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열매입니다
BIFF 2019 <찬실이는 복도 많지> 김초희
글 정지혜 사진 소동성 / Feature / 2019-10-05

영화 프로듀서인 찬실(강말금)은 인생의 기로에 서 있다. 인생의 모든 걸 쏟아 부은 프로듀서 일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그만둘 것인가. 단순히 직업을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내가 이 일을 정말 좋아했을까? 영화를 사랑하긴 한 건가? 영화 아닌 다른 삶이 가능할까?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 찬실은 미뤄온 질문을 던져야 하고, 뼈아프게 그 답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찬실은 비로소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는 영화 프로듀서로 오랫동안 일했던 김초희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다. 20대 시절부터 '영화'를 꿈꿔왔던 김초희 감독은 이 작품을 하나의 기점 삼아 연출의 길로 직진하려 한다. 영화 속 찬실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오랫동안 애정을 가졌던 프로듀서 일에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영화를 사랑하려는 출발선에 섰다. 그런 찬실의 혼란과 기대를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귀엽고 사랑스럽게 그린다. 그것이 가능한 데는 찬실을 비롯한 캐릭터들의 매력이 크다. 그들은 슬픔 속에서도 결코 유머를 잃는 법이 없다. 그 태연함이 영화의 재기만큼이나 반짝반짝 빛난다.

 

 

독립영화 프로듀서로서 오래 일하다 잠시 휴지기를 갖고 연출에 전념하기를 택했다.

2015년 7월쯤 프로듀서 일을 그만두고 무작정 캐나다로 갔다. 1년 정도 머물며 앞으로 영화 일을 계속할지를 생각했다. 그때 초심을 떠올렸다.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하던 20대 초반의 나를. 23살 때부터였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프로듀서로 오래 일하게 됐는데, 더 늦기 전에 연출에 집중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

 

꿈꿔 왔던 일을 하기까지 왜 그렇게 오래 걸렸나.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곧바로 그 길로 가면 되는데 너무 생각이 많았다. 정면으로 승부하지 않고 계속 언저리를 돌았다. 돌이켜보면 돈벌이를 해야 했던 이유도 크다. 고교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영화를 하겠다며 프랑스로 유학을 하러 갔을 때도 일을 쉬지 않았다. 영화를 하고 싶어서 영화가 아닌 다른 일을 많이 한 셈이다. 연출만 해서는 돈을 벌 수 없으니까. 그렇게 달려오다가 돌아보니 한순간 내 인생이 멈춘 것 같더라. 돈벌이가 그렇게 중요하냐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그러면서 영화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 마음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아 있는 건 영화를 하고 싶다는 그것뿐이더라. 이 길밖에 없었다. 절박했고, 간절했다.

 

캐나다 다녀와서 쓴 게 2017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공개한 단편 <산나물 처녀>(2016)인가.

그건 캐나다 가기 전에 썼다. 최근에 영화를 다시 보니까 정말 못 만들었더라. (웃음) 영화에 내 상태가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어쩌겠나. 그것 또한 나인 것을.

<산나물 처녀>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는 감독으로서의 본인의 현재적 고민과 앞으로 가야 할 방향에 대한 다짐이 상당 부분 반영된 것 같더라.

영화에 대한 마음의 불씨를 다시 지피려면 결국 나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나리오가 영화로까지 완성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등은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다시 영화를 하고 싶은 내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쓰고 싶었다. 2017년 4월부터 쓰기 시작해 1년 동안 고치고 또 고쳐서 시나리오가 완성됐다.

 

불씨가 제대로 지펴졌나.

영화로 만들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영화에 관한 평가 여부를 떠나서 나의 의지에 보답을 받은 것 같다.

