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고 막막했다. 우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고모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눈앞에 닥친 위기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어린 이옥섭을 쉴 새 없이 웃겼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여유였다. 덕분에 가장 심각한 순간을 웃으며 넘겼고, 과거는 끔찍하지만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 첫 장편 <메기>(2019)를 연출한 이옥섭 감독은 이따금 어릴 적 그날을 떠올린다고 했다. 여럿이 둘러앉아 웃음을 주고받은 선물 같은 시간은, 세상이 차갑고 험상궂은 얼굴을 내비칠 때마다 힘이 되었다. 고모들은 유머를 알려주었고, 누군가를 웃게 만드는 일에 얼마간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함께 가르쳤다. 타인을 불안 속에 홀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애정 어린 각오는 점차 영화 만들기로 이어졌다. 지난 10년간 여러 단편에 각본, 감독, 프로듀서로 참여하며, 이옥섭은 자신만의 유머를 기르고 발명해왔다. 오랜 고민 끝에 완성한 <메기>는 얼룩진 세상을 깨끗한 농담으로 받아친다. 개봉을 앞둔 이옥섭 감독을 만났다. 영화 속 농담에 관해 묻자, 여태 지켜온 진심을 들려줬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대화를 나눈 지 꼬박 1년 만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그러게, 딱 1년인데 체감으로는 4개월 정도 된 것 같다. (웃음) 국내외 영화제에 작품을 소개하고, 시나리오 쓰고, 친구들과 작업실도 만들면서 정신없이 지냈다. 지난 7월에는 처음으로 해외 로케이션을 경험해보기도 했다. 한국영화 100년 기념영화 제작 프로젝트 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는데, 마침 <메기>의 타이베이영화제 상영 일정과 시기가 겹쳤다. 그래서 대만에 놀러 간 김에 인상 깊게 본 공간을 다시 찾아가서 프로젝트 작품으로 <로미오: 눈을 가진 죄>(2019)를 만들었다. 자전거가 엄청나게 많은 곳인데, 거기서 뭔가를 한 번쯤 찍어보고 싶었거든.
개봉을 앞둔 기분은 어떤가. 단편 <연애다큐>(2015, 구교환 공동연출)를 옴니버스 영화 <오늘영화>로 개봉한 적이 있지만, 단독 연출한 장편을 극장에서 소개하기는 처음이다.
이렇게 여러 상영관을 갖고 개봉한 적은 처음이라서 설레기도 하고 긴장도 된다. 관객들이 어떻게 영화를 볼지 예측이 전혀 안 된다. 엄청나게 기분 좋은 긴장감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언론 시사회에서 <우리집>(윤가은, 2019)과 <벌새>(김보라, 2019) 등을 언급하며, “여성 감독들이 오랜 시간과 노력을 쌓아 만든 기류”라는 이야기를 했다. <메기>는 한가람 감독의 <아워 바디>와 같은 날 개봉하기도 한다. 한 시기를 함께 통과하고 마주한 입장에서 든든함과 동시에, ‘나도 잘해야 한다’는 압박도 느끼리라 예상한다.
주변에 영화를 만드는 여자 친구가 정말 많다. 학교에 다닐 때도 그랬고, 지금 함께 작업실을 쓰는 친구들도 계속해서 장편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영화 만들 궁리를 한다. 근데 상업영화 쪽을 보면 여성 영화인을 찾기가 어렵더라. 늘 이상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던 부분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집>과 <벌새>뿐만 아니라, 작년 말 <영주>(차성덕, 2018)부터 올해 <보희와 녹양>(안주영, 2019), <밤의 문이 열린다>(유은정, 2019) 등까지 최근 활발하게 이어지는 흐름을 보면서 힘을 얻는다. 한 번에 몰리지 않고 이렇게 시기를 나눠 차근차근 개봉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웃음) 덕분에 관객들도 더 주목하고 반응해주는 것 같다. 여성 감독이라는 존재가 이전까지는 없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지 않나. 시간이 축적된 당연한 결과이기에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미 여러 선배가 길을 터왔지만, 이 김에 좀 몰아치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얼마 전 시사회를 마치고 우연히 장유정 감독님을 만났다. 처음 뵙는 자리였는데, 감사하게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격려하고 응원해주셨다. 사실 작품을 이제 막 선보이는 시기라 한참 연약해져 있었는데, 덕분에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압박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지금 안 보이는 곳에서 영화를 만드는 많은 사람에게 좋은 에너지로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영화에는 총 10개의 부제가 등장한다. 윤영(이주영)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구조이기에, 여러 단편을 묶어 구성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시나리오 집필 과정부터 염두에 둔 부분인가.
