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 문단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젊은 작가의 이름을 꼽는다면 그 앞머리에 소설가 박상영을 이름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박상영은 2016년 단편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로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지난해 단편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이하 <자이툰 파스타>)로 문학동네가 선정한 ‘젊은 작가상’을, 올해는 단편 <우럭 한점 우주의 맛>으로 ‘젊은 작가상’ 대상을 받았다. 그 사이 박상영은 치열하고 부지런히 단편들을 묶어 두 권의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와 『대도시의 사랑법』까지 연이어 출간했다. 게다가 두 번째 소설집은 10쇄를 넘긴 상태다. 그 어렵다는 출판 시장에서 이 젊은 작가는 적극적인 독자층을 확보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한편 한국 문단의 비평가들은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시대적 요청과 함께 한국 문학의 퀴어 서사의 중요한 분기 혹은 결절로 박상영 소설을 읽고 불러내길 시도한다. 그렇다고 해서 오해는 말자. 박상영 소설은 퀴어 서사를 전면으로 다루며 획득하는 강렬한 페이소스가 분명 있지만, 박상영의 모든 소설이 퀴어 서사로 전개되는 건 아니다. 동시에 기억하자. 박상영 소설은 이 시대의 퀴어 서사 혹은 퀴어의 사랑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를 세밀하게 그리고 있음을. 문학평론가 김건형은 박상영의 <자이툰 파스타>를 그 예로 들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제 퀴어는 순정한 사랑의 장면이나 숭고한 희생의 담지자 같은 상징적 지위에서 세속적인 일상으로 내려온다. 낭만화와 비극화를 모두 넘은 퀴어의 세속화인 것이다. … 퀴어 ‘나’의 좋아서 하는 섹스, 세속적인 일상/성애 자체가 새로운 재현의 전략이 된다.’ (『문학동네』 2018년 가을 호) 세속의 퀴어사로 독자와 평단 양쪽의 사랑과 주목을 받는다는 건 분명 박상영 소설의 현재적 가치이자 힘일 것이다.
박상영 작가에게 만남을 청했다. 마침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문화 예술 분야의 멘토가 관객과 함께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네마투게더’ 프로그램에 그가 참여한다는 소식을 들은 차였다. 박상영 소설의 애독자라면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자이툰 파스타>의 ‘박 감독’, 영화제 출품 경험은 있다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랄 게 없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소라’를 비롯해 박상영 소설 속 인물들은 때때로 영화관으로 찾아들고 영화 일을 하는 지인들에 둘러싸여 있다. 짐작하건대 박상영 작가 역시도 꽤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그를 만나 소설과 영화 이야기, 퀴어와 문학에 관한 지금의 고민을 청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시네마투게더’에 멘토로 참여한다. 그간 소설 속 중요 인물들 가운데 영화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내심 영화에 관심이 많지 않을까 했다.
솔직히 그 프로그램에 관해서는 전혀 몰랐다. 영화제에서 연락 받고 제일 먼저 영화감독인 친구에게 물어봤다. “이거 뭐 하는 거야? 돈은 주는 거야?” 그랬더니 친구가 “돈 안 준다고 해도 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더라. 나는 돈 안 준다고 하면 엉덩이조차 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웃음) 이번에 멘토로 참여하는 분들의 리스트를 보니 내가 정말 좋아하는 정서경 작가님을 비롯해 지난해 상당히 인상적으로 본 <죄 많은 소녀>(2017)의 김의석 감독님도 있더라. 이분들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멘토가 참여 관객들과 함께 볼 영화제 상영작을 직접 고른다. 어떤 영화들인가.
나를 멘토로 택한 분들이라면 아무래도 기대하는 바가 있지 않겠나. 아직 영화에 관한 정보가 많지 않아 상영작 감독명과 영화에 관한 짧은 소개의 글만 보고 선택했다. 한 작품을 빼고는 대체로 퀴어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아저씨 X 아저씨>(레이 영, 2019), <마티아스와 막심>(자비에 돌라, 2019), <더 킹: 헨리 5세>(데이빗 미쇼, 2019), <사랑의 언어>(이사벨 산도발, 2019), <시빌>(쥐스틴 트리에, 2019)이다.


