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숨쉬기
BIFF 2019 <에듀케이션> 문혜인
글 차한비 사진 김혜미 / Feature / 2019-10-25

높고 큰 웃음과 가다듬은 말투 사이에는 괴리가 컸다. 다만, 어느 쪽이든 존재감을 또렷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효과는 같았다. 문혜인은 웃을 때 웃는다고, 말할 때 말한다고 확실히 표현했다. 와하하 하는 시원한 웃음소리와 차분히 읊조리는 문장은 금세 독특하고 기묘한 멜로디로 어우러졌다. 사실, 문혜인이 연기해온 인물들도 대개 중간이랄 게 없었다. 흥미로운 건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그들을 저밖에 모른다거나 피곤한 성격이라고 쉽게 내칠 수 없다는 점이다. 외려 우리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들의 안녕을 기원하지 않았던가. 냉기와 열기가 뒤섞여 일렁이는 표정, 문혜인은 세상을 원망하는 한편 세상에 가닿으려는 그들의 발버둥을 관객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아시아단편경선 최우수상을 받은 <나가요: ながよ>(차정윤, 2016)로 이름을 알린 문혜인은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자신의 첫 번째 장편 <에듀케이션>(김덕중, 2019)으로 동료 김준형과 함께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다. 영화제 폐막 후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서울에서 문혜인을 만났다. 양팔에 주렁주렁 짐을 매달고 왔지만 힘든 내색 하나 없었다. 오래 되새긴 문장과 확신을 품은 태도, 대화 내내 그가 보여준 면모를 생생히 전할 방도는 없을까 고민하다 격의 없이 나눈 이야기를 독백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내 이름은 문혜인. 어릴 적 친구들은 ‘무네’ 라고 줄여 불렀는데, 나는 요즘 이름 앞에 ‘숲’을 덧붙인다. 숲, 혜인. 이어서 발음하면 스페인으로 들리기도 한다. 한때는 스페인에 가고 싶었다. <에듀케이션>의 성희처럼 혼자서 스페인어를 공부했다. 왜 그렇게 스페인에 가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성희는 이렇게 답한다. “숨 좀 쉬고 살려고요.” 당장 쓸 일도 없는 언어를 익히며 먼 나라를 그리워하는 시간은 ‘현실 도피’라고 부를 법했지만, 성희와 마찬가지로 그때 나는 절박했다. 온전히 나로서 호흡하기, 부끄러움도 미련도 없이 삶에 충실한 길을 찾아내고 싶었다. 대학에서 전공한 미술사학도 흥미로웠지만 극회 활동을 통해 느꼈던 해방감과 재미에 자꾸 마음이 갔다. 나는 밖에서 예술을 다루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 안으로 뛰어들어 직접 표현하고 싶은 걸까.

질문에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채 학교를 졸업했고, 소속이 사라지자 막막함이 불어났다. 미래를 준비하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람들 틈에서 홀로 뿌연 시간에 갇힌 듯했다. 뭔가를 선택하기엔 두려웠고, 두려움을 딛고 서기엔 우울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날 밤, 아주 무서운 꿈을 꾸었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이불 위에서 눈을 떴을 때 ‘이렇게 누워서 죽음을 곱씹을 바에야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자’는 마음이 생겨났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눈앞에 서서히 푸르고 넓은 숲이 펼쳐졌다. 수많은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듯, 모든 나뭇잎이 제각기 다른 모양이듯 내가 마주한 세계는 다채로웠다. 햇빛과 바람에 따라 풍경이 달라졌고, 기대하지 않던 무언가가 새로 태어나기도 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그동안 발견하고 만들고 가꿔온 숲에 관한 이야기를.

ⓒ김혜미

비전문 배우 전문 

데뷔작을 물어보면 <나가요: ながよ> 라고 답한다. 처음으로 외부에 공개되며 배우로서 피드백을 받은 작품이다. 무엇보다 함께 영화를 만드는 마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운 작품이기에 애정이 간다. 좋은 동료와 깊은 감정을 공유한 경험은 지금까지도 기준처럼 남아 있고, 차정윤 감독과는 속내를 터놓고 의지하는 친구가 됐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수상할 때, 심사위원은 작품을 오해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근거로 시선을 꼽았다. 주인공 다현은 래퍼를 꿈꾸며 생계를 위해 룸살롱에서 일하는 20대 여성이다.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다현의 의지를 누군가는 치기라고 부를 테고 누군가는 치열하다고 하겠지만, 적어도 그를 다 아는 척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심사위원은 작품에서 다현을 대하는 애정 어린 시선이 느껴진다고 했다. 결국 연기의 잘함과 못함, 영화의 좋음과 나쁨은 외부의 평가로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나와 우리 몫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전부 보여주지 않아도 관객은 듣고 느낀다. 영화는 그토록 정직하다.

