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시학
<준하의 행성>
김병규/ 영화평론가 / Critique / 2019-10-18

올해로 7회를 맞이한 무주산골영화제는 상영작에 대한 비평적 지지를 확대하기 위해 처음으로 영화평론가상을 신설했다. 이 영화평론가상은 점점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영화 비평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단순히 평론가들이 선택한 영화에 상을 주는 것을 넘어 영화제가 상영작에 대해 조금 더 생산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과 바람에서 시작되었다.

2019년 제7회 무주산골영화제의 첫 영화평론가상은 9편의 ’‘창’ 섹션 상영작 중 조민재 감독의 <작은빛>에게 돌아갔다. 올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김병규, 정지혜, 홍은미 영화평론가는 "자신만의 영화적 리듬과 운동을 영민함과 뚝심으로 밀어붙여,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가족, 상실,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선사해줬다"고 평했다. 영화제 이후 세 평론가는 수상작 <작은빛>을 포함하여 김남석 감독의 <12하고 24>, 홍형숙 감독의 <준하의 행성>에 대한 비평을 각각 작성했다.

<리버스>는 무주산골영화제가 보내온 첫 영화평론가상의 결과물인 3편의 평문을 공개한다. 이제 막 비평 활동을 시작했거나,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3명의 젊은 평론가들이 보내온 이 글들은 동시대를 대표할 만한 3편의 한국 독립영화를 깊이 들여다보는 특별한 기회가 되어줄 것이다.

 

 

<준하의 행성>의 시작 부분에 준하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이름 모를 아이들의 뒷모습과 그 뒤편으로 펼쳐진 해안가의 풍경이 화면에 보인다. 바다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연달아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 뒷모습의 주인이 누구인지 또는 그들이 어떤 관계로 연결되고 어느 집단으로 묶인 것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이 영상을 단순히 아이들이 바다를 거니는 범용한 기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 영상은 누구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미지성을 간직한 형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정적인 도입부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리저리 움직이는 준하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난다. 준하의 쇼트는 앞서 차례로 주어진 아이들의 뒷모습과 결합하는 걸까, 아니면 평행하게 분류되는 걸까. 그들을 배치하는 시각적인 논리가 무엇인지 명쾌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곧이어 장면이 바뀌면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푸른 커튼이 흔들리는 광경이 보인다. 바람이 커튼을 건드리면서 빛이 새어 들어오고, 빛이 들어옴으로 불이 꺼진 채 어둠에 잠겨 있던 실내 교실의 윤곽이 펼쳐진다. 마이클 스노우의 <태양의 숨 Solar Breath>(2002)을 떠올리게 하는, 별다른 움직임과 활동성을 강조하지 않음에도 빛과 어둠, 그리고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화면에 놀라운 역동성을 부여하는 순간이다. 일견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 장면을 유독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영화의 세계란 스크린이라는 창틀이 열리는 것으로 촉발되는 영역이므로 프레임 안에서 열린 창문이나 커튼의 움직임이 관측되는 순간에 느껴지는 특권적인 면모를 이야기할 수도 있을 테지만, 이 장면의 매혹은 그보다 영화 내적인 논리와 연관되어 있으리라 생각한다. 홍형숙 감독의 <준하의 행성>은 준하라는 한 명의 자폐성 장애학생을 중심으로 성미산학교 공동체 내부를 이루는 집단적 주체의 얼굴을 담아내려는 시도지만, 영화에서 집단적인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와 교통의 과정만큼이나 주요하고 지속적으로 다뤄지는 것은 이처럼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학교 이곳저곳의 공간 쇼트들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왜 이러한 무인의 공간을 필요로 하는 걸까. 영화가 진행되면서 빈번히 삽입되는 이러한 공간의 쇼트를 단순한 인서트라고 말하는 건 충분치 않을 것 같다. 이를테면 이 쇼트들은 인물들이 겪는 내면과 감정의 변모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풍경은 아니다. 또는 정서가 변모하는 지점을 친절히 짚어주는 대목도 아니다. 반대로 이런 식의 쇼트가 인물과 공동체가 놓인 상태에 관한 적절한 거리두기와 사유를 제공한다는, 명쾌하기는 하지만 아무런 논점도 설명하지 않는 비평적 상투어에 기대는 것도 적확한 진술로 여겨지지 않는다. 또는 카메라가 담아낸 풍경이 자발적으로 전달하는 ‘포토제닉’하고 고유한 면모를 영화적 논리로 오인해서도 안 될 것이다. 여기서는 <준하의 행성>이 포착하는 풍경의 장면들과 또 다른 중심적 제재로서의 얼굴이 맺는 관계의 구조적인 논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준하의 행성>

