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는 영화 속 비둘기 이름이다. 방송국에서 교양프로그램 ‘오늘의 과학’을 만드는 PD 서연(박지연)은 시청률 압박에 시달린다. 부장은 끊임없이 프로그램 폐지를 언급하며 시청자가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내라 요구하고, 결국 갈등하던 서연은 마술사(최영열)를 출연자로 섭외하여 현실과 타협하고자 한다. 한편, 고생하며 쓴 대본을 거절당한 서브 작가 수오(김동석)와 아직 PD로 등단하지 못한 은지(손은지)는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서브는 서브일 뿐”이라며 탄식한다. 그 와중에 마술사는 마술에 재차 실패하고, 날지 못하는 비둘기 ‘루비’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루비>에는 여러 개의 무대가 공존한다. 등장인물은 종종 현실 세계를 이탈하여 무대에 오르는 배우가 되거나 무대를 지켜보는 관객이 된다. 방송국 세트장이 현실 속 무대라면, 연극과 마술이 벌어지는 공간은 상상 속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커다란 사건보다는 현실과 상상, 과거와 현재가 뒤엉키며 영화를 구성해나가는데, 극 중 대사처럼 “이 모두가 거대한 연극”이며, 불안감에 휩싸인 인물들은 기이한 방식으로 앙상블을 이뤄낸다. 연극과 영화의 경계에서 새로운 실험을 펼친 <루비>의 박한진 감독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났다. 선정 소식을 듣고도 한참 믿지 않았다는 그는, 거듭 동료에게 감사를 표하며 지난 시간을 즐겁게 돌아봤다.
<루비>의 첫 상영 후 GV를 가졌다. 관객 반응은 어땠나.
관객과 만나고 나니 이제야 비로소 영화를 완성한 느낌이다. 어렵다거나 주제를 알아차리기 힘들다는 반응도 있었다. 아버지가 오셨는데 뭘 이야기하는지 놓쳤다는 감상평을 남기기도 하셨다. (웃음) 하지만 일단 대화를 시작해보니, 부모님이든 관객이든 나름대로 자신이 해석한 바와 매력을 느낀 지점을 설명하더라. 그런 점이 <루비>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내가 나서서 의미를 정의하기보다는, 감상하는 이에게 판단을 맡기는 편이 훨씬 좋은 경험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 상영작 감독 중 가장 낯선 이름이다. 주로 어떤 작업을 해왔는지 이력이 궁금하더라.
한국에 무척 오랜만에 왔다. 용인대학교 영화영상학과를 졸업하고 2010년에 유학을 떠났다. 현재는 피츠버그의 포인트 파크 대학 영화과에서 교수로 일한다. 미국에서 광고와 브랜드 영상 작업을 주로 해왔다. 대학 동기이자 친한 친구로 오래 알고 지낸 김승후 프로듀서에게 어느 날 전화가 왔는데, <루비> 시나리오를 이야기하며 “주변에 연출할 사람 없을까?”라고 묻더라. “나한테는 관심 없어?”라고 되물으면서 갑자기 영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웃음)
대학 졸업 후 한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대신 유학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당시 사운드 후반 작업 등 믹싱 쪽에서 일하다가 군대에 갔는데, 운 좋게 DVD 관리를 맡았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며 영화를 가리지 않고 봤다. 자연스레 연출을 좀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작업보다는 교육과 연구에 관심이 많았기에 유학을 결심했다. 현재 생활에는 만족하는 편이다. 학생들과 소통하며 계속 공부하는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 같다. 열정적인 학생들을 지켜보며 여러모로 자극도 받고 반성할 기회를 얻기도 한다. 사실 이건 당연한 건데, 나는 현장에서 한 번도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한 적이 없다. 학생을 가르치다 보니 내 기분대로 행동하기보다는 늘 표현을 점검하고 고민하게 되더라.

장편 극영화로는 <루비>가 데뷔작인 셈인가.
나뿐만 아니라 작가, 프로듀서, 촬영감독에게도 데뷔작이다. 김승후 프로듀서는 본래 포토그래퍼로 활동했고 브라질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다가, 최근 한국으로 돌아와서 영화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박지연 배우도 상당한 경력을 갖고 있지만 주연으로는 첫 작품이다. 다른 배우들은 연극을 하던 분들로 이전까지 영화에 출연한 경험은 없다. 함께 시작한다는 느낌을 공유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사실 촬영을 2주 앞둔 시점에 최종 시나리오가 나왔다. 스태프와 배우 모두 서로 좋아서 작업하지 않았다면, 완성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오랜만에 귀국해서 영화를 만든 소감은 어떤가.