어떤 이야기가 오갈 것으로 예상되나.
내가 영화의 완성도를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나 역시 한 명의 관객으로서 영화를 보고 참여하신 분들과 자유롭게 무엇보다 위계 없이 얘길 나누길 바란다. 아무래도 주제나 내용에 관해 많이 대화하지 않을까. 나도 소설을 두고는 기존의 소설과 어떻게 다른 작법을 썼는지, 완성도는 어떤지 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번에 나는 완전히 영화 업계 외부 사람이니까. 더 즐겨야지. 그런데 어떤 분이 트위터에 올리셨더라. 박상영 작가 시네마투게더는 퀴어 영화 보고 진탕 술이나 먹고 끝날 거 같다고. 그럼 나는 또 그러겠지. ‘술 안 마실 건데? 나 카페 갈 건데?’ (웃음)
소설을 읽어 보면 작가가 영화계의 생리나 생태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더라.
친구 중에 영화 연출팀에 있거나 영화감독인 경우가 꽤 있다. 내가 영화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가리지 않고 다 보는 잡식형이다.
안 그래도 인터뷰 요청 차 연락했을 때 <리버스>에 실린 <벌새>(2018)의 김보라 감독, 김새벽 배우 인터뷰와 <우리집>(2019)의 윤가은 감독 인터뷰를 읽었다고 말했다. 덧붙여 두 감독의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고도 했는데.
‘왜 좋은가’를 말하는 건 참 힘든 일이다. 두 편 모두 정리될 수 없는 여러 감정을 정리하지 않은 채로 보여주는 게 좋았다. 좀 더 드라마화된 건 <우리집>인 것 같다. 사실 내가 윤가은 감독님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감독님의 관객과의 대화 현장에도 여러 번 찾아가 들었고 지난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오즈 야스지로 특별전 때 감독님이 참여한 토크 현장도 갔다. <벌새>는 한 단어로 설명될 수 없는 감정을 한 단어로 설명하지 않아서 좋았고. 그러기가 쉽지 않다. 특히 첫 장편을 만드는 감독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겠나. 은희(박지후)의 10대를 구성하는 여러 삽화 가운데 성수대교 사건을 지금 정도의 비중으로 다룬 게 좋았다. 우리의 기억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는가와 닮아 보였다.
또 어떤 영화를 좋아하나. 근래 본 영화중에 기억나는 영화를 말해도 좋고 흔히 말하는 ‘내 인생의 영화’라고 할 만한 영화 얘기도 좋다.
비교적 최근에 본 영화로는 <레이디 버드>(그레타 거윅, 2018). 주인공 ‘레이디 버드’(시얼샤 로넌)와 내 감정의 온도가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 애, 이상한 애 아닌가? 관심받고 싶어 하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애정 관계를 만드는 데도 실패하고. 그 애를 보고 있으면 그렇게 눈물이 난다. <벌새>의 은희와는 또 다른 지점에서 깊이 공감했다. 내 작품의 인물들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달까. 또 우울할 때면 종종 꺼내 보는 영화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디 아워스>(2002)가 있다. 이분이 문학 작품을 쓰기도 했고 영화도 문학적으로 만든다. 심지어 이 작품은 책보다 영화가 더 좋다. 돌이켜보면 고향 대구에서 청소년기에 봤던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 <친절한 금자씨>(박찬욱, 2005)도 떠오른다. 소위 말하는 N차 관람을 했다. 내가 워낙 화가 많아서 그런가? 나도 복수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웃음) 뒤틀린 모녀 관계가 나오는 <블랙 스완>(대런 아로노프스키, 2010)도 있고. 아, 지난해 정말 좋았던 <아이, 토냐>(크레이그 질레스피, 2017)도 빼놓을 수 없다. ‘미친’ 엄마(앨리슨 제니)가 정말 엄청나다.
소설에 영화감독을 비롯해 영화 일을 하는 사람들, 영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박상영 소설에 등장하는 ‘박 감독’을 작가의 페르소나, 작가의 서사적 분신으로 보기도 할 정도다.