불가능한 교통

<준하의 행성>은 두 가지 유형으로 쇼트를 나눠 배열한다. 우선 두 종류의 얼굴이 있다. 하나는 학교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들의 집단적인 얼굴이라면, 다른 하나는 집단 안에서 개인으로 존재하는 단독자의 얼굴이다. 단독자의 얼굴은 개인적이지만, 집단적 주체의 얼굴(들)은 복수의 영역이다. 카메라가 단독자의 얼굴을 담아낼 때는 고유한 타인의 얼굴과 시선을 교환하는 영역으로 향하게 되지만, 집단적 주체들을 포착한다는 것은 둘 이상의 존재가 관계와 의견을 구성해나가는 순간, 다름 아닌 정치의 영역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 <준하의 행성>에서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얼굴이 집단적인 얼굴이고 준하와 다른 학생들의 얼굴이 개인의 얼굴로 구축된다는 뜻은 아니다(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집단의 얼굴과 개인의 얼굴이 서로 대응하고 상호교차하고 있음을 영화의 카메라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개인은 때로 집단 가운데서 동떨어지고, 고립되어 고독함을 비추기도 한다. 가령, 수업시간에 혼자 방치된 준하의 얼굴이 그러하다. 충동적인 행동을 드러내지 않을 때면 준하는 잠에 빠져들거나 무기력하게 앉아 있다. 준하의 얼굴은 집단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분리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준하의 행성>이 다루는 얼굴의 테제는 단순히 타인을 마주하는 윤리의 영역으로도, 정치적인 집단의 논제로도 명확하게 환원되지 않는다.

그리고 또 다른 배열이 있다. 소란과 침묵의 배열이 그것이다. 이 영화에는 소란스러운 각종 소음의 장면들과 침묵의 장면이 병렬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소리와 침묵의 협주곡이라고 말하고 싶은 배치의 방법론이다. 교실을 뒤덮는 수업시간의 집단적인 대화, 아이들의 떠들썩한 수다, 교육의 방식을 두고 교사와 학부모들이 나누는 토론의 목소리를 경청하던 카메라는 시간이 지나 그런 말의 주체가 화면에서 사라진 뒤에도 공간을 향한 주시를 멈추지 않는다. 소리와 침묵의 이러한 배열은 영화 안에서 양자의 분리할 수 없는 결합으로 공존하고 있다. 공동체의 규칙을 설정하기 위해 의견을 공유하고 타협점을 모색하는 언어 속에 침묵은 이미 내재되어 있다. <준하의 행성>에서 몽타주는 쇼트와 쇼트 사이에서 발생한다기보다는 요소들의 배열과 불화에서 성립한다.