찍는 동안 너무 행복했다. 미국에서는 아무래도 느끼기 어려웠던 정(情)이랄까, 혼(魂) 같은 것이 느껴졌다. 미국 현장의 개인주의적인 분위기는 일면 장점으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클라이언트를 위해 일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내 작품을 연출하고 싶다는 갈증이 생기더라. <루비>를 정말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촬영기간도 짧고 한국에서 작업하는 상황도 낯설었기에 시작 전에는 걱정이 많았다. 최근 한국 독립영화에서 주력하는 톤이나 정서가 무엇인지 고민하며 KBS1 <독립영화관>에서 방영된 작품을 전부 찾아보았을 정도였다. 결국 정확한 디렉팅을 고민하는 동시에, 최대한 동료들의 역량과 재능을 믿고 맡기자는 결론을 내렸다. 시작하는 사람과 숙련된 스태프가 공존하는 현장이었고, 각자 마음껏 능력을 펼치는 자리를 만들고자 했다. 끝나고 보니 서로 돕고 토론하는 과정 자체가 큰 힘이 되어 돌아온 것 같다.



201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동명 희곡을 원안으로 삼았다. 김명진 작가가 쓴 원작을 읽어보니, 캐릭터 비중이나 인물 관계 등 영화와 다른 점이 눈에 띄더라. 시나리오 작업과 연출 면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원작은 연극을 전제로 한 각본이어서 영화로 만들려면 고민할 부분이 있었다. 김승후 피디와 김명진 작가에게 동의를 구한 후 윤형섭 작가에게 연락했다. 윤 작가 역시 신춘문예로 등단한 ‘연극쟁이’인데, 함께 시나리오를 작업하며 방향을 많이 틀었다. 어쨌든 영화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고, 전체 흐름을 보았을 때 굴곡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동시에 연극이 지닌 느낌과 매력을 영화에도 가져가고 싶었다. 영화와 연극의 차이점은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크게 두 가지로 결론을 내렸다. 우선 영화는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화면에 담아낼 수 있지만, 연극은 콕 집어서 여기에 집중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 영화와 비교하면 훨씬 넓고 연속하는 장면이기에, 관객 각자가 그때 보고 싶은 것을 골라보는 셈이다. 영화에서도 그런 효과를 주기 위해 롱테이크를 자주 사용했다. 카메라를 일부러 노출하는 오픈된 동선을 시도했고, 객석 위치에 따라 시점이 달라지는 연극의 특성을 반영하여 구도 역시 화면 한쪽으로 치우치도록 잡았다. 두 번째 차이점은 기술이다. 영화가 하이 테크놀로지라면 연극은 로우 테크놀로지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는 드론이 사용되기도 하고 다양한 CG 작업도 들어가지만, 연극은 기술적인 힘을 빌리기보다 배우가 몸으로 표현하는 데에 집중한다. 영화에도 그런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를 드러내고자 했다. 예컨대 배우가 침대 위로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장면이 있는데, 처음에는 와이어를 달아야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사용하지 않았다. 배우가 직접 소화하는 모습이 훨씬 잘 어울리고 연극적인 느낌이 살아나더라.
김명진 작가는 각본과 제작에도 참여했다. 어떤 식으로 역할을 배분했나.
시나리오 작업까지 포함해서 전반적으로 김 작가의 참여도가 높은 작품이다. 신춘문예 당선 후에 한국콘텐츠진흥원 등에서 지원을 받았고, 내가 합류하기 전부터 김승후 피디와 함께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투자를 진행했다. 김 작가는 기본적으로 예술 영역에 관심이 많고 다른 매체에 관한 호기심도 크다. 원작이 지닌 예술성이 영화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루비>의 주요 공간적 배경은 방송국인데, 시청자가 접하는 텔레비전 화면의 바깥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방송 스태프가 경험하는 지리멸렬하고 반복적인 노동이 세밀하게 드러난다. 원안을 기반으로 하는 것 외에 따로 조사한 부분이 있나.
김명진 작가가 경험한 사실에 기반을 둔 내용이다. 김 작가가 방송국에서 과학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가 만든 작품은 지금도 ‘다시보기’로 볼 수 있다. 마술사가 등장하는 콘텐츠도 실제 방송된 적이 있다. 나와 김 작가, 박지연 배우 세 사람은 그때 방송을 다시 보면서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각자 방송, 연극, 영화 영역에서 과거에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회사와 동료 관계에서 느꼈던 어려움을 공유하는 과정을 거쳤다.