옴니버스를 의도한 것은 아니다. 제일 먼저 윤영이 마음에 들어왔고, 그를 둘러싼 세계를 만들어나가면서 애인 성원(구교환), 병원 부원장 경진(문소리)을 비롯해 다른 인물들이 떠올랐다. 사람과 작품마다 시나리오를 쓰는 방식이 다를 텐데, <메기>의 경우는 다음 장면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씩 써 내려갔다. 내가 궁금해서. (웃음) 윤영이라는 인물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그 사람이 자리 잡은 땅이 어떤 곳인지 보여주어야 한다. 물이 가득 찬 수조에 스포이트로 물감을 한 방울 떨어트리면 점점 색이 번져나가듯, 영화 속 관계와 공간을 비슷한 방식으로 확장해갔다.
윤영과 경진, 윤영과 성원, 그리고 윤영과 메기가 주요 관계로 등장한다. 이중 메기는 전지적 작가에 가깝다.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 언어로 말하며, 인간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변화를 기민하게 파악해낸다. 메기라는 캐릭터를 만든 과정이 궁금하다.
영화에 관한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없을 때, 머릿속에 이미지 하나가 떠올랐다. 간호사가 어둑한 방에서 불 켜진 어항을 바라보는데, 왠지 표정이 좋지 않은 거다. 어항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는 어항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고기가 들어 있었다. 뭔가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낯선 이미지를 마주할 때,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는 편이다. 메기는 지진과 같은 지각변동을 예측할 정도로 예민하고, 더러운 물에서도 살 만큼 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그런 존재라면 윤영을 위로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이미지는 어디서 왔을까.
예전에 <연애다큐>를 촬영할 당시, 어항에 사는 뱀장어를 본 적이 있다. 어떤 분이 한강에서 낚시하다가 잡았는데, 정이 들어서 그냥 키운다더라. 금붕어나 열대어였다면 지나쳤을 텐데, 뱀장어라는 생경한 이미지에 놀라서 한참을 봤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 기억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사실 어항에 어울리는 혹은 어울리지 않는 물고기란 없지 않나. 다 자유롭고 살고 싶을 텐데 인간에 의해 갇혀 있는 거다. 그럼 왜 어항에 메기가 있을까. 윤영은 무슨 일 때문에 표정이 좋지 않을까. 둘은 병원에서 어떤 시간을 보낼까. 그런 식으로 아이디어를 연결해나갔다.
천우희 배우와는 단편 <걸스 온 탑>(구교환‧이옥섭, 2017)에서 한 차례 작업한 바 있다. 메기의 목소리를 상상할 때, 어떤 점이 그와 어울리겠다고 생각했나.
천우희 배우와 대화를 나눠 보면, 정말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걸스 온 탑>을 작업하면서 심적으로 의지했던 기억이 떠오르더라. 내가 촬영장에서 배우한테 많이 기대는 스타일이거든. (웃음) 물론 목소리도 너무 좋고.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게 만드는 목소리를 가진 배우라고 생각한다. 윤영에게는 가혹한 일이 연달아 벌어지는데, 그때 천우희 배우의 목소리가 더해진다면 윤영이 지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실제로 목소리가 들어오면서 영화의 톤이 많이 달라지기도 했고,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구교환, 이주영, 천우희뿐만 아니라 김꽃비, 권해효, 동방우 등 그간 작품을 통해 만났던 여러 배우가 역할 비중에 상관없이 참여했고, <수성못>(2018)을 연출한 유지영 감독은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동료들과의 지속적인 협업이 가능한 비결은 무엇인가.