되돌아보면 영화가 처음으로 준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도 앞서 거론한 도입부의 커튼이 날리는 교실의 풍경 쇼트에서다. 열린 창문에 바람이 들어오면서 커튼 사이로 빛이 새어드는 것처럼, 준하의 목소리가 선행적으로 교실 공간의 쇼트 위로 덧입혀지는 것이다. 가시적인 틀로서의 프레임은 시각적으로는 열린 창가의 틈새로 들어오는 미세한 빛을, 그 변화를 예민하게 수용하면서 청각적으로는 다음 컷에 등장하는 준하의 목소리를 선제해서 끌어당긴다. 파스칼 보니체가 ‘데카드라주’라는 용법으로 설명한 것처럼, 내부적인 영역의 경계를 넘어서면서 화면 바깥의 감각과 비가시성을 수용하는 프레임의 촉지적 양태를 이 장면은 보여주고 있다. 피부에 닿지 않는 것을 건드리고, 보이지 않는 대상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불가능한 교통에의 열망이 내밀한 몽타주의 감각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영화의 시선이란 단일한 프레임의 경계를 벗어나 화면 바깥의 영역으로 향하는 결합적인 조건으로 작동하는 것임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준하의 행성>

침묵의 공간과 침전의 시간

<준하의 행성>은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는 별다른 명시적 지표 없이 흘러간다. 이러한 선택은 학교에서 모색하는 대안적 교육 방식과 그것이 준하에게 작용하는 효과를 인과적인 접속의 구조로 구성하지 않는 연출자의 판단을 드러낸다. 학교가 구상한 교육이 최선이라는 근거도, 준하가 지금보다 더 나은 학교생활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도 없는 상태.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학교의 텅 빈 곳들이다. 학교라는 같은 장소, 매번 비슷한 시간, 이렇다 할 긍정적인 변화 없이 지속되는 준하의 생활. 가시적으로 관측되지 않는 변모의 흐름을 앞에 두고 영화의 카메라는 무엇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준하의 행성>의 카메라는 이 사태 앞에서 장소에 누적되는 시간의 침전을 지켜본다. 이 다큐멘터리는 공존의 방식을 모색하고 그것이 곧장 결과로 나타나는 사태를 찍는 대신 공동체가 구상한 공존의 방법이 공동체를 이루는 장소 내부에 체화되기까지의 시간을 주시한다. 멈춰지고 비어 있는 장소지만, 영화는 그 자리에서 시간의 흐름을, 카메라가 그곳을 지켜보기 전에도, 시선을 거두고 떠나간 뒤에도 우리의 공동체를 감싸는 변화하는 시간의 단면을 응시한다.

그러나 무인의 공간을 비추는 화면이 내성적인 감상주의로 채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장면들의 삽입은 강고하기 그지없는 장소의 무심함을 우리에게 돌려주면서 장소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에 ‘미완성’의 감각을 드리운다. 카메라는 사람이 없고, 자연스레 그들의 말이 사라진 장소에 남은 결여의 흔적을 주목한다. 그러므로 장면을 구성하는 사각의 프레임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진 가시성의 틀로 매듭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이 사라졌고, 다시 누군가의 침입과 출현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는 취약한 표면으로 변모한다. 인물이 머물러 있었음을 각인하는 잔존의 흔적과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한 불확실성의 경계에서 찰나적인 현재의 감각이 스크린의 표면에 감도는 것이다. 홍형숙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준하가 교실 밖으로 돌연 이탈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준하의 행성>은 준하의 일탈적인 행동과 동선을 수용하면서 마찬가지로 쇼트라는 물질이 지닌 미완에의 감각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가시적 표상으로서의 말과 소음이 전면에 활동한다면, 그러한 말과 소음의 활동과 불화하며 이를 중단시키고 부유하는 정서를 미완의 형태로 열어두는 흔적으로서의 장소가 그 이면을 지탱하고 있다. 불화와 긴장을 수반한 영화적 배치로 인해 <준하의 행성>은 특정한 시스템이 작용하는 기관 속에서 움직이는 사회적 개인들의 말과 초상을 포착하는 다큐멘터리의 사례들, 이를테면 프레드릭 와이즈먼의 작업이나 장 루슈의 <인간 피라미드>(1961), 또는 소다 카즈히로의 관찰 영화와 같은 인류학적 다큐멘터리의 범주를 미묘하게 벗어난다. 남다른 리듬으로 다가오는 <준하의 행성>의 영화적 구성은 학교 공동체에 내재한 미세한 흐트러짐과 불균형을 감지하고 그러한 긴장을 영화 내부의 육체에 가져온다. 그러한 결여의 상태와 가능한 공존의 방식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역설적으로 공동체의 토대를 이루는 근거로 영화를 이끄는 것이다.

