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배후
BIFF 2019 <비밀의 정원> 박선주
글 차한비 사진 소동성 / Feature / 2019-10-03

정원(한우연)에게는 오래된 비밀이 있다. 살가운 남편 상우(전석호)와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수영 강사로 일하며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와중에도, 비밀은 정원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이따금 정원을 멈춰 세운다. 평온하고 평범했던 정원의 일상은 갑작스러운 전화 한 통으로 파열음을 내기 시작한다. 경찰은 10년 전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를 체포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사건 피해자인 정원은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영화는 성폭행 피해자에 따라붙는 여러 편견과 낙인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동시에 가해자 처벌로 일단락되지 않는 피해 경험의 지속성을 들여다보며, 당사자와 더불어 그의 주변에서 함께 감당하는 고통을 찬찬히 어루만진다. 박선주 감독은 전작 <너와 나의 거리, 1미터>(2011), <졸업여행>(2012), <미열>(2017) 등에서 언어화하기 어려운 순간의 감정을 스크린에 옮겨놓는 능력을 입증해왔다. 첫 장편영화인 <비밀의 정원> 역시 말이 없어지거나 또는 말로 할 수 없는 시간을 담아내며,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균열과 복구를 위한 노력을 담담한 어조로 그려낸다. 부산국제영화제 프리미어 상영을 앞두고, 박선주 감독을 만나 영화를 만든 시간과 마음에 관해 물었다.

 

 

2010년 무렵부터 꾸준히 단편을 연출해왔다. 첫 장편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는 소감은 어떤가.

스무 살 무렵 처음 영화제를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재학 중이던 학교를 통해 시네필 배지를 발급받았는데, 다시 보니 지난 시간이 생각나면서 재밌더라. 배지에 붙은 사진 속 내 모습이 너무 어려 보이기도 하고. (웃음) 당시 영화과 학생이었던 내 눈에는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이 마냥 대단하고 멀게 느껴졌는데, 10년이 지나서 감독으로 참여한다니 감회가 새롭다. 오랜 시간 단편영화를 만들고 운 좋게 여러 영화제에 가면서도, 그간 부산과는 인연이 없었다. 마음에 로망처럼 부산국제영화제가 남았던 것 같기도 하다. 고생한 배우와 스태프들에게도 기쁜 소식을 들려줄 수 있어 다행스럽다.

 

<비밀의 정원>은 2017년 공개한 단편 <미열>의 확장판처럼 보인다. 기본적인 스토리라인이 동일하고 주연을 맡은 한우연 배우와 전석호 배우 역시 그대로 출연한다. 단편 작업 당시부터 장편 제작을 염두에 두었나.

<미열>을 기획한 시점이 2015년 무렵인데, 그때도 이 이야기를 장편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학부 재학 시절부터 워낙 단편을 많이 찍었기 때문에 장편 제작에 관한 욕구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긴 호흡에서 풀어낼 이야기라는 판단도 들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고,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장편 작업하면서 중점에 두었던 건 <미열>에 너무 기대지 말되 전작이 지닌 장점은 살리자는 거였다.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도 없지만, 좋은 점마저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미열>은 하루 반나절 만에 벌어지는 이야기로, 아무래도 인물의 내면을 깊이 있게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주인공이 어째서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지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고자 했다.

<미열>
<비밀의 정원>

오랫동안 구상하고 고민한 노력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총 제작 기간과 전반적인 작업 과정이 궁금하다.

<미열>을 2016년 10월에 촬영했고, 끝나자마자 12월에 곧바로 <비밀의 정원>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사실 시나리오를 작업하며 1년 정도는 헤맸다. <미열>이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그보다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다. 같은 모티브로 시작했지만, 뭔가 다른 결로 확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비밀의 정원>은 정원을 중심으로 남편과 동생과의 관계가 중요하게 나오는데, 시나리오 작업 초반에는 정원을 폭행한 가해자의 딸이 등장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다 보니 영화에서 어쩔 수 없이 용서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의 교감을 그려내야 하는 상황이 왔다. 나로서는 진심으로 쓸 수가 없더라. 영화도 오히려 자극적으로 바뀌는 것 같고, 결국 ‘이건 아니다’ 싶어서 과감하게 접었다. 이후 방향을 전면 수정하여 시나리오를 완성했고, 2018년 6월 말에 프리 프로덕션에 들어갔다. 중간에 시간이 꽤 걸린 셈인데, 제작비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첫 장편이기에 완성도도 중요했고, 영화는 기본적으로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니까. 서울영상위원회와 인천영상위원회에서 제작지원을 받았고, 촬영은 2018년 9월에서 10월에 걸쳐 진행했다. 이후 최종적으로 부산국제영화제 ACF 후반작업지원펀드에 선정되면서 완성할 수 있었다.