서사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소설과 영화는 인접 장르다. 그런데 영화는 기본적으로 촬영 현장이 있으니까 여러 사람이 등장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 만날 일도 많고 갈등도 만들어지고. 반면 작가가 화자가 되면 제한적인 게 많다. 일단 작가 화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거의 많은 사람들이 소설 속 작가와 글쓴이를 동일시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또 작가라는 직업 자체가 워낙 매력이 없다. 혼자서 작업하지, 자기 안에 매몰돼 있지, 생활 동선도 한정적이지. 그에 비하면 영화는 이야깃거리가 생길 게 많으니까. 또 내가 실제로 주변 친구들에게 주워들은 이야기가 많기도 하고. (웃음) 영화 일을 하는 친구들이 현장에서 겪은 일을 자기 업계 사람들과는 못 나누고 내게 하소연을 했다. 그게 이렇게 책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만. 친구의 허락을 받고 <자이툰 파스타>에 등장하는 한 에피소드를 썼는데 실제로 친구가 주변 사람들에게 ‘누가 그 이야기 했느냐’며 나름의 ‘색출’을 당했다고 하더라.

소설 속 인물과 작가를 등치할 때면 작가로서는 어떤 고민이 생기나. 어떻게 읽어도 무관하다?
첫 소설집을 낼 때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글을 써서 책을 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다. ‘이건 소설이니까’, ‘요즘 책을 읽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는 마음도 있었고. 거침없이 썼다. 소설 속 ‘박 감독’을 설명할 때 펜싱 선수와 동명이인이라고 한 것도 재밌게 쓰려고 한 거다. 그런데 박상영 선수가 내가 등단하던 해, 같은 달에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바람에…. (웃음) 첫 책을 내고 호되게 당했다. 모 문학평론가는 나를 ‘게이 작가’라고 명명하더라. 나 스스로 한 번도 커밍아웃을 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물론 첫 소설집의 일곱 작품 가운데 두 작품에 게이 화자가 등장하지만 나를 ‘게이 작가’, ‘게이 소설가’라고 명명하는 건 다른 문제다. 그 말이 중의적인 의미로 읽히기보다는 특정적으로 읽힌다. 그 평론을 처음 봤을 땐 정말 분개했다. 그 명명 이후 내가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언급되더라. 특히 문단 내 성폭력 문제가 발화된 이후, 당사자성 문학과 페미니즘 문학을 교두보 삼아 담론이 형성되면서 나 역시 그 일환으로 호명됐다. 정작 나는 한 번도 스스로 그런 문제의 당사자라고 말한 적이 없고 내 소설을 이런 이름으로 읽어 달라고 간청한 적도 없다. 작가로서 평단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고민스럽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경우는 내 작품의 본질이 중요하기보다는 시대의 요청 속에서 내 이름과 작품을 갖다 쓰고 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내가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길 바라며 그 기반을 만들고 싶었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외부적 요인과 맞물리면서 내가 담론으로써 소비되니까. 말하거나, 쓸 때 자기 검열도 심해졌다. 나라는 인간은 막 나가는 인간인데. 한편으로는 그런 평가에 내가 뭐라고 할 수도 없겠다 싶었다. 그건 비평가들의 작업이니까. 그런 면에서 작가가 된다는 건 내가 내 글의 통제권을 잃는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 같다. 그렇다. 내가 퀴어 소설을 쓴 것도 맞고, 두 편의 소설집이 퀴어 소설집인 것도 맞다. 그런데 유독 퀴어에 있어서는 소설의 장르를 구분하고 그 장르를 창작자와 연결 짓는 방식이 다른 것 같다. 그런데 또 내 소설을 읽고 누군가가 ‘퀴어 소설로만 가두기엔 너무 아쉽다’라고 말하면 ‘퀴어 소설이 어때서? 뭘 가뒀다는 거야?’라며 발끈하게 된다. 양면적인 마음인 거다. (웃음)

급기야 두 번째 소설집은 아예 퀴어 서사로 다 채워버렸다. 심지어 모든 수록작을 작가인 화자로 내세웠다.
