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가는 그곳에
BIFF 2019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글 손시내 사진 소동성 / Feature / 2019-10-02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부문에서 상영되는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은 10대 소녀 옥주(최정운)의 어느 여름을 담는다. 아빠(양흥주)와 동생 동주(박승준)로 이루어진 옥주 가족은 할아버지(김상동)의 오래된 이층집에서 여름을 보내게 되고, 이들 사이에 고모(박현영)가 슬며시 합류한다. 혼자 살던 할아버지의 건강엔 이상 신호가 왔고, 아빠의 일도 잘 되지 않는 것 같다. 낮잠을 자고 있으면 방안까지 해가 길게 드리우는 여름날, 삶의 흔적이 가득한 집에 모인 가족은 각자 외롭고 함께 다정하다. 영화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자기감정을 발견해가는 옥주를 지켜본다.

<남매의 여름밤>은 특별한 사건을 경유하지 않고도 옥주의 내밀한 고민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차분히 쌓아간다. 그러다가도 가족의 활기찬 순간들을 즐겁게 포착하는 걸 보면, 이 영화도 얼마간 옥주를 닮은 것 같다. 윤단비 감독은 국민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현장에서 일하다가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에 진학했다. 졸업작품인 <남매의 여름밤>을 비롯해 그동안 만들어온 단편 <생활의 길잡이>(2012)와 <불꽃놀이>(2014) 모두 가족과 유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있다. 가족이라는 집단을 통해 전형적이지 않고 도구화되지 않는 인물을 보여주고 싶다는 윤단비 감독과의 대화를 옮긴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

처음엔 문예창작과에 가려고 했다. 그러다 우연히 국민대 연극영화과에 가게 됐는데, 처음엔 기본 용어도 하나도 모르겠더라. 막연하게 내가 영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그런데 그때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봤는데, 너무 좋은 거다. 세대도, 시대도, 공간도 다르지만 영화로 이어진 친구를 만난 느낌이었다. 나를 이해해주는 친구 같은. 나도 그런 홈드라마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남매의 여름밤>도 그런 관심에서 이어진 영화 같다. 어떻게 시작된 이야기인가.

처음엔 엄마, 아빠와 두 남매로 이루어진 가족이 할아버지 집에서 물건을 훔치는 이야기였다. 약간 블랙코미디적인 느낌이 있는. 그런데 이걸 시나리오로 쓰려다 보니 잘 안 됐다. 내 감수성이 그쪽이 아니었던 것 같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풍자적이었던 이야기가 홈드라마가 되고, 엄마 대신 고모가 들어오는 변화가 생겼다. 결핍이 조금씩 있는 사람들이 여름방학 동안 쌓아가는 정서에 관한 이야기로 만들고 싶더라. 결국 완전히 바뀌었다. (웃음) 내가 솔직하게 만들 수 있는 더 나은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남매의 여름밤>
<남매의 여름밤>

결과적으로 영화엔 두 쌍의 남매가 나오게 됐다. 재밌는 대사도 많고, 소소한 일상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다. 인물을 설정하고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은 어땠나.

주변 인물들에게서 가져온 이야기가 많다. 동주나 옥주 같은 경우엔 내가 살아온 시간이 있으니 어떻게든 할 수 있는데, 아버지나 고모 같은 경우는 자칫하면 가짜가 되기 쉽지 않나.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나 가족들의 모습을 참고해 반영하려 했다. 그리고 최대한 극적인 상황이나 설정은 피하려고 했다. 시나리오를 쓰다가 이때 즈음에는 갈등이 생길 것 같은데 싶어도 그런 건 고려하지 않고 썼다.

 

시나리오를 쓸 때와 현장에서 영화를 만들 때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을 텐데.

현장에서 발생하는 우연이나 즉흥적인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대사는 내가 많이 쓰기도 했지만, 현장에서 대사나 연기, 동선을 자유롭게 열어뒀다. 그렇게 얻은 순간들이 꽤 많다. 대사 중에 툭 튀어나오는 것도 있고, 배우들의 관계가 가까워지면서 나온 것도 있다. 통제되지 않는 아역배우들의 솔직한 감정이 드러난 장면도 있다. 국수를 먹으면서 동주가 웃을 때가 아닌데 웃는 모습 같은 건 정말 좋았다. 내가 혼자서 시나리오만 썼다면 생각하지 못했을 장면이다.