 

두 주연 배우뿐만 아니라 염혜란, 유재명, 정다은 등 참여한 배우들 저마다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인지하고 제 자리를 착실히 지킨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만큼 고르고 안정적인 호흡이 돋보인다. 캐스팅 단계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나.

내가 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었다. 주연만 전면에 내세우고 조연은 말 그대로 조연인, 그런 기능적인 방식으로 배우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전사가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정원과 관계 맺는 등장인물 모두 저마다 아픔을 지닌 사람이라고 여겼다. 배우들과도 그런 부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역할 비중에 상관없이 모두 최선을 다해주었다. 캐스팅이 확정되고 나서 계속 수정을 거치며, 캐릭터를 최대한 입체적으로 만들어나갔다. 애초 이모부 역할은 좀 더 정원의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어른의 느낌이었는데, 유재명 배우가 캐스팅되면서 상우와 흡사한 느낌을 주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염혜란 배우는 전작에서 보자마자 ‘이 사람이다!’ 싶었다. 이모를 어떻게 그려야 할지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는데, 정원의 이모가 이런 사람이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더라. 두 배우 모두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어 참여해줬고,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고민했다. 정다은 배우는 굉장히 흡수력이 뛰어나다. 디렉션 이해도도 높고 집중력도 좋아서 촬영장에서도 편안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비밀의 정원>
<비밀의 정원>

영화는 대사를 통해 상황을 전개해나가는 대신, 오히려 침묵의 순간에 집중하며 감정을 쌓아간다. 배우에게는 시나리오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연기 연출에서는 어떤 점에 집중했는지 듣고 싶다.

장면마다 감정이 조금씩 변하는데, 이 부분을 잘 표현해내는 것이 중요했다. 흔히 성폭력 피해자라고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이미지로 정원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나를 포함해서 배우들 모두 노력했다. 어조나 몸짓 같은 요소에 의해 자칫 잘못하면 정원이 너무 애처로워 보인달지 죄인처럼 보인달지 하는 방식으로 타자화될 위험이 있었고, 리딩 단계부터 촬영 현장에서까지 이 부분을 원칙으로 놓고 검토했다. 사실 연기 연출에 관해서 고민을 정말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작업하면서도 그랬고, 끝나고 난 지금까지도 제일 어려운 부분이다. 현장에서 감독이 어떤 목소리와 톤으로, 어떤 언어를 사용해서 연출할 것인지 고민스럽더라. 내가 원하는 바를 전달하고 설득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과거 단편을 찍을 때는 어미 하나까지 일일이 확인하고 지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게 진행할 수는 없다는 판단이 서더라. 이번 현장에서는 뉘앙스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했다. 배우들은 연기하는 신에 집중하다 보니, 전체 흐름을 놓칠 때도 있다. 그 중간에서 자연스럽게 감정이 흘러가도록 연결을 고민했다.

ⓒ소동성

그동안 단편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 온 한우연 배우는 <비밀의 정원>을 통해 장편 데뷔한다. 어떤 점에 확신을 얻었나.