동방우 배우는 <우리 손자 베스트>(김수현, 2016)를 통해 처음 만났는데, 기존 작품 이미지와 달리 사적인 자리에서는 굉장히 장난스럽고 귀여우시다. (웃음) 내가 원래 어른을 정말 불편하고 어려워하거든. 그런 나조차 편안하게 만들어주시는 유머러스한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관객에게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4학년 보경이>(2014)를 함께 작업했던 김꽃비 배우나 권해효 배우 또한 롤이 크지 않은데도 흔쾌히 출연을 결정해주셨다. 배우의 능력으로 캐릭터를 채운 부분이 분명히 있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유지영 감독은 연기를 정말 잘한다. <남매>(박근범, 2011) 프로듀서를 맡았을 때도 느꼈지만, 연출뿐만 아니라 배우로서도 훌륭하기에 같이 작업하고 싶었다. 비결이 있다기보다 좋은 사람을 만난 덕이 크다. 사실 많은 스태프를 꾸리지 못한 상황에서 <메기>를 만들어야 했다. 연출부도 셋뿐이었고 더러 힘든 순간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학교 동기와 선후배 등 여러 사람이 와서 빈 곳을 채워주었다. 어떻게든 도우려는 이들 덕분에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고, 응원받는 기분이었기에 작업 내내 외롭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중 문소리 배우와는 첫 작업이었다. 연기뿐만 아니라 연출자로도 데뷔한 노련한 배우와의 작업 과정이 흥미로웠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오래된 팬이다. 영화를 몇 번씩 돌려본 건 기본이고, 연극도 챙겨보고, 인터뷰도 찾아 읽으면서 거의 따라다녔다. 그러니까 일방적이긴 하지만, 작업 전에도 내가 느끼는 심리적 거리는 가까웠던 편이다. (웃음)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 만났을 때, 팬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반갑게 맞아주시더라. 장편을 만들면 꼭 선배님과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애초 <메기> 시나리오에서부터 경진 역할을 염두에 두고 썼다. 현장에서는 배려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내가 어느 지점에서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이미 다 알고 계시는 느낌이랄까. (웃음) 가장 마음이 어려울 타이밍에 따뜻한 메시지도 보내주시고, 현장 분위기도 편안하게 이끌어주셨다. 전체 회차 중 일주일 정도를 함께 촬영했는데, 속으로 ‘문소리 배우 주간’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때 마음이 마냥 좋더라. 프리미어를 처음 사용할 때처럼 신기하기까지 했다. 지문과 대사로 쓴 2D 인물이 온전히 3D로 구현되는 느낌! (웃음) 첫 장면을 찍는 기쁨의 순간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이주영 배우와 합도 좋았고, 늘 기분 좋은 에너지를 전해주셨다. 내가 운도 좋고 복도 많다.
경진과 윤영의 관계가 재밌다. 경력과 나이 등의 위계질서가 지워지고, 마치 공범자에 가까운 느슨한 연대를 보여준다. 현장에서는 어떤 식으로 연기 연출을 진행했나.
내가 디렉팅을 했다기보다는 두 배우 모두 영화를 잘 이해한 상태였다. 어느 시점부터 가까워지는지, 톤과 매너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했고, 그에 따라 서로 호흡을 조정해갔다. 영화에서 이주영 배우가 반말과 존댓말을 은근히 섞는다. 그런 식으로 한 사람이 틈을 보이면, 다른 사람이 그 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자연스레 담겼다. 문소리 배우는 나에게 영화의 방향성을 질문하거나 “이건 왜 그래요?”라는 식으로 답을 요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전 촬영본을 살펴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스스로 경진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나갔다. 마치 “이제 여기로 들어올게요”라고 노크를 건네는 것처럼, 내가 만든 세계에 입장하는 제스처를 취해주었다.
윤영은 능동성과 수동성을 모두 갖는 인물이다. 경진이 믿음을 갖도록 리드하는가 하면, 자신의 불신을 대면하고 싶어 하지 않기도 한다. 이주영 배우와는 캐스팅 단계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나.
