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덫, 심연의 끝
BIFF 2019 <경미의 세계> 구지현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Feature / 2019-10-02

수연(김미수)은 20대가 되자마자 홀로 서울에 올라왔다. 배우가 되기를 꿈꾸지만, 극단 아르바이트와 단역으로 생활을 이어가는 형편이다. 어느 날, 수연은 난데없는 전화를 받는다. 수화기 너머 낯선 여자는 할머니 영순(이영란)의 전셋집을 비워 달라고 통보한다. 수연은 제 일이 아니라며 할머니와 직접 이야기하시라 대꾸하는데, 이 과정에서 영순이 요양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수연은 하는 수 없이 통영으로 내려간다. 그곳에는 7년 동안 뒤돌아보지 않았던 고향과 할머니, 그리고 사라진 엄마를 둘러싼 기억이 남아 있다.

<경미의 세계>로 장편 데뷔한 구지현 감독은 그동안 단편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여성과 여성이 맺는 관계를 탐구해왔다. <아줌마>(2016)에서는 입주 도우미 아줌마와 젊은 부부의 딸인 소녀를, <미용실>(2015)에서는 의도치 않게 경쟁상대가 되어버린 두 보조 미용사를 중심으로 믿음과 의심을 반복하는 권력 갈등을 들여다보았다. <경미의 세계>에서 이러한 시선은 확장되며 훨씬 집요해졌다. 특히 엄마라는 부재한 대상을 두고 서로의 기억을 다투는 할머니와 손녀의 힘겨루기는 영화를 진행해나가는 가장 큰 동력이자, 하나의 세계를 이뤄내는 기묘한 방식을 설득해낸다. 오랜 고민 끝에 영화를 완성하고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을 앞둔 구지현 감독을 만났다.

 

 

오래된 응어리를 깊게 파헤쳐가는 작품이다. 어떻게 시작한 작품인가.

강한 욕망을 추구하는 인물을 좋아한다. 영화를 통해 그런 인물이 깨지고 깨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고, 그 과정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데 이번 주인공은 어떻게 보면 ‘나를 가장 슬퍼하는 나’인 것 같아서, 이건 무슨 의미일까 싶더라. 내레이션이나 문어체로 된 대사 등 나로서는 전작과 다른 시도를 해본 작품이기도 하다. 지금은 고민되는 부분이 새로 생기기도 했는데, 오히려 시작은 명확했다. 실제로 외할머니가 요양병원에 계셔서 뵙고 온 날이었다. 시나리오를 쓰려고 카페에 들어갔는데, 문득 이렇게 얼마짜리 커피를 마시고 누군가를 만나는 내 평범한 일상을 할머니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할머니가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짐작할 수 없고, 우리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좁히기 어려울 만큼 멀어졌다고 느꼈다. 그런 생각으로 출발해 처음에는 단편 시나리오를 썼고, 점점 장편으로 발전해나갔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고비에 쓴 시나리오이기에 개인적인 변화가 담긴 것도 같다.

 

그간 세상과 불화하는 여성을 꾸준히 카메라에 담았다. 성별‧계급‧자본 등 권력 내 하위에 위치한 여성이 겪는 갈등을 표현해왔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가족에 집중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중 엄마를 영화에서 사라지게 만들고, 할머니와 손녀 관계에 주목한 점이 인상적이다.

최근 엄마라는 존재에 관해 관심이 커졌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모녀 관계가 나름의 방식대로 복잡하기도 하고, 30대가 되면서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엄마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엔 몰랐는데, 어느 순간 엄마와 내가 되게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릴 적에는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엄마가 멀게 느껴졌고, 내게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한 엄마를 보면서 집착에 가까운 이상한 감정을 갖기도 했다. 낯선 건 무섭고, 무서우면 화를 내게 되니까. 근데 자라고 나니 나에게서 엄마가 보이더라. 그런 엄마라는 대상이 영화에서 부재한다면 어떨지 궁금했고, 그로 인해 할머니와 손녀가 갈등하는 상황을 그려내고자 했다.