<미열>에서 만난 한우연, 전석호 배우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나지 않았다. 가장 잘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고, 실제로 촬영을 준비하며 대화를 나눌 때도 훨씬 수월했다. 사실 처음 한우연 배우에게 제안했을 때는 거절 의사가 돌아왔다. 프리가 짧았기에 준비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고, 어렵게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했다. 근데 나는 포기가 안 되더라. (웃음)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에도 계속 떠올려온 배우였기 때문에, 다시 한번 고민해달라고 설득했다. 결국 한우연 배우가 마음을 돌리면서 정원이라는 인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시나리오를 쓸 당시에는 정원과 상우 두 사람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점점 극 중심에 놓이는 인물은 정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촬영하면서도 ‘이건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정원의 이야기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한우연 배우가 영화를 잘 이끌어줬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을 영화의 출발로 삼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10년 만에 검거된 성폭행범을 다룬 인터넷 기사를 보았다. 머릿속에 ‘그럼 피해자는 어떤 상태일까?’ 하는 의문이 스치더라. 과연 범인이 잡혔다고 해서 기쁠까. 잊고 싶은 과거였을 텐데, 이전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오히려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 여러 생각이 떠오르면서 자연스럽게 현재를 살아가는 피해자의 아픔과 트라우마에 관심이 갔다. 그 여자가 결혼했다면 가족에게 말할 수 있을지, 피해사실을 밝혔을 때 과연 관계는 변함없이 그대로일지도 의문스러웠다. 그런 생각이 깊어지다 보니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그 과정에서 피해 사건을 재연하거나 피해자와 가해자를 대면시키는 방식이 아니어도, 피해의 현재성을 담아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 같다.

처음에는 어떻게 인물에 접근해야 할지 너무 무겁고 어렵게만 느껴졌다. 나 역시 성폭행 피해자에 관한 선입견이 있던 거다. 정신적 상처와 트라우마를 다룬 책이나 사례집을 여러 권 읽으면서, 영화의 방향을 잡아나갔다. 물론 사건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왜 성폭행 피해는 마치 ‘씻을 수 없는 상처’처럼 말해질까. 영화가 이야기하는 고통스러운 사건이 꼭 성폭행에 제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겪고 살아가는데, 어떻게 그 힘든 시간을 견디고 지나오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쉽게 인물의 감정이나 상태를 단정 짓지 말자고 결심했고, 단순히 힘들 거야, 슬플 거야, 이렇게 말하는 건 무책임하다고 느꼈다. 생각해보면 장례씩을 치르고 나서도 며칠 후면 회사에 출근해서 일하지 않나. 내적으로는 요동치고 있겠지만, 겉으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유지하는 면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안에서 인물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 고민해보니, 자극적인 장면을 배제하는 것이 옳겠다고 여겼다.

<비밀의 정원>
<비밀의 정원>

집이라는 공간이 자주 등장한다. 정원과 상우는 이사를 준비하고, 정원은 오랫동안 엄마와 동생이 사는 고향 집에 내려가지 않는다. 이모 집은 익숙한 공간이지만, 정원 자신이 머무를 장소라고 느끼지는 않는 듯 보인다. 정원에게 집은 어떤 의미라고 생각했나.

처음엔 이사라는 상황 설정이 없었는데, 두 인물에게 미션을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감정에 접속할 수 있는 지점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이사를 떠올렸다. 사건이 벌어진 와중에 함께 미래를 꿈꾸고 준비하는 모습이 아이러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시나리오 초고를 쓸 때는 거의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데, 나중에 보니 집이라는 공간이 되게 많이 나오더라. (웃음) 원제는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동명 영화가 있기도 하고, 중의적이면서도 동화적인 제목이 좋겠다는 생각에 <비밀의 정원>으로 변경했다. 정원은 10년 전 사건으로 인해 고향이라는 근본적인 공간을 상실한 인물이다. 이모 집에 살면서도 편안하지만은 않았고, 상우와 이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건이 시작되며 결국 집이라고 느낄 만한 공간을 오랫동안 갖지 못한다. 마지막에 고향 집에 돌아가면서 조금이나마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정원에게도 따뜻한 공간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영화제를 앞두고 긴장과 함께 후련한 기분도 들 텐데, 향후 계획은 어떻게 되나.

이렇게 후반 작업이 늦게 끝날 줄 몰랐다. 몇 년 동안 같은 작품에 매달렸기 때문에, 이제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 인물과 아픔을 공유하다 보니 심적으로 힘들기도 해서, 다음 영화는 정반대의 분위기로 가볼까 싶다. 농담처럼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 거라고 말은 해보는데, 과연 될지 모르겠다. (웃음) 장르영화에 관심이 많다. <비밀의 정원>도 관객들이 밋밋하게 느끼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런저런 장르적 시도를 해봤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영화제 상영을 마치면 배급사를 적극적으로 알아보려고 한다. 일단 내년 개봉이 목표다.

ⓒ소동성

 

비밀의 정원 | 2019 | 114분 |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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