하는 일을 좋아했거든요. 배우라는 직업 자체는 저와 멀다고 생각했는데, 학교에서 연극을 해보니 ‘이거다!’ 싶더라고요. 정기공연으로 뮤지컬 <숲속에서>를 무대에 올렸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모든 관객이 제 호흡 하나 하나에 집중하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짜릿하더라고요. 무대 연기는 중독성이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연극이 담배라면, 뮤지컬은 마약”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만큼 몰입되고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

 

뮤지컬에서 주역을 맡을 정도라면, 연기뿐만 아니라 노래와 춤 실력도 상당하다는 거네요.

권한솔_ 좋아해요. 일할 때 타고 다니는 차 안에도 마이크가 있어요. (웃음) 저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평소에도 혼자 허밍하거나 자주 흥얼거린대요. 연기자로서 입지를 다지고 나면 춤과 노래를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어요. 동시에 여러 일을 하는 데 약하거든요.

 

그러고 보니 <영하의 바람> 엔딩에 삽입된 ‘7년간의 사랑’을 직접 불렀죠.

권한솔_ 감독님은 처음부터 배우 목소리로 노래가 들어가는 걸 염두에 두셨어요. 오디션에서 “노래는 좀 하세요?”라고 물으시기에 그냥 “네”라고 답했죠. (웃음) 정말 자신이 없는 일에는 못한다고 솔직하게 말하는데, 아니라면 할 수 있다고 하는 성격이에요. 오디션 때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지는 않으셨고, 이후로 엔딩곡을 녹음할 때까지 감독님 앞에서 노래를 부른 적은 없어요. 아마도 제가 현장에서 흥얼거리는 모습을 보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권한솔 ⓒ김혜미

개봉 후에 두 배우 앞에는 ‘충무로 기대주’라는 수식어가 붙었어요. 신인 배우에게는 그만한 찬사도 없을 텐데, 개인적으로는 어떤 칭찬이 가장 마음에 들던가요.

옥수분_ 전부 감사하죠.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인데 일에 관해서 칭찬을 받는 거니까요. 특히 미진 그 자체로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제일 뿌듯하고 다행스럽게 느껴져요.

권한솔_ 저도 연기로 칭찬받을 때가 가장 행복한 것 같아요. 원래 칭찬에 부담을 많이 갖는 편인데, 연기에 관해서는 안 좋은 평가를 들을 때 무척 우울해지더라고요.

 

연기 경험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시나리오를 보았을 때, 기대 반 걱정 반 아니었을까 싶어요. 영화가 다루는 사건과 감정이 만만치 않으니까요. 당시 마음을 떠올려보면 ‘하고 싶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중 무엇에 가장 가까웠나요.

권한솔_ 시나리오에 응축된 감정이 너무 좋았어요. 꾹 누르듯 단단한 상태에서 감정이 오고 가는 영화를 좋아하거든요. 솔직히 지금이라면 무서웠을 것 같은데, 당시에는 워낙 ‘초짜’니까 그저 너무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뭘 모를 때 나오는 용기가 있잖아요.

옥수분_ 저도 뭐든지 다 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어요. <박화영>(연출 이환, 2018)에서 김가희 배우를 보며 많은 자극을 얻기도 했고요. ‘통통한 배우도 주연을 맡을 수 있구나. 나도 하고 싶다. 나는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으로 도전했어요. 게다가 시나리오가 마치 제 이야기를 다룬 것처럼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극중 영하와 미진이 그렇듯 저 역시 동갑내기 친구인 사촌이 있거든요. 비슷하게 힘든 시절을 겪었고요. 한솔이나 저나 시나리오에 푹 빠졌기 때문에 더 열정적으로 임했던 것 같아요.

<영하의 바람>

영하와 미진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각자 맡은 캐릭터만큼이나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 보여요. 함께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나요.

옥수분_ 12세와 15세를 거쳐 최종적으로 19세가 되었을 때, 영화에 쌓인 맥락만큼 인물 간에도 ‘케미’가 자연스레 묻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솔이랑 만나서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아요. 영화 밖에 있는 내용을 상상하며 채워가는 과정이었어요.

권한솔_ 오래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정말 어딘가에서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씩 떠올렸어요. 예를 들면 영하의 엄마인 은숙과 미진의 엄마는 자매인 거잖아요. 그럼 둘이 같은 시기에 임신하고 서로 의지하며 한 시절을 통과해왔을 텐데, 은숙은 왜 미진에게 냉정할까? 그런 식으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어요. 누가 들으면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하겠지만, 신기하게도 현장에서 감정을 잡을 때 도움이 되더라고요.