반골 기질이랄까.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해줄게!’ 그런 마음?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기획하고 구성해 써 내려갔다. 작가 화자를 전면에 등장시킨 것도 그래서다. ‘원한다면 나에 대해서 얼마든지 상상해라. 하지만 이 모든 게 다 내 얘기라고 하지는 않겠다’라는 심정이었다. 소설의 본질에 좀 더 가까이 가보고 싶기도 했고. 나는 모든 소설을 자전 소설로 읽고 모든 자전 소설을 픽션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심지어 에세이조차도. 기록되는 순간부터 기억의 필터링을 거치고 모종의 선택이 이뤄지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썼는데 어디 뭐라고 하는지 보자’, ‘나에게 원하는 게 ‘퀴어’이고 이 시대에 유의미한 서사가 그런 것이라면 나 아니면 아무도 못 쓰는 걸 써보겠다’는 마음. 그 절실함으로 두 번째 책을 썼다. 첫 책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오랜 꿈이 이뤄지고 그 후 한 편 한 편 청탁을 받으며 쓴 글의 묶음이다. 다음에 또 청탁이 이어질까? 매번 걱정했다. 글을 쓸 때마다 나를 증명해야 했기에 조급했고 과잉된 측면도 없지 않았다. 반면 두 번째 책은 이것이 독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를 더 생각하며 썼다. 그렇게 쓴 글을 읽은 퀴어 당사자분들이 DM 등으로 ‘내 얘길 이렇게 써준 작가는 당신이 처음이다. 현실 연애 같았다. 내가 겪었던 감정을 들여다보는 듯했다’와 같은 피드백을 줬다. 이런 이야기를 기다린 분들에게 내 이야기가 도움이 될 수 있겠구나 싶더라.
두 번째 소설집의 4편의 단편은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재희>,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이 한 묶음, <대도시의 사랑법>, <늦은 우기의 바캉스>가 또 한 묶음.
이 책은 쓸 때부터 연작 소설 형태로 갈 생각으로 썼다. 단편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주인공 박소라의 엄마가 암에 걸려 소라가 병간호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게 <우럭 한점 우주의 맛>으로 이어지는 에피소드다. 원래는 한 덩어리로 박소라의 이야기였는데 쓰다 보니까 이건 소라에게 주면 안 되겠더라. 한국에서 단편소설로 유통되기에는 분량도 너무 길어졌고. 특히 나 같은 신인 작가는 100매 내외의 단편 소설을 청탁받으니까. 물론, 나는 항상 150매를 넘겨서 출판사의 빈축을 사지만. (웃음) 그래서 아예 엄마와 관련된 전사를 떼어내 <우럭 한점 우주의 맛>으로 쓴 거다. 그리고 이 소설이 또 단편 <재희>와 한 묶음이었고. 그렇게 되다 보니 정말 초 장편소설 각이더라. 마침 급히 마감해야 하는 단편 두 편이 있어서 그럼 각각 찢어서 내자 싶었다. 먼저 <재희>를 발표했다. 그때 이미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이 300매를 넘긴 상태였다. 청탁해준 창작과 비평 출판사에 연락해 이렇게도 가능할지 살펴달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대로 실으면 좋겠다고 해 진행됐다. 이후 또 계간 『문학동네』에서 청탁이 왔다.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을 쓰면서 300매로 마무리하기엔 왠지 부족하다 싶었는데 이참에 이 작품의 후일담에 해당하는 걸 써보자 싶어 쓴 게 <늦은 우기의 바캉스>다. 이 소설에 ‘카일리’(‘카일리’는 HIV,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의 다른 이름이다. 작가는 소설에서 이 질병을 직접적으로 명명하는 대신 아름다운 이름 ‘카일리’를 지어줬다.)를 등장시켰는데 사실 두려웠다. 작가인 나 자신이 소설 속 화자로 간주하곤 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과연 나 스스로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 내가 이런 걸 써도 될까? 고민이 필요했다. 그러면서 ‘나 아니면 누가 쓰겠어. 내가 쓴다!’로 결론이 났다.
박상영 소설의 중심에는 언제나 실패하는 연애, 실연이 있다. 새롭게 시작하는 관계보다는 관계가 끝난 이후의 모습에 천착한다.