 

일과 사랑 등 인생의 모든 면에서 위기와 좌절을 맞게 된 40대 여성 찬실 역에 강말금 배우를 캐스팅했다. 단편 <자유연기>(2018) 등에 출연해왔지만, 관객들이 강말금 배우의 연기에 집중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지난해 정동진독립영화제에 갔다가 강말금 배우가 출연한 <자유연기>를 봤다. <자유연기>의 인물과 찬실은 너무 다르다. 하지만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극 중에서 강말금 배우가 <갈매기>의 한 부분을 독백하는데 ‘아, 저 사람 내면에는 진짜가 들어 있구나!’ 싶었다. 찬실이가 누구보다도 자기 삶을 열심히 살아온 사람처럼 보이길 바랐다. 강말금 배우의 얼굴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것 같았다. 실제로 이야기를 나눠 보니 그녀 역시 배우 생활을 뒤늦게 시작했더라. 29살에 연기가 하고 싶어서 무작정 대학로로 가 연극 무대에 올랐고 그 후로도 상당히 오랜 시간을 견뎌온 사람이다. 자기 마음을 귀하게 유지할 줄 아는 사람인 거다. 또 일반 관객들은 프로듀서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를 수 있지 않겠나. 그래서 최대한 알려지지 않은 배우를 찾고 싶기도 했다. 덧붙여 나처럼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나와 비슷한 또래의 배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강말금 배우를 만났고 지금은 종종 소주 한잔 기울이는 친구가 됐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은 시련 속에 침잠하기보다는 엉뚱하고 귀여운 면모로 다시 일어서곤 한다.

사람에게 귀염성이 진짜 중요하다. 무뚝뚝한 사람도 귀여울 수 있다. 귀여우면 오래오래 볼 수 있다. 사람이 힘든 일을 겪어도 제 안에 귀여움이나 밝음이 있으면 좋은 기운을 뿜어낼 수 있더라. 또 귀여워야 사람들이 버리려다가도 한 번 더 돌아봐 주고, 밥 한 끼라도 더 사준다.

 

강말금 배우에게도 찬실의 귀여운 면모를 더 많이 요청했겠다.

강말금 배우의 진중함 속에서 귀여움이 나오길 바랐다. 그래서 촬영 때 강말금 배우에게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이 있다. ‘귀엽게, 애교 있게 해주세요. 사랑스러운 사람이 돼 주세요.’ (웃음)

 

찬실의 억양, 말투가 김초희 감독과 닮았다.

강말금 배우가 나를 따라 하려고 상당한 연습을 했다고 하더라. 스태프들도 그런다. 현장에 찬실이가 두 명 있다고. (웃음)

ⓒ소동성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찬실이라는 이름의 뜻이 있나.

빛날 찬, 열매 실. 빛나는 열매다. 나도 그렇지만 극 중 찬실도 영화를 오랫동안 했는데 뭔가 결실을 못 본 듯했다. 그런 이름을 지어주면 뭔가를 맺어볼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소망을 담았다.

 

찬실 주변 인물 중에 딱 봐도 <아비정전>(1990)의 장국영으로 보이는 귀신(김영민)이 등장한다. 찬실에게 영화에 대한 사랑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인물이다.

영화에서만 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보려 했다. 어릴 때 장국영을 정말 좋아했다. <천녀유혼>(1987)을 보고 반했다. 돌이켜 보면 장국영이야말로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였는데 한동안 잊고 살았다. 그런 의미로서 그를 다시 불러냈다.

 

영화를 좋아하던 때라고 하면 언제인가.

사실 고3 때까지만 해도 소설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안의 답답함을 표현하고 싶은데 그 방법밖에 없었다. 대학 가서도 열심히 글을 썼고. 그러던 차에 비디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영화를 많이 보게 됐고 보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이 하나씩 생겼다. 그때 본 영화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게 (이번 영화에서도 언급되는) <집시의 시간>(1989)이었다. 비디오 가게에 들어오는 영화로는 성에 안 차 연극영화과 다니던 친구들을 통해 해적판을 찾아서 봤고 그렇게 본 첫 영화가 (역시 이번 영화에서 언급되는)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1953)다. ‘영화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오히려 글 쓸 때는 방황을 많이 했는데 영화라는 미지의 세계로 가겠다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을 위로해주는 또 다른 인물로 윤여정 배우가 연기하는 찬실의 집 주인 할머니가 있다. 비록 남이지만 할머니라는 존재 자체가 힘든 찬실을 감싸 안아준다.