 

영하는 미진이를 ‘깃털’이라고 부르잖아요. 미진이라면 영하에게 어떤 별명을 지어주었을 것 같나요. 김유리 감독과 인터뷰할 때 물어보니,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결국 떠오르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권한솔_ 맞아요. 저희도 정말 많이 생각했거든요. 감독님이 어릴 적 별명을 물어보기도 하셨어요. 근데 신기하게도 원래 별명이 없어요. 친구들도 그냥 이름을 부르고요.

옥수분_ 아무리 고민해도 영하는 딱 영하더라고요. 한솔에게 별명이 따로 없는 것처럼, 저도 평소에 친구를 별명으로 부르지 않거든요. 워낙 남들한테 별명으로 많이 불려선지 이름이 제일 좋아요. (웃음)

ⓒ김혜미

사전 리허설은 물론 촬영 현장에서도 굉장히 철저한 모니터링을 진행했다고 들었어요. 배우로서는 어떤 경험이었나요.

권한솔_ 처음이니까 당시에는 모든 주연은 이렇게 연기하는 줄 알았어요. (웃음)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한동안 다른 현장에 가서 모니터링을 하지 않으면 불안했고요. 감독님 덕분에 중요한 걸 많이 배웠어요. 각도에 따라 어떻게 보이는지, 제가 생각한 이미지와 실제로 화면에 담기는 이미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때 충분히 시간을 들여 찾아가는 과정을 거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여전히 배워가는 중이지만요.

옥수분_ 배우로서 자신을 파악하는 것은 감정 전달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잖아요. 감독님은 굉장히 섬세하면서도 강단 있는 스타일이에요. 애드리브를 싫어하지는 않으시지만, 지문과 대사 자체가 정확히 짜여 있었어요.

권한솔_ 감독님을 처음 만났을 때, 머릿속에 한지가 떠올랐어요. 희고 부드러운 동시에 단단한 기운이 느껴졌거든요. 책을 많이 읽으시는 분이라는 생각도 했죠. ‘가령’이나 ‘예컨대’처럼 일상적으로 쓰지 않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셔서요.

옥수분_ 저도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문어체로 말씀하실 때. (웃음)

권한솔_ 맞아요. 타인을 지칭할 때 3인칭을 쓰시거든요. 그녀가, 그가, 하는 식으로요. 현장에서 엄청 따라했어요. 아, 이거 감독님이 보면 놀라시겠다. (웃음)

<영하의 바람>

한 번에 넘어간 장면이 거의 없을 것 같은데, 특별히 기억나는 장면이 있나요. 최다 테이크를 기록한 장면은 무엇이었는지도 궁금하고요.

권한솔_ 아마 마지막 장면일 거예요. 정말 추운 날이었는데, 나중에는 추위를 잊을 정도였어요. 엄마와 식탁에 마주 앉아서 대화하는 장면도 꽤 길게 찍었고요. 사실 저는 테이크를 여러 번 가도 크게 압박을 느끼지는 않는 편이에요. 마치고 난 다음에야 ‘아, 오래 찍었구나’ 하고요. 일단 촬영이 시작되면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숨죽인 채 저한테만 집중하잖아요. 연기하면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고, 그때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전혀 알아챌 수가 없어요. 특히 촬영 감독님과 호흡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질 때 희열을 느껴요.

옥수분_ 미진이 영하와 살던 고시원을 나와서 지하철에 머무는 장면을 오래 촬영했어요. 그날 밤 한솔이가 제 걱정을 받아주느라 고생했죠. 저는 주변 상황에 예민한 편이라, 촬영이 길어질수록 부담도 커지거든요. 마땅히 의지할 데가 없으니 숙소에 돌아가서 한솔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죠.

권한솔_ 그때 수분 언니가 연기를 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갈수록 좋아져서 계속 찍었다”고 하더라고요. 감독님이 오케이 했을 때는 분명히 이유가 있는 거라며 다독였죠.

 

영하와 엄마가 마주앉아 대화하는 장면에 관해 좀 더 듣고 싶어요. 클라이맥스라고 할 장면인데, 어떤 부분에 집중하며 촬영했나요.

권한솔_ 원래는 영하가 그 장면에서 울었어요. 한 차례 촬영을 진행한 다음, 감독님이 다르게 해보자고 제안하시더라고요. 얼마나 테이크를 가는지도 모른 채 계속 저와 엄마에만 집중했어요. 감정을 폭발하지 않으면서도 같은 톤으로 유지해야 하니까요. 생각보다 눈물을 참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컷하고 모니터링 하면 울고, 촬영을 재개하면 다시 울음을 누르고 그랬어요. 기본적으로 호흡이 이어지는 대사였는데,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다 보니 기존에 연습했던 것보다 훨씬 끊어서 말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아직도 그 장면을 볼 때 제일 마음이 쓰이고 힘든 것 같아요.