 

옥주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부끄러움도 많고 자기감정을 꺼내는 것에 서툰 인물이지만,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기도 한다. 복잡한 감정을 꾹꾹 참고 있는 표정이 인상적이기도 하고. 배우를 찾은 과정과 옥주 캐릭터가 만들어진 과정을 떼어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남매의 여름밤>이 정운이의 두 번째 영화고, 첫 장편 주연작이다. 처음에 고등학생 배우를 찾다가 20대까지 넓혔는데도 배우를 찾기가 어려웠다. 성숙함이 드러나는 이미지는 잘 안 맞는 것 같기도 했고. 그러다가 문병진 감독님의 <빛나는 물체 따라가기>(2018)의 스틸 이미지를 보고서 정운이랑 오디션을 하게 됐다. 정운이를 처음 봤을 때 너무 예쁘고 밝았는데, 연기자의 느낌이 별로 없는 게 좋더라. 그냥 딱 여고생 같았다. 옥주는 집안 환경이 어려운 것에 대한 책임감도 있고 가족들한테 잘해야 될 것 같은 생각도 있지만, 쌍꺼풀 수술처럼 철없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차분할 때가 있긴 해도 동주한테까지 한 소리 들을 것 같은 철없음이나 동주와 유치하게 싸우기도 하는 미성숙함을 담고 싶었다. 정운이는 옥주와 그렇게 비슷한 성격은 아니지만, 인물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소동성

다른 가족 구성원들도 모두 기억에 남는다. 무엇보다 양흥주 배우와 박현영 배우를 볼 수 있어 반갑더라. 특히 양흥주 배우가 연기한 아빠는 전혀 폭력적이지 않은 가장인데, 그 모습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인물이다.

시나리오 쓰고 맨 처음 캐스팅된 배우가 양흥주 선배님이다. 장우진 감독님 영화에 나오는 양흥주 선배님의 이미지가 너무 좋았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고, 주변에서 많이 봤을 것 같은데 막상 영화에선 별로 없었던 캐릭터이지 않나. 그래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뵙고 같이 작업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작업할 때도 캐릭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유부단하고 능력도 없는데, 가부장적이지는 않은 인물이면 좋겠다고 말씀드렸고 선배님도 거기 동의해주셔서 같이 잘 작업할 수 있었다. 선배님이 실제로 그런 성격이기도 하고. 고모 같은 경우도 처음부터 현영 선배님이 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좀 쭈뼛거리다가 연락했는데 흔쾌히 출연을 결정해주셨다. 인자한 고모가 아니라 좀 이상한 고모였으면 했고, 현영 선배의 특징이 그대로 잘 담겼으면 했다.

 

동생인 동주도 인상적인 인물이다. 툭툭 내뱉는 말도 재미있고, 극 중 아빠로 나오는 양흥주 배우와 무척 닮아서 놀랍기도 했다.

아역배우는 그냥은 섭외하기가 좀 어렵다. 그래서 매니지먼트 쪽으로 오디션을 많이 봤는데, 아역배우들이 대개 공손하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게 있다. 그런데 승준이는 딱 들어왔는데 표정이 안 좋더라. (웃음) 잠을 못 자서 피곤하다고 하길래 더 자고 오라고 순서를 맨 뒤로 미뤘다. 오디션을 볼 때도 거침없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기죽지 않고 자기 것을 잘하겠다 싶었다. 양흥주 선배님께 닮은 아들을 섭외했다고 말씀드리기도 했다. 현장에서는, 너무 대사대로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승준이가 그게 처음엔 잘 안 됐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편해져서 자기 식대로 하는 게 많아졌다. 할아버지 생일에 춤추는 것도 그 전날까지 안 보여주겠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당일에 정말 모두가 빵 터졌다. (웃음) 관습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주눅 들지 않고 하는 게 강점이었다. 또 할아버지를 연기한 김상동 선생님도 연기 경험이 거의 없이 취미로 연기하시는 분이었는데, 영화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셔서 좋았다. 동주 나이대의 손자가 있기도 하셨고.

