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매력적인 스포츠다. 투수는 던지고 포수는 받으며 타자는 치고 달린다. 이렇듯 단순한 행위 사이에 복잡한 두뇌 싸움이 결합하며, 시합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길 위에 놓인다. 선수는 저마다 신체 능력을 키우고 상대 팀을 연구하지만, 진짜 경기는 ‘9회 말 2아웃’부터라는 말이 있듯 승리의 흐름은 한순간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아마도 최윤태 감독,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주수인(이주영)이라는 인물은 야구의 이런 점에 매료되지 않았을까.
수인은 리틀 야구단 시절부터 ‘천재 야구소녀’로 유명했으나,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현재는 어느 프로팀도 눈여겨보지 않는 ‘강속구를 못 던지는 투수’일 뿐이다. 입단은커녕 트라이아웃조차 거부당하는 상황에서 가족과 선생은 그만두라고 만류하지만, 수인은 포기할 마음이 없다. 남성 주류인 스포츠 영역에 도전해온 수인에게 안 된다는 말은 익숙하다. 여자라서 못한다는 편견과 여자치고는 잘한다는 비하를 견디며 실력을 증명해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설 자리가 막막해진다.
그 무렵 학교로 부임해온 최진태 코치(이준혁)는 수인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꿈을 지켜내려는 수인의 노력에 힘을 보탠다. 이제 수인은 마운드에 설 때 자신의 성별은 단점도 장점도 아니라고 단호히 말한다. 야구선수로서 그의 인생 역시 야구와 마찬가지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야구소녀>는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파노라마 부문에서 상영되는 최윤태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이주영, 이준혁, 염혜란 등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2007년 무렵부터 영화제를 통해 작품을 소개해왔다. 오랫동안 장편 연출을 진행하고자 했을 테고, 드디어 첫 장편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는다.
솔직히 기분이 막 좋다기보다는 겁이 난다.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기대한다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 소재가 특이해서일 수도 있고, 팬이 워낙 많은 배우가 출연하다 보니 시선이 주목되는 것도 같다. 예산 규모가 크지 않은 작품이고, 나로서는 볼 때마다 아쉬운 점이 눈에 들어온다. 하고 싶은 걸 거의 못 했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운 정도였다가, 공개할 시점이 다가오니 두려움으로 느껴진다. 말 그대로 삼백 번쯤 돌려본 것 같은데, 계속 보니까 이제는 영화가 정말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도 모르겠다. (웃음) 그래도 상영 소식을 듣고 스태프와 배우들이 많이 기뻐해서 만족하기로 했다. 관객들이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
고교 야구 선수 수인(이주영)이 프로야구 진출에 도전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스토리이지만 주인공을 여성으로 설정하면서 여러 드라마가 결합한다. 시나리오 개발은 언제부터 진행했나.
2017년 7월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와이프가 인터넷에서 우연히 야구를 하는 소녀의 인터뷰를 읽고는 굉장히 안타까워하더라. 아무리 열심히 하고 또 잘한다고 해도,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프로야구는 남성 선수만의 영역처럼 보이니까. 나는 NBA를 즐겨 보는데 마침 그때가 드래프트 시즌이었다. 문득 ‘저 소녀가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 드래프트를 경험하는 이야기를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고는 여성 인권에 초점을 맞춘 시나리오였는데, 퇴고를 거치며 주제를 좀 더 포괄적으로 넓혀 나갔다. 이후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과정으로 영화를 찍게 되면서 예산 규모와 촬영 시기 등이 정해졌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과정 12기 출신이다. 멘토링이 혹독하다고 들었는데, 시나리오 피드백 과정에서 가장 고민스러웠던 지점은 무엇인가.
멘토링 때 “수인에게 공감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수인이 왜 이렇게까지 고군분투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어떻게 보면 멘토링을 하는 교수님들은 이 영화의 첫 번째 관객이지 않나. 그들조차 공감할 수 없다면, 영화가 완성된다고 하더라도 관객에게 가닿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인의 상황과 감정을 잘 전달할 방법에 관해 한참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수인이라는 캐릭터와 나 자신이 많이 닮았다는 걸 발견했다. 나는 언어장애가 있고, 학력도 고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관련하여 그동안 영화를 만들면서 어려움을 겪어 온 부분이 있다. 그런 내 모습이 수인과 연결되더라. 수인을 통해 여성 인권에 관한 이야기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가로막는 사회적 편견을 폭넓게 들여다보고자 했다.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야기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최근에 만든 단편 <가슴의 문을 두드려도>(2016)에는 축구부 소년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야구소녀>와 전혀 다른 서사임에도, 운동하는 10대 청소년이 등장한다거나 아이와 어른의 세계가 충돌한다는 점 등이 공통적으로 읽힌다.
