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리가 배우를 꿈꾼 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친구의 부탁으로 연극 일을 도왔는데,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를 보자 묘하게 두근거렸다. 나이도 젊은데 못할 거 없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연기는, 가족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진지한 꿈이 되었다. 원칙주의자라고 부를 법한 오빠는 윤혜리의 결정을 못 미더워했고, 결국 윤혜리는 향후 계획과 목표를 적은 A4용지를 들고 가족 앞에서 ‘발표’한 다음에야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이민영은 중학생 시절 <왕의 남자>(연출 이준익, 2005)에 푹 빠졌다. 연기를 보며 가슴이 절절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또한 누군가를 울리고 웃기고 싶었다. 꿈을 말하면 “네가?” 라는 반응이 돌아올까 봐 내색하지 않았는데, 고등학교 3학년 진학을 앞둔 겨울방학에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 몰래 연기학원을 찾아갔는데 레슨비가 너무 비쌌다. 결국 속내를 털어놓자, 결혼하고 일을 관두었던 엄마가 “너는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라며 ‘쿨하게’ 응원해주었다.
두 사람은 같은 해 같은 과에 나란히 입학했다. 연기를 배우기 위해 학교를 다시 들어온 윤혜리는 이민영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두 사람은 금세 친구가 되었다.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둘은 연기할 기회가 있으면 어디든 달려갔다. 졸업 사진을 찍고 학교를 떠나야 할 시점에 단편영화 오디션이 열렸다. 같은 작품 같은 배역을 놓고 선의의 경쟁을 펼쳤는데, 놀랍게도 두 사람 모두 합격이었다. 둘이 함께 출연한 <대자보>(연출 곽은미, 2017)는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선재상, 제38회 청룡영화상 단편영화상 등 그해 영화제에서 다수 수상했고, 윤혜리는 제15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단편의 얼굴상을 받았다. 3년이 지난 후, 학교 동기에서 동료 배우로 성장한 두 사람은 <대자보>를 다시 한 번 스크린에서 마주한다. 옴니버스 영화 <오늘, 우리>(2019)의 개봉이 얼마 남지 않은 날, 윤혜리와 이민영을 만났다.
<2박 3일>(연출 조은지, 2017), <5월 14일>(연출 부은주, 2018), <환불>(연출 송예진, 2018), <대자보>까지 총 네 편의 영화가 <오늘, 우리>라는 제목으로 묶였어요.
윤혜리_ 한 자리에서 네 편의 영화를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끝나고 나니 새삼 <오늘, 우리>라는 제목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 청년 모두가 이렇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사람이 공감할 이야기를 모아서 엮은 영화인 것 같아요.
이민영_ 옴니버스 영화를 보면 가끔 ‘왜 이 영화들을 한데 묶었지?’라고 의아할 때도 있는데, <오늘, 우리>는 크게 엇나가거나 튀는 면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느낌이었어요.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관객으로서 지켜보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꼭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더라도 친구나 가족 등 주변에서 겪었을 법한 상황과 감정이 담기잖아요. 네 편 모두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여성에만 한정 지을 수도 없는 이야기들이고요. 언니가 말한 것처럼 관객마다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며 공감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중 <대자보>는 마지막 상영작인데 쭉 이어보면서 어땠나요. 끝까지 마음 편하게 관람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아요.
윤혜리_ 개인적으로 세 번째 작품인 <환불>이 전체 구성에서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해요. 영화 속 인물이 전달하는 감정이 점차 고조되잖아요. <환불>에 이르니까 마음이 먹먹해지더라고요. 그 후에 <대자보>가 상영될 때는 아무래도 우리 영화이다 보니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기는 어려웠어요. ‘아, 이제 나오는구나!’ 싶으면서 긴장되더라고요. (웃음)
이민영_ 저는 오히려 이제야 영화 자체로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3년 전에는 제 연기에 신경 쓰느라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어려웠거든요. 오랜만에 다시 보는데 너무 좋은 작품이더라고요. (웃음) 저는 이 영화를 준비하고 만들었던 과정을 기억하잖아요. ‘어떻게 저런 영화가 나왔지?’ 하면서 뿌듯하기도 하고, 지난 시간이 약간 마법처럼 느껴졌어요.