이주영이라는 배우와 윤영 사이에 맞닿는 지점이 있다고 느꼈다. 시나리오를 보여드리고 처음 만났던 시점에도 이미 경력을 꽤 쌓고 좋은 평가를 받을 때인데, 계속해서 자기 앞에 놓인 길을 고민하더라. 미팅한 지 한두 시간쯤 지났을 때, 바로 같이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단순히 고민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한 발자국이라고 더 나아가려고 하는 모습이 윤영과 겹쳐 보였다. 강단과 혼란을 모두 지닌 인물을 잘 표현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더라. 이주영 배우는 어떤 공간에 들어오면, 순식간에 분위기를 제 것처럼 만들어낸다. 전작에서도 그런 점이 인상 깊었고, 예상대로 잘해주었다.
‘믿음’을 키워드로 인물 각자의 위기 대응 방식과 관계에서 오는 불안을 조명한다. 보는 이 또한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불편해하는지 생각하게끔 만든다. 영화를 만들던 당시에 품었던 고민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그때가 2017년 상반기였는데, 한참 생각이 많았다. ‘저게 진실일 거야’라고 믿었지만, 결과적으로 아니었거든. 이제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할까, 싶으면서 파장이 오더라. 메기의 대사 중에 “사실은 그와 관련된 사람들에 의해 편집된다”는 말이 있지 않나. 그걸 진작 알면서도 마음이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런 시기를 거치고 나니, 결국 믿음과 불신 모두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누군가를 잠깐 믿기도 하고, 어느 날엔 그를 의심하기도 하면서, 언젠가는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거다. 그때 진실이 용기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얼마큼 시간이 걸리든 최선을 다해 지켜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마음으로 엔딩을 만들었다.
영화에는 데이트폭력, 불법촬영, 청년실업, 재개발, 싱크홀 등 여러 사회 문제가 교차한다. 이는 동시대의 일상적 공포이자, 윤영의 불안을 자극하는 배경이 된다. 방금 이야기한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나.
관련한 이야기를 영화에서 아주 깊숙하게 풀어내지는 않았는데, 많은 분이 영화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생각해주셔서 감사하다. 연출자로서는 윤영을 그리는 영화이므로, 윤영이 사는 세계를 구현해내는 것이 중요했다. 윤영의 집과 직장, 그 사이를 오가는 길이 곧 윤영의 세계일 텐데, 언제든 어디서든 마음 놓고 편하게 머무르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 이슈를 말하기 위해 접근했다기보다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입장에서 자연스레 들여올 수밖에 없는 풍경이라고 판단했다. 예컨대 재개발 반대 시위 장면의 경우, 그 자체로 현재 한국사회의 모습을 일정 부분 반영한다. 영화에서 시위는 실패하지만, 내게 결과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 저들이 있다는 것, 이렇게 아름답게 목소리를 낸다는 것, 자기 방식대로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실패할지언정 아예 주저앉지는 않을 것 같은 힘을 담아내려고 했다. 싱크홀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것도 이미지에서 출발했는데, 어느 날 편의점 앞에 커다란 싱크홀이 생기면 어떨지 상상했다. 일하러 들어갔던 직원이 퇴근하고 나왔을 때, 발 앞에 바로 낭떠러지가 보이는 거다. 그의 마음을 짐작해보는 순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과 인상이 스치듯 지나가더라. 현실에 공존하는 여러 절망을 외면하지 않는 동시에, 뭔가를 주장하거나 “열심히 하세요”라는 식으로 응원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세상이 어떤 상태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여기에 많은 분이 공감한다면 대화가 시작되지 않을까, 하는 작은 소망은 있다. 그럼 의견이 모이기도 하고 퍼지기도 하면서,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와중에 영화 곳곳에 유머를 배치해두었다. 3개 국어로 작성한 사직서라든가 구내식당에서 고추를 말리는 장면처럼 가벼운 웃음을 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어쩌면 농담은 힘든 상황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구멍 같다. 살면서 적어도 하루에 1초는 웃으니까. (웃음) 나 역시 유머에 많은 위로를 받아 왔다. 어렸을 때 집에 무척 심각한 일이 벌어졌는데, 고모들이 찾아와서는 한참을 웃겨 주었다. 어떻게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정말 웃을 상황이 아니었거든. 근데 고모들이 던진 유머가 불안을 가시게 해주더라. 그때 느꼈던 안정감 덕분에, 위기라고 부를 법한 시간이 마냥 가혹하게만 기억되지는 않았다. 이후 영화를 만드는 데에도 그런 유머를 원동력으로 삼았던 것 같다. 살다 보면 시시껄렁한 농담이 무기처럼 힘이 되기도 하는구나, 싶으면서. (웃음)
의상과 소품에 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원색 중심의 컬러 사용은 영화의 시각적 재미를 한층 끌어올린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파랑은 색 자체로 리듬감을 구성해내기도 한다.