<준하의 행성>

공동체의 (불)가능성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 있다. 영화의 초반부, 수업시간에 잠이 든 준하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하는 장면이다. 영화는 준하의 얼굴 위로 음악과 슬로우 모션을 덧붙이고 곧이어 희미한 노란빛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표현주의적 과장의 쇼트를 이어 붙인다. 그 노란빛이 학교 도서관에 있는 구조물의 조명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건 그 구조물 안에 누워 장난치는 준하를 보여주는 다음 장면에서다. 이 장면의 연쇄가 보여주는 호흡과 리듬은 달리 말할 것 없이 매혹적이지만 동시에 영화가 감행한 조작적인 편집에 당황스러운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잠에 드는 준하의 얼굴에서 마치 준하의 내면을 형상화하듯 추상적인 빛과 음악으로 장면을 이행하는 것은 정당한 연결인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준하의 충동 앞에서 몇 번이고 거리감과 단절을 호소하던 영화가 정작 준하의 내면을 과도하리만치 친절한 방식으로 구현한 것은 아닐까.

공유될 수 없는 타인의 감정과 정서를 조작적이고 표현주의적인 방식으로 가시화한 선택이 정당한 것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을 가능케 한 사물의 형태에 대해서 한 가지 단상을 덧붙이고자 한다. 준하가 누워 있는 모형 상자의 구조물은 사방으로 뚫린 구멍을 통해 노란빛이 스며들어온다. 이 구조물의 외관을 보면서, 우리는 <준하의 행성>의 쇼트가 영화의 프레임이 가지는 다공적인 출입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입체적 조형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영화의 쇼트는 여러 방향으로 출입구가 열린 입체적인 모형의 형상으로 주어진다. 외양은 다르지만 이는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푸른 커튼을 건드리며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관측하던 풍경 쇼트의 원리와 유사한 것이다. 이 순간에 준하의 내면과 공간의 풍경은 동일한 원리로 조응한다.

나는 <준하의 행성>이 제기하는 핵심적인 논제가 공동체의 (불)가능성에 관한 진단이라고 느낀다.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규칙으로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이 공존하는 대안적 교육공동체는 가능할 것인가. 후반부에 나오는 제주도 수학여행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의 카메라는 성미산학교와 그 주변의 마을 근처를 한 번도 벗어나지 않는다. 준하의 부모님들이 학교에서 교사들과 토론을 나누거나 다른 학부모들과 동행하는 장면은 나오지만, 준하가 집에서 겪는 일상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준하의 행성>은 준하라는 한 아이의 삶에 관한 집중적인 소묘라기보다는 하나의 공동체가 창안한 공존의 규범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영화다. 그러니 제목으로 붙은 ‘행성’의 의미는 한 명의 인간은 하나의 행성이라는 감동적이지만 그만큼 낡아빠진 은유에 기대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의 행성이 움직이는 데는 그 주위를 공전하는 여러 위성의 움직임이 함께 작용한다는 사회적 원리의 전경화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영화의 쇼트가 여러 방향으로의 개방과 출입을 전제로 하는 까닭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행성은 단지 단독적인 하나의 행성으로만 홀로 운행하는 게 아님을 영화는 역설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준하의 행성>은 소수자의 자리를 바라보면서, 동시에 침묵을 깨고 자기주장을 말하는 다수의 반응을 다루고 있다. 비유컨대 이 영화는 한 행성의 지질학적 표면을 관측하면서, 그 행성이 속한 우주의 질서와 속도를 가늠해보는 작업이다.