<경미의 세계>
<경미의 세계>

남편, 아버지, 남자친구 등 남성 존재는 의도적으로 제한했다는 인상이다.

맞다. 이야기에서 중요하지 않은 부분인데, 굳이 남성 역할을 등장시켜야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영화에 나오는 아동극 공연장, 요양병원 등 배경 자체가 기본적으로 여성이 많은 공간이기도 하다. 억지로 그중 누군가를 남성 캐릭터로 설정하고 싶지 않았다. 배역뿐만 아니라 스태프를 꾸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부와 대학원까지 오랜 시간 영화학교에서 공부하고 현장을 경험하면서, 여성 스태프가 많은 촬영장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운 좋게 내게 기회가 주어졌으니, 가급적 여성 영화인이 많은 현장을 만들고 싶었다. 사실 시나리오 피드백 과정에서 남자들로부터 질문을 많이 받았다. 시나리오에 성별을 표기하지 않았더니, 누가 아빠인지 무척 궁금해하면서 결국 수연이 일하는 극단 감독을 지목하더라. 수연이 ‘여배우’이니까, 당연히 연출은 남성이라고 생각한 거다. 남성 중심적인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를 소모적으로 쓰듯, 내 영화에 남성 캐릭터를 그런 식으로 출연시키고 싶지 않았다.

 

소위 사회에서 ‘미친년’으로 취급당하는 존재가 여러 번 등장하고, 수연은 불안과 공포, 연민 등 복합적인 감정을 느낀다. 이렇듯 타자화 된 존재를 영화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수연은 경미를 모른다.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지만, 왠지 잘 지내지는 못할 것 같다고 짐작할 따름이다. 자연스레 미친 여자들을 보면서 엄마를 떠올리고, 자신의 미래를 겹쳐 보기도 한다. 개인적인 관심이기도 한데, 가끔 길을 걷다 보면 그런 이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들의 돌발에 가까운 행동을 마주할 때, 왠지 과거가 궁금해지더라. 영화에 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수연이 미친 여자를 목격하는 시점은 통영에 내려가면서부터다. 서울에서는 과거를 다 지우고 살아가기 때문에 보이지 않다가, 고향에 도착하는 순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수연과 영순 사이를 연결하고 혹은 단절시키는 존재인 경미는 실종 상태다. 그런데도 제목에는 경미라는 이름을 가져왔다.

원래는 <영순의 세계>라는 제목이었고, 수연이 할머니의 세계를 추적해가는 이야기였다. 몇 년간 작업을 진행하면서 시나리오가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촬영할 때까지도 원제를 그대로 쓰다가 후반 작업하면서 변경했다. 더는 ‘영순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니라, 어떻게든 경미의 세계에 다가가려는 수연과 영순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는 경미의 세계에서 앞으로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구지현 ⓒ이영진

할머니는 작가이고 손녀는 배우다. 어머니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나오지 않지만, 방에 남은 그림을 보면 화가로 추정되기도 한다. 여성 삼대 모두 예술가인 동시에,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열등감 내지 소외감과 싸운다. 캐릭터를 만든 과정이 궁금하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저마다 방어기제를 만드는데, 유년 시절 수연에게는 그 방어기제가 거짓말이었다고 설정했다. 누구나 본 모습과 다른 얼굴을 연기하며 살아가지 않나. 말하자면 수연은 좀 더 적극적이었던 거다. 영순과 싸울 때 드러나는 신경질적이고 날 선 모습을 가리기 위해 연기를 시작했는데, 그것을 수연 자신의 꿈으로 착각하며 배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영순의 경우, 영화 후반부에 밝혀지는 내용으로 볼 때 작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미는 그림을 그렸을 수도 있고, 글을 썼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로 미스터리한 인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적을 감춘 뚜렷한 이유가 없기에, 영순과 수연이 더 미쳐버릴 것만 같은 상황에 빠지는 것 아닐까.

 

극 중 영순의 책이나 수연이 참여하는 연극은 모두 직접 창작한 것인가.