<대자보>를 2017년 1월에 촬영했어요. 2018년까지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 및 수상했고 2019년에는 단편 옴니버스로 극장 개봉하는 드문 기회를 얻었어요. 촬영 당시 이렇게 오랫동안 호출받을 작품인 줄 알았나요.
이민영_ 그때는 영화제에 갈 줄도 몰랐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좋아해줄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작품에 확신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제가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하는 마음이 컸거든요. 민영이라는 캐릭터가 어렵고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어요. 당시에는 영화가 어떻게 될지 생각하기보다는 당장 내가 해야 할 연기에 굉장히 집중했던 기억이 나요.
윤혜리_ 호출이라는 단어가 되게 반갑네요. 촬영 당시 둘 다 학생이었고, 늘 해오던 학회 활동의 일환으로 <대자보>에 참여했어요. 민영이가 아까 마법 같다고 했잖아요? 돌이켜보면 정말 신기한 일이에요. 그때 우연히 곽은미 감독님을 만난 것도, 평소 친하게 지내던 민영이와 함께 캐스팅된 것도요. 좋은 사람들 덕분에 시너지를 낼 수 있던 것 같아요. 배우로서는 과거에 연기한 모습을 다시 마주하기가 부끄럽기도 한데, 이런 기회는 정말 드물고 소중하잖아요. 개봉까지 할 줄은 예상도 못 했지만, 곽은미 감독님이 가진 에너지를 생각하면 그럴 법한 결과라는 생각도 들고요.
성신여자대학교 미디어영상연기학과 제작지원작이에요. 어떻게 출발한 작품이고, 감독과 연결된 과정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윤혜리_ 연기에 욕심을 가진 친구들은 영상학회와 연극학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는데, 민영이랑 저도 마찬가지였죠. 방학 때도 학교에 나가서 연습하는 게 일상이었고, 심지어 <대자보>는 졸업을 코앞에 둔 시기에 참여했던 작품이에요. 사실 어느 때가 되면 후배에게 기회가 돌아가도록 선배들은 좀 빠져줘야 하잖아요.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그만큼 절박했어요. 워낙 연기할 곳이 없었으니까요.
이민영_ 처음에는 드라마 <청춘시대>(JTBC, 2016)를 연기하는 프로젝트로 시작했어요. 저희 학과에는 연기 전공자만 있다 보니 외부에서 감독님들을 초빙해왔는데, 이왕 할 거면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게 낫지 않느냐고 제안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총 단편영화 세 편을 제작하기로 했고, 학생들은 각각 두 작품에 오디션을 볼 수 있었어요. 시나리오가 완성되기 전이었지만 <대자보>에 마음이 갔어요. 감독님을 보자마자 왠지 모르게 ‘영화 잘 만드실 것 같다’는 느낌이 왔거든요. (웃음) 사실 오디션에서는 혜리 역에 지원했어요. 진중하게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모습이 멋있더라고요. 오디션을 보고 나서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혜리보다는 극 중 민영처럼 좀 더 유쾌하고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에 어울릴 것 같다고 하셨어요. 아쉬운 마음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윤혜리_ 저도 감독님한테 반했던 것 같아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서로 인사를 나눈 다음에, 감독님이 곧바로 “저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꺼냈어요.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기 소개하는, 정말 평범하고 조촐한 자리였거든요. 그때 카리스마라고 해야 할까요, 감독님만의 무게감이 느껴지면서 아주 강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영화를 만들지 궁금하더라고요. 감독님에게 놀랐던 순간이 또 있어요. 오디션을 마치고 나서 얼마 후에 과거 연출작을 보여주셨어요. 배우들은 애써 연기를 준비하고 보여줬는데,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기만 하는 건 수평적이지 않다면서요.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대우가 흔치 않거든요.