그 무렵 <한낮의 우리>(연출 김혜진, 2016)와 <혜영>(연출 김용삼, 2016) 등 단편을 연이어 작업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비전문 배우인 줄 알았다”는 평이었다. <나가요: 기나긴 밤>에서는 래퍼를 데려와 연기시킨 거 아니냐고, <한낮의 우리>에서는 진짜 대구에 사는 나레이터 모델 같다고, <혜영>에서는 배우로 출연한 김용삼 감독과 실제로 오랜 연인일 거라 짐작했다며 놀라워했다. 동료들 사이에서 ‘비전문 전문 배우’라는 농담이 퍼질 정도였는데, 나로서는 기분 좋은 칭찬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연기했을 때 들은 말이기에 더 뜻깊게 다가왔다. 영화는 스쳐 지나가는 삶의 한 장면을 가만히 응시하도록 만든다. 그때 내가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존재로 다가갔다면 기쁜 일이다. <한낮의 우리>로 제43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독립스타상을 받았고, 배우라는 자리가 조금 더 묵직하게 느껴졌다. 내가 인물을 이해하고 껴안는 만큼 관객에게 전해진다는 걸 목격하자 책임감이 커졌다.

<나가요: ながよ>
<한낮의 우리>
<혜영>
<증언>

무심과 책임

책임감은 때로 자책을 불러온다. 촬영을 마치면 늘 아쉬움이 남는다. 충분히 집중하지 못했거나 망설였던 순간 또한 지워지지 않고 영화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책임감이 강한 건 타고난 성격이지만, 내가 연기하는 인물 덕분에 길러온 태도이기도 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동안 맡은 캐릭터는 언뜻 책임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못되고 못나게 비치는 인물이 대부분이었다. 스스럼없이 무책임하고 이기적일 정도로 무심한 사람들. 하지만 그게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이면을 배우로서 설득해내고 싶었고 그래야만 했다. 그들이 외면당하지 않기를, 잠시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또 다른 삶으로 존재하기를 바랐다. 그러다 보면 냉소에 가려진 불안과 안간힘을 쓰며 지켜낸 자존심이 눈에 들어왔다.

배우가 아닌 인간 문혜인으로서는 오히려 다정한 쪽에 가깝다. 평소 나를 챙기기보다는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인데, 연기할 때는 굳이 상냥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 놓이기에 묘한 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실제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다 보니 좀 더 내키는 대로, 나와는 전혀 다른 인물의 모습대로 행동하는 순간을 즐기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연기한 인물과 나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연기는 이인삼각 달리기처럼 나와 극 중 인물이 발맞추어 나가는 과정이다. 때로는 내가 그를, 때로는 그가 나를 이끌고 부축하며 앞을 향해 나아간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원하고 좋아한다. 그 마음이 무척이나 커다랗기에 쉽게 놓아버리지 않고, 겉으로는 냉정을 내세운다고 해도 별 수 없이 뜨거움이 새어나온다.

<한낮의 우리>에서 진주가 간직한 유일한 희망은 프랑스 여행이다. 돈을 벌기 위해 꿈을 미뤄둔 채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고 광고 인형 옆에서 춤을 추지만, 속으로는 프랑스에서 자유롭게 사는 거리 예술가를 동경한다. 무능력한 아버지와 시도 때도 없이 사고를 치는 동생은 진주의 오랜 짐이다. 진주가 내뱉는 가시 돋친 말에는 원망과 억울함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하지만 싸늘한 표정을 한 꺼풀 걷어내면 현실의 무게를 버텨내려는 뜨거운 의지가 드러난다. 그런 인물들에게 마음이 간다. 연기는 나를 건드리는 작업이다. 나 자신을 더 세밀하게 관찰하도록 부추기고, 내가 모르거나 외면해온 존재를 직면하게 만든다. 영화에 앞서 삶이 있다고 믿기에 내 삶을 잘 꾸려나가고 싶고, 연기에서도 나와 맞닿는 지점을 계속해서 찾아 나가려고 한다. 내 기준을 지키며 작업할 때 책임감은 자책이 아닌 자긍으로 돌아온다.