<남매의 여름밤>
<남매의 여름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가족들이 머무는 할아버지의 집이다. 오래된 이층집인데 계단에 있는 덧문이 독특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집안은 삶의 흔적들로 빼곡하다. 촬영 장소로서 이 집은 어떻게 발견했고 영화에 어떻게 담기길 바랐나.

처음부터 집은 중요한 요소였다. 의정부 재개발 지역부터 게스트 하우스나 민박집도 찾아봤는데 마음에 드는 집이 없더라. 그러다 인천에서 영화의 배경이 된 집을 찾았다. 50년이 된 집인데 집주인 분께서 텃밭을 정성스럽게 가꾸고 계셨고, 집 안의 물건들도 다 손때가 묻고 삶이 묻어나는 것들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물건들은 모기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집에 원래 있던 것들이다. 꼭 여기서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의 세부적인 내용을 바꾸기도 했다. 옥주와 동주가 국수를 먹을 때 2층의 미싱 대에서 먹게 하기도 하고, 텃밭을 잘 살리고 싶어서 고추나 포도 따는 장면도 만들었다.

 

국수나 과일을 언급한 것처럼, 가족들이 같이 지내게 되면서 무언가를 함께 먹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장면들이기 때문에 고민도 많았을 것 같은데.

가장 고민이 많이 됐던 게 밥 먹는 장면들이었다. 한정적이기도 하고 비슷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런데 그거 하나는 있었다. 보통 연결을 맞추기 위해 한 반찬만 집어 먹게 하거나 밥을 조금만 먹게 하기도 하는데,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연결이 맞지 않아도 되니까 먹고 싶은 거 먹으면서 진짜로 밥을 먹자고 했지. 이 밥상에서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게, 편하게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먹는 장소나 장면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도 고민되는 부분이었다. 주방이나 거실, 2층 등 공간의 느낌을 조금씩 다르게 주려고 했다.

<남매의 여름밤>
<남매의 여름밤>

마찬가지로 옥주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있지 않는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이 있었다. 그게 편히 영화를 보게 만들어줬고, 그러면서도 옥주의 고민과 변화를 충분히 진지하게 보여준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에 대한 걱정도 있었을 텐데, 영화를 만들며 정한 원칙이 있었다면.

시나리오상의 장치가 있긴 하지만, 그런 큰 진행 방향 없이도 옥주의 정서는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세 번의 꿈과 관련된 장면이 영화적 장치로 기능해줄 것 같아서 그런 장면들을 넣었다. 원칙은, 멋지게 보이지 말자는 건 있었다. (웃음) 유려하게 보이려고 하거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진행해보려고 했다. 편집과정이 좀 길었다. 처음엔 관습적으로 편집을 했는데 그게 별로 좋진 않았다. 인물이 등장하면서 우울해지고 어떤 사건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POV(시점 쇼트)를 거의 쓰지 않았다. 인물에게로 들어가지 않고 공간을 통해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더라. 리듬을 찾고 호흡을 조절하는 데 시간을 많이 들였다.

 

신중현의 ‘미련’이라는 곡을 다양한 버전으로 사용했다. 영화와 묘하게 어울리면서 독특한 느낌을 주고, 집과 인물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계단을 사이에 두고 할아버지가 듣는 노래를 옥주도 듣는 장면이 있는데, 처음에는 그게 김추자의 음악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음악을 찾다가 ‘미련’이라는 곡을 알게 됐다. 김추자 버전도 있는 곡이지만, 장현 버전이 더 부드러웠고 할아버지가 들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그 장면에 장현 선생님이 부른 미련을 넣었다. 원래 다른 장면에서는 음악을 만들어서 사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만들어도 영화와 어울리는 느낌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럼 차라리 다른 버전의 ‘미련’을 넣자 싶어서 결과적으로 네 가지 버전을 사용하게 됐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앞두고 있는데, 관객들을 만나는 것에 대한 기대와 소감을 말해 준다면.

일단은 어떤 반응을 보여주실지 궁금하다. 옥주가 나름대로 성장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대단한 성장이나 성취가 아니라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받아들이는 의미에서의 성숙함인 것 같다. 그 당시에는 몰랐다가도 지나고 나서 알게 되는 과거의 자기 모습들이 있지 않나. 다들 그런 시기를 겪었고 그게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준 시기일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소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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