이민영_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배려하고 눈높이를 맞춰 주셨어요. 지금도 변함없고요.
극 중 혜리와 민영은 다른 온도를 지닌 인물들이죠. 교수로부터 고소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도, 평소 둘은 닮아서 죽이 맞기보다는 달라서 의지할 수 있는 친구였을 거 같아요. 각자 캐릭터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듣고 싶어요.
윤혜리_ 거대한 권력과 싸우는 혜리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제일 중요한 감정은 두려움이라고 생각했어요. 올곧고 담대하면서도 “무서워”라고 고백하는 순간에는 누구보다 연약해 보이기를 바랐고요. 혜리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계속 쌓아가는 인물이잖아요. 불안, 공포, 분노 같은 다양한 감정을 밀도 있게 표현해내지 못할까 봐 걱정이 컸어요. 자칫 잘못하면 관객이 평면적으로 느끼는 캐릭터가 될 것 같았거든요. 준비할 때는 물론이고 촬영하면서도 안심할 수가 없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런 불안과 긴장이 연기에 도움을 주지 않았나 싶어요.
이민영_ 혜리가 물이라면 저는 소금이죠. 국을 끓일 때 싱거우면 소금을 넣고 짜면 물을 넣잖아요. 둘은 서로 달라서 더 이해할 수 있고 의지가 되는 친구 같아요. 혜리가 의견을 모아내고 이끌어간다면, 민영은 옆에서 그런 혜리를 챙기고 받쳐주는 역할이에요. 끈끈한 관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어떻게 해야 민영이 지닌 밝은 에너지를 위화감 없이 보여줄지 고민했어요. 저도 민영처럼 유머러스한 면이 있고 장난을 치는 것도 좋아해요. 근데 민영의 유쾌함은 또 다른 종류거든요. (웃음) 고민하다가 영화에 등장하는 대자보를 직접 썼어요. 혜리와 민영의 차이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민영이 어떤 인물인지 드러나는 장면이잖아요. 혜리가 정석대로 논리 정연한 대자보를 쓴다면, 민영은 살짝 장난스럽고 농담 섞인 글을 쓰지 않을까 싶었어요. 마침 <응답하라 1988>(tvN, 2016)을 재밌게 본 때라 노래를 개사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라는 가사를 “그대여, 비리 저지르지 말아요”로 바꾸었죠. (웃음)
윤혜리_ 민영이가 정말 열심이었어요. 다른 곡을 개사하기도 했고, 노래뿐만 아니라 랩을 준비하기도 했어요.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다시금 민영에게 놀랐어요. 무거운 분위기를 뚫고 나오면서도 주된 정서를 흩트리지 않아야 하는 어려운 연기인데 정말 잘하더라고요.
이민영_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만들었어요. 또다시 그때처럼 열정을 갖고 열심히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온 에너지를 쏟았기 때문에 좀 더 많은 분이 예쁘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 영화에 제가 낸 아이디어가 반영되니까 기분이 되게 좋더라고요. 한몫을 해낸 것만 같고요.
윤혜리_ 한몫이라니 두 몫은 했지.
이민영_ 두 몫? 두목님? (웃음)
윤혜리_ 저희 이런 개그 좋아해요. 여기서 세 몫까지 가면 멈춰줘야죠. (웃음)
4:3 화면 비율, 흑백, 핸드헬드, 원테이크 등 기법적 특징이 뚜렷한 작품이에요. 이러한 영화적 선택이 연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윤혜리_ 화면 비율과 흑백은 나중에 결정되었고, 핸드헬드와 원테이크는 이미 결정된 콘셉트였어요. 원테이크로 촬영하다 보니 부담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원래 연극을 해온 터라 익숙하기도 했어요. 연극을 하듯 호흡을 이어가는데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점이 달랐죠.
이민영_ 나는 완전 반대. 압박감 엄청났는데?