ⓒ김혜미
ⓒ김혜미

뜻밖의 말걸기

김덕중 감독에게 <에듀케이션> 캐스팅 제안을 받은 것은 2018년 3월이었다. 8월 말부터 9월까지 진행된 촬영 시기를 고려하면 제법 이른 연락이었다. 초고에 가까운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머릿속에 직관적으로 이미지가 떠올랐다. 물이 자박한 어항에서 뻐끔거리는 금붕어와 거의 비었다 싶을 정도로 물이 조금밖에 남지 않은 생수통이었다. 어느 쪽이든 버겁고 숨이 가쁘다는 느낌이었다. 많은 대사 중에서 “숨 좀 쉬고 살려고 한다”는 말은 성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심을 표현하는 순간처럼 다가왔다. 다른 말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속마음을 감추고 에둘러 전하는 것이었다. 숨 좀 쉬고 살자는 대사가 내 귀에는 숨만 쉬고 살기에도 힘들다는 고백으로 들렸다.

성희는 과정에 놓인 사람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 채 현실을 통과해 나간다. 현목(김준형)과의 만남은 그 과정에서 성희의 한 구간을 조각해주는 시간이다. 나 역시 과거에 비슷한 과정을 거쳤음을,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지 못하고 고립된 상태에서 허우적댔던 모습을 기억해냈다. 극영화이지만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킬 정도로 현실적인 디테일이 풍부한 영화였다. 내가 지향하는 연기를 시도해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판단이 섰다. 장애인 활동지원사라는 역할에도 마음이 갔다. 몇 해 전 극단에서 장애인과 연기한 경험이 있기에, 장애인이 등장하는 영화가 세상에 나올 때 조금 더 좋은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했다. 가능한 한 힘을 보태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증언>(연출 우경희, 2018)은 미투 운동 이전에 완성한 작품인데, 촬영 당시에는 극 중 혜인과 내가 아주 다른 사람이라고 여겼다. 계약만료로 해고된 혜인은 경력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퇴사한 직장을 방문한다. 그때 평소 친하게 지내지도 않던 오 대리(한해인)가 다가와 직장 내 성추행을 증언해달라고 부탁한다. 혜인은 어렵겠다며 피하다가 긴 고민 끝에야 그의 편에 선다. 인물을 이해하려는 노력과는 별개로, 나는 자신을 혜인보다 훨씬 강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일이 내게 벌어진다면 혜인처럼 주저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다. 이후 미투 운동을 통해 수많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복잡하고 거대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뚫고 나오는 목소리를 마주하며 부끄러웠다. 나는 다르다고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은 아닐지, 나약한 면을 지닌 인물을 포용하기보다는 미리 단정했던 것은 아닐지 반성했다.

그런 면에서 <에듀케이션>의 성희를 잘 껴안아 보고 싶었다. 그의 약하고 못난 부분을 받아들이고 마주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물론 두렵기도 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단편영화에 출연하며 짧은 호흡에 익숙해진 차였다. 장편이라는 경험해보지 않은 세계에 호기심과 욕구가 일었지만, 내가 과연 긴 시간 동안 중심에 서서 관객의 시선을 붙잡을 만한 배우인가 하는 걱정도 한구석에 있었다. 호흡이 길어질수록 사전에 준비하고 계획한 연기 외에 의도하지 않은 모습이 담기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배우가 화면에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얼마나 매력적이고 힘을 실을 수 있는 배우인지 확인해야 할 순간이었다.

<에듀케이션>
<에듀케이션>
<에듀케이션>

여름 산책, 가을 여행 

올해 양주로 이사를 했다. 그저 서울을 떠나왔을 뿐인데 일상을 구획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서울에서는 한 번에 서너 개씩 일을 처리했다면, 양주에서는 하루에 딱 하나씩이다.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는 일조차 마음먹고 나서야 하는 먼 길이 된 까닭이다. 서울에 도착하기까지 두어 시간쯤 걸리다 보니 오히려 앞뒤로 시간을 넉넉히 잡는다. 이전보다 여유롭고 단순하게 시간이 흐른다. 대신 걷는 일이 많아졌다. 여름에는 낯선 동네 이곳저곳을 한참 돌아다니곤 했다. 잎사귀가 무성하게 자라는 풍경을 바라보며 햇볕에 검게 그을릴 때까지 걸었다. 선명한 녹색이 습기를 내뿜었고 가끔은 더운 바람이 지나갔다. 