<준하의 행성>

마주본다는 것

<준하의 행성>의 특별한 점은 공동체 내부의 개인이 맺는 관계의 형태를 생생한 현재성으로 전달해낸다는 사실이다. 이런 촉각적인 현전의 감각은 푸른 커튼이 흔들리는 도입부의 풍경 쇼트가 지시하는 바이기도 하다. 잊지 못할 한 장면을 거론하고 싶다. 성미산학교의 학부모들이 준하와 다른 아이들이 함께 노는 영상을 보는 장면이 나온 뒤로 곧장 이어 붙는 대목이다. 카메라는 길을 잃어버려 경찰차를 타고 집에 돌아온 준하를 보여준다. 영화를 통틀어 학교와 연관을 맺지 않는 유일한 장면일 것이다. 준하의 아버지가 경찰에게 상황을 확인받는 순간에 어색하게 서 있던 준하는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든 연출자에게 말을 건다. “호호(연출자 홍형숙 감독의 별명이라고 한다), 저 경찰차 탔어요.” 그런 준하의 말에 카메라 뒤의 연출자는 “그러네.”라며 다정하게 답해준다. 찰나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이 순간의 대화를 무척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이 부드럽고 아늑한 대화의 음성을 존중하기 위해서라면, 영화 전체의 구조 안에서 해당 장면이 이질적이라거나 연출자의 개입이 다소 돌출적으로 느껴진다는 염려는 굳이 들먹이고 싶지 않다.

카메라 앞의 출연자와 뒤의 연출자가 말 한마디를 주고받는 찰나의 교통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 우리는 <준하의 행성>이라는 영화가 두 가지 관계 맺기의 과정을 통과하는 작업임을 깨닫는다. 하나의 과정이 영화의 화면에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준하와 학교 구성원들이 공존하는 관계의 기록이라면, 다른 하나의 과정은 카메라를 든 연출자와 그의 시선 앞에 놓인 준하가 맺는 비가시적인 관계의 시간이다. 그것은 보편적인 영화의 아름다움과는 무관한 우정의 교환이다. 고다르가 말한 것처럼 영화적 아름다움이 현실에서 무방비하게 방치된 것에 시선을 비추는 형태로 출현한다면, 이 장면에서 실현되는 우정이란 현실의 관계에서 마련된 신뢰와 친밀함으로 영화에 작은 틈새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미학이나 형식의 차원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짧은 대화는 통상적인 아름다움을 초과한다. 우정의 시학은 쇼트의 논리로 발견하거나 구성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다른 행성에 의해 가려진 행성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불현듯 출현하는 잠정적인 몽타주의 논리이며 나아가 영화의 첫 장면에 나타난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감도는 미지성과 거리감을 극복해내는 작은 교직의 순간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준하의 행성>이 감행한 노정이란 바다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시작해 카메라 뒤편의 연출자에게 말을 거는 준하의 얼굴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복도의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준하의 얼굴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나치고 움직이면서 준하의 모습은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무수한 행성의 움직임이란 이런 것일까. <준하의 행성>은 정적인 개인의 풍경으로 시작해 집단의 움직임으로 끝난다. 개인의 얼굴을 다루면서 그 얼굴들이 서로 마주치고 충돌하는 광장의 작동을 보여주려는 시도는 특정한 결론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그저 바라본다는 행위가 가지는 간극적 체험이 우리를 맴돌고 있다. 우리는 마침내 카메라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준하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그의 경로가 우리가 바라보고 짐작하는 것보다 넓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예측할 뿐이다. 이 마지막에서 카메라는 바람이 불어오는 텅 빈 교실을 비추는 도입부의 장면에서 일찌감치 예견되었던, 마주본다는 것의 불안과 실패를 다시 한번 매혹적으로 반복한다.

<준하의 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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