윤혜리_ 진짜? 네가 내 몫까지 다 느꼈네. 저는 그야말로 풋내기라 압박도 없었나 봐요. 슬램덩크 강백호가 된 것처럼 실수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 나는 너무 즐겁다!’ 이런 상태였죠. 말해놓고 보니 진짜 풋내기의 패기네. (웃음)
이민영_ 물론 즐겁기도 했어요. 기승전결을 쭉 이어서 보여주니까 모든 게 맞아떨어지면 짜릿했고요. 반대로 한순간에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너무 많은 거예요. 시선, 동작, 호흡, 카메라 동선, 감정 등 하나도 놓칠 수가 없으니까 중압감이 상당했죠.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 회차인 상황이잖아요. 정말 민폐 끼치지 말자, 누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컸어요.
윤혜리_ 맞아. 아침부터 시작해서 해가 지기 전까지 무조건 촬영을 완료해야 했어요. 감독님과 촬영감독님이 괜찮다고 격려해주시긴 했지만, 15분을 잘해내도 엔딩에서 삐끗하면 다시 돌아가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죠. 카메라 연기는 약속한 바를 정확히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어요. 예를 들어 혜리가 종이를 본다고 하면 몇 초 동안 어떤 각도로 볼지 미리 정해두잖아요. 낯선 경험이라 초반에는 그 약속을 잊는 바람에 NG가 나기도 했어요.
이민영_ 약속이라는 말이 정확한 것 같아요. 단지 대사뿐만 아니라 감독, 촬영감독, 상대 배우 등 현장에 있는 모두와 약속한 내용을 기억하고 따라야 했어요. 한편으로는 핸드헬드 촬영이다 보니, 카메라가 어디서 어떻게 들어오는지 눈에 보이잖아요. 감독님이 다가오는 타이밍에 맞춰 애드리브를 추가하기도 했어요. 영화에서 민영이 귤을 먹는데, 미리 껍질을 까놓았다가 카메라 왔을 때 ‘이때다!’ 하고 먹었죠. (웃음)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보니 문득 ‘출석요구서를 받은 사람이 혜리가 아니라 민영이라면?’ 하는 상상을 하게 되더라고요. 연기한 입장에서는 어떤 그림이 그려지나요.
윤혜리_ 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에요. 넌 어땠을 것 같니?
이민영_ 민영이는 거의 오두방정을 떨지 않았을까. 혜리는 숨기려고 하잖아요. 최대한 의연하게 대응하기 위해 애쓰고요. 근데 민영이는 “미쳤어, 어떡해, 큰일 났어!”라면서 곧장 동아리방으로 뛰어가는 거죠.
윤혜리_ 맞아요, 민영이라면 주변에 도움을 청했을 것 같아요. 사실 그게 중요하잖아요.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속으로 끙끙대기보다는 주변에 알리고 같이 힘을 모아서 풀어가는 게 지혜로운 대처인데 혜리는 그걸 어려워하죠.
이민영_ 지혜가 부족했네. (웃음)
윤혜리_ 그래, 민영이가 대단하네. (웃음)
이민영_ 민영이도 처음 겪는 상황이니까 속은 좌불안석이겠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사방팔방 돌아다닐 것 같아요. 일단 너무 열 받는 일이기도 하고요. 어쩌면 동아리방에 갈 때까지 안 기다렸을 수도 있어. 바로 ‘단카방’ 열어서 출석요구서 공유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투표 올리고 그랬을 가능성이 높지. “혜리야, 네가 이런 거 잘하잖아. 나 어떡해야 돼? 얘들아, 법조계에 아는 사람 없니?” 이러면서. (웃음)
윤혜리_ 리더십이 있다.
이민영_ 누구? 나?