작년 여름에는 조용히 산책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사생활이 없었다. 집과 연습실과 카페를 오가며 오직 성희에게 몰두했다. 이따금 엄마가 안부를 물으면 괜찮다는 응답을 돌려주었다. 내가 가장 자주 하는 연기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는 내 작품을 최다 관람한 관객이자 제일 열정적인 팬이다. 걱정을 덜어주고 싶어서 우리는 서로에게 가능한 한 든든해지려고 노력한다. 어릴 적엔 엄마가 거실로 불러내어 ‘주말의 명화’를 보여주곤 했다. 내가 출연한 작품을 상영하지 않을 때도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할 정도로 영화를 좋아한다. 엄마는 내가 배우가 되리란 걸 알았을까. 처음 연기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는 취미로 즐기면 안 되겠냐고 말렸지만, 막상 시작한 다음부터는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올해 부산에 초대했을 때도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에듀케이션>을 보고 나서는 지하철에 탄 성희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 아이 참 고단하게 살아가는구나 싶더라.” 수그린 고개와 축 늘어진 어깨, 엄마는 그런 걸 마음에 두는 사람이다.

나는 완성된 영화를 보고 놀랐다. 함께 만들었는데도 첫인상은 생경했다. 설명적이라고 부를 만한 장면이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이지만, 다시 봐도 <에듀케이션>은 이상한 영화였다.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잔잔하지만 강렬하다. 각박한 시대에서 자기 몫의 삶을 살아가는 데 급급한 우리가 타인에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지 질문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최종 버전은 성희와 현목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지만, 애초 시나리오에서는 성희가 더 많은 사람을 만났다. 특히 지방에서 올라온 사촌 동생과의 만남은 개인적으로 애정을 품었던 장면이라 편집된 것이 못내 아쉽다. 사촌 동생은 서울에 위치한 학원에 다니기 위해 그나마 서울 근처에 사는 유일한 친척인 성희를 찾아온다. 성희는 그 여자애를 보며 난처함과 연민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소설가 김애란의 단편 「서른」에 나온 어느 한 구절이 떠올랐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남들처럼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두 인물이 겹쳐 보였다.

사실 촬영을 마치고 꽤 힘든 시간을 보냈다. 엔딩을 촬영할 때 사고가 발생했고 상처는 외상뿐만 아니라 내상을 동반했다. 성희를 허투루 만나고 싶지 않아서 영화에 필요한 모든 걸 준비하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그런 노력이 나에게 해를 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맞닥뜨리며 배반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내 호흡대로 그 시간을 소화하고 치유할 힘을 기르기까지 꼬박 일 년, 가을에서 가을까지 사계절이 걸린 것 같다. 부산에서 관객을 만나며 비로소 영화를 떠나보낸다는 실감이 났다. 영화제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다시 부산으로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수상 소식을 전해 듣는데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터져 나와서 나도 나를 어쩔 줄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폐막식에서 올해의 배우상에 문혜인이라는 이름이 호명되었다. 추억이라고, 또는 고비라고 부를 법한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가족과 애인과 친구와 동료에게 축하를 받으면서 가슴 벅찰 만큼 감사했다.

ⓒ김혜미
ⓒ김혜미

번 아웃, 그래서 비트 

<에듀케이션>이 끝나자 ‘번아웃’이 왔다. 배우는 타인을 연기하는 동시에 자신을 이야기하는 직업이다. 재밌고 신나는 일이지만 거듭할수록 삶과 영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게 느껴진다. 자책과 자괴가 밀려드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얼마간 나를 아이라고 여겼다. 내가 키우는 아이가 혜인이라면, 그때도 나는 이렇게 내 아이를 가혹하게 대할까. 혜인에게 좋은 걸 주자고 마음먹었다. 어른이 아이에게 하듯, 엄마가 자식을 키우듯 건강하게 먹고 깨끗하게 입었다. 나를 비워내고 또 채우기 위해 제주도와 대만으로 짤막한 여행을 다녀왔다. 그런데도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비트를 ‘찍었다’. <나가요: ながよ>를 계기로 랩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비트 메이킹도 겸한다. 가사를 쓰고 리듬을 고안하는 시간은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고, 때로는 가지런히 정렬시키기도 한다.

최근에는 노래 한 곡을 정해서 완벽하게 부르도록 익히는 데 재미를 붙였다. 얼마 전 페스티발에 갔다가 딘(DEAN)에게 빠져서 몇 곡을 연습했다. 그러고 보면 탈색과 염색도 새로 생긴 취미라고 할 수 있을까. <한낮의 우리> 작업 당시 금발로 탈색한 적은 있지만, 지금처럼 눈에 띄는 색을 입혀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문득 나에게 새로운 색깔을 부여하고 싶어졌다. 세상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머리카락이기도 했다. 처음엔 파랑을 골랐다. 신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그야말로 희소한 색이기에 끌렸다. 해방감에 스트레스가 풀리기도 했고, 한 번 하고 나니 다른 색깔에도 눈길이 갔다. 작품 때문에 노란 머리로 돌아갔다가 얼마 전 빨갛게 염색했다. 내 몸에 자리를 튼 이런저런 색을 구경하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만족감을 준다.