<영하의 바람>

현장 분위기가 좋았다고 들었어요. 두 배우뿐만 아니라 은숙 역의 신동미 배우와 영진 역의 박종환 배우 모두 서로 의지하며 돈독해졌을 것 같아요.

권한솔_ 정말 화기애애했어요.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부산에서 매일 같이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레 가까워지더라고요. 엄마가 홀로 어두운 부엌에서 밥을 먹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때 신동미 선배님을 제외한 다른 배우들은 옆방에 있었어요. 휴대폰으로 재밌는 동영상을 보여주며 놀았죠. 처음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촬영을 시작한 줄도 모르고 웃고 떠든 거예요. (웃음) 정말 집중해서 찍어야 하는 중요한 신이었는데 말이에요. 옆방에서 누가 벽을 쿵쿵 치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일순 조용해졌어요.

옥수분_ 박종환 선배님도 되게 낯을 가리시는데,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특유의 유머러스함이 발휘되더라고요. 진지할 때는 한없이 진지하시고, 가벼울 때는 또 한없이 가벼우시고요. (웃음) 선배님들께서 먼저 긴장을 풀어주시려고 많이 노력하셨어요.

권한솔_ 신동미 선배님은 저희를 ‘귀요미’라고 부르셨어요. 정확히는 ‘요미요미귀요미들’이 풀네임이에요. (웃음) “요미요미귀요미들~ 여기서 뭐하고 있어? 밥은 먹었어?” 이렇게 인사를 건네시면, 옆에서 갑자기 종환 선배님이 “저는요?” 라며 받아치셨죠. (웃음)

옥수분_ 신동미 선배님 덕분에 새로운 취미가 생기기도 했어요. 촬영 마치는 날, 배우를 포함해서 모든 스태프에게 직접 만든 향수를 선물해주셨거든요. 아무리 독립영화라고 해도 전 스태프를 합하면 수십 명인데, 일일이 챙겨주시는 정성에 엄청 감동했어요. 저도 뭔가 만들기를 좋아해서 그때 일을 계기로 천연비누와 화장품 만드는 법을 배웠어요.

<영하의 바람>
<영하의 바람>

안 그래도 영화를 보며 영하와 미진의 취미가 궁금했어요. 집, 학교, 교회 밖에서 둘은 무얼 할까 싶어서요.

권한솔_ 영하는 뭔가 손으로 만들기를 좋아했을 것 같아요. 방에 사진을 붙여 두기도 하고 소박하게 꾸며 놓은 소품도 여러 개고요. 실제 저와는 거리가 멀지만, 아기자기하고 활발한 성격이었을 것 같아요.

옥수분_ 맞네, 과자 상자로 저금통도 만들고.

권한솔_ 고시원에 둘이 빨랫줄도 걸어놓잖아. (웃음)

옥수분_ 미진이도 혼자 시간을 보내는 상황에 익숙해서 이것저것 하며 지냈을 것 같아요. 영화에는 편집되었는데 15세 미진이 마트에서 장을 보는 장면이 있었어요. 할머니와 먹어야 하는 음식과 자기가 먹고 싶은 군것질 거리를 장바구니에 담아서 계산하려고 보니 돈이 부족한 거예요. 그때 자기 간식이 아니라 할머니와 먹을 음식을 빼거든요. 관계의 결핍에서 오는 적적함을 그렇게 풀었을 것 같더라고요.

 

두 분은 평소에 쉴 때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 편인가요. 왠지 만사가 무겁게 느껴질 때, 나 자신을 ‘깃털’처럼 만들어주는 일이 있나요.

권한솔_ 언니부터 이야기해. 수분 언니가 ‘취미부자’거든요. (웃음)

옥수분_ 아까 말한 천연화장품 만들기를 계속하고 있어요. 그때 만난 수강생 몇몇이 모여서 소모임을 꾸렸거든요. 제가 쓸 화장품을 직접 만들고, 고마운 사람에게 선물하기도 해요. 소모임 구성원이 되게 재밌어요. 20대부터 7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한데, 다들 언니 동생 하며 지내요. 제일 큰 언니가 ‘7학년 3반’이에요. (웃음) 집에서 모이니까 요리도 함께 해먹고요. 요즘 또 하나 배우고 싶은 건 수어예요. 얼마 전에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서 <왜냐하면 오늘 사랑니를 뽑았잖아요>(연출 루돌프 한, 2019)라는 작품을 봤는데, 수어가 나오더라고요. 찾아보니 생각보다 수강료도 저렴해서 조만간 배울 생각이에요.

옥수분 ⓒ김혜미

권한솔_ 저는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에요. 기분 좋을 때와 안 좋을 때로 취미가 나뉘기도 하고요. 우울할 때는 만화책을 보거나 하이틴 로맨스 영화를 찾아 봐요. 어떻게든 안 좋은 감정을 털어내려고요. 정말 스트레스가 심하다 싶을 때는 밖에 나가서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달리기도 하고요. 편안한 상태일 때는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고, 무엇보다 좋아하는 영화를 많이 보려고 해요.