맞다. 근데 나는 스크립트를 썼을 뿐이고, 사실 미술감독과 연출팀을 포함한 스태프들이 완성해준 장면이다. 어떻게든 영상화하기 위해 다들 고생을 많이 했다. 현장에서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순간도 있고, 연출로서 영화의 모든 부분을 알 수도 없다.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최대한 많이 생각해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이영란 배우와 김미수 배우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돋보인다. 시나리오를 읽은 후, 배우들의 반응은 어땠나.

예전부터 같이 작업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배우들이다. 김미수 배우는 지금까지 영화보다 연극을 주로 했는데, 볼 때마다 정말 연기를 잘하는구나 싶었다. 이영란 배우는 <철원기행>(김대환, 2016)에서 인상 깊게 보았다. 사실 배우들이 시나리오를 어떻게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두 배우 모두 흔쾌히 수락해주었고, 각자 인물에게 이입할 만한 지점을 찾아내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처음에는 연기 연출을 디테일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두 배우에게 맡기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사전에 함께 이야기를 나눈 부분도 있고, 시나리오 해석력과 연기력이 워낙 훌륭한 배우들이라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수연과 영순이 병실에서 나누는 대화는 마치 무대 위에서 경합하는 2인극처럼 보인다. 얽히고설킨 애증이라는 감정을 대사로 풀어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

둘의 대화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비슷하게 흘러왔다고 생각했다. 상대를 향한 에너지가 부드러웠던 적은 없는 거다. 시나리오는 훨씬 길었는데, 실제 촬영본을 3분의 1 정도로 편집했다. 꽤 길긴 하지만,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그 시간을 좀 버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반감을 갖는 상대가 있고, 그와 말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아찔해지면서 왜 이렇게까지 싸우는지 모르는 상태를 맞닥뜨리지 않나. 그럼 정말 대화가 아니라 감정만 남는 상황이 된다. 배우들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동어반복적인 말다툼에서 적대시하는 감정에 휩싸이면, 각자 자리에서 움직임 없이 말만 하리라고 생각했다.

<경미의 세계>
<경미의 세계>

극 중 많은 부분이 물음표로 남겨진다. 특히 기억이라는 주제를 놓고 볼 때, 영화는 과연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끝내 확증하지 않는다.

기억이 그만큼 불명확하고, 지나고 나면 손에 잡히는 게 없지 않나. 영화 안에서 예쁘게 마무리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삶에서는 어떤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는데, 왜 영화 속 인물에게 그런 시간을 만들어주어야 하나 싶었다. 기억은 그토록 연약하고, 공유할 사람이 없으면 점차 희미해진다. 집도 없고 영순마저 사라진다면, 이제 수연은 ‘정말 경미가 있기는 했나?’ 싶어질지도 모른다. 보통 내밀한 기억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은 가족인 경우가 많은데, 그 관계가 지속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여러 고민을 거쳐 완성한 작품이다. 완성한 다음 볼 때는 어떤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들어오던가.

수연이 영순과 다툰 후 폐조선소 안으로 들어가서 크레인을 보는 장면, 그리고 영순이 경미의 편지를 읽다가 베끼기로 결심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이유를 딱 집어 설명할 수 없는 충동에서 비롯된 행동이고, 지켜보는 사람 없이 혼자 겪는 아주 사적인 순간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가.

영화는 분명히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두 시간 정도 갇힌 채로 누군가의 삶을 봐야 하는 거니까. 그 누군가가 평소에 보기 싫거나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면 좋겠다. 관객을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만들겠다는 뜻이 아니라,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존재를 좀 더 보여주고 싶다. 그들의 일상이나 삶을 보여주지 않으면 영원히 배제될 테니까. 너무 평범해서 돌아볼 일이 없는 사람처럼 보여도, 내면에는 어떤 욕망이나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면을 지닐 수도 있다. 그런 점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이 영화의 영향력 아닐까. 앞으로도 가능한 한 사람들이 마주하길 꺼려하는 부분을 깊게 파고들고 싶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물론 어렵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유의미하고 좋은 것 같다.

구지현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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