내가 할머니들에게 막연한 존경심을 갖고 있다. 모든 할머니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부지런히 살아온 할머니들에게는 그 어떤 철학자 못지않은 인생의 지혜가 있다. 몸으로 부딪쳐 체득한 세상의 이치다. 그것을 향한 존중의 마음을 담아 이 인물을 만들었다. 윤여정 선생님과는 특별한 인연이다. 선생님도 생계형으로 정말 오랫동안 연기를 이어오신 분이다. 아마도 그러면서 체득하신 선생님만의 지혜가 있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김초희라는 친구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한번 같이해보겠다고 마음을 내주셔서 내가 이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나로서는 행운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참 복도 많지. (웃음)

 

반면 찬실에게 또 하나의 시련을 안기는 인물이 있다. 소피의 프랑스어 과외 선생 김영(배유람)이다. 찬실이 용기를 내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해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인다.

찬실은 사랑에 목말라 있다. 그래도 나는 찬실이가 영에게 차이는 게 맞는 것 같다. 사람이 힘들면 누구에게라도 기대고 싶어지잖나. 그러다 보면 사랑에도 쉽게 빠지고. 또 그러다 보면 좋은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도 찬실은 용기를 내서 자기 마음을 고백했다. 사랑 앞에서 직진해야 한다. 나도 그렇다. 이제 뭐든 직진이다.

 

찬실은 다시 글을 쓴다.

당장 감독이 되고 안 되고가 문제라기보다는 글을 쓰는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글을 쓸 때만큼은 오로지 자기만의 시간이고 자기에로의 몰입이다. 찬실 역시도 글을 쓰면서 자기에게 계속 질문할 것이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나름의 대답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나.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제목의 곡이 마지막에 들어가 있다. 가사를 들어보니 집이며 돈이며 하나 같이 ‘없다’는데 그럼에도 ‘복이 많다’고 한다.

가사를 직접 썼다. 영화를 다 만들고 나서 보니까 찬실이는 복이 많더라. 뭔가를 많이 가졌다거나 생각지도 않은 행운이 찾아와서가 아니다. 인생의 크고 작은 위기가 어쩌면 찬실에게는 복이다. 비로소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게 뭔지를 생각해 보는 거니까. 나는 사람은 아픔 속에서 성장한다고 믿는다. 현실을 살아가면서 돈, 집, 차, 직업 등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지만,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려고 부단히 애쓰고 열심히 사는 것 자체가 복이기도 하다. 무엇이 없고, 부족한 가운데서 고군분투한다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과정에서 훨씬 더 많은 걸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말미, 찬실은 동료들과 전등을 사러 밤의 거리를 나선다. 그때 찬실은 동료들 뒤에 서서 랜턴을 비추며 “내가 비춰줄게”라고 한다. 이후 영화는 필름 모양을 한 터널을 지나 어느 극장에 도착하는데 이 일련의 과정이 영화를 향한 헌사처럼 보인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그 신을 만들었다. ‘내가 비춰줄게’라는 대사는 프로듀서로서의 내 직업에 작별을 고하는 말이다. 프로듀서로서의 일도 정말 사랑했으니까. 생각해 보면 프로듀서로서 일한 경험이 내게 좋은 인연을 만들어 줬고 그때의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 현장에서도 그나마 당황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경험이라는 건 없는 것 같다. 빛에서 시작하는, 영화라는 예술을 찾아 나선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극장 장면에서 상영되는 영상은 아직 우리에게 도착하지 않은 영화다. 영화를 향한 내 사랑을 담았다.

 

지금까지는 감독 자신의 반영적 캐릭터와 서사로 영화를 만들었다. 전혀 다른 방식의 작업을 해보고 싶지 않나.

정말 그렇다. 물론 장담이란 건 할 수 없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다. 무엇을 재밌게 할 수 있을까 자문해보니 내 안에 코믹함이 있더라. 물론 이때의 코믹은 비극을 품고 있다. 좋은 코미디는 그런 것으로 생각하니까.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해보고 싶다. 코미디로 장편 시나리오를 쓴 게 있다. 이것이 다음으로 가는 씨앗이 돼주길 바란다.

ⓒ소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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