 

어떤 영화를 좋아하나요.

옥수분_ 저는 집 앞 10분 거리에 영화관이 있어서 자주 가요. 개봉작뿐만 아니라, 단편영화를 꾸준히 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영화제도 찾아가는 편이고요. 되도록 GV에 참여해서 제작부터 연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해요.

권한솔_ 누군가 “너는 참 지독한 영화를 좋아하는구나”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버드 박스>(수잔 비에르, 2018)나 <그을린 사랑>(드니 빌뇌브, 2010)처럼 묵직한 영화를 좋아해요. <4개월, 3주… 그리고 2일>(크리스티안 문쥬, 2007)도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종환 선배님이 추천해줘서 알게 된 영화인데 너무 좋더라고요. <나, 다니엘 블레이크>(켄 로치, 2016)도 여러 번 봤어요. 특히 마지막 장면이 마음에 오래 남아요. 다니엘의 메시지를 이렇게 저장해서 다녀요. (권한솔은 휴대폰에서 메모장을 열어 보여주었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로 시작하는 긴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런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다는 뜻일까요.

권한솔_ 어떤 역할을 정해놓기보다는 폭넓은 장르에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이에요. 캐릭터는 배우 본인의 역량과 상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결국 연출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변화하고 확장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원테이크 촬영이라든지 페이크 다큐멘터리 같은 형식적 실험에 흥미를 느껴요.

옥수분_ 저는 아주 유쾌한 B급 무비를 해보고 싶어요. <병구>(연출 형슬우, 2015)에서 서현우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었어요. 트레일러만 봐도 웃기잖아요. 본인은 진지하고 심각한데, 바라보는 이들은 ‘빵’ 터지는 거죠. 여태까지 그런 코미디를 만들어낸 여성 배우는 없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권한솔_ 잘할 수 있을 거야. 언니가 지닌 수줍음이 돋보이는! (웃음)

권한솔 ⓒ김혜미

곧 공개를 앞둔 차기작이 있나요. 혹은 내년에 예정된 작업이 있다면요.

권한솔_ 내년 방영을 앞둔 넷플릭스 드라마 <인간수업>에서 처음으로 ‘불량한’ 청소년을 연기했어요. 욕을 엄청 많이 하는 캐릭터예요. 촬영 끝날 때쯤엔 욕으로 모든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입에 붙더라고요. (웃음)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에도 참여했는데, 그때 만든 단편 <유빙>(김혜진, 2019)이 곧 개막하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될 예정이에요.

옥수분_ 신정원 감독의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에 단역으로 참여했고, 문혜인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김호정 감독의 <고온다습>을 포함해서 총 세 편의 단편영화를 작업했어요. 내년에 하나씩 공개될 것 같아요.

 

2019년을 분주하게 보냈네요. 만족스러운 해였나요.

권한솔_ 계획한 바는 다 이루었어요. 원래 계획은 최소한으로 세우거든요. (웃음) 올해 회사도 생겼고, 영화와 드라마 작업도 꾸준히 이어갔어요. 이제 남은 겨울은 <영하의 바람>과 함께 보낼 것 같아요. 끝까지 바쁘게 뛰어보려고요.

옥수분_ 그러게요, 정신없이 1년이 지나갔어요. <영하의 바람>으로 시작해서 <영하의 바람>으로 끝나는 한 해예요. 올해 초 제25회 브졸국제아시아영화제에 다녀왔고, 지금은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고 있으니까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소중한 기억이 한가득 쌓인 것 같아요.

 

말 그대로 영하의 바람이 부는 계절에 개봉했어요. 추운 날, 이 영화를 만나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은 영하와 미진을 조금씩 닮지 않았을까 싶어요. 극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관객의 마음에 무엇이 남았으면 하나요.

옥수분_ 영하와 미진이 서로에게 힘이 된 것처럼, 영화가 관객에게 힘으로 남기를 바라요. 대단한 위로가 되기를 기대한다기보다는, 곁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에 기운을 얻으실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함께 겨울을 잘 보내자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권한솔_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감사함을 느껴요. 정말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멀리서 시간을 내어 찾아와주시는 거잖아요. 그분들이 한국영화의 미래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저희 영화를 보러 와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주신다는 면에서요.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할 때 처음에는 너무 긴장했는데,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계속 더 많은 걸 나누고 싶던데요. 관객들이 건네주신 모든 감상이 이 영화를 완성시켜준다고 말하고 싶어요.

옥수분 ⓒ김혜미
권한솔 ⓒ김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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