박지연 배우를 포함해서 출연한 배우 모두 굉장히 편안하게 연기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전부터 관계를 이어온 사이인가.
사실 15년 만에 한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막막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일정상 캐스팅할 시간조차 빠듯했다. 고민하다가 윤형섭 작가에게 “시나리오를 작업하면서 떠오르는 배우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로봇을 이겨라>라는 연극 영상을 보내주더라. 김동석, 손은지, 최영열 배우 모두 그렇게 알게 되었다. 세 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 경험이 없거나 또는 적지만 이미 연기 호흡을 맞춘 적이 있고, 박지연 배우는 100편 이상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한 베테랑이다. 네 배우가 서로 뭉치면서 힘을 나누고 조언을 주고받았다. 본인 촬영이 없는 날에도 매일 현장에 나와서 지켜보고. 자연스레 현장 분위기를 파악하고 공부해나가는 과정이 느껴졌다. 나 역시 배우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해라, 하지 마라, 하는 식으로 지시하기보다는 그들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감독이 되고 싶었다.
영화는 오프닝부터 일종의 화면 분할을 유지한다. 서연이 일하는 현장을 보여줄 때는 카메라 앞과 뒤, 그리고 카메라 모니터까지 3개 화면을 통해 담는다. 이 또한 앞서 말한 연극적 요소를 살리기 위함이었나.
극 중 촬영 현장과 연극 무대가 연장선에 놓인, 공존하는 공간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장치였다. 실제로 방송국 세트에서 촬영할 때 여러 카메라가 동시에 돌아가지 않나. 어떤 카메라는 정면을 잡는가 하면 어떤 카메라는 인서트를 딴다. 그런 콘셉트를 영화에 가져와서, 같은 시점이지만 다른 쇼트를 보여주도록 했다.



흑백화면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촬영감독이 먼저 제안했다. 현실과 과거, 상상의 경계를 가능한 한 모호하게 만들고 싶은데, 흑백으로 찍으면 그 모든 장면이 겹치고 묶이는 효과를 낼 것 같다더라. 더불어 영화가 결국 서연이 초고를 써 내려가는 과정임을 상기할 때, 가장 잘 어울리는 컬러라고 판단했다. 초고는 완벽히 가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이기에 늘 러프한 느낌을 주지 않나. 그런 느낌을 색깔로 표현하면 흑백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주변에서는 우려 섞인 이야기가 많이 들려 왔다. 심지어 가편집본이 나왔을 때도 컬러로 돌리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의견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촬영 전부터 흑백에 맞춰 컬러 테스트를 진행했고, 그에 따라 의상과 무대 등을 조율했기 때문에 되돌리고 싶지 않았다. 색부터 텍스처까지 꼼꼼하게 배치했기에, 도리어 컬러 화면이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영화가 공개된 지금은 많은 분이 호응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수오가 상자에 들어간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다. 꿈인지 현실인지 경계가 불분명하면서도 인물이 느끼는 압박감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전체 촬영 중 가장 진땀 흐르는 순간에 나온 장면이다. (웃음) 미술감독이 종이판을 여러 개 붙여서 상자를 만들었다. 촬영 전날 사이즈가 꽤 큰데 괜찮겠냐고 물어서 일단 알겠다고 했는데, 막상 가서 보니 속이 너무 빈 거다. 이걸 어떡하나 싶어서 “5분간 휴식”을 외치고 잠시 고민했다. 가만히 서서 상자를 지켜보는데 그 옆에 여분으로 남은 종이가 눈에 띄더라. 종이를 구겨서 채워 넣으니 괜찮은 것 같았다. 그때 지켜보던 미술감독이 종이를 돌돌 말기 시작했다. (웃음) 덕분에 수오가 고뇌하는 모습이 더욱 잘 드러났고, 영화를 본 관객도 인상 깊게 기억해주는 장면이 되었다.
앞으로 계획이 궁금하다. 개봉이 아닌 다른 형태의 상영방식을 고민할 것도 같다.
개봉하되 부산에서 시작하여 점차 서울로 확장해나가는 방식을 논의 중이다. 우선은 국내외 영화제 출품을 진행할 예정이다. 절실한 마음으로 <루비>를 만들었지만, 솔직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하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김승후 피디에게 연락을 받고 나서도 처음에는 안 믿었다. (웃음) 고생한 동료들과 함께해서 뜻깊은 시간이고, 이 작품을 관객과 이어준 모든 분에게 감사하다. 앞으로도 여러 관객을 만나서 이야기 나누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