연애의 속성이지만 연애가 인간을 폭발적으로 만든다. 나라는 사람이 그렇기도 하고. 다른 것에는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고 남에게 많이 의존해 살아왔다. 그래서 이런 방식의 서사를 쓰는 게 아닐까. 지난 10년간 내가 겪은 삶이 그렇기도 했다. 사람이 세상과 맺는 첫 번째 관계가 부모와의 관계라면 그리고 그 관계의 양상이 이후 대인 관계나 연애 관계 전반에 큰 영향을 준다면? 여기에 관해 많이 생각한다. 얼마 전 책을 읽었는데 어린 시절 정서적으로 방치된 아이들이 그 공허감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고 하더라. 그리고 그런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5년 이상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애정을 받으면 그 공허함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걸 읽으면서 ‘난 안 되겠다.’ 싶더라. (웃음)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 않나. 결국 나는 소설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서 실패한 사람들의 양상을 보여주고 싶은 거다.
소설의 형식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미 어그러진 관계에서 출발해 그 관계가 어떤 양상으로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되돌아가 보는 방식을 많이 취한다. 영화로 치면 일종의 플래시백으로 편집을 시도하는 셈인데.
내 작품은 다 플래시백이다. 지나가서 다 아련한 거 아닌가. 나는 과거만 바라보는 사람이다. 문예창작과에서는 플래시백을 쓰면 서사의 진전을 막는다고 되도록 쓰지 말라고 가르친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서브플롯으로만 치부되는 플래시백이 메인보다 더 큰 기능을 할 때가 있다. 사실 내가 일상에서 삶을 감지하는 방식이 그렇다.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아, 맞아.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지’라고 떠올리는 식이다. 플래시백은 일상적인 사고방식과 닮았다. 플래시백을 쓰지 말라고 학습 받을수록 ‘왜? 난 이렇게 쓰는 게 좋은데? 이렇게 쓰려고 소설가 된 건데?’라는 마음이 든다. 또 일면 플래시백을 쓰지 말라는 사고에는 영미권의 성과주의적, 미래주의적 가치관이 반영된 게 아닐까. 소설 작법이 시나리오 작법에서 온 경우가 있고 그건 영미권 중심의 영화산업의 영향, 그러니까 메인 플롯 아래서 이야기를 크게 벌여두고 어딘가로 나아가는 식의 영향을 받았다는 거다. 그럼 또 나는 반문한다. ‘그렇게 나아가서 어디로 갈 건데?’ 내 소설을 파편적, 현대적이라고 느끼는 분이 있다면 서사적 공식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누군가는 내 글을 ‘SNS적 글쓰기로 글이 분절돼 있다’라고 말하나 보다. 사실 나는 내가 되게 고전적인 방식의 글쓰기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이 내 글을 읽을 때 잘 따라올 수 있도록 친절하게 쓰려고 많이 노력하니까. 사실 내 글을 보고 ‘파격’이라고 말하는 분들을 만나면 되게 어색하다. 나는 전위를 의도했거나 파격적으로 보이려고 글을 쓴 적이 한 번도 없다. 나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글쓰기를 할 뿐이고 오로지 자연스러운 서사이길 바랄 뿐이다.
‘대도시의 사랑법’이라는 제목에서도 감지되듯 공간, 특히 도시성은 박상영 소설의 인물만큼이나 중요하다. 강지희 문학평론가는 ‘찬란한 네온사인이 빛나는 대도시와 꿈과 술과 웃음, 그것을 두고 박상영 글쓰기를 이루는 요체’(『대도시의 사랑법』 추천사)라고 말하기도 하더라.
내 소설이 독자에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읽히길 바란다. 그래서 디테일을 부여하기 위해 애쓴다. 소설 쓸 때 인물만큼이나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소설의 의미성, 정치성이라는 게 가능하다면 그걸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요소는 공간성에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자이툰 파스타>에서 주인공 박 감독과 왕샤가 만나는 곳이 자이툰 부대가 아니라 걸프전이었다면? 완전히 다른 소설이 됐겠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라가 부산국제영화제가 아니라 서울독립영화제에 갔다면? 마찬가지다. 부산이어야 했던 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소설 쓸 때 인물과 공간만 풀리면 다른 건 저절로 풀린다.