윤혜리_ 아니, 그 민영이. (웃음) 한편으로는 좀 치사하고 이기적인 생각도 드네요. 고소당한 사람이 민영이라면 과연 혜리는 지금만큼 고민하고 불안에 떨었을까 싶어요. 물론 민영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함께 헤쳐 나가자고 다독일 거예요. 다만 본인에게 벌어진 일을 대할 때처럼 모든 것이 무섭고 어렵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이긴 한데, 상상해보니 정말 영화의 분위기나 국면이 달라지겠네요.
<대자보> 전후(<올스타> <안부>)에도 여러 차례 함께 연기했어요. <대자보>를 준비할 당시에는 서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나요.
윤혜리_ 음… 어떤 대화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기보다는 서로 배려하며 작업한 매 순간이 고맙고 즐거웠어요. 근데 자주 물어봤죠. “불편해, 혹시?” 저도 민영이도 누군가와 연기할 때 항상 하는 질문이에요.
이민영_ 사실 그동안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긴 했지만, <대자보>처럼 가깝게 호흡하며 연기한 적은 없었거든요. 언니랑 같은 무대에 오르거나 한 촬영장에 있을 때도 이상하게 마주치질 않는 거예요.
윤혜리_ 맞아요, <대자보>는 생소한 경험이었어요. ‘드디어 민영이랑 대사로 대화를 나눠보는구나!’ 하면서 설렜을 정도로요.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데도 현장에서 함께 연기하다 보니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더라고요. 이 친구는 이렇게 연기하는구나, 이런 배우였구나, 싶어서요.
이민영_ 시간이 흐르면서 미화된 걸 수도 있는데 저한테 언니는 워낙 편한 사람이잖아요. 현장에서 대화하거나 연기할 때 적응하기가 한결 수월하더라고요. 그런 든든한 기분은 아무래도 다른 현장에서 느끼기는 어렵겠죠.
윤혜리_ 동감해요. 민영이 덕분에 혜리라는 캐릭터를 완성할 수 있던 것 같아요. 계산하고 꾸민 목소리가 아니라, 평소에 “야, 밥 먹자” 하듯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톤이 그대로 영화에 담겼거든요. 최근에 <안부>(연출 진성문, 2019)라는 작품을 같이 찍었는데, 현장에 민영이가 도착하는 순간 ‘역시 친구는 친구인가?’ 싶을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실은 <대자보> 이후로 영화 작업을 거듭하면서 최근에는 무게감을 많이 느끼거든요. 강백호처럼 달려들던 풋내기는 어디로 가고 말이에요. (웃음)
이민영_ 오랜만에 같은 현장에서 만난 작품이에요. 사라진 친구의 행방을 수소문하다가 경찰서에 온 주영(윤혜리)에게 경찰인 은경(이민영)이 도움을 건네요. 사전 리딩할 때 쑥스럽고 민망한 나머지 웃음을 참지 못했어요. 처음 만나는 사이를 연기해야 하니까요. 친구라서 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집중하기 더 어려운 면도 있죠.
윤혜리_ 리딩 마치고 나서 진지하게 “우리 현장에 가서는 이러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윤혜리 배우는 최근 <계절과 계절 사이>(연출 김준식, 2018), <아무도 없는 곳>(연출 김종관, 2019) 등 장편 작업을 이어 왔어요. 조금 전에 말한 무게감과 관련이 있을까요.
윤혜리_ 사실 연기하면서 마냥 편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일이니까 그만큼 책임감 있는 태도로 임해야죠. 물론 좋은 연기가 제일 중요하지만, 촬영을 마쳤다고 일이 끝나는 것도 아니에요. 배우 역시 영화의 결실을 고민해나가는 구성원 중 한 명이니까요. 배우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마땅히 껴안아야 할 무게감인 것 같아요.
배우로서 중요한 시기를 거치는 중인 것 같아요. 근래 연기하면서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 있다면요.