나한테는 지금 세상이 너무 컬러풀하게 보인다. <메기>가 과거를 배경으로 한다면 색도 훨씬 단조롭게 쓰고 채도도 낮췄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대 이야기이다 보니, 가능한 한 뚜렷하고 다채로운 색감을 구현해내려고 노력했다. 사실 영화가 저예산이었기 때문에 스태프의 전적인 협력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나, 구교환 프로듀서, 이재우 촬영감독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무조건 로케이션이 답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웃음) 우리가 돈을 들여 만들 수 없으니, 어떻게든 원하는 룩을 가진 공간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색감은 이야기의 현재성을 강조하고 생생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해서, 파랑을 포함해 최대한 원색 계열을 사용한 공간을 찾았다. 의상의 경우에는 ‘의상 일기’를 써서 스태프와 공유했다. “오늘 윤영이 성원의 전 여자친구인 지연(이주영)을 만나러 가는데, 옷은 이렇게 입고 가방을 무얼 가져갔다”고 요약하는 식이었다. 사람에게 공간이 묻어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의상 컬러는 일부러 공간에 맞추어 정했다.
윤영이 쓰는 간호사 캡이나 경진의 오래된 왕진 가방 등 현실에서 더는 찾아보기 어려운 물건도 여러 번 나온다. 시간적 배경을 흐릿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맞다, 약간 분리되는 느낌이 들지 않나.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극 중 엑스레이 사진이 유포된 후, 윤영은 타인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지금 이 시대에 저런 말을 하다니!” 싶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이야기가 오간다. 마치 의식 수준은 2019년이 아니라 1980년대 정도에 멈춘 것 같은데, 이러한 광경을 과거에 사용하던 소품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다. 21세기에 간호사가 캡을 쓰는 병원이 있다면 마리아사랑병원이 아닐까. 출퇴근카드도 요즘에는 대개 지문 인식으로 작동하는데, 일부러 영화에는 종이로 된 카드를 사용했다. 이 집단은 시대에 발맞추지 못하고 변화를 거부하겠구나, 근데 변하지 않으려는 이곳을 윤영이 바꾸어 놓는구나, 하는 느낌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영화 음악을 찾아 듣는 관객이 많더라. Birds of Paradise의 <Maxine>이 삽입된 장면은 한 편의 뮤직비디오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간이나 음악에 관심이 많다. <메기>뿐만 아니라 그간 단편에서도 세트 촬영을 진행해본 적이 없다. 길을 걷다가 괜찮은 공간을 발견하면 사진을 찍어두기도 하고 구글 맵에 저장해놓는다. 음악 역시 평소에도 ‘이건 어떤 장면에 어울리겠다’ 하면서 갈무리해두는 편이다. 시나리오 쓸 때는 물론이고, 편집 과정에서도 많이 듣는다. 음악은 영화의 온도와 농도를 조절해주는 것 같다. 어떤 정서를 강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화 내 균형을 잡을 때 도움을 많이 받는다. 좀 무겁다 싶으면 가벼운 음악을 넣고, 너무 드라이하게 연결된다 싶으면 다른 느낌의 음악을 삽입해보는 식이다. 말하고 나니 참 많은 것에 의존하는 감독 같다. (웃음)
적재적소에 알맞게 배치하여 효과를 내는 것 역시 연출력 아닌가. (웃음) 영화는 기본적으로 여럿이 함께하는 일이지만, 연출자에게는 오롯이 스스로 짊어져야 할 영역이 주어진다. 첫 장편을 만들며 어떤 순간에는 윤영처럼 믿음을 놓고 흔들리기도 했을 텐데.