특히 대도시를 주목하는 이유가 있나. 나고 자란 대구를 비롯해 20살 때부터 지금까지 거주하는 서울은 당신에게 어떤 곳인가.
도시에서는 사람이 많아서 생기는 여러 문제도 있지만, 사람이 많기 때문에 쉽게 그들 사이로 스며들 수 있는 익명성도 가능하다. 쉽게 다른 사람을 취할 수도 있고 얼마든지 나를 대체할 사람도 있다. 그런 곳에서 산 사람의 감수성이 나를 지배한다. 서울은 10대 시절의 내 이데아였다. 대구가 너무 싫었고 매일 매일 자퇴하고 싶었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서울로 대학을 가자는 생각뿐이었다. 막상 와보니 내가 꿈꾼 것 이상으로 서울이 좋다. 그리고 드디어 올해 퇴사까지 했으니. (작가는 등단 이후에도 글쓰기와 회사 생활을 병행했고 올해 1월 퇴사한 후 전업 작가로 일한다.-편집자). 비로소 10대 때부터 꿈꿔온 일이 이뤄졌다. 현재 내 유일한 삶의 목표는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이대로 계속 살 수 있다면! 혜화동의 작은 원룸에 살고 있지만, 지금이 정말 좋다. 이걸 얻기까지도 너무 고단했으니까. 내게 주어진 이 행운을 만끽한다.
여행도 좋아하는 거로 안다.
정말 좋아한다. 대도시는 서로 비슷해 보여도 도시마다 각기 다른 요소가 있어 그걸 발견하는 재미가 크다. 20대 때는 미친 듯이 돈을 벌어서 여행 가는 데 다 썼다. 그런데 최근에 깨달았다. 나는 그냥 일상을 견디기 힘들어 여행을 가더라. 사실 수면 장애도 있고 체력도 좋지 않은 데다 낯선 곳에서의 적응도 힘들어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여행을 가면 일상이 ‘팍’ 하고 끊어지는 것 같다.
박상영 소설에 관해서라면 웃음과 유머를 말해야만 한다. 소설가 이기호는 『자이툰 파스타』 추천사에서 “‘유머’와 ‘자멸’이 사실은 같은 반 절친한 짝궁임을 알고 있는 흔치 않은 작가”라고 하더라. 당신 소설에서 유머는 심각한 이야기를 심각하게 풀지 않으려는 태도이자 인물의 자조 섞인 자기방어이며 자신을 공격하는 상대방을 향해 날리는 공격의 방편이기도 하다.
맞는 말이다. 나라는 인간이 웃음을 방어 기제로 사용해왔다. 웃는데 눈물이 나고 웃는 나를 비웃는 내가 보이는 슬픔을 잊기 위한 웃음. 또한 ‘너희가 뭐라 해도 난 웃겠다’는 공격형 웃음. 되게 슬프지 않나. 웃는 것밖에 할 수 없으니까. 나를 불쌍하게 만들려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웃는 사람이다’라고 보여주는 선언. 특히나 첫 번째 작품집의 박 감독 캐릭터가 그렇다. 그리고 나 스스로 진지해지는 것에 두려움이 있다. 지금 시대에 ‘나 힘들고 외로우니까 봐줘’라고 한들 누가 봐주겠는가. 그래서 웃음, 유머를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웃긴 걸 되게 좋아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내 소설을 두고 ‘발랄하다, 경쾌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놀라기도 한다. ‘아니,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 거지?’ 나는 내가 되게 우울하고 비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그런 말을 통해 오히려 자신을 이해하는 지경까지 왔다. ‘아, 내가 발랄하고 경쾌한 사람이었구나.’ (웃음)
지도교수였던 이장욱 작가가 당신 소설을 ‘질병과 광기의 문학’이라고 말했다고 들었다. 소설에는 ‘카일리’, 암, 불면, 면역 체계 이상 등의 병을 달고 살거나 죽음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이 계속해 등장한다.