윤혜리_ 자기비하나 혹은 투정처럼 들릴 수 있는데, 저는 제 연기를 보면 항상 아쉬움을 느껴요.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기준이 높기 때문이더라고요. 연기 영역에서 저는 배우라는 행위자인 동시에 타인의 연기를 감상하는 관객이기도 하잖아요.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눈을 돌려보면 좋은 작품과 배우들은 너무나 많고요. 어느 순간 저 자신에게 묻는 거죠. ‘너 지금처럼 연기해서 저런 훌륭한 배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니?’ 라고요. <대자보>를 기점으로 계속해서 고민하는 것 중 하나는 거리를 좁히는 일이에요.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 즉 내가 연기하고자 하는 인물과 나라는 배우가 실제로 표현해낼 수 있는 인물 사이의 거리를 최대한 좁히려고 해요.
작년에 한 영화제에서 <대자보>와 <첫 외출>(연출 김혁, 2018)이 동시에 상영된 적이 있어요. 그때 이민영 배우를 보고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나요. <첫 외출>에서는 FTM 트랜스젠더 역할이었는데, 같은 배우가 아니라고 느껴질 만큼 얼굴과 분위기가 달리 보이더라고요.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나요.
이민영_ <첫 외출>의 진수도, <대자보>의 민영도 결국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특이하고 불편하고 이상한 존재가 아니잖아요. 관객들이 영화를 통해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다는 걸 배우고 느끼기를 바랐어요. 온전히 진심을 전달할 방법에 관해서는 끊임없이 고민해야겠지만, 제가 지키려고 하는 원칙 중 하나는 가급적 정확한 정보에 근거해야 한다는 거예요. 진심은커녕 그전에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최대한 오류나 실수를 줄이도록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하는 편이에요. <대자보>의 경우, 실제 대학에서 학생들이 목소리를 낸 사례를 여러 차례 조사하며 공부했어요.
윤혜리_ 책임감이 정말 큰 친구예요.
이민영_ 성실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책임감은 있는 것 같아요. (웃음)
두 배우의 대학 시절은 어땠는지 궁금한데, 친해진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이민영_ 처음부터 언니가 많이 챙겨줬어요. 그때 아직 서울에 집을 구하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학교에 일이 생기면 청주에서 서울까지 갔거든요. 먼 길을 오가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언니가 집에 불러서 밥을 해주더라고요.
윤혜리_ 이건 제가 좀 더 재밌게 말할 수 있어요. (웃음) 그때 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이었어요. 민영이가 말한 일이라는 게 신입생 오리엔테이션과 장기자랑 준비였어요. 학교에서 딱히 강요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자율적으로 참여 의사를 결정했어요. 저는 학교 근처에 사는데도 참석하지 않았어요. 춤을 못 추니까 장기자랑은 안 하겠다고 했죠. 근데 민영이는 학교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싫은 내색 없이 모든 불편을 감수하는 거예요. 학점이나 어떤 이익과도 관련 없는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어요. 아까 말했듯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고 느꼈죠.
이민영_ 요즘 보기 드문 청년일세, 같은 건가. (웃음)
윤혜리_ 그렇지. ‘집밥’을 먹이고 싶더라고요. 친해지고 난 다음에는 연기에 관해서도 많이 이야기했고요.
이민영_ 제가 서울에 올라오면서부터는 집이 가까워져서 자주 만났죠. 둘 다 장난치며 놀기를 좋아하고, 관심사가 같다 보니 말도 잘 통하고요.
서로에게 어떤 친구인지, 또 배우로서는 어떤 매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듣고 싶어지네요.
윤혜리_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친구예요. 졸업식 날에 민영이가 사라져서 어디 갔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성적우수장학생으로 선발되어서 졸업식이 열리는 행사장에 다녀왔다는 거예요. 무척 명예롭고 기쁜 일이잖아요. 자랑하고 우쭐댈 법도 한데, 평소처럼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로 얘기하더라고요. 연기뿐만 아니라 매사에 성실하게 노력하는 모습이 참 멋져 보여요. 친구로서도 참 꾸준히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고요. 서로 죽고 못 사는 단짝이라기보다는 친하면서도 늘 일정한 거리를 갖는 사이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부분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반면에 아주 천진난만하고 엉뚱한 구석도 있어요. 특히 연기할 때는 굉장히 과감하고 용기 있는 배우예요. 저는 대개 더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거든요. 감정이든 동작이든 지금보다 좀 더 크게 나와야 한다고요. 민영이는 망설이거나 주눅 들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연기를 시도해요. 그만큼 자기 자신을 믿고 주관이 뚜렷하다는 의미겠지요.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용기를 내기가 어렵잖아요.