꼭 운동선수를 주인공으로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개인적인 경험이 반영되는 것 같다. 축구부가 있는 학교에서 10대를 보냈거든. 사실 야구에 관해서는 이전까지 큰 관심이 없었다. <야구소녀> 작업하는 과정에서 야구 관련 기사, 책, 논문 등을 열심히 찾아보며 공부했다. (웃음) 아이와 어른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 또한 어릴 적 경험에서 오지 않나 싶다. 청소년기에는 학교생활이 항상 어려웠다. 장애도 있고, 공부도 정말 못 했거든.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영화감독이 되기를 꿈꾸었는데, 많은 이가 응원을 보내기보다는 포기하라고 만류했다. “너는 안 될 거야”라는 말을 수인만큼이나 자주 들으며 자랐다. 계속해서 편견이나 차별을 드러내는 영화를 만드는 데에는 그런 영향이 있지 않나 싶다. 예를 들면 수인은 “구속이 느리기 때문에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사실 강속구가 경기의 승패나 투수의 가치를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는 될 수 없다. 그런 지점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판단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히 수인을 중심으로 세계를 이분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세대별 여성을 등장시키고 싶었다. 이주영 배우가 10대와 20대를 대변한다면, 이채은 배우가 연기한 교사는 30대를 보여주고, 엄마 역할의 염혜란 배우는 4-50대 여성을 그려낸다. 수인은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으려 애쓰고,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교사는 수인을 응원한다. 누구보다 딸을 아끼지만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엄마는 수인의 길을 반대한다. 세 사람 모두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시대의 피해자로서 서로 아픔을 공유한다고 보았다.


전작을 보면서 로맨스에 관심과 재능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장편을 만든다면 그런 강점을 극대화하지 않을까 했는데, <야구소녀>에서는 수인을 향한 정호(곽동연)의 애정을 뉘앙스 정도만 전달한 느낌이다.
시나리오 피드백 과정에서는 두 사람을 연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남녀가 나온다고 해서 굳이 연인으로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정호에게 수인은 오랫동안 함께 야구를 해온 친구이자 동료로서, 과거를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고 해서 충분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동시에 정호는 수인에게 일종의 부채감 또는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정호 입장에서는 생각 없이 툭 내뱉은 말이나 행동이 수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나. 현실에서도 비슷한 일이 종종 일어난다고 보았다. 나 역시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 수 있고, 한 번쯤은 짚어주는 장면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정호라는 이름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가 있나. <가슴이 두드려도>, <시험 비행>(2012)에 이어 <야구소녀>에도 정호가 등장하더라.
제일 좋아하는 소설의 남자 주인공 이름이다. (웃음)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나름 작명에 시간을 들여 고민하는 편이다. 말하자니 부끄러운데, 수인이라는 이름은 한자로 빼어날 수(秀)에 사람 인(人)을 쓴다. 본래 타고난 능력이 빼어난 사람이라는 의미로 지었다. 달릴 주(走)는 성에 쓰지 않는 한자이지만, 수인과 가장 잘 어울리는 글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주수인으로 정했다. 이름을 짓고 나면 계속 불러본다. 발음할 때 느낌은 어떤지, 받침이 있을 때와 없을 때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 이번에도 혼자 “수인아” 하고 여러 번 불러보며 시나리오를 마무리했다. (웃음)
캐스팅이나 로케이션 등 프리 프로덕션 과정이 만만치 않았을 듯하다. 특히 SK와이번스의 협력은 영화에 큰 힘이 되었는데, 진행 과정이 궁금하다.
전체 작업 과정 중 가장 애타고 가슴 졸이던 부분이다. 시나리오 쓸 때는 겁 없이 다 쓰지 않나. 야구장이 나온다, 공장이 나온다, 하는 식으로. 온정준 프로듀서를 포함해서 스태프들이 정말 고생 많이 했다. 나는 기획안을 만든 정도이고, 실제로 찾아가서 부탁하고 설득하는 역할은 프로듀서가 맡았다. 다행히 가장 처음 접촉했던 SK구단이 흔쾌히 수락해주었고, 여러 면에서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다. 우리끼리는 “역시 우승팀은 다르다”며 기뻐했다. (웃음)
수인은 극을 이끌어가는 인물로서 연기력, 매력, 체력 등 다양한 능력을 충족시켜야 했다. 이주영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와 과정이 궁금하다.