나부터 만성 질병을 안고 산다.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그렇다. 암과 ‘카일리’가 한 권의 책에서 같이 다뤄지는 게 내게는 중요했다. 자살 시도나 죽음에 관한 생각은 첫 번째 책을 쓸 때 더 강했다. 인간은 언젠가는 다 죽는다. 그걸 적극적으로 갈망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런데 30대가 되면서 에너지도 좀 빠졌나? 요즘 작품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수상이라는 혹은 작가로서 쓰고 말할 수 있는 지면이라는) ‘마이크’를 하나 받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여러 곳에서 청탁이 오고 책을 내자는 제안을 받을 텐데 그 가운데서 장편소설을 준비하기로 했다고 들었다.
내년 초에 <문학동네> 온라인 플랫폼에서 연재를 시작한다. 대구 수성못을 배경으로 10대들의 방황과 혼란을 그릴 예정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신경숙의 <외딴방>도 10대를 다뤘고 앞서 말한 <벌새>, <우리들>(2015), <우리집>, <죄 많은 소녀> 모두 그 시절의 이야기다. 10대 시절에 겪은 일과 트라우마를, 그리고 창작자가 어떤 방식으로 트라우마를 다룰지에 관해 많이 생각한다.


수성못은 유년기의 박상영에게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공간이었나.
그렇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곳이기도 하다. 내 인생은 스무 살부터 시작됐다고 말할 정도로 10대 시절은 암흑기였다. 세 번째 책을 준비하며 내 안의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IMF 시절을 배경으로 정치적 이야기가 들어갈 거라고도 하던데.
그렇다고 내가 <국가부도의 날>(최국희, 2018)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진 않을 테고. 그 시절을 통과한 사람들이 갖는 공동의 감수성이나 트라우마를 그릴 생각이다. 문자 그대로의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세대 차원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을까. 나 역시 ‘IMF 키드’니까. 과연 어떤 경험이 그 세대의 유년기를 도배했을까. 그에 관한 나름의 해석이다. 또 내가 안정적인 관계 형성에 실패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왔잖나. 허명임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인정욕구에 시달리는 인물 군상이 첫 번째 책에 나왔고 결국 망할 걸 알면서도 타인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이 두 번째 책에 나왔다. 그럼 왜 이들이 이렇게까지 됐을까를 물어야 하고 그에 관한 내 나름의 해석이 세 번째 책에 나올 것 같다.
<한겨레 ESC>에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라는 꼭지 명으로 연재도 이어가고 있다.
정말 힘들다. 소설 쓰기와는 또 다른 에너지가 필요한 작업이더라. 나는 대체로 글을 쓸 때 확 몰아치고 쉬어야 하는데…. 연재 제목과 달리 정서적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매일매일 굶고 자는 데 실패한다. (웃음) 내년 초에 단행본으로 묶을 예정이다. 많은 분이 좋아해 줘서 ‘나만 이렇게 사는 건 아니구나’ 하며 위안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하다.
지금도 여전히 다음 청탁이 들어올지 말지를 걱정하며 불안해하나. 아니면 이제 조금 여유가 생겼을까.
그 불안은 없어질 수 없을 것 같다. 나이 지긋한 작가들도 ‘계속 현역이 되고 싶다’고 말씀하시더라. 그 말은 단지 돈의 문제만은 아닐 거다. 현재형의 작가로 남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러려면 엄청난 노력과 운이 따라야겠지만. 물론 나는 여전히 생존의 문제를 떠날 수는 없지만. 두 번째 책이 잘 되고는 있다지만 그 역시 한시적이고 이후는 전혀 알 수 없다. 매우 불안해하며 매일매일을 버틴다. 그러면서 이 삶이 이렇게 가늘게 이어지기를 바란다. 계속 이렇게.
소설 속 등장인물의 이름과 상황이 겹치거나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형식의 소설 쓰기는 당분간은 계속될까.
그렇지 않을까. 작가의 습관이자 취향일 텐데 나는 한 번 만든 아이(소설 속 등장인물)를 잘 놔주지 않는다. 연애할 때도 그렇지만 내가 만든 인물에게 집착한다. 소설을 쓸 때 이전 소설 속 아이들을 많이 생각하기도 하고. 앞으로도 또 등장할 수 있다. 당분간은 장편 작업을 할 텐데 장편 호흡으로도 인물 한 명을 충분히 다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