스무 살 때 <와이키키 브라더스>(임순례, 2001)를 보면서 ‘아, 나는 저렇게 되겠구나’ 싶었다. 꿈을 갖고 젊은 시절을 통과해온 사람들이 점차 어떻게 나이를 먹는지, 그 모든 과정이 영화에 나온다. 아직 인생을 끝까지 살지도 않았는데, 내 말로를 본 기분이 들었다. (웃음)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결국엔 영화 속 인물처럼 될 것만 같은데, 그래도 억울해하지는 않겠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가진 것이 없으니 잃을 것도 없다는 마음이랄까. 누가 행복하냐고 물으면 “응, 난 너무 행복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영화가 제일 재미있어서, 스무 살 무렵 결심했던 다짐을 지키고 있다. (웃음) 물론 <메기>에서 말하듯 신념은 자주 바뀌기에, 중간에 회사를 알아보기도 하고 다른 일을 고민하는 시간도 있었다. 근데 내 마음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좀 더 해도 되겠다 싶을 만큼 스스로 이 일을 즐거워하더라. 뭔가를 참고 버텨왔다기보다는 그저 매 순간 가장 재밌는 걸 찾았던 게 아닐까. 오늘 10신을 쓰고 내일 11신을 쓰듯, 그동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사실 흔들리지 않으면 부러진다고 하지 않나. 더 많이 흔들려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계속 의심하고 다투고 흔들리면서 해나가고 싶다.
1년 전 인터뷰 당시 “엔딩 이후 윤영이 어떤 선택을 할지 나조차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어떤가. 여전히 미정 상태인가.
내가 그런 말을 했나. 사람이 정말 변하긴 하는구나. (웃음) 물론 그 선택이 바로 가능한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안 만들었을 수도 있다. 영화를 완성한 후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야 좀 관객의 입장에서 윤영을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 예전보다는 단단해졌다고 해야 하나, 좀 냉정해진 듯도 하고. 긴가민가한 상태로 고민만 품었다면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텐데, 아마 <메기>를 만든 덕분에 가능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계속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다 보면, 어느 순간 행동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지 않나. 지금은 엔딩 이후 윤영이 선택할 미래가 그려진다
엔딩 크레딧에 ‘여윤영’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더라. 지인에게서 빌려온 이름인가.
가까운 친구의 이름을 종종 사용한다. <4학년 보경이>의 보경이도 친구 이름이었고, 당시 실제로 4학년이었다. (웃음) 아주 낯설지 않고 주변에 있을 법하지만, 또 마냥 흔하지만은 않은 이름을 좋아한다. 여윤영이라는 친구는 눈이 정말 반짝반짝하다. 딱 보면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구나 싶다. 지금 쓰는 시나리오에는 엄수경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이름도 친구에게서 빌려왔다. (웃음)
엄수경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차기작은 어떤 내용인가. 과거에 SF를 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기도 했고, 그러고 보면 <메기>는 오프닝부터 우주를 이야기하지 않나.
나는 어떤 문제를 마주하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하며 거슬러 올라가는 성향이 있다. 때때로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을 거쳐서 문제가 도착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거든. <메기>도 처음에는 그렇게 출발한다. 실은 윤영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문제인데, 사건이 벌어질 때는 저 멀리 우주에서부터 한 방사선사를 거쳐 이야기가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메기>에는 그런 문제의식이 담겼던 것 같다. 물론 SF에 관심이 있고 시나리오를 써보기도 했는데, 보통 어려운 게 아니더라. 세계관을 창조해내야 한다는 벽에 부딪쳐서 잠시 뒤로 미뤘다. 엄수경도 원래는 복제인간이었다가 지금은 다시 현실 세계로 정착했다. 아직 그릇이 안 되는구나, 하고. (웃음) 몇 년 후에는 꼭 하고 싶다. 차기작 제목은 <사랑의 카운슬러>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사람에게 사랑 상담을 받는 이야기다. 어떻게 저 사람한테 받을 생각을 하나 싶을 정도로 창피한 상황이라, 주인공은 주변에 제대로 알리지도 못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을 담았다. 장르는 아주 재밌는 멜로 코미디? (웃음)