그새 창밖도 컬러풀해졌다. 초록에 오렌지가 더해지고 눈부신 황금색과 진한 빨강이 껴들면서 한층 알록달록하다. 정류장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코끝에는 낙엽 냄새가 머문다. 머리카락에서 붉은 물이 빠지면 겨울이 시작되려나. 다음에 염색할 색깔을 정해 놓지는 않았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은 있다. 그동안 작사 작곡한 노래를 네다섯 곡쯤 모아서 소박하게 앨범을 내고 싶다. 아마추어 수준이긴 하지만 남은 두어 달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 인생이라는 숲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새싹을 틔워내기 위해서는 결국 내 하루를 살뜰히 돌보는 수밖에 없다. 계절은 자연스럽게 넘어가기에 감동을 준다. 대체 얼마쯤 왔을까 하며 불안해질 때, 손가락을 편 단풍잎과 티 없이 맑은 하늘이 마음을 다독인다. 일상을 꾸리는 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혼자서 시간을 보낸 만큼 타인과 세상을 투명하게 바라볼 배짱이 생긴다.

ⓒ김혜미

내일의 숲

좋아하는 영화로 매번 <가족의 탄생>(연출 김태용, 2006)과 <그녀에게>(연출 페드로 알모도바르, 2003)를 말하곤 했는데, 작년에 한 편이 추가되었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연출 아녜스 바르다·JR, 2018)을 보면서 영감과 용기를 얻었다. 한참 상심에 빠진 시기에 그 영화를 보며 다시금 잘 해보고 싶다는, 이렇게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소를 좋아하는 바르다를 위해 JR은 공장 벽면에 염소 사진을 붙인다. 뿔이 달린 염소다. 인터뷰에 응한 한 노동자는 왜 하필 염소냐고 묻고, 바르다는 “재미도 있고 이유도 있죠”라고 답한다. 농장에서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 염소의 뿔을 제거한다. 노동자는 생산만 강조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염소의 뿔을 자르는 대신 그 위에 고무공을 씌우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가능하면 염소마다 다른 색깔, 다른 무늬를 가진 공이 좋겠다고 말하자, JR은 멋진 상상력이라고 응수한다.

영화는 세상에 없는 것을 있게 만든다. 그 과정에 상상력이 필요한데, 어떤 상상력은 말 그대로 누군가를 살리기도 한다. 나는 그런 힘을 경험했다. 좋은 영화를 만났고 앞으로도 생기와 활기로 우거진 영화를 만들어나가고 싶다. 언젠가 실존 인물을 연기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좋겠다. 누구라고 딱 한 사람을 꼽기는 어려운데, 나와 닮고 또 전혀 다르기에 접속할 여지가 많은 인물을 만난다면 온 마음을 쏟아볼 작정이다. 연기에 정답이란 없지만 적어도 실존 인물의 경우에는 명확한 답 하나를 갖고 출발하는 셈이다. 배우로서 궁극의 도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예전에 학교에서 연기 실습하며 타인을 모방했던 순간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나와 나 아닌 존재를 오가며 일상과 영화, 일과 여가 사이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고 문혜인은 긴 문자를 보내왔다. 오늘 받아온 것이 많다고, 마음이 풍성해져서 세세하게 일기를 적고 싶어진다고 했다. 손으로 쓴 편지처럼 온기를 안고 도착한 메시지를 읽으며 다시금 그의 웃음과 말씨를 떠올렸다. 문혜인은 자기 자신을 고집 세고 근성 있고 다채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건 배우 문혜인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했다. 스크린에서 성희가, 혜영이, 진주가, 그리고 혜인이 위악을 부릴지언정 위선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안전만큼이나 타인의 평안을 살피는 문혜인 고유의 다정함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를 둘러싼 숲에 햇빛이 골고루 깃들기를, 비를 피할 믿음직한 나무가 자라기를 응원한다. 온갖 빛깔과 진실을 암시하는 비밀을 품어낼 정도로 넉넉한 숲이 될 때, 문혜인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때 또 다시 마주 앉아 긴 대화를 나누고 싶다.

ⓒ김혜미
Feature
국수 먹고 맴맴
인디그라운드 기획전 <오목어> 김진만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2022-11-04
Feature
안녕하십니까?
인디그라운드 기획전 <감정의 시대: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 김숙현·조혜정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2-11-04
Feature
뿔뿔이 흩어졌다가도
인디그라운드 기획전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 정승오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2022-11-03
Feature
믿음과 의심의 크로스캡
인디그라운드 기획전 <숲> 엄태화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2-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