보통 가상 캐스팅을 해두고 시나리오를 쓰는데, 이번 작품에서 수인 캐릭터는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더라. 어떤 배우가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막막했다. 캐스팅 과정에서는 여러 배우와 미팅을 거쳤고 오디션도 진행했다. 그러다 이주영 배우와 미팅할 기회가 생겨서 만났는데,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이 사람이다!’ 싶었다. (웃음) 미팅만 예정된 자리였는데, 바로 같이하자고 제안했다. 내가 바라는 이미지, 연기, 운동능력 세 가지를 모두 갖춘 배우였다. 캐스팅 후 이주영 배우는 캐릭터를 굉장히 적극적으로 고민해주었다. 어떻게 하면 수인이가 주체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갈 수 있을지 여러 차례 논의했다. 자칫 최 코치가 수인을 이끌어준다는 느낌으로 표현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고, 그렇게 보이지 않기 위해 연기 톤이나 대사 한 문장까지도 신경 써서 검토했다.
수인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도 우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태도가 느껴지더라.
맞다. 사실 시나리오에는 “아이처럼 엉엉 운다”고 표기했던 장면이다. 근데 이주영 배우가 말하길, 수인이라면 그렇게 울지 않을 거라고 하더라. 일단 시나리오에 적힌 감정은 생각하지 말고 원하는 대로 해보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촬영한 첫 테이크가 영화에 들어갔다.
대역 없이 모든 장면을 소화했다고 들었다.
촬영 전 두 달 가까이 트레이닝을 진행했다. 아주 긴 시간도 아니었는데, 이주영 배우가 기대 이상으로 해냈다. 워낙 운동신경이 뛰어나기도 하고, 그만큼 노력해주기도 했다. 덕분에 한 컷도 대역을 쓰지 않고 배우가 직접 연기했다.


여자 야구선수는 그 자체로 희귀하다시피 한 존재다. 캐릭터를 구상하며 레퍼런스로 삼은 인물이나 작품이 있다면.
실제 90년대에 국내 최초로 고교 야구부 선수에 입학한 여자선수가 있다. 안향미 선수가 그 주인공인데,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참가한 최초의 여성 선수이기도 하다. 안 선수의 인터뷰 자료를 찾아보면서 참고했다. 한편 극 중 수인의 구종 변화에 따른 구속을 묘사할 때는, 현재 두산베어스 소속 투수인 유희관 선수의 기록을 기준으로 삼았다. 유 선수는 평균 구속이 130km/h정도인데, 제구력과 볼 회전력이 높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이준혁 배우가 코치로 등장한다. 극 초반에는 수인과 대립하지만, 점차 든든한 조력자로 나서며 수인을 둘러싼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이다. 이준혁 배우의 어떤 면이 인물을 소화하기에 적절하다고 판단했나.
원래 시나리오에는 최 코치를 50대 중반 정도로 설정했는데, 이주영 배우가 캐스팅되고 나서부터는 전체적인 밸런스를 고민하며 40대까지 캐릭터 연령을 낮추었다. 사실 이준혁 배우와 미팅하기 전에는 걱정이 많았다. 키도 크고, 너무 잘생기지 않았나. 화면에 들어왔을 때, 과연 잘 어우러질까 싶더라.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만났는데, 이준혁 배우 역시 대화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확신이 들었다. 이준혁이라는 사람이 지닌 진솔하고 선한 면이 강력하게 느껴졌다. 내게 울림을 주는 부분이 있었고, 이주영 배우와 마찬가지로 처음 만난 그날 바로 캐스팅을 제안했다. (웃음)
영화는 성공도 실패도 아닌 ‘진행 중’인 상태로 끝맺는다. 수인의 마지막 표정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엔딩을 많이 고민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 나는 작가로서 인물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 그에게 친구가 필요하면 친구를 만들어주고, 그런 방식을 통해 관객들도 함께 위로받기를 바란다. 근데 <야구소녀>에서는 수인이가 원하는 바를 온전히 들어줄 수가 없더라. 영화에서야 어떻게든 그려낼 수 있겠지만, 그게 정말 수인에게 행복한 엔딩인지 의문스러웠다. 지금 눈앞에 놓인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결국 아무리 영화라고 해도, 마냥 기쁘고 희망차게 끝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끝난 후 극장을 빠져나가는 관객들이 현실을 돌아보고, 수인을 응원해주길 바랐다. 그래야 현실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수인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지 않을까 싶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