이민영_ 저에게 혜리 언니는 배우이기 전에 아주 든든한 친구죠. 언니는 저한테 착하다고 해주는데, 사실 제가 마음 넓은 사람은 아니거든요. (웃음) 언니랑 같이 연극을 준비하다가 다툰 적도 많아요. 근데 싸움 때문에 언니와 멀어지지는 않더라고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참 저를 아껴주고 보듬어줘요. 아까 언니가 왜 거리감이라고 말했는지도 알 것 같아요. 제가 평소에 애정 표현을 어려워하는데, 그것마저 이해해주고 먼저 다가와 줘서 고마워요. (웃음) 배우로서는 정말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이 언니의 그런 빛나는 면을 알아주기를 바라요. 개성이 뚜렷해서 어떤 옷을 입어도 자기만의 스타일로 잘 소화해낼 배우예요. 함께 작업하면서는 같이 일하고 싶은 동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신이 더 돋보이고 싶은 순간도 있을 텐데, 항상 상대가 불편하지는 않을지 배려하고 챙기는 모습에 감동했어요. 앞으로도 잘 버텨냈으면 좋겠어요.
공개를 앞둔 작품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려요.
윤혜리_ 올해 여름에 촬영한 웹드라마 <식물 생활>(연출 백승화, 2019)이 차차 공개될 예정이에요. 오늘 이야기 나왔던 <안부>와 함께 <상주>(연출 차정윤, 2019)라는 작품에도 출연했는데, 곧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되니까 놀러 오셔서 봐주시면 좋겠어요.
이민영_ 저는 11월 7일 개막하는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에서 두 작품을 상영해요. 제목은 <교환학생>(연출 조현준, 2019)과 <연애편지>(연출 위정연, 김하영, 박예지, 2019)고요, 영화제 오며 가며 인사 나눌 수 있기를 바랄게요.
<오늘, 우리>를 개봉하고 나면 곧 연말에 접어드네요. 한 해를 마무리하는, 혹은 새해를 준비하는 계획이 있나요.
윤혜리_ 언젠가부터 계획을 안 세워요. 계획한 대로 인생이 흘러가지도 않고, 사실 그 계획이란 게 뒤틀리는 순간 큰일이 생기는 거잖아요. 올해도 무사히, 평범하게 지나가기를 바라는 정도예요. 다만 요즘은 저 자신을 좀 더 집중해서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어떻게 하면 일과 일상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데, 일단 몸이 건강해야겠더라고요. (웃음) 최근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한 시간씩 요가를 해요. 한 번 넘어져 보니까 진짜 좋은 운동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보통 넘어질 때 균형을 잃으면서 크게 다치잖아요. 요가를 하고 나서는 몸이 가진 힘을 이전보다 잘 다스릴 수 있더라고요. 청소할 때도 좋아요. 손이나 발이 닿지 않던 곳까지 수월하게 쓸고 닦아요. (웃음)
이민영_ 저는 연말 계획이라기보다 인생 계획을 잡는 시기인데, 언니와 비슷한 것 같아요. 내가 어디에 흔들리지 않고 내 삶을 잘 이끌어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에, 지금 마음이 어떤지 보려고 해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책이 참 도움이 되더라고요. 자존감과 자신감을 키워나가는 것이 일에도 삶에도 중요한 것 같아요. 가장 최근에 본 책은 『에너지 버스』(존 고든, 2008)인데, 삶의 주도권을 잡고 자기 길을 가라는 내용이에요. 내 인생의 운전대를 쥔 사람은 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